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19. 대선 (4)
2012년 12월 19일 수요일.
오전 여섯 시, 대통령 선거 투표가 시작되었다.
판세는 조금 기운 상태였다.
지지율 조사 발표 기간까지 이민수 후보가 평균 5퍼센트p 정도를 다른 후보들보다 앞서고 있었다.
이 정도면 많은 표 차이였다.
원래 3.1퍼센트p차이로 김정환이 당선했었으니.
그러나 저러나, 어쨌든 패는 까 봐야 아는 법.
그래선지 신경배 후보는 당권을 쥐기로 해 놓고도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다.
통계적으로 떨어지는 투표율 때문이었다.
문민정부 이후로 투표율이 급감하는 추세였다.
15대 대선은 80.7퍼센트, 16대는 70.8퍼센트, 그리고 17대는 63퍼센트.
선거 한 번 치를 때마다 거의 10퍼센트씩 깎여나가고 있었다.
나 같아도 기대해 볼 것 같았다.
거기에 더해서 투표 시간 연장도 국회에서 부결된 바람에 보수가 유리한 상황이었다.
물론 그건 다 틀려먹은 기대였다.
김정환이 나왔을 때도 투표율이 75퍼센트를 웃돌았었다.
- ……투표율 집계 결과, 18대 대선 최종 투표율은 76.2퍼센트입니다!
아나운서가 선관위의 집계 결과를 발표했다.
저번보다 13퍼센트p나 높은 수치.
작은 차이였지만 예상대로 달라지긴 했다.
조금 묘했다.
국회의원이 되면서부터 모든 일이 바뀌기 시작했지만, 이렇게 눈으로 볼 때면 기분이 달랐다.
무슨 역사를 바꾼다는 거창한 생각 같은 게 아니었다.
형의 결혼 약속도 그렇고.
내가 많은 일을 직접하고 미래를 바꾸고 있지만, 그럴 때마다 쓴웃음이 맺히곤 했었다.
지금도 그랬고.
나는 오피스텔 침대에 드러누워서 선거 결과를 마저 들었다.
여론조사 결과와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았다.
아마 몇 시간 뒤면 대선 패배 인정과 감사의 인사를 하게 될 것이었다.
신 후보도, 황 후보도.
* * *
밤 11시 경, 여의도.
새정치당 중앙당사 앞.
멀리서부터 경찰 경광등이 점멸하며 다가왔다.
손에 새정치당 깃발을 쥐고 있던 수백 명의 지지자들이 일시에 환호를 터뜨렸다.
“이민수! 이민수! 이민수!”
수백 명이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외친 소리가 여의도를 울렸다.
이윽고 싸이카가 선두에 등장했고, 뒤이어 경찰차와 까만 중형차까지 줄줄이 등장했다.
당사로 올라가는 길에 경찰들이 인간 바리케이드를 쳤고, 검은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이 등장했다.
대통령 당선자를 위한 것이었다.
이민수가 차에서 내리는 순간,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고, 지지자들의 환호가 절정에 달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함박웃음을 지은 이민수는 곧장 당사 4층의 기자회견장으로 올라갔다.
대기하던 경호원이 기자회견장 문을 열었고, 이민수가 안으로 발을 디뎠다.
찰칵! 찰칵! 찰칵!
카메라 플래시가 다시금 쏟아졌다.
이미 대기 중이던 방송국 카메라까지 모두 이민수를 향해 렌즈를 겨누었다.
이민수는 양팔을 번쩍 들며 등장했다.
준비하고 있던 선대위 간부와 당의 중진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축하드립니다, 당선자님!”
선대위 위원장 박우식이 꽃다발을 건넸고, 이어서 새정치당의 구성원과 주요 당직자들이 박수를 쳤다.
아직 개표가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당선이 확실시 된 상태였다.
기자회견장에 놓인 대형 TV에서도 ‘당선 확실’이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나타나 있었다.
“다들 고맙습니다,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이민수가 박우식과 포옹하고, 다른 이들과도 꽉 껴안았다.
당의 창당과 대통령 당선이라는 업적 달성에 고무되어서 이민수도, 안기는 사람도 과장되게 끌어안았다.
십수 번의 포옹과 악수가 끝나고.
여전히 고조된 감정을 품은 채, 이민수가 단상에 올랐다.
격앙된 목소리가 스피커로 울려 퍼졌다.
“선대위 여러분! 그리고 새정치당의 동지 여러분!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쉽지 않은 도전이었고, 어려운 시간이었는데 함께 해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이제 우리는 국민의 새정치 열망을…….”
