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22화 (22/191)

# 22

8. 첫 끗발 (1)

며칠 뒤, 여의도동의 한 빌딩.

내 시작이 될 회사가 개업했다.

상호는 대화투자자문으로 투자자문과 투자일임을 겸한다는데 별로 중요하진 않았다. 성과로 증명할 수 있는 회사만 있으면 될 일이었다.

그래서 전부 오 위원에게 일임했었다. 대화투자자문이라는 상호부터 사업계획서, 사무실 준비까지.

상호는 뭐…… 별 감상이 없었으나 개인적으로 괜한 이니셜보다야 한국말이 나았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대화투자자문’이라는 새 명패가 달린 사무실 문을 열었다. 15평정도 되는 작은 크기에 각종 사무집기가 알뜰하게 들어찬 모습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8인용 회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사무실이 작아서 가려질 게 없이 다 보이는 구조였다.

“오야붕 오셨구만.”

안 고문이 웃는 낯으로 나를 반겼다. 오 위원을 비롯한 몇 명의 사람들도 내게 고개 숙였다.

“앉아 계십시오.”

“어이고, 누가 왔는데 감히 앉아 있어?”

안 고문이 좋다는 듯 낄낄댔고, 오 위원도 엷게 웃음을 띤 채로 자리에 앉았다. 자연스레 상석에 앉자, 안 고문이 여전히 웃는 듯 말을 건넸다.

“그래, 비서 일은 마무리 잘 했나?”

“덕분에 잘 했습니다.”

대답하는데, 왼쪽에 있던 오 위원이 내게 까만 결재판을 건넸다.

내가 바라보자, 오 위원은 질문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사소개서입니다, 정관과 사업 계획서는 모두 자리에 구비해놨습니다. 그리고 여기 세 친구는 투자자산운용사로 대기증권과 농협에서 근무하던 경력자들입니다.”

오 위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30대 후반은 되었을 세 사내가 다시 일어나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도 고개인사로 답하자, 오 위원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말씀하신대로 편법은 일절 없이 설립 완료했고, 당장 오늘부터라도 근무가 가능합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대답하면서 결재판을 열었다.

그러곤 맥락과 단어만 가볍게 훑다가 직원 명단을 확인했다.

뭐로 봐도 사장이 가장 잘 어울리는 오 위원이 대표이사였고, 나는 실장이었다. 그 밑으로는 상무와 부장, 차장, 과장, 대리가 줄지어 있었다.

원래 오 위원은 내가 사장을 다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으나, 스물여섯에게 사장 명함은 좋은 게 아니었다.

사기꾼이나 부모 잘 만난 놈이 거들먹거리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설립자도, 대주주도 나였고, 주요 업무는 내 결사 없이 추진될 수 없었기에 사장 직함이 중요하지 않았다. 내 액면가에 적당한 걸로 가야 했다.

그렇게 결재판 뚜껑을 닫고 말을 이었다.

“근무는 월요일부터 하는 걸로 하시고, 오늘은 창립 기념할 겸 모이시라고 했습니다. 이따가 근사한 곳에 가셔서 식사하니까 그렇게 아시고…… 먼저 우리 대화투자자문이 갈 길을, 일종의 지표를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여덟 남자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첫 번째로 저희 회사는 깨끗함이 최우선입니다. 청결을 말하는 게 아니고, 위법이나 편법을 불허한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털어서 먼지 하나 나와선 안 됩니다. 개인 신상까지 그렇게 하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깨끗하게 유지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다면, 모두 비용처리 해 드리겠습니다.”

정치할 때 흠이 될 만한 것 없어야 했다. 정치와 권력을 향한 험담은 아니 땐 굴뚝에서도 연기를 나게 만드는 법이었다.

그런 경우를 최소화해야 했고, 돈으로 처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당장 꺼내 쓸 수 있는 깨끗한 현금만 몇억이 있었고, 회사 자본금으로 묶인 돈과 각종 자산을 합치면 재산이 30억을 웃돌았다. 그간 내가 준 정보로 오 위원이 불려 놓은 것이었다.

오 위원도 개인적으로 억 단위의 든익을 냈다고 했으니 말은 다 한 셈이겠지.

“두 번째, 이 안에서 벌어진 모든 일은 함구해야 합니다. 오 위원님, 아니 오 사장님. 기밀유지 서약서 전부 받으셨습니까?”

