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44화 (44/191)

# 44

14. 알아서 기어 (1)

내 사무소는 9층짜리 빌딩의 가운데에 위치한 5층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복도에 화환이 깔려 있었다.

전부 비슷한 디자인으로, 한쪽 리본에 적힌 글은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내 사무소 개소를 축하한다는 내용.

그리고 반대쪽은 제각기였다.

[미아동 민간복지협회 회장]

[성강건설(주) 대표이사 김한수]

[강북구 청소년선도위원회 일동]

그 외에도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큰 게 아니더라도, 허리높이의 화분까지 복도에 줄지어 있었다.

전부 강북구에 있던 각종 단체들과 지역 유지들이 보내온 것이었다.

이 중 내 후원금을 받은 곳이 태반이었고, 나머지는 국회의원과 얼굴이라도 터 놓을까하고 보내온 단체들이었다.

특히 개인 이름이나 영리단체명으로 보낸 화환이 후자에 속했다.

내가 그것들을 바라보자, 영석이가 곁에서 작게 말했다.

“화환하고 개소식 축하 선물 명단 받아놨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차에서 볼게, 들어가자.”

“알겠습니다.”

그렇게 영석이가 열어 준 문으로 들어가자, 사무소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보였다.

아직 개소식 전이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십여분은 남은 시간인데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환호하고 박수를 쳤다.

“윤수혁! 윤수혁! 윤수혁!”

일부러 더 과장되게 내 이름까지 외쳐 댔다.

30평짜리 사무소가 좁아보였다.

강북구 사무소를 관리하기로 한 4급 보좌관 서조훈도 멋쩍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이내 열광이 가라앉은 틈을 타서 꾸벅 허리를 숙였다.

사무소를 채운 사람의 대부분이 중장년의 남성이었고, 나머지가 나이 든 여성과 백발의 노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더 공손하게 해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비례대표 출신 국회의원 윤수혁입니다. 자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와아아아!”

또다시 함성과 박수소리가 일었고, 내 눈치를 본 서 보좌관이 나서서 사람들을 자중시켰다.

나는 곧 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악수를 하면서 한두 마디씩 섞었다.

방문객 중 3할은 예상대로 내 후원을 받은 단체의 간부들이었다.

그것도 2010년 말부터 시작된 후원이었다.

이미 1년 반 이상 내 후원금을 타먹다 보니 안 오고는 못 배기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액수도 적지 않으니, 그들로서는 와야만 했을 터였다.

총 정기후원금만 35억원이었다.

매표(買票)를 위한 대가성 후원으로 의심받을 여지가 있어서 줄인 게 그만한 액수였다.

후원금은 전부터 노리고 있던 강북구에 많이 들어가긴 했으나, 전국의 주요 단체란 단체에는 다 보내고 있었다.

어디로 가도 당선될 수 있게끔.

그사이 추가로 사람들이 오고, 더욱 비좁아진 30여평의 사무소 한가운데에서 축사며 기념사가 시작되었다.

“우리 윤수혁 의원은 새한국당의 중앙청년위원장으로서 대한민국의 청년들을 이끌 지도자입니다. 제가 평소에 봐 왔던 모습으로는…….”

서울시당 위원장인 재선의원과 강북구을 원외당협위원장으로 있는 전직 고등학교 교장이 덕담을 줄줄이 늘어놨다.

일면도 없던 이들이었으나, 오랜 지기처럼 내 칭찬을 해 주었다.

3선의 고일준이나 다른 선배 의원들이 내 사무소 개소식에 신경을 좀 써 준 덕분이었다.

특히 원외당협위원장은 라이벌이나 다름없을 텐데도 열심히 했다.

떡고물이 떨어지리란 걸 아는 눈치였다.

하여튼 순서가 돌아 내 인사와 각오로 이어졌다.

“……대한민국과 강북구를 위해, 제 한 몸 바쳐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조 대표가 미리 준비해 줘서 차에서 두어 번 읽은 연설문이었다.

선전 의도가 다분한 문장으로 구성된 것들이었는데, 의도대로 사람들을 제법 고양시켰다.

이후에는 사진 촬영과 인사, 악수, 명함 교환만이 남아 있었다.

바쁘게 인사를 하는데, 그 와중에 흰 봉투를 받았다.

돈이나 상품권 같은 건 안 된다고 하니, 옆머리에 서리가 내린 50대의 남성이 대차게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니죠! 저도 대의원이라서 알 건 다 압니다. 그거 윤 의원님 보시라고 편지 쓴 겁니다. 편지.”