이민수가 챙겨 온 원고를 중간중간 내려다보며 말했고, 기자들은 쉴 새 없이 플래시를 터뜨렸다.
기자회견을 바라보는 모두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선대위도, 정당인도, 기자도.
대통령 당선자의 첫 기자회견이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 *
며칠 뒤.
대선은 예상대로 끝났다.
그건 신경배 의원과 일을 공모한 최측근들, 그리고 장세룡 의원도 예상한 것이었다.
애초에 패배를 염두에 두고 모든 일을 진행했었다.
그 덕에 캠프 해단식과 당 지도부 사퇴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기다렸던 일이 처리되는 듯.
오늘은 비대위원장 추대 합의를 위한 당무위-국회의원 연석회의까지 열렸다.
보기 드문 일 처리였다.
원래라면 한참은 걸릴 일이었다.
애초에 지도부 사퇴부터 왈가왈부하는 게 기본이었다.
당대표만 사퇴하는지, 아니면 최고위원도 같이 사퇴하는지, 사퇴한다면 언제 하는지, 시기를 정기 전당대회에 맞출 것인지, 임시 전당대회를 고려해서 발표할 것인지 등등.
따지고 들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과정은 준비한 보람이 있게, 아주 순탄했다.
“윤 의원님, 아쉬우시겠어요.”
회장 안으로 들어가는데, 입구에서 낯익은 얼굴이 말을 걸었다.
중앙일간의 중견급 기자였다.
이 사람한테 하루 식대 수십만 원을 썼던가?
그 생각을 잠시 미뤄 둔 채 되물었다.
“제가요?”
“네, 국회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여당 자리 뺏겼잖습니까?”
그가 농담조로 말했는데, 눈빛이 능글맞은 게 기삿거리를 찾는 모양새였다.
나는 씩씩하게 웃었다.
“더 열심히 하라는 국민들의 채찍질 아니겠습니까? 아쉽기보다 제대로 못한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오늘을 계기로 더욱 발전한 정당과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드릴 겁니다.”
변명 같은, 듣기 좋은 대답이었지만 이건 진심이었다.
나는 모든 걸 바꿀 것이었다.
그러나 기자는 내가 미사여구로 대답을 꾸몄다고 생각하는 듯 웃었다.
“허허허, 대답이 청산유수십니다.”
“의정활동도 청산유수처럼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자리로 가보겠습니다.”
“그러십시오, 나오실 때 코멘트 좀 부탁합니다.”
“비공개라서…… 아, 일단 자리로 가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선배 의원님들 오시는데 늦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기자에게 둘러 댄 뒤에 자리를 찾아 앉았다.
연석회의가 오래지 않아 시작됐다.
MBS 앵커 출신의 대변인이 마이크를 잡고, 개회 선언과 국민의례를 진행했다.
이어진 원내대표의 모두발언 순서.
“이제 저희는 야당이 되었습니다. 그에 걸맞은 구조로 변화해야 하고, 국민들의 바람과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이미 신 의원과 말을 맞춘 듯한 모두발언 원고 내용이었다.
사실 선거 운동이 아니라, 지역구를 돌면서 의원들과 입을 맞추는데 열중한 게 아닐까 싶었다.
생각보다도 반발이 거의 없었다.
물론 장세룡 의원도 계파 추스르고, 친김파 다독이는데 한 몫 했겠지만.
장 의원이 순수하게 그랬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조금 다른 인간이었다.
‘A‘를 제시하면, 뒤에서 ‘B‘와 ‘C‘까지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한마디로 뒷구멍으로 호박씨를 깐다는 뜻.
그 생각을 할 무렵.
어느새 모두 발언이 끝났고, 장 의원이 앞으로 나왔다.
또 무슨 수작인가 싶어서, 그가 하는 걸 보다가 움찔했다.
“저는 새한국당의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조성현 의원님을 추천합니다. 조성현 의원님은 17대, 18대에 이어 19대 총선에서도 당선된 3선 의원으로서…….”
김정환 친일 논란에 앞장선 그 조 의원을 말하는 건가?
놀라서 나도 모르게 뒤를 바라봤다.
급하게 확인한 조 의원의 얼굴은 담담했다.
당황스럽거나 놀란 게 아니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보였다.
그렇다면 신경배 의원은?
그도 무덤덤했다.
아, 하는 소리가 턱 끝까지 나오다가 사라졌다.
셋이 합의를 본 것이었다.
중립 인사 카드로.
그걸로 반발 세력도 무마시킨 것일 터였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복잡한 판국에 다른 계파나 장 의원이 거기에 쉽게 동의했을 것 같진 않았다.
