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11. 국회로 (1)
여의도, 고급 중식집.
주홍 스커트를 입은 종업원을 따라 걸었다. 복도에서 김추완의 수행비서와 눈인사를 하고, 큼직한 앤틱 문 앞에서 멈췄다.
“손님 오셨습니다.”
종업원이 낭랑하게 말하고는 손잡이를 당겼다.
방 안에는 큼직한 원형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고, 김추완 의원이 문을 바라보듯한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는데, 눈살이 찌푸려졌다.
번들거리는 눈빛과 태연하게 젓가락을 쥔 모습, 어깨선이 반듯한 정장에서 아집과 교만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내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분위기가 너무나 권위적이었다.
이내 그의 늙은 입이 움직였다.
“너야?”
예상된 고압적인 말투.
이건 물음이라기보다, 한껏 얕잡아보는 탄식이었다. 끄트머리가 휙 올라가는 게 사람 속을 긁어 내릴 만한 말투였다.
뭐, 이런 걸로 속이 상하진 않았다. 이제 김 의원의 애가 끊어질 듯 탈 예정이었다.
나는 별다른 대꾸 없이 앞의 의자를 당겨서 앉았다.
“…….”
그러자 김 의원이 미간에 새겨져 있던 주름이 더 진해졌다. 못마땅한 듯 유린기를 집고 있던 젓가락이 멈췄다.
내가 새파랗게 어린놈이니 아랫사람으로 보는 모양이었다.
나도 이해는 한다만, 그 장단에 놀아줄 생각은 없었다. 이 협상에선 내가 우위에 있어야 했다. 그리고 내가 우위에 있을 것이었다.
“중화요리 어지간히도 좋아하시네요.”
내 말에 김 의원의 동공이 움찔거렸다. 쥐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은 그의 입이 열렸다.
“너, 나 알아?”
“잘 알죠, 오늘도 유린기 드시나 봐요?”
장 의원을 잘 알듯, 김 의원도 적잖게 알았다. 그가 가는 중식당 같은 협상 장소도 몇 군데는 알았고, 뭘 먹고 마시는지도 여전히 기억했다.
장 의원이 날개를 달고 비상할 때, 김 의원이 추락한 건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었고.
“…….”
이내 김 의원의 분노 어린 시선이 나를 향했다.
표정은 저래도 김 의원은 화를 내지 않았다. 성질이 나쁜 편이긴 했으나, 정치적 직감이나 계산은 빠른 인간이었으니까.
아마도 감시를 당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며칠 전 보여 준 장부 사본과 잘 안다는 말 한 마디로 만든 효과였고, 그건 내가 바란 것이기도 했다.
이제부터는 내 말에 더 흔들리게 될 것이었다.
탁-
들고 온 노란 서류 봉투를 원형 탁자에 올려놨다. 장부 사본이 담긴 봉투였다.
어느새 김 의원이 시선이 빠르게 봉투로 향했다가 다시 내게 닿았다. 뭐냐고 묻지도 않고, 내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분위기를 잡으려던 김 의원이 주도권을 좀 떼어 주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물론 떼어 주는 게 아니라 내가 가져간 것이겠지만.
이내 한쪽 다리를 꼬며 운을 뗐다.
“지금부터 하나씩 말씀드릴게요. 잘 들으세요.”
* * *
얼마나 됐을까.
김추완이 윤수혁을 향해 소리쳤다.
“그만!”
윤수혁이 김추완의 지역구인 울산울주군에 교부한 정부 출연금의 남용에 관해 설명하고 있을 때였다.
방 안에 적막감이 내려앉자, 김추완이 속을 고르듯 길게 숨을 내뱉었다.
윤수혁은 이미 몇 가지의 이야기를 늘어놨었다.
제삼자뇌물공여죄에 해당하는 중견기업의 청탁 사실이나 일본계 기업인 치바 그룹의 임원에게 내부 문건을 유출한 사실 등등.
선출직 공무원인 국회의원이 저지르기에는 도덕적으로 흠이 많은 범죄였다.
오래지 않아 벌게졌던 안색을 되돌리고, 김추완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아실 것 같은데요.”
그 말에 김추완의 입가가 꿈틀거렸으나, 상소리가 나오진 않았다.
“……국회 들어오게 해 달라, 그거냐?”
