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20. 드라마틱한 송년회 (1)
그날 밤, 서울 라마다 호텔.
벤츠 뒷자리에서 내리자, 영석이가 카메라를 챙겨들며 곁에 섰다.
“약주는 얼마나 하실 겁니까?”
“내가 얼마나 먹었지?”
“와인 한 병반, 맥주 두 병, 소주 반 병 정도 드셨습니다.”
“생각보다 꽤 먹었네?”
“대학 때 생각해 보면 적게 드신 것 같은데…….”
영석이가 웃음기를 섞어가며 대답하자, 나도 옅게 웃었다.
“흐흐, 그랬나? 아. 대학 동문회는 언제야?”
“중산대 송년의 밤은 27일입니다.”
“27일이면…… 다음 주 목요일이잖아? 금요일 아니었어?”
“원래 그랬는데, 저희 스케줄이 꽉 차다 보니 중산대 총동문회에서 일자 조정했습니다.”
그 말에 웃음이 일었다.
나 때문에 총동문회 일자까지 바꿨다니.
우습지만 이해가 되기도 했다.
중산대 출신의 고위공무원은 있어도, 차관급 이상의 국회의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무래도 총동문회 회장이 공식적으로 자랑하고 싶겠지.
대학 정문에 플래카드가 걸린 것도 기사로 봤었다.
그게 아니라면 회장이 구의원에 출마할 욕심이 있던가, 국방위에 청탁할 만한 게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었고.
이유야 많았다.
나는 그 대학에서 얻은 유일한 인재, 영석이를 보면서 은근히 물었다.
“총동문회 가서 학점 안 준 교수 괴롭히고 그러면 안 된다?”
“……누가요, 제가요?”
얼떨떨한 얼굴의 영석이가 묻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솔직히 학점은 제가 의원님보다 더 잘 나왔던 것 같습니다만…….”
“기억도 안 난다, 그게 언제 적인데.”
“재작년 아닙니까?”
그 말에 멋쩍게 웃었다.
생각해 보니 내 몸뚱이는 재작년 2월에 대학을 졸업했었다.
“전에 말했잖아, 내 속은 서른여덟 정도 됐다니까? 대학도 10년 전 얘기 같다.”
그렇게 농담을 하면서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동창회 장소는 컨벤션 2층.
이미 진행 중인지 입장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연회장 쪽으로 다가가자, 입구에 있던 중년의 사내가 튀어나왔다.
“의원님!”
아는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밝은 모습.
일단 고개 인사로 답하는데, 그가 꾸벅 허리를 숙여 왔다.
“총동창회 부회장 이춘식입니다. 연락 주시면 동창회 임원들이 미리 나가서 모셔 왔을 텐데…….”
“……그래서 그냥 온 겁니다.”
굳이 50대 이상의 배 나온 아저씨들 십수 명한테 의전 받고 싶진 않았다.
20대 아가씨들로 바꿔도 수락할지 말지 고민할 텐데.
“아아, 그러시구나. 그러면 일단 입장하시지요. 5분 내로 귀빈 소개 하겠습니다.”
“예, 편하신 대로…….”
“제가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죄송하지만 비서님 자리는 준비를 못했는데…… 곧장 의자 가져오겠습니다.”
“예, 일단 들어가시죠.”
그렇게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이게 뭐지?
몇 번이나 눈을 껌뻑였다.
정장이 아닌 청바지와 코트 따위를 차려입은 젊은 애들이 가득했다.
내가 주춤하자, 옆에서 부회장이 자랑이라도 말을 붙여 왔다.
“이번에 총동창회에서 특별하게 초청했습니다. 의원님께서 연세가 젊으시니, 연령대를 맞추려고 37기 졸업자들에게 초대장을…….”
부회장이 설명을 덧달았지만, 들을 필요가 없었다.
한마디로 내 졸업기수의 동창생들을 불러 왔다는 뜻.
호텔밥 공짜로 준다고 꼬드겨서.
5, 60대의 총동창회 구성원과 20대 후반의 동창생들을 잠깐 바라보다가 마저 걸음을 옮겼다.
내 자리는 가장 앞자리.
총동창회 회장과 간부들, 현 강북중앙고의 교장 등이 앉은 테이블이었다.
부회장이 빼준 의자에 앉자, 영석이가 내게 귓속말을 전해 왔다.
“의원님 저는 자리 없으니까 그냥 빠져 있겠…….”
“의자 가져 오신 댄다.”
“아닙니다, 이런 자리는…….”
“어딜 도망가려고?”
“……음, 알겠습니다.”
영석이가 포기한 얼굴로 내 곁에 섰고, 부회장이 뒤늦게 가져 온 의자에 앉았다.
영석이가 코밑을 몇 번이나 문질렀다.
나도 그랬다.
진한 스킨 향과 커피가 섞인 담배 냄새, 머리를 고정한 무스의 강한 과일 향까지.
