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37화 (37/191)

# 37

11. 국회로 (5)

김추완은 장세룡이 개를 잡았다는 옛날 얘기는 알지 못했다.

다만 장세룡의 권위 가득한 말씨를 잘 알았다.

재선의원 임에도 당의 권력을 움켜쥔 자부심에서 나온 말투.

윤수혁을 온전하게 믿진 않았으나, 김추완은 이미 장세룡에게 정신이 쏠려 있었다.

‘장세룡이 이 호로 자식이…….’

안그래도 윤수혁에게 뒷배가 있다고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감사(監査)도 피해갈 만큼 깨끗한 데다가, 자신과 엮인 비리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돈만 많다고 해서 그런 걸 다 꿰고 있을까?

아니, 대한민국에서는 힘이 있어야 했다.

이 나라는 연줄에 얽매인 권세로 기업의 발목을 잡고, 개인을 옭아매는 곳이었다.

그걸 피하기 위해서 많은 이들이 권력에 빌붙는 것이었다. 자신의 뒷배가 되어 달라고 청탁하고.

힘이나 뒷배가 있어야 뒷일을 감당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

자신 같은 5선 의원을 건들려면, 보통이 아니어야 했다.

그랬기에 윤수혁의 뒤에는 누군가가 있어야 했다. 그것 때문에 김추완도 꾹 참고 거래를 진행하려고 했었다.

어차피 협상도 무리가 가지 않은 쉬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 뒷배가 장세룡이라면?

“감히……!”

장세룡이 자신에게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것도 작정하고 휘두르는 것이었다.

이내 마음을 다잡은 김추완이 눈앞의 윤수혁을 쳐다봤다.

“너 가진 거 더 없어?”

“없습니다. 생각해 보니 있을 수가 없더군요, 장 의원이 그런 걸 남겨 놓을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곧장 윤수혁의 말이 이어졌다.

“또 며칠 전부터 장 의원하고 연락도 안 됩니다. 보니까 저도 끈 떨어진 것 같고, 이제 더 못하겠습니다. 잘못하면 저까지 엮이는 거 아닙니까? 범죄자 은닉죄 같은 걸로…….”

“그만! 누구한테 감히 범죄자야?”

김추완의 못마땅한 시선이 윤수혁에게 닿았다.

“저는 드릴 거 다 드렸습니다. 이제 그만 하겠습니다.”

“……야!”

등 돌리는 윤수혁을 향해서 김추완이 소리를 내질렀다.

“너 여기서 마음대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어린놈의 새끼가 싸가지 없이……!”

새까맣게 어린 윤수혁이 마음대로 움직이자, 김추완의 눈에 다시 살기가 돌았다.

정치판에는 기본적으로 장유유서의 개념이 있는 곳이었다.

그것도 일반 사회보다 더 집요하고 지독했다.

중진 의원들이 불혹(不惑)의 나이 마흔을 미숙하다고 말하는 판이니, 스물여덟인 윤수혁은 걸음마도 못 뗀 애와 다름없었다.

심지어 이제는 뒤를 봐주던 보호자도 사라진 상태였다.

윤수혁이 아직 앉아 있는 김추완을 쳐다봤다.

“그래서 지금 그 이판사판 하시려고요?”

“이 새끼가…….”

“그냥 없던 걸로 합시다. 비리 정보로 공천 달라고 요구한 게 전분데, 그건 의원님께 역효과 아닙니까? 오늘은 의원님한테 덕담 들은 걸로 하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김추완이 이를 악물었다.

울산대학교 총학생회 학생회장을 지내고, 정치계에 입문한 뒤로 오늘 같은 날은 없었다. 정확히는 윤수혁 같은 사람이 없었다.

머릴 숙이지도 않고, 머릴 숙이게 만들 수도 없었다.

회사 발목 잡는 것도 어려웠으며 개인을 터는 건 더 힘들었다.

물론 보다 직접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이 있긴 했으나, 그건 함부로 쓰기가 힘들었다.

어느새 윤수혁이 까먹었다는 듯 가지고 온 사진을 품에 넣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마뜩잖은 인사와 예의였으나, 김추완은 가만히 있었다.

윤수혁이 한 말처럼 지금 중요한 건 그가 아닌, 장세룡이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

윤수혁이 방을 나가자, 김추완은 스마트폰을 꺼내서 연락처를 뒤졌다.

장세룡이 휘두른 칼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잽싸게 휘두를 만한 커터칼이라도 쥐고 있어야 했다.

이대로 목이 베일 순 없으니까.

* * *

김 의원을 만난 다음, 저녁에는 박 보좌관을 만났다.

전에 사준다고 했던 고기를 이제야 사게 된 것이었다.

공천 떨어지면 볼 면목이 없지 않겠냐면서, 결과 나오면 만나자고 한 탓이었다.

청담동의 유명한 한우 전문점에 들어가자, 머쓱하게 앉아 있던 박 보좌관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흐흐, 이제 바쁘신 몸인가 보다?”

