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19. 대선 (2)
2012년 12월.
삼자구도의 선거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보수를 대표하는 새한국당의 신경배.
진보 정당의 거두 황택근.
새정치를 표방하는 이민수까지.
저마다 뚜렷한 색깔을 가진 후보들의 선거 벽보가 전국에 뿌려졌고, 수많은 지지자들이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5일인 수요일에는 대선 후보 세 명이 모인 첫 TV토론도 있었다.
토론은 신 후보의 말마따나 당권을 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연히 모르고 보면 전부 좋은 말이니 상관없겠지만, 이미 ‘비대위 체제’라는 말을 들은 상황에서 저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만은 않았다.
기본적으로 워딩이 교묘했다.
특히 TV토론 끝 무렵의 마지막 발언이 그랬다.
- 불미스런 일로 흔들린 새한국당의 구심점이 되겠습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보수로 거듭나겠습니다! 저 신경배가 국민 여러분께 약속드리겠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여기에는 흔히 쓰이는 승리나 패배, 대통령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대선보다는 전당대회 같았다.
선거 운동은 더 속보였다.
선대위에서 의원들에게 보낸 단체 문자부터가 그랬다.
[총무국 알림 - 비용 영수증 처리 필수]
뭐든지 다해야 한다는 그런 악착같음과는 동떨어진 문자였다.
이건 이기기 위한 전략이 아니었다.
효율적인 당 운영이었다.
선거 이후의 책임론을 피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
다음을 노리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이 되면 운이 좋은 것이고, 패배해도 책임론에 휩쓸리지 않게 준비하는 것이었다.
나도 그렇게 행동했다.
쓸데없이 자금을 낭비하거나, 열 올리지 않고 적당하게 움직였다.
그래서 강북구 유세나 지역 유지들 만나는 것도 적정선을 지켜가면서 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어깨띠를 두르고, 빨간색의 단체복을 입었다는 것.
그 외에는 없었다.
그리고 나중에야 알았다.
신 후보가 말했던, 결탁한 당 지도부가 장 의원이라는 것을.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 이름 자체가 불쾌한 데다가, 무슨 꼼수가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물 먹이려는 목적으로 나를 영입하는 게 오버긴 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었다.
일부러 나를 골랐다면.
거기서 시작된 생각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나를 감시할 목적이거나 아래에 두고 조종하길 원해서, 혹은 허물이 생기면 내게 덮어씌우기 위해서 등등.
장 의원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8년 가까이 ‘살인’을 입에 담지도 않더니, 내 머리를 깬 장본인이 아니던가?
그렇게 딴생각을 하는 사이, 영석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착했습니다, 의원님.”
강북구의 유세장 중 한 군데였다.
차에서 내리니, 유세차량 뒤에 있던 당직자 하나가 내 쪽으로 달려왔다.
“오셨습니까, 의원님.”
“예, 지금 바로 올라가면 될까요?”
“그러십시오, 잠시 노래하고 댄스 중단시키겠습니다.”
쉰 정도 된 당직자가 다시 꾸벅 허리를 접었다가, 유세 차량으로 달려갔다.
그사이, 조수석에서 내린 박 보좌관이 준비한 원고를 가지고 왔다.
“밑줄 친 부분은 꼭 언급해 주셔야 합니다.”
당에서 전체적으로 뿌린 공문에 포함된 단어였다.
국민이 그렇게 원하는 ‘변화’, 그리고 새한국당 지지자들이 바라는 ‘보수’라는 키워드.
그게 잘 버무려져서 원고 안에 녹아 있었다.
“고생하셨어요, 보좌관님.”
“저보다는 의원님께서 더 고생하실 것 같습니다. 그거 다섯 번은 더 읽으셔야 합니다.”
“저기 춤추시는 분들만 하겠어요? 저분들 간식이나 식사 좀 부탁해요.”
“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박 보좌관이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원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공직선거법 제135조에 자원봉사자에게 수당․실비 외의 이익을 제공할 수 없게 명시되어 있었다.
별도의 밥값과 간식 같은 것들.
물론 그건 선거캠프 관계자가 추가적인 대가로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시민단체나 지인을 동원하면 편법으로 간식이나 식사 정도는 해결이 가능했다.
그걸 박 보좌관이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리고 박 보좌관이면 그 정도는 알아서 할 융통성과 눈치가 있었다.
애초에 성격이 좋은 편이었고, 도우미가 나오는 룸살롱까지 편하게 가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것도 시기와 때를 가리며 조절했고, 올해는 내 눈치를 보느라 거의 가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알아서 잘 했다.
나는 50대 당직자의 안내를 받아 개조한 유세 차량 위로 올라갔다.
강북구에서 가장 핫한 유세장이어서 사람들이 꽤 많았다.