딴 자리에 가고 싶었지만, 상석이라고 내준 자리라 그럴 수가 없었다.
더구나 총동창회 회장이 내게 말까지 건네 왔다.
“참석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의원님.”
“아닙니다.”
“제가 듣기로 오늘 스케줄이 마지막이라고 하신 걸로 아는데, 식사 자리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제가 피곤해서 오래 있긴 힘들 것 같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 총동창회 고문님이나 임원들을 좀 소개시켜드리려고 합니다만, 불편하실는지…….”
머리가 백발인 그의 말에 잠깐이면 되겠느냐고, 긍정적으로 대답해 주었다.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만 쳐다보고 있던 탓이었다.
다행히 영석이가 적절하게 끼어들었다.
“오늘 행사 때문에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음주도 최소한으로 하셔야 합니다.”
“아무렴요, 걱정 놓으십시오.”
회장이 그렇게 대답하는 사이, 귀빈 소개가 이어졌다.
나 말고 늦게 온 사업가도 같이 호명됐고, 나는 곧장 단상에 올라 축사까지 연달아 처리했다.
그리고 얼마 뒤.
여러 식순 끝에 사회자가 분위기를 잡았다.
수상 시간이었다.
내가 받을 올해의 중앙인 말고도 다른 상이 꽤 있었다.
공업이나 상업, 의료 등등의 각 분야마다 상이 있었고, 기부나 장학금 후원에 보답하는 감사패 수여도 있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지금부터 강북중앙고등학교 총동창회에서 선정한 2012년 올해의 중앙인 상 수여가 있겠습니다. 시상자인 허금석 총동창회 회장님께서는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회장이 뿌듯하단 얼굴로 일어났고, 테이블에선 벌써부터 박수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회장이 말도 안 되는 미사여구를 담아서 수상자에 대한 설명을 늘어놨다.
그러나저러나, 이유는 하나였다.
내가 강북중앙고 졸업자 중 최초의 국회의원이라서 그랬다.
내가 졸업한 초중학교도, 대학교도 마찬가지였다.
국회의원이라서.
대한민국에 오직 300명밖에 없는 직업이니.
“……수상자는 37회 졸업생이자 현 새한국당의 국회의원이신 윤수혁님입니다. 앞으로 나와 주세요.”
여태 중년의 인사들만 받아가던 상을 내가 받게 됐다.
영석이의 카메라 플래시와 함께 상을 받았고, 참석객을 향해 고개 숙였다.
이제 할 일을 반 정도 한 것이었다.
그럴 줄 알았는데.
일은 다른 곳에서 터졌다.
* * *
20대 후반이 앉은 테이블 10여 개에서 올해의 중앙인 수상식을 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쟤가 그 윤수혁이야?”
“그렇대, 와…… 진짜 국회의원 됐구나.”
“너 TV 안 봤어? 쟤 북한이 미사일 쐈을 때도 나왔잖아.”
“미사일 아니고 포탄이야.”
“하여튼, 저번에 대통령 후보 증거도 공개했던데. 완전 유명하잖아.”
그중 감색의 코트를 입은 남자가 테이블 중앙의 맥주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국회의원이 그렇게 쩔어?”
“입법부잖아, 당연히 법 만드니까 쩔겠지.”
“그래도 저 새끼 존나 거만해 보이는데?”
고등학교 시절, 학급 분위기를 휘어잡았던 남성의 말에 옆자리의 여자애가 눈을 찌푸렸다.
“왜 그러냐, 무슨 고등학생도 아니고.”
“너 그거 모르지?”
“뭐?”
“여기 꼰대 밖에 없으니까 저 새끼가 우리 다 부른 거야.”
“에이, 그거…….”
“딱 보면 모르냐? 여기 아줌마 아저씨 판이잖아. 이거 원래 회비 내야 오는 거야.”
그 말에 테이블에 앉았던 이들이 술렁거렸다.
상패를 받고 고개 숙이는 윤수혁을 보던 감색 코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 저 새끼 뺨 한 대만 때리고 싶은데.”
“뒤통수 갈기기 내기 할래?”
그중 안경잡이의 말에 감색 코트가 킬킬댔다.
“미친 새끼, 그러다 수갑 찬다?”
“아니면 볼 꼬집기, 그 정도는 귀엽잖아.”
“볼 꼬집기? 오오, 너 많이 컸다?”
감색 코트가 농담조로 말하자, 안경잡이가 의자에 기대며 영화 대사를 흉내 냈다.
“원래 키는 내가 더 컸다 아이가?”
“푸하하하, 존나 웃기네.”
“10만원 빵 할래? 레알 한다니까? 볼 꼬집는 걸로 신고라도 하겠냐?”
그러자 테이블에 있던 다른 이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좀 그렇지 않아? 여기 교장도 있어.”
