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29화 (29/191)

# 29

10. 잘하고 있어요 (1)

“안녕들 하십니까?”

전 MBS 사장이자, 강원지사 후보인 김형문이 나타났다. 그것도 출근시간에 맞춰 대화투자자문의 사무실 문을 연 것이었다.

“어, 그……!”

“아나운서, 아니. 방송국 사장님이시죠?”

얼굴을 알아본 직원들이 일어났고, 들어오던 김 후보가 말끔하게 넘긴 머리를 숙였다.

“맞습니다, 김형문입니다.”

“맞다, 김형문!”

정 대리가 생각났다는 듯 외치자, 김 후보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나는 손에 펜대를 쥔 채 그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웃고 있던 눈이 내게로 향했다.

“아, 여기 계셨네. 연평도 의인 윤수혁 씨.”

“…….”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생각이 많아진 탓이었다. 김형문이 여기까지 올 줄은 예상하질 못했었다. 애초에 정치권에 들어오는 것조차 실패한 인물이라 염두에 두지도 않았었는데.

“어제 연락 드렸는데 안 받으셔서 직접 왔습니다.”

“일이 많이 바빠서요.”

“그래도 5분 정도는 얘기 나눌 수 있겠죠?”

출근한 지 30분도 채 안 된 시간이었다. 중간에 끼어들지 못한 오 사장이 내 눈치를 살피기에 가만있으라는 의미로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 의원도 쥐고 흔들었는데, 이런 후보 한 명을 내가 상대 못할까?

“사장님, 저 5분만 자리 비우겠습니다.”

오 사장이 허락이 떨어지자, 김 후보가 자신의 사무실인 것처럼 나를 바깥으로 안내했다. 다시 사무실 문을 닫고서 몇 걸음 옮기는데, 김 후보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수혁 씨, 방송 잘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시대 청년들의 본보기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대단하더군요.”

“과찬이십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누른 김 후보가 짐짓 목소리를 깔았다.

“윤수혁 씨는 꿈이 뭡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본론이나 말하면 좋을 걸, 바쁘다고 했는데도 이렇게 빙빙 돌려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터뷰하러 오신 겁니까?”

“아닙니다, 윤수혁 씨 같은 청년을 돕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국가를 수호하고 안보를 몸소 실천하는, 이런 청년이 요즘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다들 군대조차 안 가려는데.”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러니까 낙선하고, 정치에 발도 못 담갔지.

김 후보는 지금의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나 같은 어린 20대에게는 이런 조언과 도움이 통한다고 여기는 걸까?

뭔지 모르겠지만, 까탈스러울 필요가 있었다.

나는 김 후보의 아랫사람이 아니었다.

“저한테 도움이 필요해 보이십니까?”

“글쎄요, 뭐가 됐든 간에 도와주면 더 잘 되지 않겠습니까? 저 MBS 사장도 했었고, 이번에 강원지사 후보로 출마합니다. 그러니까…… 예시 하나 들어 줄까요?”

띠잉-

도착 알림음이 들린 뒤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먼저 들어가라고 입장을 권하면서 김 후보가 말을 이어 갔다.

“윤수혁 씨가 경기도당의 무슨 하급 당직자라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관련 서류도 몇 장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데 말이에요.”

“결론은 지지 연설 해 달라는 겁니까?”

내 말에 김 후보가 처음으로 멈칫했다.

“어이쿠, 직설적으로 들어오니…… 하하하. 예, 맞아요. 주말에만 시간을 좀 내서 유세 현장에 같이…….”

“바빠서 못 합니다.”

김 후보의 안색이 빠르게 굳었다.

거절한 게 별로인가? 아니면 말 자른 게 별론가? 나는 아직 굳어 있는 김 후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배웅은 주차장까지 하겠습니다. 그럼 약속한 5분 될 것 같네요.”

그제야 김 후보가 고개를 들더니 감정을 드러냈다. 조금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윤수혁 씨, 새한국당 지지자 아니에요?”

“…….”

“저도 새한국당입니다. 그럼 같은 당 동지를 도와야지, 도대체 왜…… 아니, 당직은 왜 달았어요?”

“말씀드렸다시피 바빠서 못하는 겁니다. 3월부터는 제가 졸업한 대학에 강연까지 갑니다. 안보 특강도 있고요, 스케줄이 꽉 찼습니다.”

내 과거와 성공, 그리고 연평도의 일화를 묶어서 책으로 써 내자는 출판사까지 생긴 마당이었다. 당연히 편집장과는 한 차례 미팅을 가졌고, 곧 있으면 원고 작업도 시작될 것이었다.

