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20. 드라마틱한 송년회 (3)
서초구 대일각.
고급 한정식당 입구, 나는 차에서 내리려다 영석이의 어깨를 짚었다.
“이제 그만 퇴근해라, 나 알아서 갈게.”
“음주도 상당히 하셨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하루 종일 몇 병 먹은 게 다야.”
“……알겠습니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 주십시오. 차는 대일각에 발렛 맡기겠습니다.”
“그래, 이거 차비해라.”
지갑에서 5만 원 권 몇 장을 꺼내 주자, 영석이가 거절하는 눈으로 나를 봤다.
차비로는 과하다는 뜻이겠지.
“야간 근무, 초과 근무 수당 쳐 준거야. 너무 많은 거 같으면 갈 때 모범택시 타고, 사치품도 사가면서 내수 활성화에 동참해. 됐냐?”
내가 농담조로 말하자, 그제야 영석이가 조심스레 돈을 받았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들어가, 오늘 고생했다.”
비대위원장과의 자리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영석이를 먼저 보낸 것이었다.
더구나 공적인 스케줄도 아니었다.
이내 영석이가 고개 인사 뒤에 등을 돌렸고, 나는 기와집 스타일의 한식당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있던 도어맨이 조 의원의 이름을 듣고는 곧장 방으로 안내했다.
한문으로 적힌 모란방 입구.
“손님 오셨습니다.”
도어맨이 말을 마치고 조심스레 장지문을 열어 주었다.
안에 있던 두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한 명은 비대위원장 조 의원.
남은 한 명은 그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50대의 사내.
조 의원이 내게 악수를 청하면서 계면쩍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합니다. 아, 이 분은 서울동부지검 손기택 차장검사님이십니다.”
“괜찮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차장님.”
조 의원과 악수를 나누자마자, 다시 그의 옆에 있던 손 차장과 악수를 나눴다.
“동부지검 차장 손기택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의원님.”
“예, 반갑습니다.”
차장검사면 동부지검장 바로 아랫자리를 말했다.
한마디로 검찰 고위 인사.
정치권력의 곁에는 결국 검찰이 있는 모양이었다.
장 의원 옆에서 수발 들 때, 전직 대검 차장검사라는 이도 여러 번 봤었고, 현역 검찰 인사들도 꽤 많이 봤었다.
나도 마침 이쪽에 연줄을 좀 만들어야 했는데, 잘 된 일일까?
웃으며 손을 놓자, 조 의원이 내게 자리를 권했다.
붉은 실로 수놓은 방석에 앉는데, 테이블 위에 음식 말고 다른 것도 눈에 띄었다.
내가 잘 아는 것이었다.
손수 타이핑해서 출력하고 정리한, 장세룡계와 친김계의 비리 내역.
“저것 때문에 불렀습니다.”
내 시선을 본 것인지, 자리에 앉던 조 의원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실은 제가 당장 얘기를 나눠야겠다고 했습니다, 워낙 중대한 사항이라…… 불편 끼쳐서 죄송합니다. 의원님.”
이번에는 차장 검사가 말을 덧붙였다.
속에서 웃음이 일었다.
이번 송년회가 드라마틱하게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 *
동부지검 차장검사 손기택.
그의 눈이 맞은편에 앉는 윤수혁을 훑었다.
‘뭐가 특별해 보이진 않는데…….’
손기택이 생각을 흐리면서 얄팍한 입술을 적셨고, 이어서 가는 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관록도 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인생의 절반을 검사로 살면서 자신에게는 남다른 능력이 있다고 믿어 왔던 그였다.
예컨대 사건 상황을 조망하는 시야와 낱개의 사물을 관통하는 눈 같은 것.
그래서 단순 줄타기로 차장 직함을 단 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이 자리까지 버텨 온 것이었다.
윤수혁만 달랐다.
테이블에 놓인 서류 뭉치부터 시작해서 수천 억 재산과 국회의원 배지까지.
이상함을 넘어서서 신비했다.
재산 형성 과정은 특히나 불가사의였다.
미공개 정보 이용, 주가 조작, 불법 증여 와 같은 과정이 아예 없었다.
그저 사는 주식마다 족족 올랐다는 것 밖에.
금감위도 두 번이나 조사에 착수했다가 조용히 물러났지 않았던가?
“차장님, 말씀하시죠.”
