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32화 (32/191)

# 32

10. 잘하고 있어요 (4)

[YSH 조사 보고서]

겉장을 넘긴 김추완이 미간을 좁혔다.

이내 한 장, 두 장을 넘기던 그가 종잇장을 쥔 채 멈췄다.

“이게 다야?”

김추완의 찢어진 눈초리가 차렷 자세의 4급 보좌관에게로 향했다.

긴장한 얼굴로 김추완을 바라보던 보좌관이 얼른 입을 열었다.

“뒤에 한 장 더 있습니다.”

“이 미친놈이…… 누가 몰라서 물어?”

김추완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그의 손에는 겉면을 포함해서 고작 네 장짜리에 불과한 보고서 밖에 없었다. 심지어 보고서 내용도 여백이 상당히 많아서 별 게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문장이 긴 것이라고는 윤수혁의 국회 비서시절 업무 행태와 맡은 당직, 제작한 선거 홍보 영상 등의 일에 관한 것들이었다. 불법 정황이나 위법 사항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다.

개인을 탈탈 털었다고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분량이었다.

보좌관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죄송합니다.”

“너, 직접 가 봤어?”

보좌관이 멈칫했다. 지시를 받은 건 고작 몇 시간 전이었다.

조사하고, 전화를 걸어서 자료를 받고, 출력해서 청담동까지 달려오기만 해도 빠듯했다.

윤수혁이 대표이사로 있는 투자자문회사는 같은 여의도지만 가 볼 수도 없었다. 무슨 권한이 있다고 가서 사무실을 찾아간단 말인가?

보좌관은 고개를 숙였다.

김추완이 변명을 듣자고 말한 게 아니라, 단순히 힐난하기 위함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대꾸라도 했다간 방금 한 장 남았다고 했을 때처럼 화가 돋으리라.

“죄송합니다.”

“니미…… 싹 찢어 버려.”

김추완이 꽉 틀어쥐고 있던 보고서를 보좌관에게 내팽개치듯 주고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금세 연락처에서 ‘구로세무서장’을 찾은 김추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나 김추완입니다.”

- 아이고, 의원님! 공사가 다망하실 텐데 어쩐 일로 전화를 주셨습니까?

구로세무서장이 깍듯하게 대꾸했다.

단순히 국회의원이어서, 장관급의 의전이 뒤따르는 위치여서 그런 게 아니었다.

김추완은 새한국당에서 손꼽는 실세였고, 17대에 재정경제위원회에 속했을 때는 세무서를 감사하는 위원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당시에 국세청 이하 세무서가 혜택을 보기도 한 데다가, 김추완이 기재위의 의원 몇을 움직여서 세무서를 괴롭힐 수도 있기에 공손하게 대해야만 했다.

금세 김추완이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하는 회사로 직원들 좀 보내 주십시오. 부정부패와 탈세로 의심이 되는데 증거가 없어서, 개인적으로 부탁드리게 됐습니다. 이거 공식적으로는 하기가 힘든 거 아시지요? 나도 정황만 파악한 겁니다.”

술술 늘어놓은 거짓말에 구로세무서장이 얼른 대꾸했다.

- 그럼요, 의원님. 조사관은 내일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바로 보내겠습니다. 거기가 어딥니까?

“대화투자자문, 대표이사 윤수혁. 위치는 여의도입니다.”

- 알겠습니다. 세무 공무원으로서 선진세정구현을 실천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적인 부탁이 아닌, 공적인 업무로 만드는 구로세무서장의 말이었다.

차후 문제가 될 일도 없었다. 탈세 의혹 제기는 늘상 있는 일이었고, 비정기 조사를 나가는 것도 없는 일이 아니었다.

김추완이 곧 구로세무서장에게 답례의 말을 건넸다.

“조만간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 여부가 있겠습니까, 의원님.

전화를 끊은 김추완이 스마트폰을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연락처 카테고리를 확인했다.

그중 법제사법위원회에 있는 재선의원의 이름을 눌렀다.

“어, 나 김추완이야.”

- 아! 선배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과는 다르지만 서울대학교 동문이고, 같은 사모임에 속한 사이였다.

또한 정치계 입문이 늦은 재선의원은 김추완과는 열 살도 차이가 나지 않아서 서로가 선후배라 부르고 있었다.

김추완이 느긋한 어조로 안부를 물었다.

“나는 잘 지내지, 자네는 어떤가? 아들 유학 갔다면서?”

- 네, 학비에 생활비 대느라 허리가 휩니다. 마누라가 영수증 관리한다는데 기가 차네요, 하하하.

재선의원이 너스레를 떨자, 김추완도 가볍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로펌이라도 들어가서 전관예우라도 받지그래? 자네 대검 출신 아닌가?”

- 어휴, 옛날 얘깁니다.

“그래? 밑에 자네 후배들은 뭐하는데?”

묘하게 바뀐 김추완의 어감에 재선의원이 멈칫했다.

-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 사기꾼 같은 게 하나 꼬여서 그래.”

- 선배님한테 사기꾼이 붙었다고요?