그 사이, 김 후보는 LED 스크린에 뜬 화면을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찌푸려졌던 그의 눈가가 좀 풀어졌는데, 이내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윤수혁 씨, 직접 왔는데 여지라도 좀 남겨 주세요, 이건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내가 당선되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말을 해도 그런……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나를 지지하는 게 아니라, 새한국당을 지지하는 건 상관없잖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유세장에 갈 시간이 없습니다.”

“그럼…… 유세장에서 틀만한 영상 하나 만듭시다. 그건 괜찮죠?”

전 방송국 사장다운 말에 잠깐 입을 다물었는데, 김 후보의 얼굴이 전보다 더욱 풀어진 것처럼 보였다. 칼같이 거절하던 내가 침묵하니 긍정이라고 느낀 모양이었다.

긍정이라기보다는, 나도 내가 받을 수 있는 걸 생각해 보고 있었다.

이 의원이나 김 후보가 비슷하다고 해도, 전직 언론사 고위직은 타협을 봐도 좋을 만한 대상이었다.

무능하긴 해도, 그가 가진 경력까지 무능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이 의원도 의원직을 해먹는 것이었고.

“윤수혁 씨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특집은 어떻습니까?”

역시나 김 후보는 방송가 인물답게 그가 줄만한 것을 내놨다.

“서민이었던 연평도 의인의 성공 신화, 그거면 사업을 하던 정치를 하던 간에 이득이지 않겠어요?”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이건 이득이었다. 아니, 정치인에게 언론매체를 이용한 인지도 상승은 항상 득이었다. 불쾌감을 주는 노이즈 마케팅까지 마다하지 않는 판국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심보가 궁금했다. 직접 찾아와선, 화까지 참아가며 설득하는 이유가 뭔지.

“하나만 여쭤보겠습니다.”

“바쁘다는 대답보다는 훨씬 낫군요.”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김 후보가 내 말에 빙긋 웃었다. 이제야 뭔가를 보여 주겠다는 듯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젊은 세대와 부모 세대의 표 값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의 말대로 지금 내 캐릭터면 도움이 되긴 될 것이었다. 서민적인 데다가 인성까지 괜찮은 캐릭터였다. 아쉽게도 화제성이 많이 떨어져서 섭외 요청이 확 줄긴 했으나, 작년 11월부터 오늘까지 나보다 이슈 된 사람이 없었다.

역시 MBS 사장을 고스톱 쳐서 올라가진 않은 모양이었다.

정수장학회나 방문진, 방통위가 병신을 데려다 사장직에 앉힐 리도 없을 테고.

띠잉-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정장 차림의 사내는 수행비서인 듯 김 후보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김 후보에게 가볍게 고개 인사를 건넸다.

“전화 기다리겠습니다.”

“직접 온 보람이 있네요, 그럼 또 봅시다.”

그의 말대로, 결정권이 없는 수행비서나 선거사무실 직원이 왔다면 성사되지 않았을 거래였다.

생각지도 않은 것치고는 괜찮은 거래였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변수가 생긴 셈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감수할 만 했다.

이미 작년에 구입한 비트코인도 등락이 심해서 수익 보장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살 때부터 시세가 급등했고, 그 여파로 뭔가가 틀어진 것이었다.

물론 아직은 이익을 보고 있어서 놔두고 있는 중이긴 했다.

김 후보처럼.

* * *

3월, 날씨가 풀렸다가도 꽃샘추위가 밀려올 무렵.

동남권 신공항 지역 선정 문제로 경상도에 연일 집회가 들끓었다. 신공항 유치를 위해서 지역구 국회의원들과 유지들이 나와서 열심히 피켓을 흔들었다.

그러던 중 3월 11일, 일본에선 충격적인 대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했다.

후쿠시마 원전에 이상 징후가 발생했고, 이튿날 원자로 1호기가, 다시 이틀 뒤에는 원자로 3호기가 연달아 폭발할 예정이었다.

노트북을 살피던 중년의 다큐멘터리 메인작가가 입을 열었다.

“화제성에서 상대가 안 되겠어요. 지금 방영하기에는 좀 그렇고, 시기를 미루는 게 낫겠네요. 이를테면 4월…… 아니면 5월?”

담당 PD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들은 게, 다들 쓰나미 특집 준비에 아주 열을 올리고 있다고…… 거기다 유럽이나 아프리카도 아니고, 일본에서 벌어진 일이라 파동도 꽤 크지 않습니까? 방영을 다음으로 미루시죠.”

이내 PD와 메인작가의 시선이 맞은편의 윤수혁에게 닿았다. 그들을 담담히 바라보고 있던 윤수혁이 입을 열었다.