어느새 조성현이 나직하게 말을 건네 왔고, 손기택은 앞에 놓인 서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 서류, 전부 사법 처리에 들어갈 겁니다.”
“……전부요?”
윤수혁이 멈칫하며 되묻고는 조성현을 쳐다봤다.
“위원장님, 이거 당 내부 분열이라고 욕먹을 겁니다. 비대위원들도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지금이 아니면,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비대위원장 자리하고 이 자료까지, …… 기회는 지금 뿐입니다.”
“그래도 자료가 모자라지 않습니까? 사법처리 하기에는 애매합니다.”
“그래서 저한테 칼을 쥐어 준 거 아닙니까, 윤 의원님.”
조성현이 단단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윤수혁이 잊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긴 합니다만…… 당 내부 정리에 쓰실 줄 알았습니다.”
“칼이 있으니 무라도 썰어 봐야겠지요.”
“그러네요. 말씀대로 위원장님께서 칼을 쥐고 계시니,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겠습니다.”
윤수혁이 미소 띤 채 말을 마치자, 다시금 손기택이 말을 붙였다.
“저, 윤수혁 의원님.”
“아, 예.”
“의원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사법처리 하기에는 수위가 조금 낮습니다, 물증도 애매하고…….”
“예.”
“그래서 좀 어렵겠지만, 정보원을 만나게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정보원이요?”
이 정도의 비리 내역이라면 정보원이 있다고 봐야 타당했다.
흥신소나 화류계 바지사장, 관리자급 인물, 그도 아니면 사정기관의 인력 또는 정계 내부자.
그중 화류계 종사자가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이에 손기택이 변명과 조건을 달 듯 얼른 말을 이었다.
“정보 수집의 적법성을 따지진 않을 겁니다.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거나, 증거의 효력을 확인할 생각입니다. 아니면 추가 증거가 더 있을 수도…….”
“죄송합니다. 정보원은 만나실 수 없습니다.”
윤수혁이 단언하자, 손기택이 서류를 내려다봤다.
조금만 더 파면.
정말 조금만 더 알면, 물량전이 아니라 사건의 심각성으로 공론화도 가능했다.
피의자로 법정에 세우고, 집행유예가 아닌 징역형까지 이끌어 내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이에 손기택이 아쉬움을 삼키지 못하는 사이.
윤수혁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대신에 저한테 말씀하세요. 웬만한 건 다 압니다.”
“지금 말씀드려도…….”
“예, 편하게 말씀하세요.”
대답한 윤수혁이 작게 미소 지었다.
* * *
손 차장은 나름 준비한 것인지, 수첩까지 꺼내서 내게 질문을 했다.
조금 더 구체적인 물음이었다.
용의자가 탄 차량의 차종, 넘버, 동승인 등등.
이미 내 정보의 사실 여부는 얼추 확인한 모양이었다.
그중 기억이 나는 것은 꼬박꼬박 대답해 주었고, 흐릿해서 차마 기록하지도 못한 것들은 고개를 젓기만 했다.
당연히 대부분이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애초에 내가 기억하지 못해서 정리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거의 3, 40분 즈음 됐을까.
손 차장이 한숨 같은 날숨을 뱉고는 조 의원을 바라봤다.
“이대로라면 물량 전으로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법처리 수준으로는 의원직 상실도 힘들 겁니다. 도덕적 흠결을 만들고, 내부 인사 단행에 도움 되는 수준 밖에 안 됩니다.”
손 차장이 이미 계산기를 두드린 듯 말했다.
내 생각에도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 기억을 기록해 두면서, 정리한 채 갖고만 있었다.
물론 실제로 보도된 비리 내역은 조금도 풀 생각이 없었다. 협박용이든, 협상용이든, 그건 내가 직접 다뤄야 했다.
“이게 한계라면 받아들여야 되겠지요, 그리고…… 차장검사님. 그것도 말씀해 주십시오.”
그거라니?
어느새 조 의원이 은근한 눈으로 손 차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네. 결례일 수 있겠지만…… 정황상 윤수혁 의원님께서 하신 7,200만 원 상당의 후원금 내역을 확인했었습니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현실과 타협하는 칼잡이는 이미 이 바닥에 널리고 널려 있었다.
그런 면에서 홀로 싸우던 조 의원은 새한국당에 몇 없는 깨끗한 사람 중에 하나라고 봐야 했다.
