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67화 (67/191)

# 67

21. 폭풍 (3)

- 오늘 저녁에 시간 어떠십니까?

대뜸 나온 말.

그러나 환영할 만한 얘기였다.

손 차장이 속내를 까발리진 않아도, 감춰 둔 얘기를 꺼내겠다는 뜻이었으니까.

나는 걸으면서 일정을 계산했다.

오늘이 2012년 12월 28일.

온갖 송년회가 몰려 있는 12월의 마지막 금요일이었다. 내가 국회의원 당선 됐을 때보다 잡혀 있는 모임이 더 많은 날이기도 했다.

“최소한 밤 열 시는 넘어야 합니다.”

- 그럼 열 시 반 괜찮으십니까?

언제든지 상관없다는 말투.

이 사람이 기다리던 때가 지금이었나 싶을 정도로 담담했다.

“장소가 서울 안쪽이면 됩니다.”

- 그럼 장소 정해서 문자 남기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따로 하시겠다는 말씀 들을 수 있는 겁니까?”

확인하기 위해 묻자, 그의 목소리가 금방 건너왔다.

- 네, 그럴 겁니다.

예상대로였다.

그가 바라던 것이 뭔지 알 기회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빠서 먼저 끊습니다.”

- 네, 의정 활동에 힘써 주십시오.

형식적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은 뒤.

머릿속에서 손 차장을 지우고 걸음을 빨리했다. 이제 당장 닥친 고발 사태에 대응해야 했다.

나는 의원실로 뛰듯이 걸어갔다.

개인 사무실.

도착하자, 박 보좌관이 준비한 인쇄물 뭉치를 줬다.

언론 보도물을 스크랩해서 출력했고, 형광펜으로 주요 부분에 표시를 해 놓은 자료였다.

역시나.

언론에선 이미 펜촉으로 대상을 겨누고 있었다.

새한국당 전체, 혹은 조성현 의원.

광고주나 힘 있는 뒷손이 움직인 결과물일 것이었다.

타이틀에 들어간 단어 들만 봐도 감이 왔다.

고발장 접수하자마자 곧바로 터진 속보를 제외하고는 자극적인 워딩들이 주를 이뤘다.

피바람, 칼부림, 숙청, 내분, 분열…….

그러다 문득 딴생각이 하나 났다.

조성현 의원.

그가 비대위원장 자리는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아군 삼기에 괜찮은데.

나는 아직 앞에서 대기 중인 박 보좌관을 바라봤다.

“보좌관님.”

“네, 의원님.”

“당헌당규 찾아 봐주세요. 조 의원님 비대위원장 자리가 바뀔지, 유지가 가능한지.”

당의 강령이 당헌, 규칙이 당규였다. 그것도 아주 길고 복잡한, 서술형 문장으로 구성된 활자들.

윤리특위나 당무위도 그걸 전부 암기할 순 없으니 의원실마다 당헌당규가 책자처럼 배부되어 있었다.

박 보좌관이 곧장 대답했다.

“바로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의원님.”

“예.”

“저희 입장은 어떻게…….”

박 보좌관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정해 달라는 뜻이었다.

조 의원 편을 드느냐, 반기를 드냐, 여론을 의식하거나 당론을 따르느냐 등등.

국회에 흔히 있는 일이었다.

애초에 정치인이라는 존재가 그랬다.

각종 사회적 이슈, 갑자기 터져 나온 논쟁 따위에 국회의원이 엮이는 건 흔한 일이었다.

더욱이 판을 벌리고 세력을 키우려 노력하는 나는 여론몰이 당하기도 좋았다.

그래서 조심해야 했다.

안 그래도 그렇게 매도되어 욕을 몇 사발씩 먹은 의원들이 수두룩했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아도 혼자서 헛소리를 하거나, 말실수를 하는 의원들도 부지기수로 많기도 했고.

“조성현 의원님을 지지하세요, 대신 강력하게 주장할 필요 없고, 사실 관계에 주안점을 두세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미약하더라도 조 의원을 지지해야만 했다.

그래야 친김계와 장세룡계에 피해를 줄 수 있었다.

여론 조성에 최소한의 도움이 되길 바라고, 조 의원의 신념을 유지하는데 보탬이 될 수도 있으니.

무엇보다 이게 잘만 된다면…….

리스트의 23명은 언론을 의식한 사법부의 처벌 수위에 휘청거리고, 도덕적 지탄을 받으며, 정계 내의 위치도 추락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사이, 무슨 말인지 알겠냐는 내 말에 박 보좌관이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당연히 숙청 같은 말 같잖은 소리는 일축해야 합니다. 그런 것까지 간 보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네, 의원님.”

