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21. 폭풍 (1)
이틀 뒤.
바로 전화를 걸었다.
수신자는 어제 만난 서울동부지검 손기택 차장검사.
두어 번의 통화 연결음 끝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윤 의원님, 전화 주셨군요.
“예, 시간이 좀 이른가요?”
오전 여덟 시 반.
아홉 시에 예정된 임시 의총 직전이었다.
오늘 눈뜨고, 출근하자마자 전화를 건 것이었다.
조 의원이 리스트의 사법처리를 예고한 상태니, 언제 뭘 어떻게 할 건지 궁금한 탓이었다.
그리고 그가 내게 무슨 얘기를 할지, 그것도 궁금했고.
그사이, 손 차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아닙니다, 저도 회의 전이라.
“다행이네요, 전화 드린 건 어제 나눈 얘기 때문인데…… 어떻습니까?
- 진척 정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뇨, 어제 얘기했던 리스트. 그거 기소도 몇 명 안 될 거고, 증거 불충분으로 사법처리도 쉽지 않을 거라고 하셨는데 진짜 강행하는 겁니까?”
- 비대위원장님 의지가 강력하셔서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조금의 고민도 없이 바로 나온 대답.
그러나 여기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상대가 새한국당인데요?”
이건 가벼운 물음이 아닌, 내게 남아 있던 작은 의구심이었다.
새한국당이 어디 보통인가?
군소정당도 아닌 원내 과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었다.
정권 수립 이후로 기득권을 자처하고, 유지해 온 곳이었고.
거기에 더해서 검찰과 가진 관계도 적잖았다.
당장 검찰 출신의 의원들, 그러니까 손 차장의 하늘 같은 선배들이 있는 곳도 새한국당이었다.
이번 12년 총선에서도 법복을 벗은 검찰 고위직이 비례와 지역구 공천을 통해 금뱃지를 달기도 했었다.
장 의원만 해도 전 대검 차장을 지인으로 두고 있었고.
그들의 압박을 버틸 수 있을까?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쉽사리 납득하긴 어려웠다.
그사이 손 차장이 대답해 왔다.
마치 내 질문의 요지를 다 안다는 듯한 말투로.
- 새한국당이라도 가능합니다. 자세한 건 제가 다시 전화드렸을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뭐가 있다는 뜻이었다.
단순히 비대위원장인 조성현 의원을 믿고서 그럴 것 같진 않았다.
“그럼 언제부터 진행합니까?”
- 12월 말이나 1월 초순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아, 예산안 처리시기를 피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지금도 예산안 처리 중이었다.
정확히는 처리가 아닌 합의가 지연되는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국가 예산인 3, 400조에서 수 조 원의 금액을 수정하는 과정이었고, 새정치당이라는 제3당이 생긴 만큼 합의는 더 오래 걸릴 것이었다.
내 기억에 의하면 13년도 예산 수정안은 13년 1월 1일에 가결 됐었다.
해를 넘긴 건 헌정 사상 최초.
물론 예산안 처리 법정 시한은 12월 2일로 기간이 지난 지 오래였고, 이것 역시 되풀이해 온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도 1월 1일 전후로 예산안이 처리될 것 같았다.
“언론은요?”
- 아직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아무래도 조만간 엠바고 요청하고 진행할 것 같습니다.
보도 유예.
언론사의 흔한 관행이었고, 기업이나 정부의 요청으로 이뤄지는 일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어제 미처 듣지 못한 말을 짐작하면서 물었다.
“하실 말씀 있으셨던 걸로 아는데…… 아닌가요?”
- 제 큰딸 얘기도 있고, 부탁드릴 것도 있긴 합니다.
“무슨 부탁입니까?”
- 그건 제가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슨 부탁일까?
궁금했지만, 더 나눌 얘기는 없었다. 오히려 그의 큰딸 얘기만 추가로 나올 것 같았고.
“그럼 다음에는 손 차장님이 전화 주세요. 제가 시간 내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의원님.
그와 전화를 끊고서, 나는 바로 박 보좌관을 호출했다.
스케줄을 조정해야 했다.
사법 처리될 의원들과 같이 있거나, 같은 사진에 담길만한 자리는 최대한 제외해야 했다.
그리고 가급적 말도 아껴야 했다.
공적인 장소든, 사적인 장소든.
말실수까지 고려해야 했다.
