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50화 (50/191)

# 50

16. 새로운 역사 (1)

서울, 프레스센터.

19층의 기자회견장에 사람이 가득 찼다.

말 그대로 바글바글했다.

100명에 이르는 기자들뿐만 아니라, 정당인과 대관 담당 기업인까지 와 있었다.

연설대 앞에 서자마자, 순식간에 수십 번의 플래시가 명멸했다.

가슴 떨렸다.

긴장일수도 있고, 기쁨일수도 있는 떨림이었다.

연평도 포격사건과 국방부 비리 폭로 이후 오랜만이었다.

아니, 오늘 같이 준비된 대규모의 스포트라이트는 처음이었다.

이전에는 갑작스러웠고, 규모도 이보다 작았었다.

삼각대에 설치된 방송사의 ENG카메라며 수십 대의 카메라 렌즈, 그리고 당장이라도 원고를 송고할 듯한 노트북들.

그 모든 것들이 사람만큼이나 많았다.

옆에 선 박 보좌관은 나를 불안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그가 입을 벙긋거렸다.

전화 옵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통화가 걸려오는 스마트폰을 내게 들어 보이기도 했다.

“그냥 두세요.”

나직하게 말하고 앞을 바라봤다.

전화를 건 이들은 선대위 간부들, 당 지도부 등등의 의원들일 것이었다.

초선 주제에 판을 벌려도 너무 벌렸으니, 놀라서 전화했겠지.

무슨 이유인지 알기 위해서, 그리고 나를 통제하기 위해서, 그 외의 이유로.

나는 잡다한 생각을 잠시 밀어내고 마이크를 켰다.

“아, 아.”

그 순간 기자회견장의 모든 시선이 나를 향했다.

카메라가 저격이라도 하듯 들렸고, 삼각대 뒤에 서 있던 카메라맨들이 뷰파인더를 확인했다.

나는 준비한 원고를 확인하고 정면을 바라봤다.

호흡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19대 국회의 구성원 윤수혁으로, 대한민국의 국민 윤수혁으로, 중대 발표를 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차라라라락!

운을 떼자마자 플래시가 터졌다.

기자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내가 발표할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해도, 중요하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어쩌면 내가 당의 공격수로 지명됐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아니면 해명을 위해 나왔거나.

기자들에게는 김정환 후보의 친일 논란에 대해 발표할 예정이라고만 말해뒀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 템포 쉬고, 좀 더 나직하게 목소리를 냈다.

“먼저 이번 발표는 누구의 지시도 아니며, 정치적 이해도 가미되지 않은 선공후사와 멸사봉공의 각오와 국가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통감해서 이뤄진 일임을 알려 드립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다시 수십 번은 터졌다.

기자들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다음 말이 중요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모양이었다.

작금의 정계는 아수라장이었다.

신민주당은 비난의 날을 세웠고, 시민단체의 항의와 투서가 새한국당을 향해 그야말로 쏟아지고 있었다.

김 후보의 대처 때문이었다.

부정.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당사자인 왕보좌관은 사직서를 내고 잠적했으며, 이에 대한 해명은 그 누구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게 목소리에 힘을 주고, 표정까지 굳혔다.

연기를 배우진 않았어도, 이런 타이밍은 알았다.

“그리고 저의 정치적 행보와 인간성을 믿어 주시고, 제게 이런 기회를 주신 국민 여러분께는 대단히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기회라는 말에 기자들의 눈빛에 불이 붙었다.

당장 달려들 것 같은, 훈련된 맹견들이 나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심장이 뛰었다.

두려운 게 아니었다, 기뻐서 그랬다.

금뱃지를 달고, 프레스센터에서 백 명의 기자와 수많은 카메라를 앞에 두고 설 수 있음에 감회가 새로워서.

이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려줄 차례였다.

“저는 김정환 후보의 친일 논란에 대한 제보를 받았습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일시에 폭발하듯 터졌다.

새하얀빛이 나를 덮쳐 왔다.

* * *

서울시 성북동.

자택 서재에 있던 김정환이 핸드폰을 확인하고는 얼굴을 굳혔다.

그의 곁에 있던 최측근들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남성이 급하게 서재의 TV를 켰다.

지상파 채널에서는 드라마 재방송이 한창이었는데, 밑에 빨간색 띠가 하나 붙어 있었다.

긴급 속보를 알리는 표시였다.

[속보 - 김정환 후보 친일 문건 공개]

리모컨을 쥔 이의 손이 급하게 움직였고, 화면은 보도전문채널로 바뀌었다.

문서 하나가 클로즈업 된 상태였다.

대한민국 국회의 워터마크와 일본 의회의 워터마크가 인쇄된, 온통 일본어로 가득한 서류.