“그래, 자네가 조용히 확인 좀 했으면 해. 괜히 일 키우고 소란해서 좋을 거 없잖아, 지금 같은 시국에.”

- 그렇죠, 공천이 코앞인데…….

재선의원이 은근히 말꼬리를 흐렸다.

마치 바라는 것이 있는 듯한 말투에 김추완이 피식 웃었다.

“자네는 공천 걱정할 거 없어, 이번에 3선하고 중책도 한 번 맡아야지. 아니면 법무부 장관도 괜찮지, 명색이 대검 출신인데.”

- 하하하, 말씀 고맙습니다. 제가 조용히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놈 누굽니까?

김추완의 주름 진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대화투자자문 대표이사, 윤수혁.”

* * *

며칠 뒤, 전남 소록도.

영석이와 함께 봉사단체를 통해 집수리와 허드렛일을 좀 하고 있었다.

겨울을 앞두고 주택 보수와 한파를 대비하는 것이었다. 보온재로 상하수도 파이프를 감싸고, 바람이 드는 화장실의 깨진 벽에 보수용 시멘트를 바르는 일 등등.

입고 온 옷도 지저분해지고, 하루의 일이 끝날 무렵이었다.

“대표님, 전화 왔습니다.”

장갑을 끼고 있던 영석이가 후다닥 움직이더니, 맨손으로 스마트폰을 건넸다. 나는 막 장갑 한 짝을 벗다가 피식 웃었다.

“그냥 장갑 끼고 줘, 유별 떨 필요 없어.”

“네, 대표님.”

영석이가 싹싹하게 대답했고,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했다. 한창 회사 운영에 신경 쓰고 있을 오 대표였다.

“여보세요.”

- 대표님, …… 오늘도 조사관 다녀갔습니다.

“무슨 일 생겼습니까?”

- 그건 아닙니다만…….

“커피나 음료도 대접하고, 대답도 잘 해 주셨죠?”

- 네, 그런데 이게 잘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디서 압력이 좀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직원들 신상까지 파악하는 것 같고…….

나는 가볍게 웃었다.

벌써 조사관들만 두 번이나 왔다 간 셈이었다.

얼마 전에 김추완 의원의 후원회장과 만난 게 자극이 된 모양이었다.

김 의원이나 후원회장이나 셈이 밝아서 바로 찾아올 줄 알았는데, 은근히 먼 길을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물론 도로 가든, 모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하니 상관없긴 했다.

나도 공천만 받으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과정이 지나면, 김 의원도 깨닫게 될 것이었다. 안 고문이나 오 대표가 한 수 접고 들어온 것처럼.

당연히 당내 중진이자, 5선 의원이니 쉽게 될 리는 없겠지만, 방법이 없진 않았다.

“잘하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 대표님, 그리고 인원 확충과 사무실 확인 건은…….

“오 대표님이 알아서 하십시오. 물론 내 회사다, 생각하고 진행하셔야 합니다?”

- 물론입니다.

“진심으로 본인 회사라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내 말에 오 대표가 주춤하더니 전보다 힘 있게 대꾸했다. 내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 명심하겠습니다!

이 회사의 대표 자리면 충분히 나를 위해서 일할 것이었다. 여태 그래 왔듯 앞으로도 계속.

사실 이 정도 되니, 이제 누가 와도 충성할 것 같았다.

대화투자자문의 총 자본금이 700억을 훌쩍 넘은 상태였다.

결코 1년짜리 회사라고 볼 수 없는 규모였다.

내가 점찍은 부동산과 주식 값이 뛰기도 했으나, 정상적으로 벌어들인 수익도 상당했다.

연평도 사건 이후에 대기업 계열사 몇 군데에서 이미지 활용을 위해 자산 운용을 위탁했고, 부유층 일부가 개인 투자를 맡긴 덕분이었다. 그 덕에 기본 수수료와 성과 수수료가 회사 자본금의 많은 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다.

내가 내주는 아이템 하나에 성과 수수료로 수십억이 발생하기도 했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나는 다시 봉사 현장으로 돌아갔다.

영석이가 다른 봉사원들과 함께 쓰던 시멘트를 밀봉하고, 부자재를 커다란 농업용 비닐로 덮고 있었다. 보고 있자니 가볍게 웃음이 일었다.

시킨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하는 놈이었다.

가슴이 뿌듯하거나 내 안의 사명감 같은 게 생기진 않았으나, 썩 마음이 편하긴 했다.

“역시 몸 쓰는 일이 어울리나.”

그러다 문득 팔뚝과 어깨에 알이 배긴 것 같아서 고개를 저었다. 나도 대표라는 자리에 적응하긴 한 모양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맞나?

어느 샌가 내 눈치를 확인한 영석이가 달려왔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그런 영석이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대표님, 제가 무슨 잘못을……?”

“너도 잘하고 있어, 의전이 좀 과하긴 한데. 그건 내년 봄부터 고치면 돼.”

“네?”

영석이가 잘못 들었다고 대꾸하는 사이, 나는 다시 장갑을 꼈다.

