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16. 새로운 역사 (2)
잠깐의 정적.
모두가 굳어 있던 와중에 장세룡 의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후보님, 괜찮으십니까?”
그러자 원내대표와 최고위원도 급하게 ‘후보님’을 찾으며 고개 숙였다.
나도 반 박자 늦게 고개 인사를 했다.
김정환 후보는 야당 인사하고 먼저 접촉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여길 왔지, 하는 생각까지 할 무렵.
문가에 서 있던 김 후보가 방을 쓱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셋이서 초선 데려다가 군기 잡는 거요?”
“아유, 아닙니다.”
최고위원이 냉큼 대답하자, 원내대표가 뒤따라서 경위 파악 중이었다고 얼른 변명했다.
고개를 끄덕인 김 후보가 이내 나를 향해 턱짓을 했다.
“저 친구 좀 따로 보려는데, 괜찮겠지요?”
그 순간 아, 하는 소리가 올라오다가 말았다.
유일한 변수가 있었다.
바로 나.
일을 계획했고, 계획이 예상대로 흘러간다고 여겨서 잠깐 놓쳤지만, 나는 정계의 돌풍 같은 존재였다.
사진을 몇 군데에 흘리고 선공의 기회도 넘겨줬지만, 김 후보는 아마도 총알받이 뒤를 내다봤을 것이었다.
거기엔 내가 있었을 테고.
그래서 나를 찾아왔을 것이었다.
어차피 수습은 며칠 걸릴 테니까, 당장의 용건을 먼저 처리하려 하겠지.
어느새 최고위원이 곁에 있는 방주인, 원내대표를 향해 곁눈질을 했다.
“그러면 자리를 좀 비켜드릴까요?”
시선을 받은 원내대표가 뒷말을 이었다.
“잠깐 나가 있겠습니다, 후보님. 한 5분이면 되겠습니까?”
“잠깐이면 돼요, 다들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후보님.”
그들이 고분고분 일어섰다.
아직도 김 후보를 대선 후보로 받들어 모시는 것처럼 보였다.
단순히 친김계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대선이 이대로 계속될 거라고 믿는 걸까?
둘 다겠지.
기자회견을 마친 지 이제 한 시간 남짓 지났을 뿐이었다.
이들은 파급력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김 후보가 해 온 더 많은 매국 행위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에게 짜증만 냈다.
겁박과 협박을 해 대도 모자랄 판에, 김 후보의 말처럼 군기잡기를 해 대는 것이었다.
그저 부인하고 무시하면 이 정도 사태는 넘어갈 수 있으리라 믿고 있을 테고.
뭐, 그럴 만도 했다.
대중은 정치를 좋아하지 않았고,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사회 유지들이 침묵했고, 오히려 김 후보의 역성을 들어 주는 완고한 지지층도 꽤 있었다.
4대 일간지를 자처하는 대형 신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크게 의식하지 않는 것이겠지.
오로지 당사자인 김 후보만이 사태를 인지하고 있을 것이었다. 스스로가 한 행위가 있으니까.
이내 셋이 원내대표실을 나가고, 김 후보가 들어왔다.
덜컥.
문이 닫히고, 맞은편에 그가 앉았다.
먼저 입을 열지 않았는데, 김 후보도 마찬가지로 가만히 있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넨가.”
묘한 눈이었다.
무슨 말인가 했는데,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름이 윤수혁이라고…… 기억해 두겠네.”
뜬금없는 소리에 대꾸도 차마 못하는 사이.
그가 벌떡 일어섰다.
나도 덩달아 일어섰는데, 인사도 없이 김 후보가 문고리를 잡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까?
그러나 이미 문이 열렸다.
나는 그가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개가 저어졌다.
대통령이 될 뻔한, 그리고 했었던 사람의 속내까지 이해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는 대통령을 사임한 뒤에도 칩거 생활만 했었다.
당의 중진들이 찾아가거나, 김 후보가 정계의 흑막이라는 근본 없는 루머가 돌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이윽고 원내대표 일행이 복도까지 김 후보를 배웅하고 난 뒤였다.
나는 들어서는 원내대표를 보며 몸을 일으켰다.
“……부득이하게 먼저 일어나야 될 것 같습니다.”
방금 다녀간 김 후보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긴 것처럼, 조금 애먹었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기회가 온 김에 여길 나갈 생각이었다.
원내대표도 물을 게 남았고 아직 질책하고 싶겠지만, 별 수는 없을 것이었다.
