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20화 (20/191)

# 20

7. 이제는 그만둘 때 (4)

그날 밤, 여의도 호프집.

“지금 내가 예상하는 게 있는데…… 아니지?”

박 보좌관이 이미 예상했다는 듯 물어 왔다. 마음이 급한 것인지, 차임벨도 누르지 않고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마침 종업원이 와서 의례적인 신분증 언급을 하고 주문을 받아갔다.

분위기가 환기되자, 박 보좌관이 아직도 대답하지 않은 내게 좀 더 풀어진 어조로 말을 꺼냈다.

“왠지 내 예상이 맞는 거 같은데, 아니야?”

“……저 그만둬야 할 것 같습니다.”

박 보좌관의 입이 달싹였다가, 짧은 정적이 돌았다. 내 사직을 예상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물론 설마하는 우려의 수준이었겠지만, 이맘때 비서들의 사직은 흔한 것이었다.

생각이 많은지 박 보좌관은 테이블만 내려다봤다.

그의 한숨과 고민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선했다. 호프집의 다른 소음들도 메우지 못한 공백이 느껴졌다.

어느새 박 보좌관이 시선을 들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잘 버텼잖아.”

“예.”

“나하고 쭉 같이 가자며? 아니면 나 못 믿어? 내가 4급 꽂아준다고 한 거 진심이다, 수혁아.”

“예, 압니다.”

“그런데 왜?”

박 보좌관이 눈썹을 휘면서 물었다.

나를 꽤 많이 아낀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하긴 내 칭찬을 하고 다니는 사람도, 내게 일을 가르쳐 주려고 애쓰는 사람도 박 보좌관이었다.

지금도 박 보좌관은 본인이 억울한 것처럼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를 달래기 위해서 좀 더 무거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이건 보좌관님한테만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직 집에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가족한테도 말하지 않은 것.

영석이한테도 써먹은 방법이었다. 자신이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게 만드는 작은 장치였다. 사람을 휙 휘어잡지는 못해도, 차근차근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고.

어느새 박 보좌관이 입을 꾹 닫은 채, 계속해서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내가 진지하다는 걸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사실 전에 토토 상금 남은 돈으로 주식하고 부동산에 투자해서 차익을 좀 봤습니다. 그걸로 다른 일을 해 볼 생각입니다. 제 전공을 살린 사업도 하고 싶고, 전부터 하고 싶던 봉사 활동이나 사회 교류 같은 것도 해 보려고 합니다.”

박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수긍하는 모양새는 아니었고, 박 보좌관의 입에서 나온 말도 마찬가지였다.

“음…… 수혁아, 내가 너보다 직장 선배로, 인생 선배로서 말 좀 할게.”

그리고 이어진 말은 구구절절 옳은 말들이었다.

사업의 위험성, 자영업자의 생존율 같은 통계 수치가 박 보좌관의 입에서 줄줄이 나왔다. 젊은 나이의 치기에 흔들리면 기반을 잡을 수 없고, 그럼 나중이 더 힘들어진다는 설득까지 나왔다.

마치 실수하는 동생을 바로잡기 위한, 그만의 방법처럼 보였다.

계속되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박 보좌관은 내가 번 돈이 궁금하지도 않은지, 그저 내가 엇나가지 않게 애쓰려고만 했다.

나는 다시금 박 보좌관의 말에 대꾸했다.

전보다 더 나직하고, 정중하게.

“무슨 말씀하시는지 다 압니다, 그래도 해 보고 싶습니다. 제 20대의 혈기를 못 이겨서 배낭여행이나 가려는 게 아닙니다. 후회 없이 일해 보고 싶습니다. 지금 아니면 제가 언제 이렇게 일할 수 있겠습니까?”

박 보좌관이 입을 다물었다가 긴 숨을 내쉬었다.

“……제대로 마음먹었구나.”

“예, 진심입니다.”

어느새 나온 맥주를 들이켜고, 박 보좌관이 내 눈을 들여다봤다.

조금 힘 빠진 눈빛을 보니 결국에 포기한 모양이었다.

“수혁아, 그럼 부탁하나 하자. 국감은 마치고 나가라, 그건 괜찮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맙다, 이거 영감한테는 말 하지 마. 미리 말 꺼내면 난리 칠 인간이니까, 내가 나중에 사표수리 다 도와줄게. 정 안 되면 그냥 무단결근 해 버려.”

“고맙습니다.”

“근데 혹시…….”

대답하고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맥주를 또 들이켠 박 보좌관이 나를 떠보듯 바라봤다.

“영감이 괴롭혀? 아니면 방 식구가 갈궈?”

박 보좌관이 묻는 게 뭔지 알만했다.

부조리.

위계질서와 허례허식에 목 맨 국회이니 부조리가 적잖았다. 욕설이나 폭행 같은 직접적인 괴롭힘부터 업무 방해 와 따돌림 따위로 강압을 줄 수 있는 곳이 바로 국회였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제가 욕먹겠습니까?”

“잘해도 좃 같잖아, 내가 그걸 모르겠냐?”

박 보좌관이 그러면서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생각해 보니 그도 보좌진 중에서는 에이스로 꼽히는 실력자였다. 그리고 연줄이 없어서 차별 받았던 사람이기도 했고.

“그런 건 다 버틸 만합니다.”

어느새 완전히 납득하고 기분이 풀린 것인지, 박 보좌관이 편한 웃음을 뱉었다.

“흐흐, 그나저나 너 나가면 어떡하냐. 나 신입 못 받을 거 같은데?”

“박 보좌관님이 계시면 뭔들 안 되겠습니까?”

“그냥 너 같은 놈 또 안 올 거 같아서 그래. 또 오면 모르지만…… 올 리가 없지? 죽었다 깨어나도 너 만한 놈은 또 없을 거다.”

