# 68
21. 폭풍 (4)
밤 11시, 한식당.
간단한 반주와 함께 음식을 좀 먹은 뒤.
“피곤하시겠습니다.”
손 차장이 온화한 말투로 운을 뗐다.
여태 가벼운 안부, 일 얘기, 국회 돌아가는 꼬라지에 관해서 한두 마디 나눈 상태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제부터 본격적인 얘기에 들어갈 모양이었다.
그의 말을 받아주면서 되물었다.
“아직 버틸 만합니다. 차장님은 괜찮으세요?”
“옛날 같진 않습니다. 젊으신 의원님을 보니까 부럽습니다. 며칠 뒤면 스물아홉…… 맞습니까?”
“예.”
“저는 그 나이 즈음에 검사시보 하면서 조인트 까였었는데, 하하하. 우리 의원님 대단하십니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져 있었다.
진짜 기분이라도 좋은 건지.
“너무 비행기 태우시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지…….”
내가 넌지시 말을 꺼내자, 손 차장이 여전히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비행기라니요. 진심입니다, 재산도 굉장하시던데요. 저는 그때 몇십만 원 있었나…….”
바라는 게 결국 돈인가?
내가 예상하는 사이,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현찰만 1,000억, 주식도 수백억에…… 갖고 계신 건물도 20채가 넘더군요. 아, 지자체에 임대해 준 땅도 평수로만 30,000평이 넘던가…… 얼추 맞습니까?”
정확한 건 집에 있는 장부를 확인해야 했지만, 그의 말대로 얼추 맞긴 했다.
그런데 재산 내역을 꽤 상세하게 털 줄이야.
건물은 어디 가서 말도 꺼낸 적이 없었다. 내가 시세보다 저렴하게 세를 주고, 임대를 거저 준다고 해도 어쨌든 투기니까.
그래서 돈 얘기, 주식 얘기는 해도 건물 얘기는 안 했었는데.
손 차장이 대부분을 끄집어낸 상태였다.
“그런데 신기한 건, 주식도 그렇고 땅도 그렇고…… 산 게 전부다 오른다는 겁니다.”
“그게 궁금하십니까?”
“아니오, 대단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비행기를 태우는 게 아니라, 왜 대단한지 설명한 겁니다.”
그가 조곤조곤 말했다.
나를 은근히 압박하려 드는 건가?
그래도 내가 꿀릴 건 없었다.
그냥 주식과 땅을 샀고, 마침 값이 올랐을 뿐이었다.
오를 만한 주식은 쥐고 있고, 땅은 건물을 올리거나 지자체에 임대 준 게 다였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과정에 어떤 편법도, 불법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전문 관리인이 1차로 확인하고, 공인중개사나 세무사, 대화투자자문의 오 대표까지 2중, 3중으로 확인한 일이었다.
내 생각을 확인시켜 주듯 손 차장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깨끗하더군요. 간섭의 여지없이…….”
“차장님, 말 끊어서 죄송합니다만. 이게 하려던 말씀입니까?”
더 이상 듣고만 있으면 페이스에 말릴 것 같았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이 있었다. 그의 직급이 만든 것인지, 연륜이 만든 것인지 분간하기 힘든 뭔가가.
나는 그런 분위기를 끊고, 또박또박 발음했다.
“하시려던 말씀을 하시죠.”
그러자 옅은 미소가 지워지고, 손 차장이 금세 입을 열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법무법인 설립에 투자 좀 해 주십시오.”
“……?”
그가 말을 잇길 기다렸다.
무슨 소린지 단박에 캐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냥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법무법인 설립이라니?
그것도 현직 차장 검사였다.
“저도 아슬아슬합니다. 여의도에 돌아갈 자리 정도는 만들어 놔야죠, 맨손으로 사무소 개업할 순 없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저절로 되묻게 됐다.
내가 검찰 내부 사정까지 잘 알진 못하지만, 차장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높은 건지는 알았다.
휘하에 있는 부장과 평검사들 머릿수가 수십에서 백 단위가 아니던가?
그런데 아슬아슬하다니.
내 의문 뒤로 여전히 여유로운 손 차장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줄을 하나 타고 있습니다. 검찰 라인이 아니다 보니 부담이 좀 있지요.”