“그걸로 됐고, 임시 의총이나 일정 잡히면 바로 알려 주세요. 혹시 모르니까 오늘 송년 모임에 미리 연락해서 불참 밑밥도 깔아두세요.”

“이미 진행하고 있습니다.”

역시 일 처리 하나는 우수했다.

“다음에 거하게 한 번 쏠게요, 고생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의원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박 보좌관이 나가고, 나는 따로 갖고 다니던 스마트폰을 들었다.

다른 업무용 스마트폰은 걸려오는 수신 전화가 줄을 잇는 중이었다.

나는 바로 연락처를 뒤졌다.

일단 경제민주화의원연구모임의 수장인 3선의 고일준 의원.

그리고 국방위 위원장인 3선의 임청학 의원에게 연락해야 했다.

그리고 말 좀 듣는 재선 의원들과 소장파 의원들에게도 내 의사를 전달해야 했다.

그들이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 * *

“이 정신 나간…….”

“이놈 이거 제정신이 맞아요?! 3선이나 된 놈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의원 몇이 성토하듯 짜증을 쏟아 냈다.

자신들의 이름이 리스트에 올라가 있는 상태고, 고발장에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친김계 잔존 세력과 장세룡계 인사들.

그 중, 전 최고위원인 3선의 우성효 의원이 입을 열었다.

“그 인간, 일단 비대위원장에서 끌어내립시다.”

“예산안 처리까지 끝났는데 물고 늘어질 것도 없잖습니까?”

“그리고 내부 분열 난다고 지랄들인데…….”

의원 몇이 되묻자, 우성효가 인상을 썼다.

“일단 보이콧부터 합시다. 당 의총하고 모임들, 아니면 임시회까지. 비대위원들 부추겨서 조성현 끌어내리고…… 또 시위도 하고.”

우성효가 할 만한 것들을 줄줄이 읊자, 의원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다고 될까요, 조성현이가 은근히 뚝심 있는 놈이라서…….”

“세상 혼자 살아요? 뚝심은 개뿔. 당헌당규 확인이나 하라고 하세요. 그리고 진짜 내부 분열 일어나면 탈당하겠다고 협박이라도 해야지, 어쩔 겁니까?”

“탈당은, 으음…… 협박용으로 쓰기에 좀 무리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런 말 나와도 동요하지 말라는 겁니다. 아니, 방금은 조성현이가 뚝심 있는 놈이라면서요?”

“뭐 일단은…… 참. 장 의원님은 뭐라고 안 하십니까?”

고발당한 의원 중 절반은 장세룡계였다.

장세룡 본인만 없을 뿐.

우성효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신경배 의원님 찾아갔을 겁니다.”

그 시각.

신경배 의원실.

닫힌 개인 사무실 문 안 쪽, 장세룡이 한숨을 뱉었다.

짜증이 담긴 한숨.

이윽고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신경배 의원님…… 알만큼 아실 분이니까 요점만 말하겠습니다.”

그의 주름진 턱이 닫혔다가, 다시 열렸다.

“해결책 있으십니까?”

소파에 몸을 기대 있던 신경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불편한 얼굴 표정만 유지할 뿐.

그 모습을 보던 장세룡이 금세 말을 이었다.

“……없으시면 일단 조성현 자리 뺏고, 당 차원에서 문제 삼아서 징계 내려야 합니다. 제명이든, 출당이든.”

“셋이서 한 합의는?”

대선 패배와 당 쇄신을 구실로 조성현을 공격수로 쓰자는 합의.

그러나 장세룡은 기억도 안 난다는 듯 말했다.

“무슨 합의요? 조성현이가 먼저 저 난리를 피웠는데?”

그의 표정이 구겨졌다.

“비대위 차원에서 할 만한 개혁이나 추진하라고 했지, 언제 식구들한테 몽둥이 휘두르라고 했습니까?”

이어진 장세룡의 말.

신경배가 느지막하게 대꾸했다.

“국민 여론도 움직일 걸세, 그것도 봐가면서 움직여야지.”

“여론 신경 썼으면 대한민국 동남아 후진국 꼴 났습니다. 그리고 여론도 여론 나름이지, 보긴 뭘 봅니까?”

“장 의원, 말 좀 조심하지.”

신경배가 등받이에서 몸을 땠다. 그러자 장세룡의 눈매가 꿈틀했다.

“……의원님, 저도 욕 못해서 참는 거 아닙니다.”

“이 사람이…… 뭐하자는 거야?”

그러자 장세룡의 표정이 굳었다.

