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47화 (47/191)

# 47

15. 준비하시고, 쏘세요! (2)

그날 저녁.

퇴근해서 내 오피스텔에 막 들어왔을 때였다.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안순익 고문]

화면을 보니 미소가 지어졌다.

그가 일본에 간 지 거의 한 달째였고, 통화는 보름 만에 하는 것이었다.

그때 전화 하면서 안 고문이 한 말이 있었다.

- 내가 뭐 하나 해갖고 다시 연락줌세. 관광 온 것도 아니고 국제 전화만 해 대니 민망하구만.

그렇게 말하고서 오늘 전화한 것이었다.

내가 지시한 일을 해결한 것일까?

아니면 뭘 했을까?

얼른 통화 버튼을 밀었다.

“여보세요.”

- ……날 세.

목소리가 무거웠다.

이건 일을 실패한 뒤의 어감과는 달랐다. 감당하기 힘든 일을 짊어졌을 때 나오는 어조였다.

놀란 뒤의 떨림, 고조가 느껴졌다.

예상대로 안 고문이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 서류들 찾았네.

단순히 찾아서 그랬을까?

내가 무당처럼 장소며, 사람이며, 문서를 맞춰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번역하셨군요.”

서류의 내용을 알지 못하면 저런 목소리가 나오기 힘들 것 같아서 물었다.

이윽고 안 고문의 옅은 숨소리가 스마트폰을 넘어왔다.

- ……했네.

“조심히 하셔야 할 텐데요.”

- 대학생들하고 재일교포 스무 명한테 문장 한 줌씩 나눠 주고, 번역한 거 글자 모아봤네.

그만하면 충분했다.

다만 안 고문이 심적 충격을 받은 게 이해되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는 주류에서 밀려나 아등바등 정치 인생을 보낸 사람이었으나, 어쨌든 수십 년을 정치판에서 보낸 장관출신의 경력자였다.

또한 내가 준 특급 정보로 돈을 쥐고, 국회에서 안면을 텄으며, 여러 단체장들과도 인사를 했다.

그래서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갖고 있던 서류 내용에 심각할 정도로 당황한 것이었다.

- 이게 참이라는 게지?

“예, 그것 말고 더 있습니다.”

- 후우…….

내 확언에 안 고문의 한숨이 넘어왔다.

다름 아닌 김정환 후보의 친일 행각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서류 자체는 김정환 후보가 한국에서의 업무를 일본에 보고하고, 일본한테 지시를 받았다는 증거였다.

모든 업무도, 모든 지시도 아니고 일부분이었으나, 이건 국민과 더불어 정치인들도 납득하기 힘든 사안이었다.

마치 일본인 사이에 주고받은 문서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가위바위보도 이겨야 하는 일본이 아닌가?

그런데 업무를 보고하고, 지시를 받다니.

국민 정서에 불이 붙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그 결과 국민은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모였고, 야당은 탄핵카드를 꺼냈으며, 여당은 옹호와 비판 속에 분당했다.

역사상 최초로 보수 정당이 분당했고, 끝으로 대통령은 사임했다.

이 모든 게 16년도나 돼야 일어날 일이었다.

나는 그 시기를 앞당겼을 뿐이었다.

당시의 언론보도로 웬만한 것들은 다 까발려진 상태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새 안 고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30분 뒤에 출국할 걸세, 인천공항으로 마중 나올 수 있는가?

“예, 마침 퇴근했습니다.”

- 고맙네, 내가 물어볼 것도 있고, 하고 싶은 얘기도 있어서 그래.

“알겠습니다,

- 그럼 끊겠네, 이따 보세.

속이 꿈틀거렸다.

기뻤다.

위원장 자리에 이은 일어 문서까지.

타이밍이 잘 맞아 떨어졌다.

사실 지원금도 없고, 내정자가 있는 청년정책위원회는 썩 좋은 게 아니긴 했지만.

어쨌든 이목 받기는 좋지 않은가?

나는 정장을 마저 벗고, 얼른 욕실로 들어갔다.

안 고문이 도착할 시간을 고려하면, 늦지 않게 샤워하고 나와야 했다.

퇴근 시간이니 차가 좀 막힐 것 같아서 영석이를 부를까하다가 말았다.

안 고문이 저렇게 나오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 * *

인천국제공항.

벤츠 조수석에 탄 안순익이 입을 열었다.

“이게 전부일세.”

인사보다 앞서 나온 말.

윤수혁은 안순익이 건넨 서류를 받아서 군말 없이 내용을 확인했다.

접은 자국이 역력한 인쇄물, 수기로 기록한 번역 자료.

확인을 마친 윤수혁이 굳은 안색의 안순익을 바라봤다.

“고생하셨습니다. 댁으로 가실 건가요?”