그 말에 안경잡이가 다시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그래서 우리 벌점 준대? 아니면 화단 청소 시킨대?”
“너네는 나이 어디로 먹었어? 내일 모레면 서른인데…….”
“그러니까 하는 거지, 서른 돼서 이러면 욕 먹지만 아직 20대 아니냐?”
“……모르겠다.”
그러나 감색코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경잡이의 말에 반응했다.
“방금 거 명언이다?”
“역시 찬길이가 뭘 좀 아네. 전역할 때 내가 연대장 표창도 받았다.”
그렇게 테이블에 있던 몇 명이 떠들썩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행사 1부가 끝났다.
* * *
이어서 뷔페가 시작됐다.
동시에 나는 총동창회 회장과 함께 장내를 돌기 시작했다.
총동창회 임원과 동문생들에게 인사하러 움직이는 것이었다.
좀 피곤해도 어차피 익숙한 일이었다.
국회의원이라면 마땅히 몸에 익혀서 생활화해야 될 일들이었다.
눈 맞춤, 인사, 악수, 포옹 등등.
추가로 권하는 술 한 잔 마시는 일까지.
그러던 중 내 앞에 생글생글 웃는 중년의 사내가 섰다.
보통 저런 눈은 지인인 경우가 많아서 쳐다봤는데, 그의 입이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열렸다.
“안녕하십니까, 혹시 저 기억 나십니까?”
“……죄송하지만 누구시죠?”
“아, 저 홍기표입니다.”
“으음…… 홍기표씨?”
이름만 들어서는 가물가물했다.
나이대로 보면 학교 다닐 때 교사였을 것 같았는데.
“으하하, 저 의원님 학교 다니실 때 학년주임 맡았었습니다. 과목은 윤리 가르쳤구요.”
그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 예. 건강하셨습니까?”
“덕분에 잘 지냅니다. 그런데 학생 때는 지각도 하시고 그래서, 큰 일하실 몰랐는데…… 참 대단하십니다.”
“그러게요, 하하…….”
“아, 뒤 쪽에 그때 학교 다닌 동창들 있는데, 한 번 가보시죠. 바쁘셔서 얼굴도 제대로 못 보셨을 것 같은데요.”
학년주임 홍기표의 말에 총동창회 회장도 거들었다.
“인사라도 나누시죠, 저희가 의원님 연세를 고려해서 특별 초청했으니…….”
회장이 자랑스레 말하길래 작게 화답해 주었다.
“앞으로는 이렇게 특별대우 하지 마세요.”
“아……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회장이 고개 숙이는 걸 막고, 뒤쪽을 바라봤다.
뒤의 20대도 다들 식사 중이었고, 분위기가 조금 어수선했다.
앞자리와 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왠지 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일진한테 맞았거나, 첫사랑이 왔다는 무슨 드라마틱한 이유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다.
그냥 감이 그랬다.
애초에 나한테 학교는 학교일 분이었다.
친한 단짝 몇 명은 기억에 남아 있긴 했으나, 그렇다고 그 친구들이 엄청나게 반갑거나 그리운 것도 아니었고.
내가 걱정하는 건 별 게 아니었다.
우스운 말이 나오고, 체면 상할 일이 생길 것 같아서 그런 것이었다.
농담이든 빈말이든.
그렇게 나는 총동창회 회장, 학년주임, 부회장 및 임원들, 학교 교장과 영석이까지 끌고 뒷자리로 이동했다.
무슨 귀족 나리 행차인가 싶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움직였다.
원래 다들 그랬다.
어느 모임을 가던 간부들이 의전하고 쫓아다니며 이동해서 별날 것도 없었다.
그나마 기초의원 없는 게 다행이었지.
“오, 윤수혁! 올만이다!”
역시나 가자마자 감색 코트 걸친 동창생 하나가 말을 걸었다.
얼굴이 낯익긴 하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나 강찬길이잖아. 몰라?”
“아, 강찬길. 그래, 반갑다. 식사 맛있게 해.”
대충 때우고 지나가려는데, 이번에는 웬 안경잡이가 말을 걸었다.
“셀카 한 방 찍자, 수혁아.”
이건 또 누구지?
거듭되는 반말에 내게 존대를 썼던 몇 명의 어르신들이 표정을 굳혔다.
“그래, 그러자.”
대충 한 장 찍으려는데.
어라?
옆에서 뭐가 훅 튀어나와서 몸을 뒤로 뺐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안경잡이와 감색 코트를 쳐다보는데.
“씨바, 존나 빨라.”
“크하하하, 이 새끼 실패했어.”
날 가지고 장난이라도 친 건가?
그 판단이 드는 순간.
쫘악-
안경잡이의 얼굴이 돌아갔다.
그리고 솥뚜껑만한 손이 천장으로 치켜들어졌다.
학년주임이었다.
“이 호로쌍놈의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아…….
이게 이렇게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