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14. 알아서 기어 (2)
2012년 8월 20일 일요일.
어제가 경선 투표일이었다.
나는 13대의 버스를 불러서 당원과 대의원을 태우고, 15분 거리의 투표장으로 보냈었다.
내가 강북구에 투자했던 후원금과 얼마 전의 사무소 개소식, 그리고 사교성 좋은 서 보좌관의 말빨 덕분이었다.
물론 당원들에게 누굴 뽑으라곤 하지 않았다.
괜히 위법을 자초할 필요도 없었고, 굳이 누굴 뽑으라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할 일은 그게 끝이었다.
문자로 지시한 장 의원은 내가 데려온 강북구의 당원과 대의원, 대절한 버스 숫자만 파악할 것이었다.
김정환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까지는 알 수도 없고, 신경 쓰진 않으리라.
그리고 내가 대의원들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경선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것이었다.
때 마침 경선 결과도 나왔다.
- ……이에 김정환 후보가 대통령 후보로 당선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대선 경선 관리위원장의 선포에 축포가 터지고 환호가 일었다.
앉아 있던 김 후보가 일어나서 만세를 불렀다.
과반을 조금 넘는 득표.
김 후보는 인기몰이에 성공한 정치인의 표본이었다.
YS의 최측근이라는 기반으로 시작해서, MB와 각을 세우고 대립하며 이슈를 만들었고, 주요 정책을 성공시키며 인지도를 높였다.
거기에 국회 업무와 청와대 실무까지 겸했고, 큰 사고도 없었으니 대권 후보는 당연한 길이었다.
물론 16년도까지만 해당되는 말이었다.
이번에는 대선 전에 끝날 것이고.
그 사이, 차가 멈추기에 조수석 뒤에 설치된 스크린을 종료시켰다.
“도착했습니다, 의원님.”
영석이도 나직하게 도착을 알렸다.
강북구의 한 사회복지관 앞.
전봇대에 묶인 여름 바자회 플래카드가 뙤약볕에 늘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참여할 행사였다.
사실 참여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5분에서 10분 내외의 얼굴 비추는 일이었지만, 올 수밖에 없었다.
국회의원이 왔다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지역구 주민들이 좋아라하기 때문이었다.
그게 반복되면 유권자의 기쁜 마음은 표심으로 나타날 것이었다.
나는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줬다.
“영석아, 가서 아이스크림이랑 음료수 좀 사 와. 아, 충분히 사 와. 바자회 사람도 먹고 나도 좀 먹게.”
“알겠습니다.”
“나 먼저 내린다.”
그나마 다행인 건 주말이라서 정장 차림이 아닌, 가벼운 스포츠 웨어를 입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에어컨 바람이 쏟아지던 벤츠 뒷자리에서 내리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복지관 앞의 주차장.
거기에 천막 몇 개가 서 있었고, 아이들과 주민들 백여 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몇 사람이 힐끗거렸는데 알아보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인사하기 위해 준비한 손이 어색해지던 차에, 드디어 아는 체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윤 의원님 아니세요? 아이고! 윤 의원님!”
“아하하,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관장님.”
“이 더운 날에 이런 곳까지 와주셨네요, 정말 고맙습니다.”
복지관 관장의 말처럼 이 더운 날, 이런 곳이 어울리는 장소였다.
백 명을 조금 웃도는 사람들과 주차장 아스팔트 위.
거기서 열리는 바자회.
강북구갑에 있는 동료 의원이나 강북구을에 있는 신민주당 의원이 오지 않을 만했다.
그래서 내가 골라서 찾아온 것이었다.
“어떻게 혼자 오셨어요? 저는 동네 주민인 줄 알았어요.”
“비서하고 같이 왔는데, 그 친구는 아이스크림 좀 사러…….”
말하는 데 영석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왜 뒷모습이지?
의아한 생각이 들 무렵, 영석이가 뒤로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등장한 것은 대우 로고가 달린 냉동 탑차였다.
그것도 5톤짜리.
물류업 할 때나 쓰이는 냉동탑차가 아닌가?
그러고 보니 차량 크기 때문에 영석이가 진행 유도를 하고 있었다.
저게 왜 오나 싶었는데, 기사가 차를 주차하는 사이에 영석이가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내가 뭐냐고 묻기도 전에 영석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트 사장한테 아이스크림을 준비해 달라고 했는데, 냉동차로 배달 해 준다고 해서…….”
“저 차로?”
“……저도 저렇게 큰 건지는 몰랐습니다.”
“뭐…… 그래.”
헛웃음이 올라오다가 말았다.
마트 사장이 잘 보이고 싶어서 애를 쓴 모양이었다.