“그래, 가면서 얘기나 하세.”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

윤수혁이 차를 몰며 묻자, 안순익이 잠깐의 뜸을 들였다.

이윽고 늙은 입술이 열렸다.

“……자네 꿈이 뭔가?”

안순익의 고민이 응축되어 나온 말이었다.

최초에 윤수혁과 함께 일하기로 한 뒤부터 갖고 있던 근원적인 질문이었고, 오늘 얻게 된 문서로 뭘 할지 돌려 묻는 것이기도 했다.

차선 변경을 하던 윤수혁은 사이드미러를 보면서 태연하게 대답했다.

“전에 말씀드렸어요.”

안순익이 눈매를 좁혔다.

자신이 윤수혁의 장래에 대해서, 그리고 저 문서의 쓰임에 대해들은 게 있었는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윤수혁이 했던 그간의 가벼운 말이 스쳐 지나갔다.

순수한 정치적 열망.

훌륭한 정치가.

그 외의 비슷한 말들.

그사이, 윤수혁의 말이 이어졌다.

“기억나시죠?”

“……순수한 정치적 열망, 훌륭한 정치가. 그런 것 말인가?”

“예, 아시네요.”

“그게 진심인가? 아니, 자네가 왜?”

안순익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윤수혁은 분명 ‘빠꼼이’였다.

정치도 알 만큼 알고, 할 만큼 할 줄 아는 능구렁이.

그런 윤수혁에게는 특급 정보에서 파생한 수천억 원의 자산과 국회의원이라는 권력, 그리고 좋은 이미지까지 있었다.

국가에 몸 바치기에는 가진 것도, 지킬 것도 너무 많았다.

더욱이 그 모든 것을 내다버릴 정도로 윤수혁은 멍청하지도 않았고, 순수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윤수혁은 전과 다름없는 어조로 말했다.

“헌신하는 정치가들 있잖습니까? 나라를 좀 더 옳은 방향으로 고치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가진 건 그것뿐이야. 자네는 아니잖은가? 재산이며 권력이며, 자네 좋은 이미지는 다 어쩌고?”

“그래서 하는 겁니다. 그래야 제대로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안순익은 얼떨떨한 눈으로 윤수혁을 쳐다봤다.

속내가 무엇일까?

서른도 안 된 청년을 짐작조차 하기도 힘들다니.

안순익은 떠오르는 의문을 놔둔 채, 나직하게 물었다.

전보다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그럼 저 문서는…… 어쩔 생각인가?”

윤수혁의 눈이 옆에 둔 서류를 잠깐 쳐다봤다.

이내 정면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터트려야죠.”

안순익이 멈칫했다.

먼저 말한 윤수혁의 꿈에 부합하는 일이었지만, 그건 ‘빠꼼이’에게 어울리는 대답은 아니었다.

김정환과 협상을 본다던가, 터트릴 시기를 조율하며 야당과 물밑 거래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가장 먼저 나온 말이 터뜨린다는 것이었다.

협상이나 조율은 없다는 뜻.

안순익이 다시 입을 열었다.

“새한국당도 타격을 입을 걸세.”

“어디서, 어떻게 터질지 알고 있습니다. 몸뚱이가 크니 다 피하진 못해도, 직빵으로 맞진 않을 겁니다.”

안순익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느새 그는 윤수혁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감정이 얽힌 묘한 눈빛이었다.

“자네라면…… 그렇겠지.”

* * *

이튿날.

고일준 의원을 주축으로 한 새한국당 계파의 조간 모임에 참석하고, 이후에는 서울을 기반으로 한 유력 시민단체장들과 만났다.

만나는 김에 후원금을 냈고, 내는 김에 동료 및 선배 의원들에게도 적잖은 후원금을 기부했다.

300만원씩, 총 스무 명에게 보냈다.

물론 1인당 후원 한도액인 2000만원을 넘길 수는 없기에, 가족 명의로도 나눠서 보냈다.

제 3자 명의로 바꾸거나 쪼갤 필요 없이, 그대로 보낸 것이었다.

일부러 내 이름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으나, 굳이 무슨 작업을 할 필요는 없었다.

국회의원간의 후원은 이미 오래된 관습이었다.

이유는 많았다.

정치적인 목적, 단순 친분, 대가와 답례 같은 온갖 이해관계 등등.

그 탓에 여러 명의로 쪼개어 보내는 편법이 존재하기도 했으니, 내 이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이체하자마자, 의원들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 의원님이 저한테 300만원 후원하신 거 맞죠?

- 윤 의원, 갑자기 웬 후원금이야?

- 술 사달라고 했더니, 얼마짜리 사려고 300씩이나 보냈어?

다들 말끝마다 물음표를 달고 있었으나, 아는 눈치였다.

