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15. 준비하시고, 쏘세요! (1)
여야 주요 대선 후보가 확정되었다.
동시에 진창 싸움도 시작됐다.
새한국당 대선기획단의 공보위원이 무소속 후보인 이민수 측근을 협박한 사실이 드러났고, 김정환 후보의 친일 역사관은 욕을 먹었다.
여의도 대선캠프 회의실에 있던 장세룡이 미간을 구겼다.
‘밖이나 안이나.’
그의 생각대로 당 바깥 못지않게 내부도 시끄러웠다.
특히 인사 문제.
김정환 후보 밑으로 나뉜 수십 갈래의 파벌이 저마다 자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인선 확정이 늦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미처 통제하지 못한 언론에서는 정치면 첫 타이틀에 새한국당을 걸었다.
[중앙 선대위 인선 난항 중]
[전국대통합위원회 위원장 후보 소문만 무성해]
[신민주당, “집안 관리 못한 가장, 나라 살림 맡을 자격 없어.”]
장세룡은 사무집기와 함께 놓인 신문을 쳐다보고는 마뜩잖은 어조로 운을 뗐다.
“이거 먼저 해결들 합시다.”
대선기획단 주요 인사들이 모인 자리였다.
“어떻게 말입니까?”
같은 3선 의원인 비서실장이 장세룡을 향해 물었고, 대선기획단의 핵심 인사들도 궁금한 눈으로 장세룡을 쳐다봤다.
“되는 대로 인선 정해서 내보내야지, 뭐 어쩔 겁니까?”
장세룡의 거침없는 말에 외부인사 출신의 대학 교수가 입을 열었다.
“중앙선대위를 먼저 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중앙선대위 꾸리다가 이 모양 된 거 아닙니까?”
“그래도 모양새가 있는 건데, 그렇게 정해서 되겠습니까? 주먹구구에 박 터질 거라고 떠들 겁니다.”
끼어든 교수의 말에 장세룡이 고개를 젓더니, 좌중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박 터질 일 없습니다.”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상향식 공천으로 발표하고, 지방 선대위부터 마무리 지읍시다. 부산이랑 울산은 인선 뻔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자리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지방부터 가는 건 보기가 영…….”
연이은 부정적인 어조에 장세룡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럼 수단 강구를 해야지! 후보님한테 결과물 내밀 생각들은 없고, 말만 뱉을 겁니까?”
장세룡이 마뜩잖다는 듯 좌중을 쳐다봤다.
침음이 일렁이듯 퍼졌고, 비서실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중앙선대위도 시늉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당한 인선은 먼저 처리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여론도 잠재우고, 시간도 벌어야 하니…….”
그 말에 장세룡이 테이블의 신문을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재선한 강미숙이 아니면, 초선에 윤수혁이 어떻습니까?”
“음, 여성계와 청년계라면 둘 다 좋네요. 적당합니다.”
비서실장이 긍정적으로 대답하며 동의하자, 교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성도 있고, 둘 다 이미지도 좋으니, 캐릭터들이 괜찮네요.”
“그 둘이라면 반발은 없겠습니다.”
그렇게 참석자의 동의를 받은 장세룡이 그중 젊은 축에 속하는 50대 사내를 쳐다봤다.
“그러면 이 의원이 그 둘 맡아서 진행하고, 공보단에 자료 넘겨.”
“알겠습니다, 의원님.”
* * *
황송한 오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 의원님! 중앙선대위 청년정책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셨습니다!
“예?”
전화를 받자마자 터져 나온 박 보좌관의 흥분한 말에 절로 되묻게 됐다.
- 방금 대선기획단에서 공문 왔습니다. 조만간 위원장 임명식을 진행한다고…….
박 보좌관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사이, 반 박자 늦게 정신을 차렸다.
나는 박 보좌관의 말을 잘랐다.
“보좌관님.”
- 임명식은…… 아, 네.
“청년정책위원회요? 중앙선대위에 그런 조직은 없잖아요?
- 그게 희망세대위원회를 청년계와 여성계로 분리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뭔가 짚이는 게 있어서 얼른 말을 이었다.
“그럼 여성계는 누가 맡았어요? 강미숙 의원?”
- 어? 아시네요. 좀 있으면 기자회견 한다는데, 아마 기자들이 냄새 맡고 먼저 전화할지도 모릅니다.
강미숙 의원은 전형적인 여성계 국회의원이었다.
비례대표로 뱃지를 달 때부터, 각종 여성단체를 대리하고 대표하는 자격으로 안정권의 순번을 받았었다.