“그 줄이란 게…… 이번 고발 사태와 관련 있는 겁니까?”
“네, 눈치 좋으십니다.”
아니면 말을 꺼낼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를 재촉했다.
“계속 말씀 하시죠.”
“그럼 새한국당이라도 가능하다, 기억 하십니까?”
“예.”
내가 가졌던 의문.
새한국당이라는 거대 정당을 무시할 수 있는지, 과연 국회의원 23명에 대한 수사 착수를 진행할 것인지 등등.
하여튼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이 의문은 풀리지도 않았고, 풀린 적도 없었다.
이건 아무나 하기 힘든 일이었다.
지검장이든, 검찰총장이든.
설사 단 한 명조차 기소하지 못한다고 해도, 언론에 이름을 실었다는 것 자체로 압력을 받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곧 손 차장이 나를 지그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제 뒤에 VIP가 있습니다.”
고작 임기 몇 개월 남은…….
MB를 떠올리던 중, 손 차장의 미소에 아차 했다.
“……이민수 당선자.”
“맞습니다.”
“사모임이라도 가진 다는 겁니까?”
“어, 알고 계시는군요.”
“보통 그런 데 들어가면 승진할 텐데요?”
내 정치판 생활 10년의 기억이 그랬다.
비록 그 근처를 심부름 겸 어깨 너머로 본 게 전부였지만, 그런 건 모르기가 더 힘들었다.
실세들이나 그 최측근의 모임이야말로 출세의 끝이었다.
그와 유사한 모임도 마찬가지였다.
욕망이 뭐가 됐던 이룰 수 있을 테고, 돈과 권력은 자동으로 따라올 것이었다.
그런데 불안하다니?
내 생각을 안다는 듯, 손 차장의 대답이 들려왔다.
“마침 연차가 맞아서 승진을 하긴 할 겁니다. 다만…… 권불십 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권력은 10년을 못 간다.”
“그래서 준비해놓는 겁니다. 돌아갈 곳이 있어야 저도 마음을 놓을 것 같습니다.”
결론은 나한테도 줄을 대놓겠다는 뜻.
그것도 안전줄.
왜 그런가, 생각하다가 물었다.
“법무법인은 검사를 그만둬야 할 텐데…… 혹시 다른 사람 겁니까?”
“네, 저희 아버지도 검사 출신입니다. 연세가 드셔서 그렇지, 변호사 자격증은 여전하지요. 그 자격증 걸어 놓고 동기랑 후배들 모아 놓을 생각입니다.”
그가 이미 구상을 마쳤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법무법인 설립 투자금을 내라, 그 말씀입니까?”
내가 힘을 주며 말하자, 손 차장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제가 협박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얘기를 들어 봐야 알겠죠.”
내 말에 그가 다시 씨익 웃었다.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보면 볼수록 윤 의원님은 참 대단하신 분입니다. 돈도, 능력도, 사리판단도. 정말 우수하십니다.”
칭찬은 들을 만큼 들었다.
그의 말처럼 보통이 아닌 사리판단을 보여 줘야 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그래서 하시려는 말씀이?”
“월요회입니다.”
“……?”
갑자기 나온 말.
듣도 보도 못한 명칭이었다.
비슷한 단체로는 수요회라는 게 있긴 했다.
공중파 언론사인 MBS의 전현직 간부들로 구성된 모임.
그러나 월요회는 내 정치판 인생 10년 중에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내 기억에도 없는 단체라…….
내가 머리를 굴리는 사이, 그의 말이 계속해서 나왔다.
“거기 여야 의원분들도 한 분씩 계십니다.”
정보 교환인가 싶었는데.
손 차장이 태연하게 이름까지 밝혔다.
“그 중에 한 분이 신경배 의원님입니다.”
순간 온몸에 오한이 돋았다.
헛웃음이 나오지 못할 정도로 놀라웠다.
그래서 예산안 합의를 종용했나?
그럼 1월 1일에 타결될 예산안 합의가 사흘이나 앞당겨 진 것도 이해가 갔다.
양당체제가 아닌, 3당 체제 속에서도 합의가 늦어지지 않은 이유가 납득이 갔다.