보수우월주의 같은 것도 없었고.
내 눈을 보던 손 차장이 조 의원에게 보고하듯 말을 이었다.
“위원장님께서 정황상 불법이 아니냐고 하셔서 확인했는데, 특별히 잘못된 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더 조사하려면 수사에 착수해야 할 겁니다.”
생각보다 듣기 좋은 말이었다.
하지만 좀 이상하기도 했다.
조 의원도 눈치챌 정황을 수십 년 검찰 밥을 먹은 차장검사가 부인한다?
편법임과 동시에 확대하면 불법으로 넘어갈 만한 사안이었다.
나 스스로가 3억의 돈을 그렇게 기부했으니까.
그러나 어찌 됐든, 조 의원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나를 쳐다봤다.
“저번에 윤 의원이 이해한다고 해서 부득이하게 확인 좀 부탁했었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아닙니다, 위원장님. 저하고 이걸로 타협하셨다면, 제가 실망했을 겁니다.”
내 말에 조 의원이 엷게 웃고는 일어날 것처럼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만 일어 들 납시다, 요새 늦는 바람에 집사람 등쌀에 힘듭니다.”
“저도 매번 늦는 처지라 비슷합니다, 위원장님.”
손 차장이 그 말에 맞장구를 쳤고, 조 의원이 나를 보며 웃음을 흘렸다.
“윤 의원은 그런 걱정 없어서 좋겠습니다.”
“저도 결혼 얘기가 나오고 있어서…….”
내가 멋쩍다는 듯 웃자, 손 차장이 불쑥 말을 붙였다.
“결혼하십니까?”
“아뇨, 아직이죠. 여자도 없고요.”
설마 이 사람들까지 나한테 여자 얘기를 꺼내나 싶었는데, 손 차장이 슬쩍 말을 흘려 왔다.
“제 큰딸이 아직 대학생인데…… 절 안 닮아서 아주 예쁩니다.”
그 말에 손 차장을 바라봤다.
둥그스름한 코에 날카로운 눈매가 돋보이는 모습.
안 닮았기에 다행이었다.
“혹시 마땅한 혼처 없으시면 저한테 연락주세요, 의원님. 하하하.”
농담처럼 하던 말을 마무리 지으려는 듯, 그가 과장되게 웃었다.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도 그 말을 받아주었고, 자연스레 명함을 교환했다.
이윽고 위원장이 앞서 갈 무렵.
손 차장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 갔다.
“아, 후원금은 3억2천만 원이었죠?”
얼른 돌아보니, 방금까지 농담을 던지던 손 차장이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이게 뭐하자는 거지.
분명 조 의원 앞에서는 잘못된 게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바쁘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 더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사적으로 주셨다면…….”
처음에는 당황했었으나, 이제는 헛웃음이 턱 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역시 검사는 검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차장검사.
손 차장이 들여다본 정치 후원금 서류만 늘어놔도 연병장 두 바퀴는 될 것이었다.
애초에 모르기가 더 힘들겠지.
어느새 손 차장이 더욱 은근하게 말을 붙여 왔다.
“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잘못됐다고 하진 않았습니다. 편법이었고, 그 정도는 흔한 일이죠.”
그 말에 내 입가에도 미소가 어렸다.
조 의원의 조사 부탁을 덮어 줬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뭔가를 바라고 있었다.
그게 뭘까?
돈인지, 정치욕인지.
내가 채워 줄 수 있는 것이니 이렇게 말을 꺼냈겠지.
나는 뒤처진 채 복도를 걸으며 말을 꺼냈다.
“하실 말씀이 더 있으신 것 같은데…… 2차라도 가시겠습니까?”
그러자 그가 조금 더 짙게 웃었다.
속내가 가려진 미소였다.
“2차는 어렵고, 편하신 시간에 연락 주십시오.”
“그럼 그렇게 하지요.”
마지막으로 그와 악수를 나누는데, 손 차장이 짧은 미소 뒤에 말을 덧달았다.
“그리고 방금 드린 말씀 진담이었습니다.”
무슨 말을…….
생각하다가 아차했다.
대학생이라던 큰딸 얘기였다.
내가 피식 웃자, 그가 정중하게 고개 숙였다.
큰딸은 모르겠지만, 이 장면은 제법 괜찮은 그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