마찬가지로 같은 캐릭터로 재선까지 했었는데, 그게 능력이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정치적인 이미지가 명징하다 보니, 보다 써먹기 좋은 패라는 의미였다.
나는 차창 바깥을 잠깐 확인하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좀 있으면 마포대교에 진입하니까 여의도 들어가서 다시 얘기 하시죠.”
- 그럼 자료 정리해놓겠습니다.
“예, 끊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자, 픽 웃음이 났다.
예상은 했던 일이었다.
청년대책위의 위원장이 내 범주에 없던 직책이었을 뿐.
나는 다른 걸 염두에 두고 있었다.
부위원장이나 부본부장, 아니면 위원 같은 직책.
그런 걸로 머릿수를 맞추기 위해 어디 조직에 대충 끼워 넣으리라 생각했다.
그게 위원장으로 업그레이드가 된 것이었다.
그건 그렇다 쳐도, 너무 갑작스러웠다.
보통 중앙선대위는 핵심 기구와 대표자들을 먼저 발표하고, 하향식으로 조직도를 알리는 게 기본이었다.
뭐 바뀔 수도 있긴 하지만, 내 기억 속에도 없던 두 위원장을 갑자기 만들어 냈다는 건 무슨 노림수가 있다는 말이었다.
여론 환기나 라인 만들기, 공격수 기용 같은 것.
아무래도 야당이 선대위 구성을 물어뜯고, 언론도 썩 우호적이지 못하니 여론 환기의 목적일 가능성이 높았다.
한마디로 나나 여성계를 맡게 될 강 의원은 관상용이라는 뜻이었다.
내가 예상했던 부위원장이나 위원과 다를 게 없었다.
그래도 위원장은 급이 다르긴 했다.
묻혀가는 위원과 다르게, 어쨌든 간에 중책이라는 뜻이었다.
우스웠다.
내가 낙마시킬 김 후보의 대선캠프에서 중책을 맡았다니.
“의원님, 도착했습니다.”
영석이의 목소리에 차창을 바라보자, 어느새 의원회관 전경이 나타나 있었다.
차가 정지한 뒤, 나는 내리자마자 곧장 의원실로 향했다.
박 보좌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맞이했고, 개인 사무실 문까지 열어 주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내 사무책상 위에 놓인 서류 몇 장을 볼 수 있었다.
“이쪽이 공문이고, 옆에 건 위원장 권한과 관련한 당헌당규입니다.”
박 보좌관이 알아서 설명하는 사이, 공문을 살피고, 다른 서류도 마저 읽었다.
이윽고 시선을 들자, 박 보좌관의 흐린 표정이 나타났다.
“의원님.”
나를 부르는 목소리도 전화를 걸었을 때와 다르게 어두웠다.
뭔지 알 법 했다.
중책을 맡았다는 사실만으로 기뻤던 최초와 다르게, 자료 정리를 하면서 실상을 알아버린 것이겠지.
서류만 봐도 위원장 자리가 정상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건 국회를 구를 만큼 구른 박 보좌관이 놓칠 수준이 아니었다.
“저, 이걸 참 말씀드리기가…….”
“당 지원금 추후 지원. 이거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부위원장 이하 낙하산들하고.”
관련 서류에 적힌 추후 지원.
그리고 이미 내정된 위원 몇과 부위원장.
지원금 배정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고, 내정자는 실무자의 낙하산일 확률이 컸다.
보니까 그 중에 국회의원은 나뿐이었다.
나는 움찔한 박 보좌관을 향해 말을 이어 갔다.
“그런 거 다 상관없습니다.”
“그러면 지원금 같은 건…….”
“제 사비 지출해도 됩니다. 그거 얼마나 한다고 그래요? 그리고 위원장 자리잖아요.”
“그래도…….”
“차라리 잘 됐습니다.”
“차라리요?”
그게 무슨 뜻인지 되묻는 것 같았으나, 박 보좌관에게 말해 줄 생각은 없었다.
대선기획단을 엿 먹일 아이템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대선기획단을 가장한, 김 후보의 측근들이 목표였다.
그 안에 포함된 장 의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엿 먹일 방법은 있었고 또한 쉽기도 했다.
많은 돈과 멋모르는 초선의원의 패기.
그 두 개의 준비물만 있으면 됐다.
나는 그걸 가지고 단순 여론 환기를 위한 관상용(用)을, 우러러 볼 관상용(龍)으로 바꿀 생각이었다.
쉽게 말하면 주객전도.
그리고 잠잠해졌던 스포트라이트를 가져오는 일.