애초에 후원금액도 연간 최대 한도액인 500만원이 아니라, 공시의무대상에 걸리지 않는 300만원이었다.

나는 그들의 물음에 태연하게 대답했다.

“국정 돌보는데 보태셨으면 해서 보냈습니다. 나중에 좀 더 보태드릴게요.”

이유가 어떻든, 내가 의도한 바는 하나였다.

잘해 보자는 대가성 후원.

그래서 나중에 더 주겠다는 우스운 말까지 덧붙인 것이었다.

의원들은 군소리를 달지 않고 순순히 납득했다.

고맙다고, 잘 쓰겠다고 하면서.

그들도 내 의도를 다 알고 있으니 넘어가는 것이었다.

또한 돈 잘 받고, 나와 접점도 있는 이들을 일부러 고른 것이었다.

안 받을리가 없었다.

그게 내 빠듯한 오전 스케줄이었다.

점심에는 기자들을 만났다.

오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전투를 앞두고 대비하는 중이었다.

김 후보의 친일 문건이 터지면 피해를 최소화하고 내부를 추스르기 위한 밑 작업.

최소한 당이나 보수 전체가 욕먹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걸 위해서는 국회와 민간단체, 언론이 동시에 움직여야 했다.

그사이, 한식집에서 만난 기자가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 왔다.

“어쩐 일로 우리 의원님께서 식사까지 사주십니까?”

팀장 하나가 과장되게 말하기에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어제 위원장 임명됐다는 기사 잘 써 주셨잖습니까? 그거 감사해서요.”

“으하하하.”

팀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내가 청년대책위 위원장이 되어야만 했고, 된 것이 올바르다는 식으로 기사를 써 줬었다.

한 차례 웃은 팀장이 말을 이었다.

“당연히 그렇게 써야죠. 누구 기사라고 함부로 쓰겠습니까?”

그의 말에 엷게 웃었다.

대화투자자문이 연간 수천만 원을 광고비로 내고 있음을 암시한 것이었다.

내가 거기 대주주였고, 내 지시가 들어간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모르겠으나, 내가 국회의원이 된 이후로 대화투자자문에서도 신문사의 자금 일부를 위탁 운용하고 있었다.

팀장 옆에 있던 선임기자도 은근히 기대하는 얼굴을 하고는 물어 왔다.

“혹시 기사거리 있습니까? 오프 더 레코드도 좋은데.”

나는 그의 기대를 흘려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번에 뭐 좀 해 보려고요.”

“어떤…….”

기자가 말꼬리를 흐리며, 궁금하다는 듯 상체를 기울였다.

“청년정책위 됐으니까, 정부부처 실무자들 모아서 비공개 간담회 진행해 보고, 교수님들하고 시민단체 모아서 공청회 하려고 하거든요.”

“아, 청년정책위원회.”

“그런데 비공개 간담회는 기자분들 모실 수도 없으니까…… 괜찮으시면 몇 줄 써 주십사 해서요.”

“그게 뭐 어렵겠습니까?”

기자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인당 3만 5천 원짜리 식대가 빛을 발한 모양이었다.

사실 할 말은 따로 있었다.

김 후보의 친일 문건.

당장은 아니고, 나중에 터뜨릴 것이었다.

그 과정에선 당연히 기자들을 이용해야 했으니, 미리 약을 쳐 놓는 것이었다.

식대나 커피, 별것 아닌 호의가 뇌물이 되곤 했으니까.

“공청회 할 때도 오셔서 자리 좀 빛내주십시오. 바쁘시면 후배 분이라던가, 아시는 분도 좋습니다.”

“하하, 저희가 간다고 무슨 자리까지 빛나겠습니까?”

“기자님들 아니면 제가 공청회 한 거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그 정도면 빛내주시는 거 아닌가요?”

“으하하하. 말씀도 잘 하시네요, 윤 의원님 평판이 왜 좋은지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제 보좌관이 스케줄 확정해서 보내드릴 겁니다.”

“그럼 행사 끝나고 식사하시는 거죠?”

팀장이 대놓고 식대를 달라는 듯 묻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기자님.”

내가 선택한 기자다웠다.

그는 얻어먹는 걸 좋아하고, 능력 과시를 위해 억지로 기사까지 써 주는 사람이었다.

내가 비서 노릇할 때 숱하게 만나서 잘 알았다.

지금이야 김영란법이 발의된 상태이긴 했으나, 많은 부분이 수정되고 시행되려면 앞으로 4년은 더 있어야 했다.

그래서인지, 기자는 그 날이 오기 전까지 비싼 것들을 얻어먹으려는 것처럼 굴었다.

나는 그 기대를 채워 주기 위해서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때는 더 좋은 데로 모실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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