기계가 아닌 이상, 의중에 품고 있던 말이 예상치 못하게 툭 튀어나올 수도 있었다.
이게 어디 보통 일이던가?
사법처리, 더 쉽게 말하자면 고발.
그것도 같은 당 동료 의원이자 현 비대위원장인 조 의원이 직접 검찰에 고발장을 낼 것이었다.
이런 짓을 대신 해 줄 인간은 없을 테니까.
생각만 해도 헛웃음이 났다.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언론을 통해 온갖 공격을 당하며, 지나가던 극성 보수주의자에게 칼침을 맞아 생을 마감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라면 하지 못할 것이었다.
피해는 최소화하고, 공격을 극대화하는 기본 상식을 벗어난 일이 아닌가?
이건 신념에 사로잡힌 독불장군만이 할 만한 일이었다.
그 사이, 박 보좌관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스케줄 조정 좀 해 주세요.”
“어떤 스케줄을 말씀하시는 건지……?”
“표시 해 둔 거 드릴게요.”
내가 몇 군데 체크한 일정표를 내밀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공식, 비공석적인 자리 중에 빠질 수 있는 건 빼주세요. 억지로 뺄 필요는 없고, 무마 가능한 쪽으로요.”
그러자 일정표 확인을 마친 것인지 박 보좌관이 고개를 들었다.
뭔가 낌새라도 느낀 건가?
그의 표정에는 호기심 대신에 다른 것도 보였다.
“의원님.”
“예.”
“이유를 짧게라도 말씀해 주시면, 원하시는 쪽으로 처리해놓겠습니다.”
역시 박 보좌관.
그 말이 혀끝까지 튀어 올라왔다가 가라앉았다.
외견상 나보다 열 살은 많은 그가 대견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게 왜 그러냐고 직접적으로 묻는 대신,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말과 함께 작은 이유만 달라고 했다.
볼수록 마음에 들었고, 기특했다.
그럼 알려 줘야지.
어차피 의원실을 총괄하고, 실무를 정리하는 건 그의 몫이었다.
충격에 대비하고, 급작스러운 언론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대충이라도 알고 있긴 해야 했다.
“조만간 일이 하나 터질 겁니다.”
“……부정적인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그래서 조용히 있을 생각입니다. 구설수에 오르지 않게.”
그것도 우리나라 역사에 없는 부정적인 일이었다.
현직 국회의원이, 같은 당의 동료 의원 이십여 명을 검찰에 고발하는 것.
후폭풍이 몰려올 것이었다.
그것도 앞으로 1주, 길면 2주 뒤.
일단은 원내 의원들.
그다음으로 언론.
그리고 당원과 유권자, 내 인맥과 엮인 수많은 사람들까지.
간단한 연락이나 사실관계 확인은 물론이고, 의혹이나 논란이 있는지 알아보려 할 것이었다.
박 보좌관이 약간 놀란 듯 멈칫했고, 나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보좌관님도 좀 더 주의하시고, 방 식구들도 챙겨 주세요. 이번 거는 아마…… 김정환 대선 불출마 건보다 셀 겁니다.”
“……!”
박 보좌관이 멈칫했다.
김정환 대선 불출마 건이 어땠는지 몸으로 기억하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의원실로 온갖 말들이 쏟아졌었다.
단순한 칭찬과 항의 이상으로.
“더 말씀 못 드리는 건 박 보좌관님이 이해해 주시리라 믿어요.”
“알겠습니다, 의원님.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내 대답에 박 보좌관이 일정표를 한 차례 확인한 뒤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마무리 해 봐야 알겠지만, 스케줄이 이틀 정도 빌 것 같습니다.”
“언제쯤이요?”
그의 시선이 다시 일정표를 확인했다.
머릿속으로 바쁘게 스케줄을 지우고 정리하는 게 훤히 보였다.
그의 눈동자가 바쁘게 일정표를 오가고 있었다.
“……음, 26일 하루가 비는 건데, 25일 화요일 밤부터 27일 목요일 저녁까지 더하면 이틀 정도 될 겁니다.”
내 머릿속에서도 일정표가 그려졌다.
이틀의 휴일이라.
주말에도 못 쉬는데, 평일에 쉬게 될 줄 몰랐다.
간만에 늦잠이나 잘까?
그 생각을 하는데 와이셔츠 깃이 꾸깃꾸깃한 박 보좌관이 보였다.