김정환의 눈가가 떨렸고, 측근들이 김정환과 TV를 번갈아 살폈다.

“후, 후보님…….”

그중 가장 나이 지긋한 이가 김정환을 불렀다.

김정환의 안색이 급격하게 나빠진 탓이었다. 시선도 추락하듯 떨어지고 있었다.

“TV를 어떻게…….”

리모컨을 손에 쥔 남성의 말에 김정환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이 지친 듯 열렸다.

“일단 보자…….”

“알겠습니다, 후보님.”

남성이 얼른 리모컨을 내렸고, 이내 TV 화면을 바라봤다.

화면에서는 봉투에 담긴 일어 문서와 함께 번역 자료, 감정원의 지문감식 결과, 그 외의 추가 사진까지 나오고 있었다.

이건 운 좋게 얻게 된 증거 같은 게 아니었다.

김정환의 커넥션을 알고서 오랜 시간 동안 집요하게 파헤친 결과물이었다.

서재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김정환도, 최측근도 벙긋하지 못했다.

‘이걸 수습할 수 있을까?’

김정환을 다독이려 했던 나이 든 측근이 생각했고, 리모컨을 쥔 젊은 남성이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좃 됐다…….’

네 명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부인하고, 침묵하며 기다리던 방법은 더 이상 소용없었다.

차라리 네거티브를 위해 꼬투리를 잡고, 조잡하게 공격했다면 모르겠지만.

저 모든 것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리고 사실이었다.

저걸 부인이나 할 수 있을까?

김정환이 고개를 저었다.

공식적으로 수사가 시작되고, 야당과 언론에서 과거를 캐내기 시작한다면 뭐가 드러나도 드러날 것이었다.

자신과 함께 있는 세 보좌진만 조사해도 나올 게 많았다.

일본발 자금, 출국 내역, 사용 내역이 불확실한 현금, 그리고 어딘가에서 숨 쉬고 있을 증인들.

대선일이 코앞으로 올 것이었다.

당선만 되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으나, 과연 당선이 될 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건 개인의 비리나 실수 같은 게 아닌, 국민의 정서와 연관된 문제였다.

김정환이 길게 숨을 뱉었다.

그렇게 윤수혁의 기자회견이 이어질 무렵.

그의 입이 열렸다.

“여기까진가…….”

힘이 빠진 목소리.

포기선언이었다.

김정환을 바라본 최측근들도 금세 눈치챘다.

“……후보님.”

“죄송합니다, 후보님.”

“……죄송합니다.”

셋이 거의 동시에 김정환을 향해 고개 숙였다. 눈물만 나오지 않았을 뿐, 분위기에는 애도가 짙게 끼어 있었다.

그들도 김정환이 당선 되면 각종 수석이나 비서실장에 임명될 요인들이었다.

한마디로 감투도, 권력도 이젠 남의 일이 됐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아직 그들에게는 남은 인생이 있었다.

정치판과 비자금.

김정환은 뒷방 늙은이가 되겠지만, 조용히 물러나면 체면 유지는 하면서 살 수도 있었다.

이내 김정환이 말을 이었다.

“……이민수랑 황택근이한테 연락해, 좀 보자고.”

무소속 대선 후보 이민수과 신민주당 대선 후보 황택근.

젊은 남성이 고개 숙였다.

“알겠습니다.”

* * *

여의도, 국회.

기자회견 이후에 원내대표실로 불려 갔다.

4선의 당 대표와 3선의 장세룡 의원, 그리고 친김계의 최고위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셋의 시선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분위기가 살벌했지만, 고개 인사는 했다.

어쨌든 나는 예의 바른 초선의원이었으니.

“야! 너 제정신이야?!”

머리가 반 즈음 벗겨진 원내대표가 곧장 삿대질을 해 왔다.

“그런 제보가 들어왔으면 보고를 해야지, 무슨 생각으로 일을 저질러?”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 숙이자, 소파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던 최고위원이 연달아 입을 열었다.

“인기 스타 되니까 좋니?”

“아닙니다.”

“아니긴, 띄워 주니까 아주 날개 달린 거 같지? 카메라 플래시가 반짝거리니까 보석 같던?”

이 사람 국문과 출신인가?

듣고 보니 비꼬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하는 건 물타기와 줄타기가 전부겠지만, 말이라도 저렇게 할 줄 아니 최고위원이 된 것이겠지.

속에서 이리저리 떠오르는 생각과 말을 지우며, 비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잠잠히 들어 주는 척했다.

어차피 판세는 반김(反金)으로 넘어와 있었다.

김 후보에게 최초로 사죄를 요구한 조성현 의원을 시작으로, 국방위 위원장인 임청학 의원과 비주류, 비김계가 뭉치고 있었다.