조 의원은 어찌 됐든 학벌도 인맥도 모자란 비주류인 데다가, 김정환의 친일 논란도 앞장서서 까발린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수용했다니.
비대위원장이 고작 몇 개월짜리 임시직이라고 해도, 당을 좌지우지할 최고 권위자였다.
심지어 정기 전당대회까지 맡아서 진행할 텐데.
그럼 뭘까?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그렇게만 생각하는데, 장 의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또한 조성현 의원님은 재작년 전당대회부터 비계파(非系派)를 외치며 당의 혁신에 앞장 선 분으로…….”
그러다 문득 뒷목이 서늘했다.
이제 알았다.
왜 조 의원을 비대위원장으로 추대했는지.
물론 장 의원의 더러운 속내까지 아는 건 불가능했지만, 그의 행동이 뜻하는 바를 추측하는 건 불가능한 게 아니었다.
그의 최측근으로 수발을 든 게 무려 8년이었다.
그것도 단순 사무보조가 아닌, 추잡하고 더러운 일들이었다.
이 정도는 눈치로 알아야 했다.
칼잡이로 다시 쓰려는 것이었다.
내가 임청학 의원을 칼잡이로 쓰려고 마음먹었듯이.
“하…….”
헛웃음이 나왔다.
그도 조 의원을 앞세워 반대파를 쳐 내려는 것이었다.
대선 후보인 김정환을 물 먹이는데 앞장섰던 훌륭한 칼잡이니까.
조 의원을 이용하려는 게 분명했다.
그것 외에는 조 의원을 비대위원장으로 앉힐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거기까지였다.
그가 누구를 베려는 것인지는 알기 힘들었다.
어디 적이 한둘인가?
어쩌면 당권을 노리는 신 의원의 뒤통수를 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 머리를 박살 냈듯이.
기회가 되면 조 의원을 만나서 떠봐야 될 일이었다.
그런데 왠지 단상에 오르는 조 의원의 시선이 싸늘했다.
나한테 감정 있나?
아니면…….
* * *
단상에 나간 조성현은 감사 인사 이후에 원고 낭독을 시작했다.
미리 준비된 것이었다.
신경배와 장세룡, 둘과 합의한 내용의 일부였다.
“오늘부터 당 쇄신과 보수의 혁신 작업에 이 한 몸 바쳐서…….”
그렇게 원고를 낭독하며 드문드문 고개를 들었는데, 유독 예리한 시선 하나와 마주쳤다.
윤수혁.
제대로 마주하고, 대화한 번 해 본 적이 없는 초선 의원.
그러나 조성현도 윤수혁을 잘 알았다.
단순하게 업적이 알려지고, 유명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들은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며칠 전.
장세룡이 그를 찾아왔었다.
“비대위원장이 되면 가장 먼저 골라낼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슨 소립니까?”
조성현이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대뜸 던진 말을 청탁이나 부탁이라고 여긴 탓이었다.
더구나 장세룡은 자신이 타파하고자 하는 계파 정치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비록 비대위원장 추대를 약속 받고, 당내 혁신 작업에 협조하겠다는 합의를 했지만.
어쨌든 편한 관계가 아니었다.
장세룡도 그 사실을 인식하고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비리 의혹 리스틉니다, 찬찬히 보세요.”
그러면서 내민 서류 봉투.
그 안에 담긴 것은 사법처리까지 생각해 볼 수 있는 비도덕한 내용이었다.
다해서 서너 명의 자료.
“……!”
그 안에는 윤수혁도 있었다.
다름 아닌 후원금 쪼개기 납부 의혹.
예상 금액이 무려 7,200만 원이었다.
거의 8천만 원에 달하는 거금.
법적으로 1인이 낼 수 있는 기부금 한도는 연간 2,000만 원 이하였다.
한마디로 위법 행위.
물증은 없지만 정황상 후원금을 제공한 사람이 윤수혁이었다.
기부금을 수수한 의원들은 무려 이십여 명.
자료를 확인한 조성현이 장세룡을 쳐다봤다.
섣불리 믿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자료까지 믿지 못하거나 무시할 순 없었다.
“확인은 해 보겠습니다.”
대답한 조성현이 가까운 의원 몇에게 물어서 사실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의혹 중 일부가 어렵지 않게 확인 되었다.
그러나 정황 뿐이고, 물증이 없었다.
돈 받은 의원들이 윤수혁을 팔아넘기겠다고 증언할리 없으니.
이윽고 원고 낭독을 마친 조성현이 단상에서 내려왔고, 윤수혁의 곁을 지나갔다.
그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 있었다.
장세룡은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다가 미소를 머금었다.
‘공격수가 알아서 잘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