국회의원 수행비서한테 먼저 전화 받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 마트 사장이 옳다구나 하고 선의를 베푼 것일 터였다.
그게 5톤짜리 냉동 탑차인 게 좀 웃겼을 뿐.
그래도 유권자들이 좋아라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하긴 했다.
어느새 관장이 내게 달려와서 양손을 덥석 잡았다.
“아이고, 이거 감사해서 어쩌죠. 안 그래도 후원금까지 매달 받는데…….”
“아닙니다, 관장님. 지금처럼 아이들 잘 돌봐주시고, 지역 사회에 계속해서 기여해 주시면 됩니다.”
“그래도 참, 아! 사무실에서 커피라도 좀…….”
“괜찮습니다, 오늘 행사 보러 왔으니 사무실 구경은 다음에 하겠습니다.”
그 사이 냉동 탑차 주문자가 나라는 걸 안 중년 여성들이 다가왔다.
“어머, 국회의원이세요?”
“혹시 예전에 연평도에서…….”
“아, 그 젊은 국회의원이시구나?”
여성들이 뒤늦게 알아보고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 사이에 탑차 옆문에선 냉기와 함께 아이스크림이 포장 박스째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자원봉사자가 눈치껏 받았는데, 내리는 박스가 대여섯 개를 넘자, 영석이가 얼른 달려갔다.
이후에 지역구 주민들과 사진 촬영도 하고, 영석이의 손을 빌려서 단체 사진도 촬영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차안에서 영석이가 나직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실수했습니다.”
아까 냉동 탑차가 신경이 좀 쓰였던 모양이었다.
“괜찮아, 마트 사장이 오버한 거 갖고.”
“아닙니다, 그냥 가지러 갔어야 했는데…….”
“앞으로 갑질하고 을질 엄청 당할 텐데, 뭘. 멘탈이나 더 빡세게 키워놔. 그래야 이 바닥에서 버티기 쉬워.”
“감사합니다.”
“감사는 뭘, 그냥 경험인데.”
장 의원 밑에 있을 때 여러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접대와 뇌물, 청탁 같은 것도 많이 받아봤었다.
그것도 천차만별이었다.
괜스레 격세지감이 느껴져서, 짧은 웃음으로 상념을 날려 보냈다.
그토록 원하던 금뱃지에, 넘치는 돈까지 쥔 상황이었다.
부족한 거라고는 학력뿐이었지만, 그것도 벌써 해결 중이었다.
Y경영전문대학원에 접수한 서류가 심사 통과해서 합격처리가 난 상태였다.
면접도 따로 없었다.
애초에 기업체 경영자나 임원, 고위공직자 등만 지원하는 것이니, 이해가 되기도 했다.
높은 사람 오라가라해서 득 될 게 없었으니.
오티가 다음 달부터 시작이었다.
* * *
9월 초, 남산 힐튼호텔.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도어맨이 공손하게 묻자, 윤수혁이 엽서 크기의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은박의 글자가 새겨진 초대장이었다.
[Y경영전문대학원 ORIENTATION INVITATION]
뒤쪽의 영자는 유려한 필기체였다.
초대장 뒤쪽의 ‘합격자 윤수혁 귀중’을 확인한 도어맨이 초대장을 돌려주며 다시 고개 숙였다.
“그랜드볼룸으로 모시겠습니다.”
도어맨이 정중하게 말하곤 앞서서 길을 안내했다.
그랜드볼룸은 국제 행사나 호화 결혼식에 쓰이는 고급 연회장이었다.
그것도 구조 변경으로 최대 1,000명까지 수용할 만큼 커다란 규모였다.
곧 그랜드볼룸 입구에 도착한 윤수혁이 픽하고 웃었다.
입구에 일반 화환도 아닌 색색의 꽃들과 윤택이 도는 화분이 도열되어 있었다.
‘돈 지랄 어지간히도 했네.’
이미 초대장을 받을 때부터 느낀 소감이었다.
고급 초대장이며 5성급 호텔에서 열리는 오리엔테이션, 좌우에 놓인 꽃까지.
전부 돈이었다.
이게 대학원 오리엔테이션이 맞긴 한가?
윤수혁은 이어진 생각에 짧게 헛웃음을 뱉었다.
당선 이후 서울시장이 주최한 초선의원과의 만찬하고 다를 바가 없던 탓이었다.
직원이 윤수혁을 얼굴이 아닌 초대장으로 구분하고, 참석자가 몇 배 정도 많은 차이만 있을 뿐.
‘어차피 구경 차 왔으니…….’
이내 입구에서 초대장을 확인받고, 윤수혁은 안으로 들어섰다.
널찍한 내부는 예상대로 고급스러웠고, 화려했다.