딱 보니 낌새가 좋아보이질 않았지만, 일단은 공손하고 정중하게 받아야 했다.

유권자들이 다 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꼭 읽어 보겠습니다.”

그렇게 편지 몇 장을 더 받았는데,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양해를 구하고 복도로 나가자, 뒤따라온 영석이가 문을 닫고는 몇 걸음 떨어져서 주변을 경계했다.

흡사 경호원 같은 모습에 피식 웃고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했다.

[정책위의장 장세룡]

나는 영석이와의 거리를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날세, 윤 의원. 기사는 봤나?

“아, 예. 사무소 개소식하러 가는 길에 봤습니다.”

- 전대 비상 걸렸으니까, 자네도 입방아 안 오르게 행실 똑바로 해.

“알겠습니다.”

- 그럼 내 다시 연락하겠네.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끝났다.

전당대회 당비 지원에 관한 말은 쏙 들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보는 해프닝이 되겠지만, 논란이 되었던 만큼 언론이나 선관위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돈이 움직이면 친김계의 전당대회는 어떤 식으로든 비난을 얻어맞게 될 터였다.

그리고 이미 돈깨나 받아 먹었을 것이었다.

정치자금 없이 경선이 치뤄지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에 내 이름 하나 더하려고 했겠지만, 굳이 혹을 달 필요는 없었다.

장 의원 입장이든, 새한국당 입장이든, 뭐로 봐도 지금은 없던 일로 하고 조용히 넘어가는 게 상책이었다.

나는 사무소로 들어가기 전에 받아둔 몇 장의 이상한 편지를 펼쳤다.

조금 읽어 내려가는데 역시나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제 아들이 입대 영장을 받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한데 어떻게 입대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윤수혁 국회의원님께서 국방위원회에 계시니…….]

청탁이었다.

그 뒤에는 읽을 필요도 없었다.

병무청이나 국방부에 입김이나 불어 달라는 뻔한 부탁이 이어져 있었다.

장 의원 밑에서 비서 생활 할 때도 이런 청탁을 숱하게 받았었다.

장 의원을 근접에서 보좌하니 내게 대신 건네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런 편지도 있었고, 뇌물, 혹은 명함이나 말을 전해 달라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나머지 편지도 대충 확인하고, 영석이한테 건넸다.

“이거 박 보좌관한테 그대로 줘라.”

박 보좌관이라면, 증거로 남기고 블랙리스트에 업데이트하고, 부정 청탁에 대한 답변까지 알아서 잘 해 줄 것이었다.

이후 영석이가 편지들을 갈무리하는 사이, 나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찾아오고 있었다.

* * *

며칠 뒤.

돈 봉투 살포가 해프닝으로 일단락되었고, 선관위와 새한국당에서 각각 소명 자료를 발표했다.

장세룡이 발표 영상에 눈을 찌푸렸다.

태블릿 PC를 들고 있던 4급 보좌관이 눈치를 살피자, 장세룡이 치우라는 듯 턱짓을 했다.

보좌관이 태블릿 PC를 종료시켰다

장세룡은 마뜩잖은 얼굴로 보좌관이 아닌,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범인은?”

보좌관이 얼른 대답했다.

“지금 확인 중에 있습니다만, 익명이라서 아직 파악하진 못했습니다.”

그 말에 장세룡의 눈매가 굳었다.

“맞은 놈은 있는데, 때린 놈이 없어?”

“아, 아닙니다. 있습니다, 있는데…….”

“있으면 데려와야지, 왜 놔둬?”

“죄송합니다.”

보좌관이 고개 숙이자, 장세룡이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는 문가로 턱짓을 했다.

보좌관이 꾸벅 고개를 숙인 뒤에 잰걸음으로 물러갔다.

“어디서 날파리가 꼬여선…….”

장세룡은 짜증섞인 말을 뱉고는 고개를 저었다.

나온 게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 숱한 언론사와 단체에 동시 다발적으로 의혹 제기를 했는데, 일말의 증거조차 나오지 않았다.

철저했고, 다분히 계획적이었다.

이는 명백한 공격이었다.

그것도 새한국당 전당대회를 향한 공격.

일평생을 고고하게 살아온 장세룡에게는 경멸을 불러일으킬 만한 일이었다.

내부고발자도 찾아내서 징벌을 가하는 판국이었다.