몇몇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봤지만, 다들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나는 댄스가 멈추고, 노랫소리가 줄어들 무렵 마이크를 켰다.
“안녕하십니까, 강북구 주민 여러분! 새한국당 국회의원, 강북구의 아들! 윤수혁입니다!”
가장 먼저 자원봉사자가 바람을 잡듯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이어서 근처에 서 있던, 그리고 제 갈 길을 가던 사람들이 따라서 박수를 쳤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본 것이었다.
그래야 했다.
내가 지역구에 쏟아부은 게 벌써 수억 원이 넘어가고 있었다. 공공시설 개선과 각종 단체 기부, 후원금으로.
강북구에서 완장 좀 차본 사람이면 나를 알아야 했다.
그러라고 쓴 돈이었으니까.
* * *
새한국당 중앙당의 총무국장과 대면한 신경배가 테이블 위의 서류를 가는 눈으로 쳐다봤다.
숫자들이 표 안에 가득 차 있었다.
돋보기안경을 쓰고 있던 신경배가 총무국장을 올려다봤다.
“간이 영수증까지 받았나?”
서 있던 총무국장이 움츠러들듯 대답했다.
“……네, 후보님.”
“총무국장,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래?”
부드러운 말투에 가시가 박힌 듯 따가웠다. 총무국장이 멈칫했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시도당 위원장들 반발이 너무 셉니다, 거기 지역 대의원들 항의 전화가 하루에 이백 통씩 와서 총무국 전화기가 거의 마비됐었습니다.”
그 말에 신경배가 미간을 구겼다.
“어느 시도당이야?”
“정확한 건 메모한 것을 확인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 곳이라는 의미.
신경배의 눈가에 못마땅한 주름이 잡혔다.
이런 상황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출마 과정부터 기존 후보의 낙마로 시작해서 잡음과 분쟁이 있었다.
간신히 소란을 잠재우고 협의 끝에 대선 후보로 나왔는데, 타 계파의 시도당에서 불만까지 표시하다니.
기분이 언짢을 수밖에 없었다.
“반발한 시도당 위원장들 명단하고 메모한 것도 싹 가져오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얼마나 남겠어? 예상 잔액이 5천이라면서?”
“아, 네. 그래도 저번 대선보다 3배 정도 더 많이 남은 겁니다. 많이들 절약하고는 있습니다.”
“그런 정신이면 안 돼, 이럴 때 일수록 더 아끼고 아껴야지.”
“맞습니다, 최대한 절약하겠습니다.”
총무국장이 고개 숙이며 답하자, 신경배가 나가보라는 듯 손짓했다.
“올 때 후원금 VIP 명단도 가져와.”
“네, 알겠습니다.”
나가던 총무국장이 문 앞에서 다시 고개 숙였고, 신경배는 침대에 누우려다가 멈칫했다.
후원금 생각에 윤수혁이 떠오른 것이었다.
대기업 일가 출신의 정몽준을 제외하고 원내 공개재산 최고 의원.
이미 상생의 약속까지 한 상태였으니, 신경배는 망설임 없이 번호를 눌렀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신경배가 윤수혁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 여보세요.
“나 좀 보지, 여기 중앙당사야.”
- 지금 말씀입니까?
“전화로 할 말은 아니라서 그래, 바쁘나?”
- 유세장 가던 길이었습니다. 연설 끝나고 가면 30분 뒤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 숙직실에서 한숨 잘 테니까 곧장 오게.”
-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신경배는 붉은 넥타이를 넉넉하게 풀고는 1인용 침대에 몸을 뉘였다.
서울 전역을 쏘다닌 그가 금세 잠에 빠져 들었다.
* * *
똑똑.
세 번째 노크였다.
대답이 없길래 손잡이를 돌렸고, 조용히 밀고 들어갔다.
1인용 침대에 누워 있는 신경배 후보가 보였다.
한숨 잔다더니, 제대로 늘어진 게 아주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가, 협탁에 놓인 종이 몇 장을 발견했다.
포스트잇이 딸린 문건이었다.
몇 줄 읽어 내려가는데, 익숙한 이름들이 보였다.
경남도당과 대구광역시당, 경기도당 위원장들 이름.
이게 뭘까 싶었는데, 포스트잇을 보고 알았다.
반발자들이었다.
경남도당이나 대구광역시당은 친김계의 잔존 세력이 남아 있었고, 경기도당은 다른 계파였다.
충분히 반항할 만했다.
남은 시도당은 아무래도 중도를 흉내 내거나, 줄타기를 하고, 이리저리 눈치보고 있을 것이었다.
간을 보다가 힘쓰는 쪽에 붙는 게 신상에 이로울 테니까.
김정환이 그래서 소수의 친위대로 시작해서 과반을 넘어가는 영향력을 가졌었다.
