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15. 준비하시고, 쏘세요! (4)
9월 말, 국방위 위원들과 진해의 해군기지사령부를 다녀온 뒤.
나는 국방위 위원장인 임청학 의원과 독대했다.
미리 중요한 일이라고 언질을 준만큼, 그의 얼굴에서 긴장이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저번에 위원장님께서 언질이라도 달라고 말씀하셨던 거 기억하십니까?”
“기억 하지요. 오늘 할 말도 그런 폭탄입니까?
핵폭탄이라고 대답하려다가, 가만히 사진을 내밀었다.
“일단 이거 먼저 보시겠습니까?”
내 말에 임 의원이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과연 폭탄을 제대로 알아볼까?
나는 임 의원의 눈을 응시하면서 사진 몇 장을 건네주었다.
사진을 받아 든 그의 눈매가 좁아졌다.
이내 한참을 확인하던 임 의원의 혼잣말 같은 물음이 들려왔다.
“후보님 뒷조사 했나?”
“아닙니다. 저도 제보 받은 겁니다.”
그러자 여전히 사진을 보던 임청학 의원의 시선을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제보자가 누굽니까?”
“거기까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내 말에 임 의원이 입을 다물었고, 다시 사진을 봤다.
공항, 호텔 등지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에는 명확한 촬영 대상이 있었다.
일명 왕보좌관.
YS때부터 김정환 대선 후보의 최측근으로 활동했고, 지금까지 김 후보의 오른팔을 자처하는 인물이었다.
나이는 40대 후반에 보좌 경력은 20여 년.
그래서 왕보좌관이라는 별칭이 붙은 것이었다.
왕(王) 자가 붙은 만큼 왕보좌관에게는 그만한 권세가 있었다.
호가호위가 뭔지 보여 주는 사람.
사진 속에는 바로 그 왕보좌관이 있었다.
그는 사진 속에서 인천공항을 출국했고,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으며, 도쿄의 임페리얼 호텔을 드나들었다.
그렇듯 모든 사진에 그가 있었는데, 딱 한 장만 아니었다.
거기엔 다른 사람이 있었다.
왕 보좌관과 마찬가지로 40대 정도 되었을 남성.
어느새 임 의원도 그 한 장의 사진을 들어 보였다.
“이건 누굽니까? 일본인?”
역시 짐작은 하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김 후보가 친일파라는 소문도 은연중에 퍼져 있었다.
나는 임 의원의 눈을 마주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인 누굽니까?”
떨리는 그의 눈빛을 마주한 채, 나직하게 대답했다.
“자민당 중의원, 고토 요시히로입니다.”
고토 요시히로.
국회와 행정부를 조율하는 총리의 정무 담당, 그리고 자민당의 유력 인사.
“……!”
임 의원의 눈빛이 크게 출렁였다.
그도 아는 것이었다.
한일의원연맹의 안보외교위원회 간사직을 수행했던 게 바로 작년이었으니, 모를 수가 없을 터.
혼란스러움을 힘겹게 삼킨 듯 임 의원이 물어 왔다.
“……확실한 겁니까?”
사진이 진짜인지, 둘이 만난 게 진짜인지, 이중으로 묻는 것이겠지.
“확신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신민주당도 이걸 그냥 보고만 있진 않을 거라는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신민주당도 이 사진을 가졌다고요?”
임 의원이 놀라서 되묻기에 담담히 대답했다.
“제보자가 그랬답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내 말에 임 의원이 고심하듯 미간을 좁혔다.
그래봤자 결론은 하나였다.
김 후보를 적으로 돌리는 것.
그것 외에는 없었다.
이미 임 의원은 친김계와의 관계가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그게 16년 총선에서의 탈당, 이후의 분당(分黨)으로 이어질 예정이었고.
대립하는 것만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였다.
이윽고 임 의원의 입이 열렸다.
계산을 마친 모양이었다.
“윤 의원, 사람 모을 수 있겠어요? 뜻 맞는 소장파들, 아니면 잘 챙겨 주는 선배들 있지요?”
칼을 먼저 빼 들겠다는 신호.
내가 바라던 말이었다.
역시 17년 대선 후보로 나왔던 사람답게 빠릿빠릿했다.
나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예, 있습니다.”
“지지해 달라고 밑밥 좀 깔아두세요. 그리고 제보자 연결 됩니까?”
“될 겁니다.”
“제보자도 확보하세요, 그래야 우리가 선수라도 칠 수 있어요. 그리고…….”
임 의원이 말하다 말고 내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당황한 흔적이 있긴 했지만, 50대 초반의 연륜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작은 눈에서 나오는 그의 예리한 시선 끝에 목소리가 이어졌다.
