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10. 잘하고 있어요 (3)
9월 1일, 케이블 TV에선 속보처럼 자막을 띄웠다.
그러고는 인터넷을 시작으로 그날 저녁, 전국의 방송사에 예상했던 파란이 퍼져 나갔다.
뜬금없이 등장한 서울시장 후보 때문이었다.
[이민수 서울시장 출마 고심]
[이민수 등장으로 서울시장 다자구도로 바뀌어]
전국의 방송사와 4대 일간지의 타이틀을 휩쓸며 등장한 그는 대학교수 출신의 사업가로 나보다 몇 수는 앞선 인간이었다.
쉽게 말해서, 내가 몇 개월간 해 온 것을 이 대표는 몇 년째 공고히 쌓았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서울대, 카이스트 등등의 명문대를 이력 안에 담았고, 참신한 이미지와 지식인으로서의 면모까지 갖췄다. 웬만한 사람이면 혹할 만한 캐릭터였다.
그 말인즉슨, 내 입장에서는 반갑지 못하다는 뜻이었다.
나보다 괜찮은 캐릭터가 아닌가?
물론 까보면 나하고 비교할 수준이 아니겠지만, 아쉽게도 당장 이 대표는 건들 수가 없었다.
범죄 이력도 없었고, 비리도 정황이나 의혹으로 끝날만한 게 전부였다.
나중에 정계에 입문해서 온갖 음모론의 한 가운데로 끌려들어가지만, 지금의 이 대표는 참신한 지식인일 뿐이었다.
나는 이 대표와 관련된 기사를 훑다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서울시장 출마는 하지 않았고, 반응만 떠보다가 국회로 나올 사람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놔둔 채 내 할 일을 해야 했다.
스마트폰을 꺼내서 전화를 걸자, 곧 안 고문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 윤 대표, 무슨 일이신가?
“바쁘십니까?”
- 바쁠 게 뭐 있겠는가, 뭐든 말해 보게.
내가 저번에 준 경산시장 검찰수사 건수를 잘 써먹은 모양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꽤 좋게 들렸는데, 이제 정반대로 바뀔 예정이었다.
내 입에서 나올 말 때문이었다.
“조사 좀 부탁드립니다.”
- 누굴 말인가?
“김정환 새한국당 전 대표입니다. 외국계 기업인 치바 그룹과의 관계부터 일본 정관계와의 교분에 주안점을 두시면 됩니다. 형식적으로 그렇다는 말이고, 실제는…… 굳이 말씀드릴 필요는 없겠죠?”
- …….
침 삼키는 소리만 넘어왔다.
김정환은 YS의 최측근으로 정계에 입문해서 5선이나 해먹은 국회의원이었고, 영향력이 막강한 새한국당의 수장이었다. 지금이야 당 대표에서 사퇴해서 가진 자리가 없지만, 곧 비대위원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당헌당규 개정까지 시작할 것이었다.
그사이 더딘 안 고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자네…… 김정환이 다리를 걸 생각인가?
“뭐, 비슷합니다.”
- 이거…… 김정환이는 너무 크지 않겠어? 다리 건다고 넘어갈 놈이 아닌데 말이야.
내 말이라면 무조건 수긍하던 안 고문이 주저하는 대답을 내놨다. 그만큼 김정환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 유명한 친김세력의 수장이면서 대권 후보였고, 미래에는 대통령도 해먹을 사람이었다.
“저도 잘 압니다.”
- 그런데 왜 김정환이를 잡으려 드는가? 자네 무슨 영화처럼 데뷰하고 싶어서 그래? 내가 여태 국회에서 얼굴 팔아 놓은 거, 그거 무너지는 거 아무것도 아니야. 그놈 말 한 마디면 움직일 공격수들이…….
“고문님. 긴 말씀은 못 드리고 하나 확실한 걸 말씀드리자면…….”
안 고문의 말을 자르고, 잠깐 텀을 가졌다.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그의 주의를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대통령이어도 탄핵당할 소스입니다.”
- ……!
안 고문이 내뱉는 헛숨이 스마트폰을 넘어왔다.
여태 단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던 내 정보였고, 내 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모양인지 채 말을 잇지 못한 숨소리만 건너왔다.
이내 더디게 들려온 안 고문의 목소리에는 놀란 감정이 묻어 있었다.
- 대통령도 탄핵 당한다는 게…….
“예, 그리고 다리를 건다고 말씀하셨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넘어뜨려서 다신 못 일어서게 만들 겁니다.”
- 이유는…….
“친김의 정치 장악을 끝낼 생각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미래에 외교분란과 국정혼란을 동반할 21세기 최악의 대통령이 된다고 말할 순 없었다.
- 하, 하겠네!
여전히 놀란 듯했지만, 조금 신난 것처럼 들렸다면 기분 탓일까?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좋습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다 하겠습니다.”
* * *
10월 초, 새한국당에서 윤수혁을 찾았었다.
강원지사 선거 때처럼 유세를 권유하기 위함이었고, 부탁은 한 차례의 전화로만 끝났다.