그걸 할 생각이었다.
* * *
일본 도쿄, 임페리얼 호텔.
단정하게 차려입은 호텔리어가 비품실에서 청소 카트를 끌고 나왔다.
곧 손님이 나간 객실에 도착해서 문을 연 무렵.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젊은 사내가 나타났다.
“少々お待ちください、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잠깐 기다리세요, 들어가 봐야 됩니다.).”
남성의 일본어에 객실로 들어가려던 호텔리어가 얼른 뒤를 돌아봤다.
‘……?’
호텔리어는 이상하다는 눈으로 남성을 쳐다봤다.
운동화에 면바지, 허접한 재킷.
역사와 전통이 있는, 5성급의 임페리얼 호텔에 어울리는 옷차림이 아니었다.
더구나 호텔리어가 들어가려던 방은 일반 스탠다드룸이 아닌, 42제곱미터의 디럭스룸이었다.
1박에만 6만8천 엔이 필요한 값비싼 방.
모든 게 의심스러웠으나, 호텔리어는 교육 받은 직원답게 친절한 얼굴로 물었다.
“お泊まりでしょうか?(투숙객이십니까?).”
그러자 남성이 옆을 흘깃 보고는 얼른 대답했다.
“はい、確認だけして戻ります。(네, 확인만 하고 갈 겁니다.)
거짓말 같은 대답.
호텔리어는 남성의 눈이 향한 옆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흰 머리의 안순익이 있었다.
카라 티셔츠에 정장 차림을 한 그를 순식간에 확인하고, 호텔리어가 다시 입을 열었다.
“客室カードは…… 。(객실 카드는…….).”
호텔리어는 친절한 어조만 머금었을 뿐, 의심을 감추진 못했다.
물론 안순익은 충분히 임페리얼 호텔에 묵을 만한 사람으로 보였으나, 젊은 남성이 영 이상했다.
애초에 투숙객이라고 하기에 둘이 어울리는 조합도 아니었다.
그 사이, 훌쩍 비킬 줄 알았던 호텔리어가 계속 입을 열자 안순익이 인상을 썼다.
“통역, 저게 지금 뭐하자는 거야?”
“객실 카드를 보여 달라고 하는 데요…….”
“지랄하고 있네. 대충 둘러 대고 그냥 비키라고 해.”
말을 마친 안순익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가 거의 한 달을 넘게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カードは忘れてしまって…… 。(카드는 잃어버려서…….).”
“얼른 안 나와!”
통역이 말을 이으려는 데, 안순익이 호텔리어를 향해 한국말로 소리쳤다.
저 객실은 보통 방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김정환의 보좌관이 머물렀던 공간이었다.
그것도 일본의 중의원과 함께.
비정상적이었다.
대통령 후보의 유력한 보좌관이 중의원과 같은 방을 쓰는 건 여태 없었고, 어디에도 공개된 적이 없던 일이었다.
그사이 호텔리어가 겁먹은 듯 뒷걸음질을 치자, 안순익이 얼른 걸음을 옮겼다.
“진즉 비킬 것이지.”
안순익이 흥분한 기색을 그대로 내뿜으며 호텔리어를 지나쳤다.
통역이 그 뒤를 따르자, 안순익은 현관을 가리켰다.
“너는 입구 지키고 있어.”
“아, 네.”
통역이 멀거니 서자, 안순익이 급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건 4인용 회의테이블과 빼 놓은 의자들이었다.
안순익이 기다렸다는 듯 테이블 위를 쳐다봤다가, 쓰레기통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윽고 한두 걸음 옮겨 쓰레기통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안순익이 흠칫하고 말았다.
“……!”
대충 접힌 서류들이 쓰레기통 안에 가득했다.
‘……이게 진짜라는 게야?’
늙은 목울대를 움직여 침을 삼킨 안순익이 손을 떨면서 서류를 집었다.
모든 게 윤수혁이 예고한 그대로 이루어졌다.
지목한 호텔부터 서류가 있을 것이라고 단정한 쓰레기통까지.
윤수혁은 그럴 것이라고 안순익에게 미리 통보했었다. 김정환의 보좌관이 언제 즈음 출국할 것이라고 지목까지 했었고.
모든 게 예언처럼 맞아 떨어졌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만…….’
안순익은 순간 뒷골이 오싹해지는 듯 오한을 느꼈다.
몇 달 전에 들은 윤수혁의 언질이 귓바퀴를 간질이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이내 서류를 챙기던 안순익이 나잇살로 처진 몸을 떨었다.
‘내가 귀신이랑 일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