4급 보좌관의 보고서와 구로세무서의 조사 보고서, 검사 출신인 후배 의원의 조사 내역을 정리한 하나의 결과였다.
깨끗한 과거, 능력 있는 CEO, 그리고 새한국당의 당직과 선거 영상.
마지막으로 새한국당 비대위원이자 공천의 핵심인 자신에게 접근한 사실을 더하면, 윤수혁이 원하는 것은 국회 밖에 없었다.
그 말과 생각이 맞다는 듯 윤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너…… 정치 모르지?”
“압니다.”
“안다는 놈이 공천 받겠다고 상대를 겁박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이렇게 해서 공천이 잘 될 것 같아? 나중은? 공천 끝난 다음에도 협박하고 다니게?”
참고 있던 김추완의 성질이 삐져나왔으나, 윤수혁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더 차가워져 있었다.
‘공천 다음은…… 당신하곤 상관없지.’
윤수혁이 가진 김추완의 비리에 대한 기억은 묻혀 있는 과거가 아니었다. 언론에서 대서특필될 내용이었다.
기간은 2012년 4.11 총선 직후.
대검찰정 중앙수사부의 발표가 났고, 김추완을 시작으로 의원 몇과 고위공무원, 대기업 임원과 사업가 몇이 연루되어 난리가 났었다.
이후 야당의 부정선거 의혹으로 잠잠해지긴 했으나, 윤수혁이 잊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대검 중수부의 고발자가 장세룡 의원이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고 내색하지 않았지만, 장세룡을 최측근에서 보필하다가 윤수혁이 알게 된 것이었다.
전략통이라는 장세룡의 내부자 정리였으며, 당 내 물갈이 작업이었다.
이내 윤수혁이 설명하듯 대답했다.
“지금은 거래를 트려고 온 겁니다.”
“뭐?”
“그러니까 제가 받을 건 공천이고, 의원님이 받을 건 이겁니다. 제가 여태까지 떠든 거, 그게 이겁니다.”
윤수혁이 탁자 위의 봉투를 짚으며 눈을 깜빡거렸고, 다시금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앞서 말한 건 협박이 아니고, 의원님이 받을 게 뭔지 미리 알려 드린 겁니다. 공천이랑 바꿀만한 건지 확인은 하셔야죠. 뭔지도 모르고 거래할 순 없잖습니까?”
“싫다하면?”
“아시잖습니까? 인터넷 기사하고 신문지면, TV에서 의원님 이름 팔릴 겁니다. 이거 좋아라 하는 기자들 많습니다.”
김추완이 그 말에 봉투를 쳐다봤다.
“그게 원본이라고? 사본이고, 가짜면?”
“가짜면 국회에 들어가서 제가 피 볼 텐데요, 의원님.”
“…….”
“이거 복사해서 보내드리기라도 해야 됩니까?”
김추완이 차마 대답하지 못한 사이, 윤수혁이 여전히 봉투를 짚은 채 말을 이었다.
“비례대표 25번, 그거면 됩니다.”
4.11 총선 당시, 새한국당의 비례대표 합격 최종 순번이 25번이었다. 윤수혁이 그때를 떠올리며 말하자, 김추완이 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25?”
비례대표 25번은 당선권이 아니었다.
2008년 4.8 총선 당시에 비례대표 당선자는 22번까지였다. 25번이면 떨어질 가능성이 높은 자리였고, 천운이 따라야만 합격이 가능한 범위였다.
김추완의 꾸덕꾸덕했던 표정이 그제야 좀 풀렸고, 안색을 확인한 윤수혁이 말을 이었다.
“여성 홀수제가 걸리면 24번으로 해 주세요. 아, 제가 주의사항 말씀드릴 필요는 없겠죠? 당연히…… 거래 외의 다른 행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밖에 있는 의원님의 수행비서가 제 손에서 이걸 강탈하려고 한다던가…….”
힘으로 빼앗는 것도 김추완이 생각한 한 가지 방법이었다.
그러나 비례대표 25번이라는 말에, 물리적인 위해는 굳이 선택지에 넣을 필요가 없었다. 충분히 대화로 풀 수 있는 협상이 된 것이었다.
윤수혁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런 거 하지 마세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제 회사 자본금이 780억이고, 제 재산은 1,000억대 입니다. 아마 드릴 게 많을 겁니다.”
