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20. 드라마틱한 송년회 (2)
뺨 한 대 맞고 반성하랴?
“아나, 씨바!”
안경잡이의 입에서 분노 섞인 욕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거친 콧김과 탄성이 좌우에서 팍 튀어나왔다. 학년주임 뿐만 아니라 총동창회 간부들의 눈이 돌아간 것이었다.
이들이 누군가?
사회에서 완장 좀 차본 사람들이고, 유지 역할을 하는 이들이었다.
치과의사, 한의원 원장, 제조공장 공장장, 대기업 부장…….
이들의 체면은 그저 점잔을 빼는 수준이 아니었다.
자존심이었다.
나 같은 뱃지 단 놈한테는 몰라도,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욕먹을 짬이 아니라는 뜻.
그들 중 왕년에 힘깨나 썼던 배불뚝이 50대가 앞으로 나왔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움직이는 게 생각보다도 빨랐다.
“가만 안 있어?!”
“이 어린놈의 새끼가……!”
팔뚝 두꺼운 사내들이 나와서 팔딱거리려던 안경잡이를 붙잡았고, 일어서는 감색 코트까지 주저앉혔다.
보고 있자니 대단했다.
나이 든 이들의 힘이 생각보다 억세고, 빠르다는 게.
내가 그래서 장 의원한테 머리가 깨졌나?
어이없는 생각까지 할 무렵.
상황이 정리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나서는 동창생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머지 동갑내기들은 얼떨떨한 눈으로 이 상황을 그저 방관하고만 있었다.
하긴 그게 상식적이었다.
애초에 이 정도로 개념과 인성이 모자라다면, 라마다 호텔이 아니라 구치소 같은데 있어야 했다.
이 둘은 오래지 않아 그런데 가게 되겠지.
그리고 이제 내가 나서야 할 타이밍이었다.
“선생님들.”
“아이고, 의원님. 괜찮으십니까?”
“예, 저는 멀쩡합니다. 그나저나 여기 동창생 이름이…….”
내가 안경잡이를 바라보며 말하자, 테이블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규진이요.”
“아, 고맙습니다. 저 규진아, 흥분 좀 가라앉히고 얘기 좀 하자.”
그러자 안경잡이가 총동창회 임원들에게 붙잡힌 채 나를 쳐다봤다.
화가 서린 눈빛이었다.
당연하게도 여전히 씩씩대고 있었으나, 더 이상 난리를 칠 것 같진 않았다.
상황 돌아가는 꼴을 뒤늦게나마 이해한 모양이겠지.
더 개기면 다구리 맞게 생겼다는 것 정도?
“규진아 너 놔줘도 괜찮겠지? 거기 찬길이도?”
그러자 안경잡이와 감색 코트가 알겠다며 짜증 내듯 대꾸했다.
여기서 더 난리를 치면, 세모눈이 된 교장이 튀어나와 턱주가리를 돌려놓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둘은 잡혔던 팔이 풀리자, 인상을 쓰며 늙은 사내들을 노려봤다.
임원들도 마찬가지.
서로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일단은 여기서 있었던 일 풀고, 식사 맛있게 하십시다. 오늘 행사 좋게 마무리 해야겠죠? 학년주임 선생님께서 먼저 사과를 하시죠.”
내 말에 학년주임이 멈칫하더니,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내 말하려는 것처럼 보였는데.
연회장 문이 살짝 열렸다.
그리고 다가오는 정장 차림의 중년 사내.
금색 명찰을 단 걸로 봐서는 직급깨나 있다는 뜻이었는데, 그가 잰걸음으로 움직였다.
이윽고 중년 사내가 나와 총동창회 임원쪽을 향해 왔다.
“연회 지배인 김용훈입니다. 강북중앙고 총동창회 책임자분이 어느 분이십니까?”
“접니다.”
총동창회 회장이 나서자, 지배인이 조금 긴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 동창회에서 폭행 시비가 있었다고 신고가 들어왔는데, 경찰이…….”
그 말에 곧장 입구를 바라봤다.
형광 조끼와 경찰 근무복이 열린 문틈으로 보였다.
경찰도 지배인이랑 말을 맞췄는지, 무작정 들어오지 않고 입구에서 일단 대기하는 모양이었다.
그사이 회장이 손을 내저었다.
“언성이 좀 높아진 건데 누가 오해해서 신고한 모양입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다행입니다. 신고하신 당사자분이 경찰하고 대화해서 오신고하셨다고 말씀을 해 주셔야 돼서, 경찰 분들 잠깐 들어오게 하겠습니다.”