“예, 오늘 공천 후보들 소집하던데요. 그거 말고도 후원 계좌 트라고 은행에서 전화오고…… 뭐, 바쁘더라고요.”

박 보좌관이 내 수저를 챙겨 주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도 24번은 좀 애매하지 않아?”

“애매하니까 줬겠죠?”

“흐흐흐, 말은 잘 한다. 어쨌든 운 좋으면 영감님 되시겠네?”

“뭐, 안 된다고 해도 제가 못 살 이유는 없잖아요? 저 돈 많이 버는데.”

“그렇쥐, 아! 나 아직 주문 안 했다.”

“제 동생이 미리 했어요, 저기 벌써 나오네요.”

내가 턱짓하자, 박 보좌관이 눈을 껌뻑였다. 종업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숯불을 가져오고, 고기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동생이 여기 사장이야?”

“아뇨, 아는 동생인데, 수행비서 해 주고 있어요. 일이 좀 많아야죠.”

“이야, 벌써 영감님 다 됐네.”

“그럼 영감님이 구워 주는 고기 드십쇼.”

그렇게 박 보좌관과 농담 따먹기를 하듯 얘기를 나누면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소주도 까서 한 병을 텅 비웠고.

기분이 좀 풀린 것처럼 보여서 나는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보좌관님, 저 국회 들어가게 되면 부탁 하나 할게요.”

“뭔데?”

“같이 일합시다.”

“흐흐흐, 그것도 괜찮지. 근데 그게 맘대로 되겠냐, 너도 알잖아?”

모집 공고를 내서 보좌진을 뽑긴 했으나, 낙하산이 일부 있었다.

거기서 박 보좌관의 거취가 정해질 수 있었다. 선수 높은 의원이 오라고 하면 가야만 했다.

거부했다간 괜히 나한테까지 불똥이 튈 수도 있었다.

그건 의원이나 보좌관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기에 한 말이겠지만, 나한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설마 아무것도 없이 그랬겠습니까?”

내 말에 박 보좌관의 눈이 껌뻑거렸다.

“……그럼 뭐가 있다는 거야?”

“저도 뭐가 있죠. 괜히 비례 받았겠어요?”

19대 의원 중에 의원직을 상실할 새한국당 인원만 열 명 안팎이었다. 신민주당과 군소 정당과 무소속을 합치면 스무 명이 넘어갔다.

선거법, 공직자법 등등을 위반해서 100만 원 이상의 벌금형을 선고받은 이들.

그들 일부에게서 협조 정도는 구할 수 있었다.

협박하든, 회유하든.

무엇보다도 나는 대통령이 바뀌어도 일어날 일들을 알고 있었다. 전 정권에서 추진하던 사업, 교섭단체 대표들이밀어붙이는 것들.

어느새 박 보좌관이 나를 오묘한 눈으로 보기에 피식 웃었다.

“그럼 일단은 하나만 해 주세요.”

“어떤 거?”

“보좌진 리스트만 먼저 뽑아주세요.”

“그 정도야 쉽지. 근데 다 팔려 가고 남은 애들로 꾸리려면…… 힘들지 않겠냐? 내가 너 가고 나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박 보좌관의 너스레에 다시금 웃었다.

나는 그의 빈 잔에 소주를 채워 주면서 말을 이었다.

“일단 에이스들로 팀만 꾸려 주세요. 위닝 포메이션 짠다고 생각하고…… 아, 7급 수행비서 해 줄 친구는 따로 있어요.”

“오케이, 그 정도야 뭐. 지금 써줄까?”

취기가 좀 오른 것인지 박 보좌관이 수첩까지 꺼내서 순식간에 이름을 적어가기 시작했다.

오늘 오후까지 국회에 있던 사람이어서 그런가, 이름이 술술 나왔다.

어느새 보좌진 여섯 명의 이름이 쭉 적혔다.

박 보좌관이 수첩 한 장을 뜯어내게 휙 내밀었다.

“이게 에이스 팀.”

그의 말에 뜯긴 종잇장을 들었다.

보좌진 중에서 실력도 좋고, 성격도 좋다던 사람들이 쭉 적혀 있었다.

“좋네요. 이거 참고할게요.”

“에이스 아닌 팀도 있어야지?”

“그건 이거 안 되면, 나중에 받을게요.”

내 말에 박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일단 순번이 와야 그것도 쓸모가 있는 거지.”

왠지 자조적인 말투였다.

비례대표 24번까지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모양이었다. 차마 나한테는 직접적으로 말하진 못하고.

나는 그런 박 보좌관의 빈 잔을 다시 채워 주었다.

“4.11을 위해서 짠 한 번 하시죠.”

“그래, 4.11을 위해서.”

* * *

3월 중순, 성북동의 고급 한식당.

장세룡이 미송으로 짜인 한옥 대청에 들어섰다.

한복 차림의 20대 여성이 공손한 인사로 맞이하고는 곧장 객실로 안내했다. 여성이 오래지 않아 걸음을 멈추고 장지문을 밀자, 널찍한 내부가 드러났다.