축하연이라도 하는 듯 가장 앞에는 단상이 설치되어 있었고, 남은 공간에는 원형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와인이나 간단한 음식은 기본이었다.
그러나 몇 걸음을 더 옮기던 윤수혁은 금세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아…… 여기서도 막내야?’
모두가 연장자였다.
국회와 비교하면 연령대가 조금 낮긴 했으나, 그랜드볼룸의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40대의 중장년층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곳이 대학원 오리엔테이션 장소라는 것이었다.
선수에 대한 예의와 장유유서가 근저부터 깔린 국회가 아니었다.
그렇게 빈자리를 찾아가던 중, 윤수혁의 앞에 훤칠한 중년의 사내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구재일 교수입니다. 혹시 윤수혁 국회의원님 아니십니까?”
“예, 안녕하세요. 비례대표 국회의원 윤수혁입니다.”
“앞으로 가실까요? 제가 자리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예, 고맙습니다.”
윤수혁이 대답하자, 구재일이 가벼운 손 안내와 함께 곁에서 걷기 시작했다.
이윽고 단상을 코앞에 둔 테이블에 도착하자, 윤수혁은 테이블에 놓인 작은 팻말을 볼 수 있었다.
그건 ‘윤수혁 님’이라고 쓰인 작은 이름표였다.
자신의 이름을 본 윤수혁은 주위를 슬쩍 확인했다. 많은 테이블을 지나왔으나, 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에 의자를 빼주던 구재일이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저희가 윤수혁 의원님을 VIP로 분류해서 따로 준비했습니다.”
“저, 듣기로는 다른 분들도 VIP같던데요. 아닙니까?”
윤수혁이 조양준 대표에게 들었던 ‘내로라하는 유력가’라는 말을 떠올리고, 모집요강에 적힌 고위층이라는 지원 자격을 떠올릴 무렵.
구재일이 가까이 다가서면서 나직하게 대답했다.
“전혀 아닙니다. 기수가 같다고, 어찌 수준이 다 같겠습니까?”
“모집 요강에는 지원 자격이 까다로운 것 같았습니다만…….”
“그건 맞습니다. 동기 분들도 모두 소기업 대표이사나 중견기업 임원, 공기업 이사관 정도 되는 분들입니다.”
그리고서 구재일이 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여기에 장관급 의전이 필요한 직책은 의원님 밖에 없습니다.”
“……아, 그럼 이 자리는요?”
윤수혁이 원형 테이블의 남은 자리를 바라보며 묻자, 구재일이 빙긋 웃었다.
“저희 원장님과 원우회장님, 행정사무장님, 그리고 제자리입니다.”
그래서 비어 있었구나.
윤수혁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구재일이 당겨 준 의자에 앉았다.
“언제라도 불편한 점을 말씀해 주시면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오리엔테이션 준비 때문에 가보겠습니다.”
구재일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곧 도착할 대학원 원장을 의전하고, 원우회장도 의전하러.
그사이 윤수혁은 묘한 위화감을 다시 느껴야 했다.
50대 사내의 의전을 받아, 가장 앞자리에 앉은 20대를 수십 명이 바라보고 있던 것이었다.
곧 작은 웅성거림이 일더니, 원피스 차림의 40대 여성이 다가왔다.
“저…… 윤수혁 국회의원님 맞으세요?”
“아, 예. 비례대표 윤수혁입니다.”
“어머, 반가워요. 국방위 위원 이시잖아요. 저 삼원케이윈 상무이사예요. 저희 남편이 거기 대표고요. 잘 부탁드려요.”
어느새 여성이 명함을 꺼내어 건넸다.
윤수혁은 명함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 하고 입을 벌렸다.
삼원케이윈은 무기체계 품목을 생산하고 납품하는 방위산업체였다.
최근 방위사업청 업무보고 때문에 봤던 업체명이었다.
윤수혁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여성에게 가볍게 고개 인사로 답했다.
‘막내 대접은 안 받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윤수혁에게 인사하겠다는 사람들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대략 열 명 정도의 인사를 받았을까.
윤수혁이 구재일 교수에게 불편 사항이 생겼다고 말해야 하나, 고민까지 할 때.
장내에 마이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 지금부터 Y경영전문대학원 AMP 31기,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31기 입학생분들께서는 좌석을 정돈해 주시기 바랍니다.”
막 식품제조업체 사장과 악수를 나눈 윤수혁이 자리에 앉으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막내가 아니라, 큰형님 노릇을 받게 생긴 것이었다.
그것도 자기 동네에서는 난다긴다 하는 유지들한테.
윤수혁은 대충 넣어 두었던 십여 장의 명함을 다시 정리했다.
‘릴레이션쉽이라…… 괜찮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