“이거 마무리하고 사우나나 가자.”

* * *

영등포구, 구로세무서 서장실.

서장실 안에 들어선 김추완이 구로세무서장과 악수를 나눴다.

“바쁘신데 여기까지 걸음하실 필요는…….”

구로세무서장이 통화 때와 다르게 힘 빠진 어조로 맞이했다. 마치 찔리는 게 있는 부하 직원 같은 모습이었다.

구로세무서장의 눈치를 확인한 김추완은 곧장 문건이 가득 쌓인 테이블 앞에 앉았다.

말없이 테이블 위를 스윽 훑던 시선이 서류철 앞에서 멈췄다.

스테이플러 와 사무용 클립으로 정리된 수많은 서류 뭉치 중에 서류철 하나만 반듯하게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김추완이 대뜸 서류철을 집으면서 구로세무서장을 쳐다봤다.

“이겁니까?”

대화투자자문과 윤수혁에 대한 조사 자료냐고 묻는 것이었다. 차마 자리에 앉지도 못한 구로세무서장이 조심스레 양손을 모았다.

“아, 그게…… 네.”

변명이나 다른 말 대신에 구로세무서장이 주저하는 대답을 내놨다.

서류철 안에는 세무조사 내역이 항목별로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각종 세법 용어 와 숫자의 나열이 편한 양식은 아니었으나, 재경위를 거쳐 온 김추완이 보기에 어려운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게 잠깐 동안 서류철 내의 종잇장을 넘기던 중이었다.

김추완이 디 보지도 않고 시선을 들었다.

“이게 답니까?”

“……네, 의원님.”

구로세무서장이 죄라도 지은 듯 고개를 숙였다. 김추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의혹제기를 했고, 회사와 대표자까지 알려 줬는데도 성과가 없음을 질책하는 것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구로세무서장은 어느 기업이든 세무조사에 들어가면 절세를 빙자한 탈세 자료가 있다고 믿었는데, 윤수혁과 대화투자자문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내기 번거로운 세금까지 찾아가면서 꼬박꼬박 납부했었고, 과다납부를 꺼리지도 않았었다.

한마디로 윤수혁은 대한민국에서 보기 힘든 우수 납자세였고, 성실 납세자였으며, 모범 납세자였다. 표창을 받아도 수십 번은 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까라면 까야 하는, 김추완의 지시를 이행하지 못한 구로세무서장은 군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오래된 눈치로 변명을 감추고, 꾸중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추완은 예상과 다른 말을 뱉었다.

“이거 물건이야.”

“……네?”

구로세무서장이 깔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김추완이 별다른 기색도 보이지 않은 채, 서류를 덮고 있었다.

“수고 많았어요. 서장님.”

“아아, 아닙니다. 의원님.”

이내 훌쩍 일어선 김추완이 손바닥을 털었다.

“이거 깨끗하게 폐기하고 평소처럼 업무보세요. 내가 괜한 시간 뺏은 것 같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의원님. 귀한 시간 내셔서 행차해 주신 것만으로 감사드립니다.”

구로세무서장의 얼굴에서 그늘이 가셨고, 미미한 웃음이 입꼬리에 걸렸다. 성격이 좋지 않은 김추완이 한 마디의 질책도 없이 떠나가고 있었다.

“나 갑니다, 나오지 마세요.”

“네, 의원님. 살펴 가십시오.”

구로세무서장의 허리가 95도로 숙어졌고, 김추완은 서장실을 나와서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 전화 받았습니다, 선배님.

“윤수혁이랑 약속 잡아.”

- 윤…… 아, 연평도 의인이요?

“그래, 의인인지 의병인지. 그놈 쌍판대기 좀 보자.”

뚝, 전화를 끊은 김추완이 헛웃음을 뱉었다.

법사위에 있는 후배 의원을 동원해서 조사한 성과도 없었다. 알아낸 것이라고는 과속단속카메라에 두어 번 걸린 게 전부였다.

윤수혁 뿐만 아니라 대화투자자문도 보통이 아니었다.

기재부 출신으로 차관급의 단체장까지 지낸 이가 공동대표이사였고, 그 밑의 직원들도 청와대 근무 이력이 있는 인재들이었다. 추후에 수혈한 피는 베테랑의 투자전문가들로 대기업 부장을 넘어서는 연봉을 받았다.

심지어 회사는 창립한 지 1년 만에 자본금 15억에서 700억으로 불어났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윤수혁의 개인재산은 더 늘어가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초고소득층으로 1000억대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미 올해 중순에 금융위에서 비정상적인 재산 증식 속도에 윤수혁을 한 차례 조사했었다.

물론 그때도 윤수혁은 잡음 하나 없이 넘어갔었다.

그 와중에 묘한 것은 윤수혁이 새한국당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국회 비서부터 시작해서 경기도당에서 청년대책위 부위원장이라는 하급 당직을 맡았고, 김형문 강원지사를 통해 선거 영상을 제작하기도 했었다.

김추완이 마뜩잖은 듯 입꼬리를 내렸다.

“이런 게 어디서 튀어나와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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