“김정환 후보한테 먼저 안 갔습니까?”
“예.”
“이런 사진이면 김정환 의원실을 먼저 찾아가는 게 순서 아닙니까?”
윤수혁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사진이 공개되면, 김 후보의 친일 역사관과 친일파 소문은 기정사실화 될 겁니다. 선거는 이미 끝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명감에 휩싸여서 헛소리를 하는 것보다는 사리 판단하는 모습이 나았다.
적어도 이 사진이 가질 위력을 알려 줘야 했으니까.
어느새 임 의원이 다시 물어 왔다.
“그럼 왜 납니까?”
훌륭한 칼잡이니까, 라는 직설적인 말 대신에 돌려 말했다.
“원내에 의원님만한 분이 안 계신 것 같아서요.”
대답이 끝나자, 임 의원이 난데없이 웃음을 흘렸다.
우스운 생각이라도 난 건가?
짤막하게 조소를 흘린 임 의원이 이내 입을 열었다.
“윤 의원, 킹메이커 알아요?”
“……?”
너무 뜬금없는 소리에 보기만 했는데, 임 의원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윤 의원이 꼭 킹메이커처럼 말을 하네?”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킹메이커 보다는 킹슬레이어 가 어울리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나는 조심히 대답했다.
“……오해십니다.”
“하하, 해 본 말입니다. 그럼 일어납시다. 나도 내 사람들 챙겨야 되니까.”
그렇게 대꾸한 임 의원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났다.
언제 놀라고 당황했냐는 듯 보였다.
대권 후보까지 나갔던 사람이니, 역시 담력이나 속내가 보통 사람과는 다른 모양이었다.
이어서 나도 몸을 일으켰다.
이제 제보자가 되어서 신민주당으로 가야 할 때였다.
* * *
서울시장 박창일이 눈앞에 마주 앉은 윤수혁을 바라봤다.
조금은 당황스런 눈빛이었다.
‘이게 정상일까? 아니, 믿을 순 있을까?’
윤수혁이 소속 대선 후보의 추문을 직접 들고 왔다. 그것도 그냥 루머가 아닌, 낙마로 이어질 수도 있는 물증이었다.
그러나 달리 고를만한 선택지가 없었다.
저 사진을 가져야 했다.
선거는 이미 네거티브전이 시작된 지 오래였다.
애초에 오래전부터, 선거는 네거티브전을 포함하고 있었다. 지금의 네거티브전은 그나마 순화된 추세였다.
박창일은 사진을 내려다보며 윤수혁이 한 말을 떠올렸다.
‘이건 개인의 문제로 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 부탁 하나만 들어 주십시오.’
아직 부탁이 무언지 묻진 않았으나, 대가가 가볍진 않을 것이었다.
돈, 혹은 인사 문제 개입.
이런 것일 확률이 컸다.
박창일이 그에 대한 고민으로 입을 다문 사이, 윤수혁이 목소리를 냈다.
“아까 부탁은 청년정책위 활동을 서울시가 전폭 지원하고, 토론회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기사만 내주시면 됩니다.”
“……네?”
박창일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묻자, 윤수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기자회견 정도면 괜찮겠네요.”
“이, 이게 터지면 선대위 활동은 엎어지는 거 아닙니까? 이유가 뭐죠?”
“그냥 해 주세요. 말씀처럼 선대위 활동 엎어지면, 토론회든 전폭 지원이든 없던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윤수혁의 말대로였다.
논란이 터지면 모든 건 흐지부지되고 말 것이었다.
“…….”
박창일은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입을 다물고, 윤수혁의 태연한 얼굴을 바라봤다.
대선 후보의 치부, 거기에 이은 황당한 부탁.
납득할 수 없는 게 너무나도 많았지만, 박창일은 눈앞의 사진에 시선이 가는 걸 막지 못했다.
저것만 있으면 대선 판도를 뒤집는 게 가능했다.
탁자에 내려 둔 사진.
그 안에는 자민당의 중의원과 대선후보의 보좌관이 만났다는 증거가 있었다.
물론 사진 자체가 연출이거나 거짓일 확률도 있었으나, 박창일은 거기까지 신경 쓰진 않았다.
진위 감별과 별도로 사진을 언론에 흘리기만 해도 이슈가 될 것이었다.
대선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두 달이었다.
힘겨운 공방만이 이어질 게 뻔했다.
네거티브전은 그런 지저분한 싸움이었다. 불명확한 게 많았고, 수습과 변명 또한 많았다.
서울시장 선거를 직접 겪은 박창일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같잖은 말꼬리마저 물고 늘어지는 게 정치판이었고, 선거판이었다.