다녀 간 사람이 김 대표였으니.
“……가 봐, 경거망동하지 말고 행실 조심해. 일 있으면 보고부터 하고.”
원내대표의 말에 얼른 고개 인사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이내 몸을 돌려서 그를 지나쳤다.
이제 정국에 변화의 물결이 일 것이었다.
* * *
2012년 10월 중순.
김정환 후보의 친일 논란과 윤수혁의 기자회견으로 국회에도 돌풍이 불었다.
예정대로 진행되던 국정감사가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 탓에 웬만한 국정감사 현장에서는 김정환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었다.
우선 각 상임위에서는 김정환이 지난 세월 동안 거쳐 간 상임위와 일본의 관계를 파헤쳤고, 한일의원연맹에 소속된 의원들은 그간의 교류 내용을 확인했다.
정부 견제와 비판, 행정부를 감사하는 일은 뒤로 미뤄진 것이었다.
야당의 뒤에 선 신문사에서는 자극적인 소재를 주워 바쁘게 지면을 채웠다.
[김정환 후보 기재위 시절에도 일본과 접촉한 사실 있어]
[김정환 후보, 정보위 소속 당시 자민당 의원들과 비공개 좌담 가져]
[까도 까도 나오는 김정환 후보의 과거, 친일인가 매국인가?]
점차 기사 내용이 공격적으로 변했다.
이미 여야 의원들이 상대 후보에 대한 흠집 내기를 시도하고 있긴 했지만, 친일이 더욱 좋은 공격 소재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광복 전후가 아닌 21세기의 친일이었다.
그렇게 김정환에 대한 공격이 줄을 잇던 무렵.
카메라 앞에 김정환이 섰다.
사진이 유포된 지 보름이 좀 넘었을 때였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최근 일부 언론 보도에 대한 입장을 말씀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린 기자들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김정환을 쳐다봤다.
후보 사퇴설이 미미하게나마 돌고 있던 때였다.
마침 자리한 최측근이나 캠프 요인들도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7년차 베테랑 기자는 말이 멈춘 틈을 타서 재빠르게 타이핑을 했다.
[(속보)김정환 대선 불출마 선언]
대선 불출마일 가능성을 미리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사이, 김정환의 말이 이어졌다.
“그동안은 정확한 사실 관계 파악을 위해 언론 보도를 일절 부인하였으나, 내부 확인 결과 밝혀진 사실이 있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정환이 선 단상 아래에 줄지어 선 캠프 참모들이 흙빛의 안색을 어쩌지 못했다.
기자들은 그들이 긴 시간 눈을 감는 동안 플래시를 터뜨렸다.
“제 보좌관은 언론에 공개된 대로, 자민당 중의원 고토 요시히로를 만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날조된 사실과는 다르며…….”
그렇게 변명과 사실이 이어졌다.
감싸기도 하며 스스로를 비판하는 말까지 나왔다.
성명문 내용에 기자들이 차차 긴장감을 높이며 김정환을 바라봤다.
본능적으로 중요한 말이 나올 것임을 인지한 것이었다.
이윽고 김정환의 입이 열렸다.
잠시 머뭇거리다 나온 목소리가 한없이 무거웠다.
“……그 모든 잘못에 대해서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과드립니다. 또한 모든 책임을 지고 대선 출마를 포기하겠습니다.”
플래시가 일시에 단상을 덮쳤다.
그러나 허리가 숙어지는 와중에, 김정환에게는 미련이 남아 있었다.
‘혹시‘라는 글자에서 시작된 작은 생각.
그것은 당선이 된다면, 그렇게만 되면 모든 것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어렴풋한 상상이었다.
분명 이 사태의 규모와 파급성을 가장 잘 알았고, 이미 야당과 합의까지 끝낸 상태였지만, 김정환은 종장에 다다라 마음이 흔들린 것이었다.
정계의 권력자로 수십 년, 대선 후보까지 했어도 사람은 사람이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코앞에서 놓쳤다는 생각을 차마 내려놓지 못했다.
‘왜 하필 지금…….’
김정환의 머릿속에 상념이 피어올랐다.
일본과의 사적 교류는 벌써 몇 해나 이어져 온 일이었지만, 그게 상납과 대가의 성질로 변질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해 봤자 몇 개월.
그러나 그 안에 포함된 내용은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알려진다면 길가다 몽둥이로 얻어맞고 머리가 깨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전에 검찰에 구속되거나.