“그냥 돌아가도 될 일을…….”
“신고가 접수되면 확인을 해야 된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답니다, 죄송합니다.”
한숨이 나왔다.
왠지 이 뒤쪽으로 오기가 꺼려졌는데, 그 감이 적중할 줄이야.
나는 차마 발을 떼지 못했다.
분을 풀지 못했다는 듯, 억울하다는 듯한 안경잡이와 감색 코트의 시선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연회 지배인이 문 쪽을 바라보자, 두 명의 경찰이 등장했다.
그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들어올 때.
“여기요! 여기!”
안경잡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이게 결국 이딴 식으로 나오는구나.
이래서 뒷자리로 오고 싶지 않았다. 내가 참석한 동창회가 폭행 시비에 휘말려 뉴스에 나오는 건 사절이었다.
경찰들이 손을 들며 이쪽으로 왔다.
“충성, 실례하겠습니다. 안경 쓰신 분이 신고자 분이십니까?”
이미 협의가 된 줄 아는 듯, 장년의 경찰이 사무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안경잡이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아뇨, 아뇨. 제가 맞았어요! 저 새끼한테 맞았다고요!”
안경잡이의 손가락이 학년주임을 향했고, 경찰은 눈을 껌뻑거렸다.
“폭행이 있었다고요?”
“네네! 여기 빨갛게 된 거 안 보이세요?”
그의 뺨을 확인한 장년 경찰이 지배인을 쳐다봤다.
“……지배인님?”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되묻는 듯한 시선.
그러나 지배인도 대답을 못한 채 난처한 듯 표정을 굳혔다.
“그러면 일단 호텔 바깥으로 가시죠. 여기서 소란스럽게 해서 좋을 거 없으니, 선생님?”
경찰이 학년주임에게 손 안내를 할 무렵.
나는 장년의 경찰에게 슬쩍 고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아…… 네. 어? 혹시 TV에서…….”
“새한국당 국회의원 윤수혁입니다.”
그가 알아보기에 악수를 청했고,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그 분 모셔갈 필요 없이, 여기서 완만하게 해결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네?”
“저도 이 친구한테 얼굴을 가격당할 뻔했습니다.”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안경잡이가 눈을 치켜떴다.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그의 욕설에 경찰이 손을 들었다.
“거기 가만있어요! 그래서…… 의원님, 말씀하십시오.”
“그 과정에서 여기 선생님이 제압하는 과정에서 맞게 된 것 같습니다만…… 이게 단순 폭행죄가 성립됩니까?”
“아, 시바! 그냥 꼬집으려고 한 것 갖고 지랄…….”
때마침 튀어나온 말에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방금 저 말, 위해 가했다고 자백한 거 같은데, 인정되지요?”
“네! 그렇습니다!”
경찰이 재깍 대답했다.
의기양양하고 화가 넘치던 안경잡이의 얼굴이 빠른 속도로 굳었다.
감색 코트도 마찬가지였다.
“자, 이거 나가서 처리할 필요 없죠? 여기서 좋게 합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은근히 합의를 종용하자, 경찰이 안경잡이를 쳐다봤다.
안경잡이는 억울하다는 듯 입을 댓 발 내밀고 중얼거렸다.
“아니, 꼬집으려고 한 거 가지고…….”
“꼬집는 것도 폭행입니다. 지금 공격하려는 걸 스스로 인정하신 게 됐습니다. 이것도 엄연히 죄예요, 죄. 이대로 경찰차 타시겠어요? 아니면 여기 선생님하고 합의 보시겠어요?”
경찰이 허리에 손을 짚으며 말하자, 안경잡이가 턱을 긁었다.
“아니…… 그게.”
“규진아, 잘 생각해.”
내가 말을 얹자, 안경잡이가 눈가를 찡그렸다가 한숨을 뱉었다.
“……그냥 가세요.”
제대로 미친놈이 아니라면, 이 상황에서 해 보자고 할 리가 없었다.
경찰과 국회의원, 지역 유지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더구나 경찰도 내 편을 드는 듯 행세했고.
나는 상황을 마무리 짓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경찰 분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참, 관등성명이 어떻게 되십니까?”
“저는 도곡지구대 소속 경장 김재성이고, 이 친구는 이찬우 순경입니다.”
“그러시군요, 두 분 오늘 일은 따로 격려 가 있을 겁니다.”
“아,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될 일인데…….”
내가 해 줄 건 승진 같은 거나, 윗선에 이름을 알려 주는 게 아니었다.
도곡지구대 회식비 기부 정도?
“충성! 의원님, 고생하셨습니다.”