이윽고 박창일이 결단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답변을 드리면 됩니까?”
“오늘이요.”
“오늘은…… 음.”
박창일이 시간을 살피고는 침음을 흘렸다. 막 점심시간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사이 윤수혁이 생각났다는 듯 말을 달았다.
“대답은 기자회견으로 듣고 싶습니다.
“기자회견이라면…… 청년정책위 지원을 말하는 겁니까?”
“예, 당 말고 제 이름에 포커스를 맞춰서요.”
“……음, 그 정도는 가능합니다. 그럼 저도 회의를 해야 하니, 이만 일어나도록 할까요?”
박창일이 조급한 듯 몸을 일으키며 물었고, 윤수혁도 흔쾌히 일어났다.
“예,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 * *
며칠 뒤.
[초선의원 윤수혁, 정치판의 진정한 수퍼맨]
서울시의 기자회견이 열린 지 사흘 만에 실린 주요 일간지의 칼럼 제목이었다.
보자마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회원수 500명을 돌파한 내 팬클럽 이름이 ‘수퍼맨 윤수혁’이었는데, 논설위원도 그걸 안 모양이었다.
꼼꼼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난 한 달 동안 기백만 원이 넘는 식대를 받아먹은 것이겠지.
나는 엷어진 조소로 생각을 마무리 짓고, TV를 봤다.
- ……이 사진에서는 조작된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정상적인 인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입니다.
사진 전문가라는 사람이 나와서 내가 뿌린 사진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을 늘어놨다.
오늘 아침이 그 시작이었다.
정확히는 정론관에서의 기자회견.
신민주당의 대변인이 정론관에서 대선 후보 보좌관과 일본 중의원이 가진 비밀 만남을 폭로한 것이었다.
- ……이에 논란을 유발한 김정환 후보를 규탄하며, 김정환 후보가 직접 명약하고 소상하게 해명하길 요구하는 바입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얼마나 터졌던지.
언론에 흘리지 않은 걸 보니, 뒤에서 따로 확인을 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 덕에 나도 본회의 참석을 위해 국회에 출근했다가 회의실로 불려 갔었다.
선대위 간부 긴급 소집이었다.
당시 친일 행각을 확신하는 의원들과 임 의원의 선후배들이 확산 자제를 요구했다.
“일단 아니라고 잡아뗍시다.”
“일단은 신민주당이 네거티브 공격하니 그걸 구실로 삼아서…….”
“안 그래도 시끄러운데 사태 축소를 해야지, 무슨 대응을 하겠다는 겁니까!”
고성방가가 오가는 건 야기된 결과였다.
선대위의 긴급 회의가 개판이 됐었다.
옹호론과 비판론, 중도론으로 쪼개져서 의원들이 서로 말싸움을 했다.
나야 가만히 듣고 있기만 했었는데, 다행히 결론이 나긴 났다.
입단속.
그게 전부였고, 이튿날 임시의총에서 발언하는 걸로 선대위 회의는 끝났다.
물론 그건 선대위의 생각이었을 뿐.
이미 한 쪽에서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었다.
- 김정환 대선 후보는 보좌관의 자민당 중의원 접촉 사실에 대해 명명백백히 해명하고, 논란에 대해 사죄해야 합니다. 당의 초계파(超系派) 및 비주류 의원들은 모두 김정환 후보의 발표를 기다릴 것입니다.
지금도 그 영상이 보도채널에서 반복되는 중이었다.
이 주인공은 임 의원이 아니었다.
임 의원은 지난 며칠 동안 당 내에서 물밑 작업만 진행한 것으로 보였다.
방금 발언은 다른 칼잡이의 것이었다.
조성현 의원.
비주류 중에 비주류, 고고하게 초계파를 주장하던 사람.
2010년 전당대회에서도 초계파를 주장했다가 적은 표차로 최고위원에서 낙마했던 사람이었다.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으나, 어쨌든 상관은 없었다.
내가 기다리던 것이었다.
누구든 최초의 비난을 감수하고 샌드백의 역할을 대신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게 임 의원이 아닌, 조 의원이었을 뿐.
불이라도 붙은 듯 김정환의 수족을 자처했던 친김계 의원들이 들고 일어났고, 김정환 휘하의 단체들이 움직였다.
나는 TV 채널을 돌리며 불타오르는 정계를 바라봤다.
흐뭇했다.
그러나 오래 지켜보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검찰 수사가 언급되고, 국민들까지 나서게 되면 증언과 증거가 나오기 시작할 테니까.
그 전에 내가 나서야 했다.
나는 스마트폰을 들어서 박 보좌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박민푭니다.
“이번 주 안으로 기자회견 잡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