새한국당의 최고위원이자 서울시장 후보인 김영은의 체면 때문이었다. 여성 중에서 유일하게 전당대회 순위권에 들었으며, 새한국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사람이 두 번이나 전화할 순 없었다.
알아서 찾아오는 우파 성향의 사람들이 줄을 선 마당이었다.
공직자, 사업가, 지역 유지와 대의원 등등.
그랬기에 사업가인 이민수와 무소속 야권 성향의 박창일 변호사가 단일화를 이루었음에도 김영은은 지조 있게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재보궐 선거 당일인 10월 26일.
밤늦은 시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는 김영은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성원해 주신 서울 시민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오늘 선거 결과는 시민 여러분의 질책으로 삼고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박창일 당선자께서 훌륭한 시장이 되어 주시길 바라며, 끝으로 애써 주신 새한국당 동지 여러분께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개표 중이었으나 패배가 확정된 상황이었다.
김영은이 단상에서 고개를 숙인 뒤에 자리를 뜰 무렵, 안국동의 선거 캠프에서 박창일은 꽃다발을 끌어안았다.
신민주당의 주요 인사들이 박창일과 악수를 나눴고, 가까운 자리에서 카메라의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정국의 변화였다.
대선의 전초전이라 불리는 서울시장 선거에서 무명이었던 야권의 변호사가 승리했고, 새한국당내 여성의 상징이었던 김영은이 장렬하게 패배했다.
그렇게 시장 선거를 포함한 재보궐 선거가 끝나고, 공천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윤수혁이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 * *
“자리 좀 마련해 주세요.”
내 말에 안 고문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천 때문에 그런 게지?”
10.26 재보선이 끝나고 공천이 언급되고 있었다.
새한국당은 비대위 간의 알력싸움으로 공심위 조직 구성이 조금 늦어지고 있었으나, 신민주당에서는 벌써 전국 단위의 조사팀이 공천 대상자 조사에 착수한 상태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 고문이 슬그머니 물어 왔다.
“점 찍어 둔 사람이라도 있는가?”
“고문님은 있습니까?”
내심 궁금해서 묻는 것이었다.
일하는 솜씨는 경력에 걸맞게 준수해서, 눈치나 직감은 어느 정도 되는지 알고 싶었다. 요새 안 고문이 해 온 일도 자료 수집하기에는 충분했을 테고.
그러자 안 고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의 의도가 뭔지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핵심이 있긴 해.”
“그게 누굽니까?”
“장세룡이하고 김추완이.”
정확했다.
비대위원장인 김정환 얘기는 꺼내지도 않고, 딱 실세만 짚어 냈다. 친김 다음으로 영향력이 큰 전직 당 대표 신 의원이나 최고위원 출신인 고 의원은 언급할 생각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국회 내의 이해관계도 파악을 마친 모양이었다.
“그런데 내가 거기까지 어떻게 가겠나? 안면이나 터놓은 건 비대위 위원 서넛 정도에 의원들 열댓 명이 전부일세. 아직 많이 모자라지. 야당도 있긴 한데, 거긴 허깨비들 몇이 전부고…….”
안 고문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정말 중요한 소스가 아니면, 연고주의와 온갖 부조리에 엮인 국회를 뚫는 건 어려웠다.
표면상 여, 야 혹은 찬성과 반대로 입장만 갈릴 뿐, 국회는 하나였다.
온갖 것이 얽매인 거대한 유기체와 같았다.
이내 안 고문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내게 닿았다. 정보를 쥔 나한테는 뭔가가 있다고 여기는 반짝거리는 눈빛이었다.
“그래, 내가 뭘 하면 되겠는가?”
“제가 지금 시킨 일도 있고 하니까…… 공천 건은 쉽게 갈게요.”
“쉽게?”
안 고문이 더 궁금하단 듯 물었다.
“예, 김추완의 후원회장하고 다리 좀 놔주세요.”
김추완, 방금 안 고문이 언급한 공천의 핵심 중에 하나였다. 장 의원이 오른팔이라면, 김 의원은 왼팔이었다.
당연히 머리이고, 몸인 사람은 친김의 수장인 김정환이었고.
안 고문의 눈이 껌뻑거리면서 나를 응시했다.
“후원회장을?”
“예, 가능한 빠르게 잡아주십시오.”
만나서 다이렉트로 협박할 것이었다. 장 의원의 사무실에서 가져온 장부 복사본으로.
후원회장이야 명의 분산으로 후원금 관리하는데 이력이 났을 테니, 장부를 한 눈에 알아보고 김 의원을 불러 올 것이었다.
그사이 안 고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대답하는 눈을 보니 김 의원을 타겟으로 잡은 이유를 궁금해 하는 것 같았으나, 말해 줄 생각은 없었다.
아니, 말해 줄 수 없었다.
나중에 검찰 조사로 밝혀지거나 논란이 될 비리가 내 손에 있는 정보였다. 장 의원이 내부자 관리를 위해 갖고 있는 장부도 어떻게 말하겠는가?
이걸 구구절절 풀어 놓을 순 없기에 가볍게 마무리를 지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 * *
11월 중순.
관훈클럽의 지기들과 낯술을 즐기던 김추완이 문가를 바라봤다.