“원래 약속은…….”

“3월 20일에 방영하기로 했죠. 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 혹시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촬영분은 편집도 진행 중입니다. 저희가 문제가 생겨서 방영을 미루자는 게 아니라…….”

눈치를 보던 PD가 윤수혁의 말 한 마디에 필요 없는 대답까지 하며 성실하게 읊어나갔다.

메인작가도 마른 입술을 적시면서 윤수혁을 살폈다.

‘저 사람한테 뭐가 있길래…….’

다큐멘터리 제작 단계부터 윗선에서 지시가 따로 내려왔었다. 심지어 촬영 대상과 컨셉, 방영 기한까지 정해진 지시였다.

한마디로 윤수혁에게 PD나 메인작가가 모르는 빽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사이 PD는 절절 매듯 설득하고 있었다.

아무리 윗선의 지시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고 해도, 시청률이 바닥을 기게 둘 순 없기 때문이었다. 이미 경쟁사의 다큐멘터리는 쓰나미를 소재로 제작에 들어간 상태였다.

이 상태로 경쟁사와 맞붙으면 철지난 ‘윤수혁’은 많은 사람이 외면할 것이었다.

이내 윤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PD님, 그러면 4월 초는 괜찮겠습니까?”

“3월보다야 낫긴 합니다만.”

“그러면 4월 초에는 방영하겠다는 계약서를 하나 써 주세요.”

“계약서를요?”

“저도 4월 초를 넘기기는 힘듭니다. 사정이 있어서요.”

윤수혁의 말에 PD가 약간의 난색을 표할 무렵이었다. 그의 안색을 본 윤수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는 김에 제작지원 계약서까지 같이 쓰면 어떻습니까?”

“네?”

“간접투자든, 직접투자든…… 저희 회사와 연결시켜 드릴 테니까 실무진하고 적정 한도 내에서 협의를 보시죠. 원하시는 만큼 충분히 지원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윤수혁의 상대는 방송국 PD였다, 환심을 사둬서 나쁠 게 없는 사람.

이미 다른 방송국에서도 건실하고 젊은 기업 오너로서 이미지를 그려 가는 와중이었다.

윤수혁이 그런 생각으로 PD를 바라보자, PD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숙어졌다.

“고맙습니다, 실장님.”

“저희 쪽에서 PD님한테 연락이 갈 겁니다.”

“네네, 알겠습니다.”

PD가 다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수십억 자산가라는 소문이 도는 만큼 윤수혁의 후원은 모자람이 없을 것이었다.

제작비 걱정을 덜게 된 PD의 안색이 환해졌다.

“그럼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가보겠습니다.”

윤수혁이 훌쩍 일어났고, PD와 메인작가가 따라 일어나서는 허리를 숙였다.

‘4월 중순이었나?’

윤수혁은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먼 곳을 바라봤다.

4월 중순인 선거 직전에 김형문의 불법선거운동 논란이 발생할 예정이었다. 선거사무실 직원 둘이 감옥에 가고, 선거운동원 이십여 명이 벌금을 맞게 되고.

이후 김형문은 연루 되지 않았다는 변명을 발표하지만 결국 낙선하게 될 것이었다.

윤수혁은 가볍게 웃고 에았다.

‘사건 터지면 딴 얘기 할 거 뻔하니까 4월 초라도 방송해야지.’

그렇게 윤수혁이 주차장에 도착하는 순간이었다.

입구에서 정장 매무새를 고치고 있던 최영석이 고개를 숙였다.

“벌써 오셨습니까, 실장님.”

“둘이 있을 때는 편히 해도 된다니까.”

윤수혁이 편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그러나 윤수혁의 도움으로 2월 말에 대학을 졸업하고, 대화투자자문에 취직까지 하게 된 입장에서 최영석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더구나 연평도 의인으로, 투자자문회사 오너로 알려진 윤수혁이었다.

친한 과 선배였다고 해도 전처럼 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윤수혁은 갓 대학을 졸업한 최영석과는 갭이 너무나도 큰 사람이었다.

“직원분들 앞에서도 실수할지 모르니까 지금처럼 하겠습니다.”

윤수혁이 그런 최영석을 대견하단 것처럼 바라봤다.

“뭐, 그래라.”

그러나 차에 타기 전, 윤수혁이 문을 여는 최영석을 쳐다봤다.

“그래도 나는 회사에서만 최 사원이라고 부를 거다? 최 사원하고는 이제 이틀 밖에 안 됐고, 영석이랑 지낸 건 6년이나 됐잖아.”

윤수혁이 웃으며 말하자, 최영석도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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