이게 이렇게 돌아가는구나.
선수(選數)값을, 이름값을 한다는 것이지?
호랑이 뒤에 숨어 있던 여우.
김정환에게 밀려 정치 은퇴를 했었지만, 결국 그도 노회한 정치꾼이었다.
잔대가리 굴리는 솜씨가 일품이라는 의미.
내가 생각에 빠진 사이.
그의 목소리가 푹 찔러 들어왔다.
“이 정도면 맛보기로 괜찮습니까?”
“……뭐가 더 있습니까?”
놀란 감정을 수습하며 묻자, 그가 엷게 웃었다.
“저는 윤 의원님께서 그 자리에 앉으시면 어떤가 싶은데…….”
“월요회 자리요?”
“그래서 법무법인에 설립을 도와달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편법 후원이나 정보 몇 개로 흥정하기에는 법무법인 설립이 꽤 비쌉니다.”
머리가 바쁘게 돌았다.
이 중에 내가 믿어야 할 건 많지 않았다.
투자서나 월요회를 내게 권유한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신경배보다 만만하고, 돈도 많고, 쓸 만하니까.
내가 그 자리에 있어도, 70이나 먹은 늙은 여우보다는 나 같은 놈을 데려다 쓸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짐작일 뿐.
월요회에는 신 의원까지 있었다.
이해관계가 보통 난잡하랴?
단순히 들은 얘기로, 그리고 짐작하는 것만으로 이해관계를 파악할 순 없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손 차장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힘들다는 뜻.
누구의 콧김이 닿은 건지, 아니면 일련의 사태에서 발생한 우연인지, 손 차장의 의도인지 아무것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오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진실처럼 보이기는 했다.
그가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제안은 생각해 보겠습니다. 투자금이 얼마나 됩니까?”
“많긴 하지만, 의원님이 염려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투자 제안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부탁 하나만 할게요.”
“네, 말씀하십시오.”
“월요회 자리는 일단 킵하는 걸로 하죠.”
당장 그 자리에 들어가선 안 될 일이었다.
신 의원이 약속한 지명직 최고위원, 그리고 경기도당 위원장 자리를 받아야 했다.
그다음에 신 의원을 털어 내는 게 순서였다.
곧 손 차장이 빙긋 웃었다.
킵한다는 말을 수용으로 받아들인 모양새였다.
“개업할 사무소만 번듯하면 안 될 게 뭐 있겠습니까?”
“제가 먼저 선행해야 한다는 거군요.”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준 게 있으니까 받아야 한다, 그런 게 아닙니다. 저도 잘못하면 옷 벗을지도 모르니까 준비하는 겁니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신 의원을 꺾기 위해서는 피해를 각오해야 했다.
지금의 신 의원은 불안정하긴 해도, 새한국당 내에서 세력이 가장 큰 계파의 수장이었다.
당의 원로들과 중도층, 친김계까지 포용한 덕분이었다.
그런 신 의원을 어떻게 꺾을지.
궁금하긴 했지만, 묻는다고 그의 입에서 방도가 줄줄 나올리는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정장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더 안 드십니까?”
손 차장이 먹다 남은 상으로 눈짓하기에 고개를 저었다.
“체하면 안 되지 않겠어요?”
“하하하, 이렇게 젊으신 분이 어떻게 말씀도 똑 부러지는지…….”
“그럼 일어나겠습니다.”
“네, 의원님. 다음에는 편한 자리에서 한 번 뵙지요.”
그의 웃음이 왠지 능글맞아 보였다.
사석에 큰딸을 데려오려나.
국내 탑배우 정도면 받아줘야겠지, 우스운 생각을 하면서 손 차장과 헤어졌다.
이윽고 미리 부른 대리기사가 차를 끌고 올 무렵.
나는 찬 바깥에서 간만에 통화할 사람을 찾았다.
[안순익 고문]
통화 버튼을 누른 뒤.
금방 안 고문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넘어왔다.
- 오랜 만이야, 윤 의원.
“예, 고문님.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 늙으면 잠이 없어져, 그런데 무슨 일인가?
“부탁 좀 드릴 게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