“네, 실장님. 자리에 원본 구비되어 있습니다.”

이제 사장이 된 오 위원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 안에서 나올 말들은 당사자나 극소수만 알고 있을 정보였다. 밖으로 나가서 좋을 건 없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열심히들 해 주십시오. 업계 최고 수준의 연봉뿐만이 아니라, 열심히 해 주신 만큼 따로 보상도 드리겠습니다.”

내가 입을 닫자마자, 오 위원이 앉은 채로 묵례를 했다.

“고맙습니다, 실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의 인사가 순식간에 테이블을 한 바퀴 돌았다.

당장 받게 될 업계 최고 수준이라는 연봉과 보상이라는 말이 만든 효과였다.

앞으로도 나는 일을 하면서 이들에게 틈틈이 선물을 줄 예정이었다. 떼부자가 아닌 한 물질에 마음이 흔들리기 마련이었고, 그런 만큼 사람의 환심을 사기도 쉽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임금은 자연스레 업계 최고 수준이 되었고, 오 위원의 연이 닿은 대기증권과 농협의 직원들이 계약서를 받자마자 바로 넘어왔었다. 물론 오 위원의 연줄이 큰 영향을 발휘했겠지만.

“그럼 일 얘기는 모레부터 하시고, 이만 식사하러 가시죠.”

먼저 일어서자, 사람들이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사기 충전이 먼저였다.

나는 나가는 길에 안 고문을 따로 불렀다. 그도 내가 부른 이유를 짐작한 듯 조용히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이가 들어도 눈치는 어디 안 가는 모양이었다.

“땅 엎을 준비 다 됐네, 윤 실장.”

전에 말했던 땅 속의 110억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 고문이 줄줄이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심부름을 맡을 용역 전문가 금 사장과 준비한 차량, 돈의 회수 방법 등등.

이내 말미에 안 고문이 고심하는 얼굴을 해 보였다.

“그리고 선불을 한 세 장 정도는 줘야 하는데…….”

세 장이면 3억이었다.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예, 댁으로 보내겠습니다.”

안 고문이 내 대답에 눈을 껌뻑거렸다.

“이렇게 휙 줘버려도 괜찮겠어?”

“뭘 말씀이십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가 싶어 물었더니, 안 고문이 곧장 말을 이었다.

“모르는 놈 주머니에 넣어 주는 건데, 걱정이 안 된단 말인가? 아니면 설마…… 금 사장을 아는가?”

“……알긴 합니다.”

내 대답에 안 고문의 얼굴에 놀람이 확 번졌다. 혹시나 하는 의구심이 확신으로 바뀐 것이었다.

“자네가 연구소며 청와대에 빨대가 있어도 그렇지, 금 사장까지 안단 말인가? 기가 막힐 노릇이구만.”

모를 수가 없었다.

장 의원 밑에서 근무할 때 그의 존재를 알았었다. 만나 보진 못했으나, 최소한 그에 대한 소문 정도는 어렴풋이 접할 수 있었다.

금 사장은 정권의 일 거리를 수주하는 용역 사업의 인물로, 이전 정권부터 여러 심부름을 하며 업계에서 커온 사람이었다. 윗분들 비위도 잘 맞추고, 용역 실력도 준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안 고문의 반응에서 볼 수 있듯, 금 사장은 알려진 존재가 아니었다.

애초에 정관계의 용역 사업은 감추어져 있었고, 대외적인 용역 업체는 따로 있었다. 금 사장은 드러난다고 해도 윗분들 앞에서만 나타날 뿐이었다.

그리고 안 고문은 아직 내가 얼마나 많은 정보를 쥐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개인투자를 맡고 있는 오 사장과는 다른 입장이었다. 안 고문에게는 그저 물어보는 것만 방향을 알려 줄 뿐.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닙니다. 그분은 저를 모르겠죠. 그래서 고문님께 부탁드린 겁니다.”

안 고문도 어느새 내 말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놀란 감정이 쉽게 날아간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금 사장은 고급 찌라시에서도 볼 수 없는 이름이었으니까.

어느새 약간은 고양된 듯한 어조가 들려 왔다.