외부의 제보자를 추적해서 보복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새한국당과 자신을 함부로 업신여기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장세룡이 짜증을 털어 내고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이어서 두툼한 엄지로 연락처에서 이름 하나를 골라선 문자를 적어 보내기 시작했다.

[장세룡입니다, 선관위원장님. 억울한 당의 입장을 헤아려 주시고, 제2의 피해자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제보자를 찾아내야 합니다. 각별히 신경 써 주십시오.]

꾹꾹 눌러서 장문의 문자를 적은 장세룡이 내팽개치듯 스마트폰을 내려놨다.

이미 검찰 관계자에게 전화 통화로 가벼운 재촉을 한 뒤였다.

장세룡이 의자에 기대며 짜증을 삭히던 찰나, 인터폰 벨이 울렸다.

버튼을 누르자, 인턴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의원님, 15분 뒤에 부산시당 방문 일정 있으십니다.

“차 빼놔.”

- 알겠습니다.

장세룡은 전당대회 때문에 부산의 지역구 사무소에 내려온 상태였다.

일어나면서 정장 상의를 챙겨 들던 장세룡이 결국 욕설을 뱉었다.

이 더운 날, 선거운동을 하러 나가야 했다.

* * *

8월 초.

부산에서 한창 유세중일 장 의원한테 문자가 왔다.

[45인승 버스 최소 10대 대절, 19일 경선에 투입.]

[현재 강북구을 원외당협위원장 횡령으로 징계처리 됐고 재임명 준비 중.]

두 통의 문자가 연달아 왔다.

전국에 200개 가까이 투표소를 세울 텐데 버스를 대절하라는 건, 대놓고 김정환 후보를 뽑게끔 유도하라는 말이었다.

결국 돈으로 지원하는 대신에 표로 뽕을 뽑으려는 모양이었는데, 두 번째 문자가 우스웠다.

당협위원장 자리를 걸었으니까 알아서 지시를 이행하라는 소리였다.

그 와중에 원외당협위원장은 내 사무소 개소식에 와서 축사까지 해 주고 잘린 꼴이 되어 버렸지만, 잘못해서 잘렸다니 어쩌겠는가?

나는 강북구 사무소에 있을 서 보좌관에게 문자를 보냈다.

[강북구 당원하고 대의원 19일에 경선에 참여 가능한지 알아 봐 주세요. 버스 대절 규모도 확인해 주시고요. 당원 편의 최대한 봐드리고, 선관위하고 마찰 없게 진행해 주세요.]

보낸 지 몇 초 만에 서 보좌관에게 답장이 왔다.

[경선 참여 인원, 버스 대절 확인 후 보고 드리겠습니다.]

문자 확인을 마치고 마주 앉은 조 대표에게 다시 눈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업무 때문에.”

“괜찮습니다, 그럼 설명 계속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조 대표가 테이블 위의 서류를 짚었다.

[K대학원 MBA 커리큘럼]

[Y경영전문대학원 입학 안내문]

유명 사립대학 로고가 큼직하게 박힌 대학원 소개서.

이건 내 학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 대표가 가져 온 결과물이었다.

“둘 다 평일 야간에만 수강이 되고, 3~4학기 동안 특정 학점을 이수하시면 졸업이 됩니다.”

“다른 선택지는요?”

내 말에 조 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더 있긴 합니다만, 학력 커버하기 위해서는 이 두 곳이 제일 좋습니다. 굳이 학력이 아니더라도, 의원님의 릴레이션쉽에도 도움이 됩니다.”

“인맥이요?”

“네, 이 두 곳 같은 경우에는 현역 국회의원은 없지만, 내로라하는 유력가들이 많습니다.”

나는 두 학교 로고를 번갈아 보다가 조 대표를 바라봤다.

“그럼 대표님 판단에 둘 중 어디가 났습니까?”

“음…… 서울대 입장에서 보면 큰 차이는 없습니다.”

조 대표가 농담조로 말하면서 미소 지었다.

그럼 가까운 게 장땡이지.

나는 오피스텔과 국회에서 가까운 Y경영전문대학원 입학 안내문을 짚었다.

“이걸로 접수 진행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아, 다음 달에 오리엔테이션있습니다.”

“대학 오티랑은 많이 다르겠죠?

일어나면서 농담 삼아 물으니, 조 대표가 가볍게 웃었다.

“오리엔테이션 장소가 남산 힐튼호텔 그랜드볼룸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