김추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돈 때문이 아니더라도, 생각의 끝에는 YES라는 선택지 밖에 없었다.
모든 게 윤수혁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후원회장을 통한 장부 공개부터 뒷조사, 지금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윤수혁이 요구한 비례대표 25번도 YES를 유도하고 있었다.
김추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국회 들어오면 목줄부터 채워 주지.’
대한민국의 정치는 엄연한 정당 정치였고, 정당 정치는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법안에서 문장 몇 개 추가하고, 삭제하는 개정법률안을 발의하는 일도 10인 이상의 국회의원이 찬성해야 했다. 정부에서 법안을 제출해도, 상임위의 의원들이 가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의원들 몇을 움직이면, 윤수혁 하나 휘어잡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김추완이 입을 열었다.
“비례 24번에 네 이름 올려줄게, 대신에 낙마해도 그건 가져와야 돼. 안 되면 이판사판이다. 무슨 말인지 알지?”
그 말에 윤수혁이 봉투를 집었다.
“예, 그럼 공천심사 면접 때 다시 뵙겠습니다.”
* * *
중화식당을 나오자마자, 영석이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영석아, 경호원 한 명만 붙여 줘. 24시간으로.”
“네, 대표님.”
영석이는 깔끔하게 대답한 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제 한 명의 완벽한 비서가 되어가고 있었다.
김 의원이 마지막에 말한 이판사판이라는 말이 내심 걸려서 그랬다.
궁지에 몰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궁지에 몰리지 않은 장 의원도 직접 삼단봉을 휘둘렀었다.
그렇게 벤츠에 올라서 집으로 갈 때였다.
안 고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 자네 김추완이 만났지? 어떻게 됐나? 당비로 쇼부라도 봤는가?
궁금한 게 많은 여간 모양이었다. 쏟아붓듯 이어진 안 고문의 질문에 피식 웃었다.
“아뇨, 비례대표로 추천해 준다는 대답만 들었습니다.”
- 몇 번인가?
“글쎄요, 20번대 정도 되지 않을까요?”
연기를 해야 했다.
안 고문은 내가 장부와 각종 비리 내역을 쥐고서 협박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는 것이라곤 첫 만남에서 내가 언급한 특별당비뿐이었다.
사실 그때도 안 고문을 설득하기 위해 내뱉고 본 말이었다.
당에 특별당비를 내는 관행이 있긴 했으나, 제삼자 명의가 발각되고 대가성이 입증되면 당선 자격을 박탈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권력과 인맥에 따라 발각될 확률이 다르겠지만.
여하튼 조심해야 하는 게 특별당비 납부였다.
어느새 안 고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20번 대라…… 어차피 윗순번은 다 정해져 있겠지. 그래서 20번 대를 받기로 끝냈단 말인가?
“네.”
- 특별당비는?
“말 안 했습니다.”
- 돈도 많은 사람이 왜? 땅 파서 나온 것도 100억이나 되잖은가?
안 고문의 놀란 목소리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전에 드린 말씀, 기억나세요? 순수한 정치적 열망이 있다는 말이요. 고문님 처음 만나서 제가 한 말인데, 그거 농담 아니고 진심입니다. 특별당비 같은 거 없이 이대로 갈 겁니다.”
믿을 것 같진 않았지만, 일단 말은 뱉었다.
나는 안 고문과 모든 걸 공유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는 내 일의 일부를 대신 해 주고 대가를 받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가 내게 바치는 충성이 적진 않았지만.
이내 안 고문의 옅은 웃음소리가 스마트폰을 넘어왔다.
- 흐흐흐, 정치는 잘 하겠어.
“예?”
뜬금없는 말에 되묻자, 안 고문이 느긋한 어조로 대꾸해 왔다.
- 얼굴에 철판도 잘 깔지, 연기도 잘 하지. 이미 반 정치인 아닌가? 아무리 봐도 자네는 분명 빠꼼인데, 이럴 때 보면 긴가민가해. 그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내가 이 정도면, 웬만한 놈들은 껌뻑 속지 않겠나?
“진심입니다, 고문님.”
- 대답 들어 보니 국회에 들어가게 되겠구만. 순번이 몇 번이든 간에.
안 고문도 이제 눈치를 챈 듯 말했다. 자신도 모르는 방법으로 금뱃지를 보장 받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해 줬다.
“훌륭한 정치가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