그렇게 뒷장까지 확인하려던 찰나, 신 후보가 부스럭거렸다.
“윤 의원 왔나?”
“예, 후보님.”
방금 온 듯 의자에 앉자, 신 후보가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오후에 또 스케줄 있나?”
“유세장 가야 됩니다, 조금 늦추긴 했는데 1, 20분 정도 여유 있습니다.”
“나도 간단히 말할 거야, 그게 중요한 얘기라 그렇지.”
이제 첫 임무라도 내릴 건가?
내심 긴장하는데, 신 후보의 목소리에 매가리가 풀렸다.
“자네 돈 있나?”
“……있긴 합니다.”
“얼마까지 줄 수 있나?”
그의 직설적인 말에 멈칫했으나, 나도 똑같이 대답했다.
이 사람 앞에서는 순진한 것보다는 아는 체 하는 게 나았다.
“얼마까지 바라십니까?”
“그럼 자네가 듣고 계산해 봐, 이게 얼마짜린지.”
무슨 말인가 싶어 바라보는데, 신 후보의 늙은 입가에 웃음기가 어렸다.
어느새 잠기가 물러간 모습이었다.
“지명직 최고위원, 상임위 사보임. 더하면 얼마짜리 같은가?”
비쌌다.
일단 최고위원은 당의 지도부였다.
당 대표 한 명, 선출직 최고위원 넷과 지명직 두 명.
그 일곱 명으로 이루어진 새한국당 지도부의 일원이 된다는 소리였다.
행정, 인사, 당정 등의 모든 일에 개입할 수도 있고, 주요 당론을 논하며, 당무를 처리할 권한과 능력이 있는 자리.
그게 최고위원이었다.
특히 공천이나 지역구, 상임위 분배, 예산 등의 중요 안건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다.
물론 전당대회로 선출된 최고위원과 달리 지명직이 훨씬 약하긴 했지만.
그래도 지도부는 지도부였다.
총 300개의 의석수 중 152석을 차지한 원내 제 1당의 핵심.
비쌀 수밖에 없었다.
상임위 사보임도 마찬가지였다.
사임과 보임을 합쳐 부르는 말인 사보임은 쉽게 말해 다른 상임위로 옮겨 준다는 뜻이었다.
한마디로 좋은 상임위를 고르라는 말.
지역구에서 반기는 국토위나 기재위, 예결위 등등 고를 만한 게 많았다.
어쨌든 둘 다 고가의 품목들이었다.
내게 충성을 요구하는 걸까, 아니면 재산을 탈탈 털어가려는 걸까?
나는 잠깐을 고민하다가 다른 말을 꺼냈다.
“상임위 사보임 대신에 다른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국방위도 상관없었다. 내가 가진 돈으로만 웬만한 소규모 사업은 처리가 가능했다.
지금 필요한 건 다른 것이었다.
친김을 밀어 버리고, 장 의원의 목을 졸라 버릴 힘.
한마디로 당내 영향력.
내 말에 언제 잤었냐는 듯 신 후보가 눈을 빛냈다.
“말해 봐.”
“경기도당 위원장 주십시오. 그게 상임위 사보임보다 저렴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현 경기도당 위원장은 반발자로 교체될 사람일 테니, 그 자리에 내 사람을 넣을 생각이었다.
경기도당 위원장이면 경기도의 국회의원들보다 한 수 위였다.
당원 입당부터 시작해서 웬만한 업무에 간섭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시도당 위원장에게는 지역 기초의원이나 선출직 공무원에 대한 공천권이 있었다.
내 말에 신 후보가 고민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넨 강북구에 사무소 차렸지? 경기도당은 다른 사람 줄 모양이구만.”
“그렇습니다.”
“흐흐, 딴사람까지 챙길 줄 알아, 속도 깊은 게 마음에 드는구만.”
“……감사합니다.”
“감사는 됐고, 총무국장이랑 얘기 좀 나눠봐. 그 친구가 계산기 두드리니까.”
얼마나 될까?
총무국장이면 당직자 중에 끗발이 좀 있는 사람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기재위에 있는 웬만한 초선이 함부로 못할 정도.
기본적인 업무 능력이 뛰어나기도 한 데다가, 당정에 밝아 당리당략에 대한 이해도 빨랐기 때문이었다.
줄타기, 눈치의 선수들이었다.
이윽고 신 후보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벌써부터 계산기 두드리나? 가면서 하지, 바쁘다면서?”
“그럼 가보겠습니다.”
내 속내를 빤히 안다는 듯 웃는 그에게 고개 인사하고 중앙당사를 나왔다.
내 양손에 최고위원과 경기도당 위원장이 있다는 사실에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둘 다 아주 비싼 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