내가 틈틈이 밥값 겸해서 사적으로 수당을 챙겨 주고 있긴 했지만, 그걸로만 직장인을 위로하긴 힘들었다.
쉼, 여유.
그런 게 있어야 했다.
나조차도 일에 치여서 바쁜데 보좌진들은 오죽할까?
박 보좌관이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의원실 식구들과 강북구 사무실의 식구들도 저녁 늦게까지 퇴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보좌진 생활을 몇 년간 했기에 잘 알았다.
의원이 쉬는 날에도 보좌진은 행사 이후의 피드백을 하고, 쏟아지는 민원을 처리하며, 예정된 행사 일정 조율과 축사와 기념사까지 준비해야 했다.
한마디로 일복이 터졌다는 뜻.
평소에도 공무원들 퇴근하듯 정시 퇴근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박 보좌관님도 쉬시죠.”
“……말씀은 감사한데, 아시잖아요.”
“잘 알죠. 저희 방 식구들 제대로 못 챙긴 것도 잘 알고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이건 내 사람 챙기기 이전에 효율적이고 우수한 일 처리를 바라는 내 심정이었다.
기계도 쉬어야 하는 마당에 사람이 못 쉬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리고 피크 타임 중간의 휴식은 평소의 휴일보다 더 달콤한 것이었다.
박 보좌관의 입에서는 부정의 말이 먼저 나왔다.
“그래도 말씀하신 그 일이라도 터지면…….”
“그건 그다음에 터질 겁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잖습니까?”
앞으로 사흘 뒤가 12월 25일이었다.
“쉬세요, 이거 상급자 지시입니다? 휴가 안 쓴 거 많잖아요. 보좌진 전부 쓰세요.”
내 말에 박 보좌관이 머뭇거리긴 했으나, 얼굴이 미묘하게 밝아졌다.
쉬는 걸 싫어하는 직장인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박 보좌관은 의원실 업무를 총괄하는 대표자였다.
책임감과 내 신뢰, 그리고 가외로 얻는 수입 같은 게 눈에 밟혀서 머뭇대고 있을 것이었다.
잠깐을 고민한 것인지 박 보좌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26일에 하루 정도 쉬게 하겠습니다. 강북구 사무실도 문 잠가 놓겠습니다.”
“아뇨, 25일부터 27일까지 쉬세요. 크리스마스 지나고 놀면 뭐해요. 저야 애인 없지만, 방 식구들은 다들 있을 거 아닙니까?”
박 보좌관도 결혼 준비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의 얼굴에 다시 걱정하는 기색이 보였다.
“의원님, 25일에 교회하고 성당, 복지시설에도 가셔야 합니다. 저희가 그 날까지 쉬면 보좌도 그렇고, 하다못해 심부름도…….”
“저도 가족하고 움직이려고요. 의원실 식구들하고 있는 것보다 그게 그림이 낫겠죠?”
“아…….”
박 보좌관이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청년 국회의원과 가족.
상당히 괜찮은 그림이었다.
그리고 국회의원인 아들을 사회 곳곳에 자랑하고 싶은 부모님의 욕구도 좀 채워 줄 생각이었다.
“제가 외삼촌한테 억지 좀 부릴 테니까, 오늘 내로 휴가계들 쓰세요. 제가 휴가비 챙겨드릴게요.”
내 말에 웃는 낯을 하고 있던 박 보좌관이 얼른 대답했다.
“휴가비까진 안 됩니다. 안 그래도 밥값을 많이 받아서 호화스럽다고 지적 받을 수도 있습니다.”
역시 박 보좌관이었다.
받을 때 받고, 거절할 땐 거절하는 프로.
“그래요, 아. 저도 이틀은 푹 쉬게 괜찮은 곳 좀 알아 봐주세요. 부모님도 모시고 가게.”
“국내로 가실 거죠? 그러면 거리나 금액, 원하시는…….”
“국내 어디든 편하게 쉴만한 곳이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리스트 금방 뽑아 보겠습니다.”
박 보좌관이 짧은 미소를 남긴 뒤에 개인 사무실을 떠났고, 나는 등받이에 기대며 기지개를 켰다.
가구 몇 개 없는 조용한 오피스텔 말고, 좋은 데서 제대로 쉴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났다.
쉬는 게 역시 좋긴 좋은 모양이었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어쨌든 폭풍 전에 잠깐의 여유를 즐길 생각이었다.
폭풍이 오면 쉬기 힘들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