노크 소리가 들렸고, 그 뒤에 수행비서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김추완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쓰으,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후원회장이 급하다고 연락 왔습니다.”
수행비서가 정중히 폴더폰을 들어 보였다.
“……끝나고 연락 준다고 해.”
“정말 급하다고, 바로 연락을 달라고 하셔서…….”
수행비서가 말을 잇다가 움찔했다.
김추완의 얼굴이 있는 대로 구겨졌기 때문이었다.
옆에서 눈치를 살핀 신문사 편집부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김추완의 노기를 조금 풀어 주기 위함이었다.
“다녀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말에 간신히 체면이 선 김추완이 젓가락을 내려놨다.
그러나 방을 나오자마자, 김추완은 폴더폰을 내민 수행비서의 따귀를 갈겼다.
짝-
짜악-
연이어 두 번을 갈기고는 넥타이를 주욱 잡아당겼다. 수행비서가 휘청거리듯 움직였고, 김추완의 입이 열렸다.
못마땅한 팔자주름이 입가에 깊게 새겨져 있었다.
“후원회장이 니 애비야? 아니면 내 위야?”
“……죄송합니다.”
수행비서가 고개를 푹 숙이면서도 폴더폰을 내밀자, 김추완이 혀를 찼다.
“가서 입구나 지켜.”
“네, 의원님.”
그렇게 수행비서가 떠나고, 김추완은 눌려 있는 번호를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채 한 번을 넘기기도 전이었다.
- 서, 선배님!
커다란 목소리에 김추완이 남아 있는 짜증을 풀었다.
“너까지 왜 이래?”
- 지금 어디 십니까? 만나서 얘기 좀 해야 될 것 같은데요, 좀 빨리…….
“지금 중요한 자리야, 인마. 말로 해.”
- 선배님, 지금 중요한…….
“그냥 말로 해.”
김추완이 힘을 주며 말하자, 폴더폰 너머의 목소리에 주저함이 섞였다.
- 저, 그게…… 박 사장 2,000만원이라고 적힌 장부를…… 아니, 그거 말고 다른 것도 더 있다고 얘기를 하는데…….
“너 애냐? 쉰이나 처먹고 뭘 빌빌대. 말 똑바로 안 할래?”
- ……장부 봤습니다.
김추완이 인상을 찌푸렸다.
5선에 이르기까지, 김추완은 금품을 적잖게 수수했었다.
새 법안이나 개정안과 관련 있는 대기업들로부터 리베이트를 수령했고, 기초의원 공천권과 피감기관 감사권을 쥐고서 대가성 뇌물을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전화상으로 들은 2,000만원을 김추완은 곧장 떠올리지 못했다.
‘2천? 니미, 잘 기억도 안 나는 거를…….’
김추완은 상임위에서, 혹은 지역구에서 대기업과 연관된 사업을 관리할 때마다 억 대의 금품을 받았었다. 2,000만원은 그에게 차 값도 안 되는, 소액의 사례금과도 같은 액수였다.
그렇게 잠깐을 고민하던 김추완이 작다랗게 입을 벌렸다.
‘아아, 재작년인가?’
해외교포 출신의 사업가가 한국에서 새 사업을 한다면서 청탁하기 전부터 돈을 돌렸었다. 다른 의원은 물론이고 1급이나 차관에 준하는 공무원도 연례행사처럼 현금을 받아갔었다.
모르는 사람이 아닌, 내부인의 소개로 이루어진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이내 김추완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누가 그래?”
- 연평도 의인이라고, 윤수혁 아세요? 재작년에 북한에서 포탄 쐈을 때, 해병대 구한…….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 그 연평도 의인이 왔다 갔습니다. 원래 라운딩 했던 업자가 미팅을 잡았는데, 갑자기 그놈이 나타나선…….
“그래서. 그놈이 그걸 안다고? 뻥카 아냐?”
- 제가 장부 직접 봤습니다. 그리고 업자까지 꿰고 있는 걸로 봐서는…….
“니미, 그래서 넌 지금 어디야? 그놈이랑 같이 있어?”
- 의인은 지금 갔습니다. 연락 달라고 명함 놓고요.
“의인은…… 지랄하고 있네. 딴 데 입 뻥끗하지 말고 명함 찢어 버려.”
- 네, 선배님.
뚝, 전화를 끊은 김추완이 4급 선임보좌관의 번호를 눌렀다.
- 최경철입니다, 의원님.
“연평도 의인 싹 털어.”
- 연평도를요……? 죄송합니다, 의원님. 한 번만 더 말씀해 주십시오.
“연평도 의인 몰라? 윤…… 니미. 하여튼 그 새끼 먼지 하나까지 다 털라고. 내 이름을 팔든가, 기관장 쪼인트를 까든가. 너 퇴근하기 전까지 결과 보고해. 알았어?”
길어진 설명과 무거운 말투에 분위기를 파악한 4급 선임보좌관 최경철이 얼른 목소리를 냈다.
-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김추완이 눈을 감고 분노를 읊조렸다.
“이게 뒤질라고, 감히 누구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