먼저 와 있던 두 사람이 일어섰다.

흰 머리가 돋기 시작하는 5, 60대의 사내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친근한 웃음을 지었다.

“장 의원, 어째 선거철에 신수가 더 훤해졌어? 놀고 먹나보다?”

“김상철이! 인마, 내가 너하고 같겠냐?”

장세룡이 그러면서 김상철의 어깨를 쳤다.

김상철은 장세룡의 친구이자, 대검 차장을 지냈던 서울대 법대 출신의 로펌 고문이었다.

이내 둘이 낄낄대면서 한두 마디의 농담을 더 했고, 장세룡이 안부 인사를 마친 뒤에 뒤쪽을 바라봤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박우형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장세룡 의원님, 오랜 만에 뵙습니다.”

장세룡이 다가가 악수를 나눴다.

“아, 총장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총장 끝나고 변호사 사무실 개업한 지 벌써 1년째입니다. 이젠 총장 소리 부끄럽습니다, 하하.”

“요새 변호사 사무실이 문전성시라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박우형이 웃는 사이, 김상철이 끼어들었다.

“장 의원, 너 자꾸 친구 후배한테 ‘님’자 붙일래? 어차피 학교 후배잖아. 그냥 박 변이라고 불러. 우형아, 너도 괜찮지?”

김상철이 옆에 있던 박우형을 향해 물었다. 박우형이 넙죽 고개를 숙였다.

“그럼요. 의원님께서도 편하게 박 변이라고 부르십시오. 어차피 학교 후배지 않습니까?”

“하하하, 우리 박 변 성격이 참 좋네.”

그렇게 인사 차 얘기를 나누고, 술과 음식이 세팅되기 시작했다.

한 상 거하게 차려 먹은 이후였다.

장세룡이 시중을 들던 젊은 여성들을 물린 뒤, 품에서 흰 봉투를 하나 꺼냈다.

두 시선이 봉투와 장세룡을 오갔다.

시선을 받은 장세룡은 둘을 바라보다가 봉투로 눈짓했다.

“전문가들이 계산 한 번 내봐.”

“뭔데 그래?”

김상철이 얼른 가져가서 봉투를 열었고, 안에서 잘 접힌 몇 장의 종이를 꺼냈다.

김추완과 관련한 비리 의혹들이었다.

직접적인 장부 기록도 있었으며, 김추완의 통장 입출금 내역 사본과 녹음 기록 같은 것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옆에 있던 박우형도 김상철이 확인한 것을 차례로 살폈다.

이내 둘이 마지막 장까지 훑을 무렵.

장세룡이 슬그머니 물었다.

“어떤 거 같아?”

“배임수재죄가 한 건 확실하고, 나머지는 수사하면 더 나오겠지마는…… 이걸로는 일단 의원직 상실 백 프로다. 기본 형량이 징역 4월은 나오거든.”

김상철과 박우형의 시선이 교차하며 긍정하는 사이, 장세룡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럼 됐네.”

“……뭐가?”

“내가 백업해 줄게, 이거 밀고 나가자.”

“진심이냐?”

“지금이 적기야, 더 늦으면 안 돼.”

“……계파 싸움이냐?”

장세룡이 고개를 저었다.

“싸움 아니고 정리하는 거지, 그리고 나는 너 말고 박 변한테 맡길 생각이다.”

“저, 저 말입니까?”

“어, 박 변. 상철이는 법복 벗은 지 꽤 됐잖아? 후배들 다 정퇴하지 않았어?”

박우형이 김상철의 눈치를 보는 사이, 장세룡이 말을 이어 갔다.

“이거 대검에서 확실하게 밀고 가, 박 변 후배들 아직 한창 현역 아닌가?”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5선 의원을 상대로 하기에는…….”

“나도 위에서 결재 받은 거야, 걱정 말고 밀고 나가. 그리고 상철아, 너는 따로 부탁하나 하자.”

심각한 눈을 하고 있던 김상철이 움찔하면서 장세룡을 바라봤다.

“왜?”

“윤수혁 좀 알아?”

“윤…… 아! 연평도 의인? 공천 받은 애 말하는 거냐? 걔는 또 왜?”

“덫이라도 하나 놔야 되겠어.”

“무슨 소리야?”

김상철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되묻자, 장세룡이 미간을 구겼다.

“함정 수사든, 뭐든 간에 윤수혁이를 좀 털어야 된다고.”

“걔를 왜?”

“윤수혁이한테 뭐가 있어, 그놈 때문에 김추완도 내가 지 찌를 거 알아.”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 봐.”

김상철이 도통 모르겠다는 눈을 하자, 장세룡의 입이 다시 열렸다.

“너는 윤수혁이 마크하고, 박 변은 김추완 마크하라는 소리야. 내 말 비토(Veto)하지 마, 김추완도 칼 뽑았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김상철과 박우형이 침을 삼키는 사이, 장세룡이 마침표를 찍듯 말했다.

“나 찔리면 다 죽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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