“내가 여태 잘못 생각했네, 자네는 대단한 젊은이가 아니라 예상할 만한 그릇이 아니야. …… 정말 귀신 같구만.”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대답하며 미소로 무마하자, 안 고문이 여운을 털어 낸 듯 엷게 웃었다.

“흐허허, 자네 속에 구렁이가 똬리를 튼 것 같구만. 한 오십 년 즈음된 구렁이 말일세.”

오십 년이라니.

아무래도 미래의 정보가 내 나잇값을 더 올려 준 모양이었다.

* * *

이틀 뒤 월요일, 오전 10시.

대화투자자문을 방문하는 당장의 손님은 없었다.

사무실의 위치가 여의도동이기 때문이었다. 각종 은행 지점과 대형 증권 본사, 유명한 투자자문 회사들이 마주 보고 있는 지역.

굳이 들어올 이유가 없었다.

막 개업한 15평 남짓한 사무실에는 직원들만 있었다.

첫날인 만큼 직원들은 개인에게 필요한 책과 자료, 사무집기를 따로 정리하고 있었으며, 필요한 프로그램을 세팅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듯하자, 윤수혁이 옆 자리의 오준범에게 물었다.

“조간회의 준비 되셨습니까?”

“네, 지금 시작하셔도 됩니다.”

“좋습니다, 다들 모이시죠.”

윤수혁의 말을 기점으로 잡무를 보던 정재운까지 총 여덟의 사람들이 회의 테이블에 앉았다. 자연스레 상석에 앉은 윤수혁이 입을 열었다.

“첫 조간회의이니 만큼, 간결하게 할 말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제가 안건이나 아이템을 리젝트 할 수도 있을 텐데, 리젝트한 아이템은 무조건 폐기하십시오. 나중에 개인적인 고객이나 기관에서 상담을 요구해도 마찬가집니다. 리젝트 된 건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 말에 증권가에서 넘어온 직원들이 기대와 우려가 섞인 눈으로 윤수혁을 응시했다.

투자는 단언이 아니라 확률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절대적인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 한, 세력주도 엎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하물며 시작도 안 한 아이템을 폐기한다?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직원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윤수혁은 수억의 연봉을 주는 실질적 오너였고, 청와대의 경제통이었던 오준범이 깍듯하게 모시는 사람이었다. 감히 말대꾸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사이, 윤수혁의 말이 이어졌다.

“두 번째로 여러분들께서 다뤄야 할 아이템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중 일부는 향후 고객 유치에 사용하셔도 되나, 이것 역시 사장님께서 교통정리를 해 주시면 그때 이용하십시오.”

아이템이라는 말에 세 명의 경력자뿐만 아니라, 오준범의 후배들도 눈을 반짝였다. 그 중에서도 오준범의 눈빛이 가장 예리하게 바뀌었다.

오준범은 이미 윤수혁의 개인 투자를 도우며 정확한 정보를 접했었고, 엊그제 치러진 미국 중간선거 결과마저 윤수혁에게 열흘 전에 들은 상태였다.

오준범은 이제 증권가의 정보 분석도, 언론을 통한 입장 표명보다도 윤수혁의 말 한마디를 더 신봉하는 상태였다.

곧 윤수혁의 목소리가 15평 사무실을 채우기 시작했다.

“하나금융에서 외환은행을 인수할 겁니다.”

“……?!”

오준범을 비롯한 직원들의 얼굴에 당황함이 비쳤다.

“아니…… 외환은행이 맞습니까? 우리금융이 아니고요?”

차장 신분증을 단 김배환이 윤수혁의 말을 부정하듯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에 그가 본 신문에도 하나금융과 우리금융의 줄다리기에 관한 논평이 실려 있었다. 물론 하나금융의 인수 고려 대상 중에는 외환은행이 있긴 했지만, 하나금융의 1지망은 엄연히 우리금융이었다.

또한 외환은행의 인수예상자도 하나금융이 아닌 호주의 한 은행이었다.

호주 은행은 10월 24일에 서울 치바호텔에서 열린 ‘한·호주 경제인 대화‘에서도 인수에 관한 입장을 표명했었다.

가능한 빨리 외환은행 인수 작업을 마치겠다고.

그러나 윤수혁은 김배환의 말에 고개를 저었고, 단언하듯 말했다.

“우리금융 민영화는 실패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