그러나 김정환은 하필 지금이라는 생각에, 오랫동안 허리를 피지 못했다.
정수리로 쏟아지는 플래시를 그대로 감내할 뿐이었다.
단상 아래에 선 십여 명의 캠프 핵심 요인들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줄을 잘못 섰네…….’
이유가 달랐을 뿐.
그들도 빈 정수리로 쏟아지는 플래시를 받았다.
* * *
충남 계룡시, 공군본부.
국정감사를 위해 정리된 대회의실에 들어서는데, 분위기가 상당히 어두웠다.
어제 있었던 김 후보의 대선 불출마 선언 때문인 모양이었다.
의원들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야당도 다르긴 했지만, 예상치 못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럴 만했다.
흔한 네거티브 전이 좀 더 지저분해졌고, 힘겨워졌다고 생각했을 게 뻔했다.
선거판이 다 그 모양이었으니까.
조금만 버티면 풍랑을 이겨 내고, 어떻게든 대선을 치를 수 있을 거라도 믿었을 터였다.
그랬기에 여덟 명의 새한국당 의원 중에 괜찮은 안색은 서넛뿐이었고, 나머지는 먹구름이 낀 것처럼 보였다.
친김계이거나, 친김계에 손을 뻗었던 의원들이었다.
이윽고 국방위 위원장 임청학이 마이크 가까이 입을 댔다.
“의석을 정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헌법 제61조, 국회법 제 127조와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공군본부 등 5개 기관에 대한 국정감사를 실시하겠습니다.”
땅, 땅, 땅.
세 차례의 타봉이 이루어지고, 임 의원이 말을 이어 갔다.
공군이 국방에 기여한 노고 등등에 대한 형식적인 감사 인사가 있었고, 금세 공군 참모총장이 증인선서까지 했다.
그렇게 참모총장 이하 간부들의 업무 보고가 이어졌으며, 질의가 시작됐다.
질의는 어제와 달랐다.
‘김정환‘이라는 이름이 빠진 것이었다.
웬만한 상임위를 다 거쳐 간 김 후보 때문에, 국정감사 내내 김 후보가 언급됐었다.
피감기관 장(長)은 난데없는 김 후보의 이름에 난색을 표하고, 알지 못한다거나 확인해 보겠다는 대답만 했었고.
그러나 지금은 평범한 국감으로 돌아와 있었다.
뒤에서 얘기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평범하다고 해도, 국감은 국감이었다.
과거의 비리 내역이나 공군의 불명예스런 사건 등을 언급하며 공군참모총장을 괴롭혔다.
내 차례도 왔다.
“……다음은 존경하는 윤수혁 위원님 질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 비례대표 출신 윤수혁입니다.”
나를 보는 의원들의 시선이 가지각색이었다.
친김계의 앞잡이였던 몇몇 의원이 나를 배신자라고 불렀고, 중간층은 간을 보며 다가오다 말았으며, 비주류는 나를 반겼다.
당연히 야당도 좋아라 하긴 했고.
무엇보다도 대외적인 여론이 괜찮았다.
배신자 같은 말을 피하기 위해 조성현 의원 같은 샌드백을 미리 세우고 기자회견을 조심스레 한 덕분인지, 김사모 같은 단체로부터 욕도 적게 먹었다.
간간이 항의 전화가 있긴 했지만, 옹호론이 대세여서 크게 문제 삼을 만한 것도 없었다. 애초에 진상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었다.
나는 의원들을 한 차례 둘러보고, 공군참모총장을 향해 질의하기 시작했다.
박 보좌관과 송 비서관이 준비해 준, 그리고 관례상 피감기관에 한 부씩 보내 준 내용이었다.
적절한 공격과 적절한 칭찬.
질의 끝에 참모총장이 엷게 미소 지었다.
저번에 국방부 차관을 놀래준 깔깔이 비리 같은 깜짝 쇼가 없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이윽고 다음 순서로 질의가 넘어갈 무렵.
안주머니의 진동에 스마트폰을 꺼냈다.
[(단독)새한국당, 무소속 대선 후보 이민수에게 러브콜]
제일일보 온라인 기사 링크였다.
클릭했다가 헛웃음을 뱉을 뻔했다.
아직 해단하지 않은 대선캠프에서 흘러나온 말을 기사화 한 것이었다.
그것도 핵심 간부의 얘기.
이건 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고개를 저으면서 품에 스마트폰을 넣었다.
하나를 정리하니, 다른 하나가 사고를 치는 건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