싸늘해진 눈매.

“이거 의원님 그림입니까?”

장세룡이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

신경배 같은 주요 내부자가 주도한 게 아니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기 힘들었다.

예산안 처리가 끝난 시기.

그리고 23명의 구차한 비리 내역.

공격수 조성현까지.

세 가지가 이번 고발 사태와 교묘하게 맞물렸다.

더구나 이번 예산안 처리 합의를 은근히 종용했던 것도 바로 신경배가 아니던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신경배가 벌떡 일어났다.

“뭐야?!”

순식간에 벌게진 얼굴, 부푼 핏줄과 힘이 들어간 턱 근육.

그의 말이 울뚝 튀어나왔다.

“말조심 하라고 했지!”

“아니면 뭐요? 손이라도 하나 거들었습니까?”

장세룡의 시선이 더 날카로워졌다.

“야! 장세룡!”

신경배가 고함을 치며 삿대질을 했다.

힘이 잔뜩 들어간 입이 움찔거렸고, 눈알에 핏발이 섰다.

장세룡은 그 모습에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태연하게 풀어 놨던 정장 단추까지 여몄고, 금세 말을 이었다.

“이러니 경선도 대선도 다 낙마한 겁니다.”

급기야 신경배가 움직일 무렵, 장세룡은 몸을 돌려 개인 사무실을 나왔다.

그 뒤로 신경배가 훌쩍 뛰쳐나왔다.

“야, 인마!”

의원실 내의 보좌진들이 급하게 일어났다.

“……!”

놀란 보좌진을 두고, 신경배가 다시 목청을 돋웠다.

“장세룡! 이게 어른 대접 해 줬더니 감히……!”

“말조심 하세요, 의원님. 그리고 나한테 이렇게 나와선 안 됩니다.”

장세룡이 차갑게 쳐다보고는 의원실을 나갔다.

“일들 안 해?!”

신경배가 멀거니 서 있던 보좌진을 향해 고함쳤다.

보좌진들이 황급하게 자리에 앉자, 늙은 입술을 비죽인 그가 곧장 개인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품에서 까만 폴더폰을 하나 꺼냈다.

폴더폰의 뚜껑을 연 신경배가 구형 키패드를 꾹꾹 누르며 연락처를 뒤진 후.

화면에는 연락처 하나가 표시됐다.

[새정치당 당대표 염상수]

화면을 확인한 그의 엄지손가락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잠깐을 기다린 뒤.

“어, 염 대표! 얘기 좀 하지.”

* * *

급하게 송년 모임 두 개를 취소했다.

두 개라서 다행이었다.

새로 생긴 급한 약속이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장파, 경제민주화의원연구모임, 언론사 관계자 모임 등등.

고발 사태 때문에 발생한 모임들이었다.

그리고 계획대로, 거기서 내가 할 만한 일은 다 했다.

내 말을 주의 깊게 듣거나, 잘 듣거나, 따르는 사람들에게 언질을 주는 것.

그것도 특별할 게 없는 정상적인 언질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경거망동을 삼가야 합니다. 싹 다 쳐 넣어야 한다는 국민들 의견에 동조하라는 게 아닙니다, 상황을 보자는 겁니다.”

그리고 비슷한 내용의 또 다른 말.

“사실 관계에만 주안점을 둡시다, 아직 검찰 수사 결과가 안 나왔으니 말을 아낄 수 있을 겁니다.”

당연한 말이었다.

경거망동 하지 말고, 상황을 보자.

누구나 할 만한 말이었고, 누구나가 그렇게 생각할 법했다.

그리고 여기서 반발하거나 튀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내가 골랐던 이들이었고, 대부분이 상식적인 이들이었다.

조 의원 같은 독불장군은 아주 희귀한 경우였다.

납득했다는 고갯짓을 받아 내고, 합의를 이끌어 내는 건 힘든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상황, 사실.

여기서 나온 행동은 간단한 게 아니었다.

돌려 말하면, 조 의원이 벌인 고발 사태에 암묵적으로 동조하자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반발하는 의원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했다.

당연히 내 얘기를 들은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장세룡계나 친김계는 배신이라고 생각할 확률이 높았다.

새한국당이라는 소속감.

또한 중요하진 않더라도 이리저리 엮인 연줄을 두고도 가만히 있는다?

그건 조금 과장하자면 배신이었다.

더구나 나는 동조하는 뉘앙스로 대응할 예정이었다.

과연 어떻게 흘러갈지.

내가 머리를 굴리는 사이, 영석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원님, 도착했습니다.”

밤 10시 25분.

이제 손 차장을 만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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