두 경찰이 내게 경례를 붙였다.
“제가 무슨 고생입니까, 우리 경찰 분들께서 수고가 많으십니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경찰들이 그렇게 경례 뒤에 움직였고, 지배인도 내게 90도로 허리를 접었다.
“못 알아 봬서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을 해 주셨으면 저희 측에서…….”
“그래서 말씀 안 드렸습니다. 조용히 있다 갈 거니까 편하게 계세요.”
이어서 연회 지배인까지.
부장급 정도 될 그가 다시금 허리를 접은 뒤에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일을 처리하고 자리로 오자, 영석이가 내 곁에 붙었다.
“……의원님, 여기 인터넷 신문사 기자도 한 명 있습니다만, 제가 가서 얘기 해 놓을까요?”
“그렇게 하세요.”
내 말과 동시에 영석이가 움직였고, 총동창회 회장이 다가와선 넙죽 고개를 숙였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의원님.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행사장에서 비슷한 일 많이 겪었습니다.”
많아도 엄청 많았다.
가끔은 새한국당 반대파가 물건을 집어던졌고, 극우주의자가 칼부림을 예고하기도 했으며, 노인들이 술에 취해서 고성방가를 내지르기도 했었다.
오늘 같은 일은 별거 아닌 편이었다.
오히려 흔한 일이었다.
단지 저급해서 별로 끼어들고 싶지 않을 뿐.
그렇게 자리에 앉는데, 같은 기수의 동창생들이 다가왔다.
얼굴은 드문드문 기억이 나고, 이름이 가물가물한 동창생들이었다.
“사진 좀 같이 찍어도 되죠?”
“명함 있으면…….”
“혹시 나 기억 안나? 같은 반이었는데…….”
쭈뼛거리며 서너 명이 오더니, 줄을 서듯 사람들이 모였다.
내가 국회의원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경찰들의 경례와 지배인의 인사, 총동창회 임원들의 의전이 가시적인 효과를 냈다던가.
나는 그저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사진 촬영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제 명함은 여기 있습니다.”
어찌 됐든 상관없었다.
동창생 이전에 저들은 표를 가진 유권자였다.
매번 하듯 인사해 줘야 했다.
이제 막 사원이나 대리, 간혹 소기업 과장 직함이 인쇄된 명함을 받고 유권자용 명함을 건네줬다.
그리고 셀카까지.
어느새 다가온 영석이는 내게 작게 귓속말을 전했다.
“이거 아무래도 기사는 나갈 것 같습니다. 되도록 긍정적인 방향으로 부탁했는데, 그것도 확실치는 못합니다.”
“됐어요, 그냥 두세요.”
대답하는데, 이번에는 강북중앙고 1기 출신이라는 60대의 사내가 다가왔다.
“실례지만, 우리 의원 후배님께서 미혼이라고 하시던데…….”
“아, 예.”
“제가 딸만 다섯이고, 셋이 아직 시집을 못 갔는데 한 번 봐주기만 해 주시면…….”
정중하게 거절하는데, 밥 먹기는 그른 것 같았다.
내가 찾아가지 못한 테이블에서도 사람들이 주춤대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더욱이 과거에 알던 사이라고, 안면이 있었다고 말을 걸어 대는 통에 시간은 점점 더 늘어졌다.
이거 대학 송년의 밤도 이렇게 돌아가는 게 아닐까?
백 번이 넘는 악수를 하고, 유권자용 명함 수십 장을 돌렸다.
중간에 영석이가 교통정리를 했고.
그렇게 오늘의 송년회가 더디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일, 모레의 송년회도 열두 번은 더 있었다.
바쁜 일과겠거니.
그렇게 생각하는데, 걸려온 전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대위원장 조성현 의원]
내가 자료를 넘긴 지 며칠 만에 걸려온 전화였다.
무슨 일일까?
나는 양해를 구하고 복도로 나가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비대위원장입니다. 상의할 게 있는데, 와줄 수 있습니까?
“지금이요?”
- 미안합니다, 지금 올 수 있겠어요?
“예, 가겠습니다.”
마침 몰려들던 사람이 꽤 빠진 상태였고, 이제 행사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냄새가 독해서 더 이상 머물 생각도 없었다.
무엇보다 비대위원장이 부르는데, 싫다고 뺄 수가 있겠는가?
- 고마워요, 여기 서초구 대일각입니다. 내 이름 말하면 입구에서 안내해 줄 겁니다.
“10분 내로 갈 것 같습니다. 저도 마침 강남입니다.”
- 그래요, 이따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