오늘을 기점으로 임시 연합은 더 확대될 것이었다.

그렇다고 친김이 나약한 건 아니었지만,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김 후보는 곧 대선 후보직을 내려놓을 것이었다.

임기 1년 반이나 남은 대통령도 그만둔 사람이었고, 노회한 정치꾼답게 판단도 빠른 이었다.

여기서 더 나가면 대선에서 깨지고, 야당 등쌀에 시달리다 못해 수사까지 받게 된다는 걸 충분히 이해할 인간이었다.

지금 즈음 야당 인사들과 접촉하지 않았을까?

그사이, 원내대표와 최고위원의 헛소리가 끝나고 장 의원이 입을 열었다.

“한 번 드러나 보자, 이번에는 누구 뒤에 섰나?”

나를 떠보겠다는 듯한 말투.

빤히 쳐다보는 모습도 내 속내를 훑겠다는 시도로 느껴졌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내가 운을 떼자, 순식간에 세 사람의 시선이 바뀌었다.

“제보자가 절 믿어 줬다는 사실에 너무 들떠서…… 그래서 기자회견까지 연 것 같습니다.”

“뭐? 지금 그걸 말이라고…….”

원내대표의 못마땅한 소리가 바로 뒤따라 들려왔다.

장 의원은 끌끌거리며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이래, 윤 의원. 줄 서 봤잖아? 말해 봐, 여기 다 동지들이야.”

동지들.

최고위원은 탈당하고, 원내대표는 국무총리 인사청문회에서 탈탈 털려서 정치판의 뒤안길로 사라졌었다.

남은 건 셋 중에 장 의원뿐이었다.

역사가 바뀐 이상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보기에 동지는 셋에게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다.

이합집산.

그 정도가 괜찮았다.

뭐, 그래도 이 셋의 위세는 당분간 유지될 예정이었다.

친김계의 근위대 몇만 치명상을 입고, 나머지는 중상이나 경상, 가벼운 찰과상으로 끝날 테니까.

나는 조심하는 척, 대답했다.

“뒤에 설 수도 있지만, 앞에 설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아무리 초선이라도 그렇지, 왜 이렇게 천지분간을 못해? 외까풀이라 앞이 잘 안 보여?”

최고위원의 말이었다.

허접한 인신공격에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탈당했다가 다시 복당(復黨)했던 선두주자가 바로 이 사람이었다.

어렴풋이 기억을 떠올리다가 대충 고개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들이 내 발 아래에 있게 되면, 어떻게 나올까?

그때도 무게를 잡을까?

아니면 반말을 할까?

최고위원의 사과문을 기대하는 사이, 이들의 말이 이어졌다.

“하…… 그래서 뒷수습은 어쩔거야?”

“왜 말이 없어? 생각해 둔 거 없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

“참, 제보자는?”

셋이 연달아 말을 뱉었는데, 마지막 말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래, 제보자가 누구야?”

“…….”

대답하지 않자, 최고위원이 팔짱을 풀었다.

“제보자 이 바닥 놈이지? 아니면 보좌관들 나다니는 길목을 어떻게 꿰고 앉아 있어. 맞잖아? 제보자 누구야?”

최고위원의 말에 고개를 들었는데, 셋이 나를 같은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호기심, 분노 등의 온갖 게 섞인 눈빛.

잔뜩 달아오른 모습이었다.

여기에 찬물을 끼얹어야지.

“그건 말씀 못 드립니다.”

어차피 이 방만 벗어나면 상관없었다.

조 의원이나 임 의원이 나서서 나를 감쌀 것이었다. 그 둘이 아니더라도 나를 옹호해 줄 고 의원이나 동료 의원들이 꽤 있었다.

사회에서는 많은 시민단체와 지역 유지들이 내 편이었다.

기자들도 아직은 멀었지만, 곧 등을 돌릴 것이었다.

어느새 최고위원이 말을 이었다.

“같은 식구구나? 그래서 말 못하지? 니들 조간 모임 멤버야?”

고 의원을 주축으로 한 이십 여명의 친목모임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내가 제보자입니다, 그 말이 혓바닥을 어슬렁거렸다.

한 번 말해 볼까, 하는 욕구도 슬그머니 치고 올라올 무렵.

똑똑똑똑똑.

다급한 노크 소리에 문가를 쳐다봤다.

왠지 비서의 목소리도 얼핏 들리는 것 같았는데, 원내대표의 허락도 없이 문손잡이가 돌아갔다.

그리고 문이 벌컥 열렸다.

순간 움찔했다.

셋이 동시에 일어났고, 나도 반 박자 늦게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연 사람이 다름 아닌 김 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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