왠지 그가 내 얘기를 하는 것만 같아서 웃음이 났다.

죽었다 깨어난, 국회에 또 온 놈.

박 보좌관도 내 웃음을 보더니 끌끌거리면서 다시 맥주컵을 들었다.

“내가 장담하는데, 너 어디가도 성공할 놈이야. 나중에 잊지 말고 밥이나 한 번 사라.”

“당연하죠.”

* * *

9월은 국정감사를 준비하는 달이었다.

소관부처의 서류 제출과 증인출석요구 따위로 여야가 진통을 겪었고, 9월 말이 되어서야 간신히 합의가 맞아들었다.

그리고 대망의 국정감사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국회의 1년 농사 결실이라고도 말하며, 1회성 쇼라고도 부르는 이중적인 행사.

국감은 국회 상임위의 영향력이 닿는 모든 피감기관을 감시, 감독하는 일로 동시에 행정부를 견제하는 입법부의 막강한 권한이기도 했다.

대통령의 최측근들도 줄줄이 불려 가 곤혹한 상황을 연출해야 했고, 실질적인 제한까지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국회의원들은 전국구로 이름을 날리고 국감스타로 유명해지기 위해, 논란이 될 증인들을 세우고 피감기관장을 더욱 들볶을 예정이었다.

요청한 증인에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 CEO들은 물론이고, 블리자드엔터테인먼트의 한국 지사장인 길마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윤수혁은 국감에서 별일이 없을 거라고 단언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안순익은 그 말에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윤수혁이 구체적으로 뭐라고 하는지 듣기 위함이었다.

“그래도 이번에 4대강도 있고, 민간인 사찰 사건도 있지 않는가? 신민주당에서 터뜨린다고 하던데?”

“민간인 사찰은 BH(Blue House:청와대)까지 못 갑니다. 4대강도 전방위로 공격한다고 했지만, 겉핥기가 대부분이라 실익은 별로 없습니다. 이번 국감은 그저 그런, 평범한 국감이 될 겁니다. 국감스타라고 뜰만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윤수혁이 비교적 길게 단언했다.

이미 한 차례 겪은 국감이었다. 그것도 치열한 준비 끝에 진행되기에 더욱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이었다. 청와대에 있을 때도 국감은 주목해야 하는 것이어서, 동향 파악과 분석 자료를 적잖게 한 윤수혁이었다.

“자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아쉽구만. 근데 바쁜 와중에 어쩐 일인가? 국감이 아무리 맹탕이라도 그렇지, 쉴 짬이 안 날 텐데 말이야.”

멋쩍게 웃은 안순익이 분위기를 전환하며 물음을 던졌다.

“국감 끝나면 일 그만둘 겁니다.”

“비서를 그만둔다는 말이지?”

“예, 그리고 해 주셔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윤수혁이 덤덤하고도 나직하게 목소리를 깔자, 안순익도 살짝 상체를 기울였다.

“내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네, 요새 자네만 보면 아주 재미가 있거든.”

“이번 일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아, 쉽진 않습니다.”

“말해 보게.”

윤수혁이 그 말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고는 안순익의 당황스런 반응을 미리 예상하듯 느긋하게 말을 꺼냈다.

“땅 파서 돈을 좀 꺼내 와야 합니다.”

안순익의 눈썹이 못 알아들었다는 것처럼 꼬부라졌다.

“그게 무슨 소린가?”

“말 그대롭니다, 땅 속에 돈이 좀 있습니다.”

* * *

나는 당황해 있던 안 고문에게 땅 속의 돈에 대해 잘 설명해 줬다.

정확한 위치와 액수는 배제하고, 자금 회수 시 고려해야 하는 요소, 불법 도박 자금이라는 돈의 성질 같은 것을 알려 준 것이었다.

어느새 안 고문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입이 쉽게 열리진 않았다. 테이블을 바라보며 나름대로 고민을 하는 듯했고, 오래지 않아 안 고문의 늙은 입술이 벌어졌다.

“당장 견적을 내긴 힘들고…….”

무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언제 해야 되나?”

“겨울이 오기 전에는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겨울?”

“예, 땅이 얼면 파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허허, 그렇지. 내가 조만간 수단을 강구해 보겠네. 자네는 국감 때문에 바쁠 테니 신경 쓰지 말게.”

“고맙습니다, 고문님.”

“고맙기는, 그게 내 일인데. 근데 얼마나 되는가? 자네가 말 안 한 거 보니까 더 궁금해지는데.”

피식 웃음이 났다.

내 웃음을 본 안 고문도 웃는 얼굴을 하더니 먼저 선수를 쳤다.

“이 사람아, 내가 설마 돈 들고 도망이라도 갈 것 같은가?”

“적은 돈이 아니라서요.”

“등산도 제대로 못하는 몸뚱이를 무에 걱정해? 박스 몇 개 짊어지려고 하다간 허리 부러져.”

“박스 몇 개가 아닙니다.”

안 고문이 설마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 기대와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알기로 수십 개가 넘을 겁니다. 제가 아까 트럭 말씀드렸었죠?”

내가 묻자 안 고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허허, 참…… 그래도 도망가진 않겠네, 팔순을 감옥에서 보낼 순 없지.”

나는 그의 말에 가볍게 웃었다.

“좀 떼어 드리겠습니다.”

“그거 써도 되는 돈은 맞나?”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들켜서 좋을 건 없습니다.”

“근데 불법도박자금인 건 어찌…… 흐허허. 내 실수 했네, 그거야 물을 필요도 없겠지. 자네가 다 아는 수가 있어서 한 말이겠지.”

다시금 물음을 던지려던 안 고문이 털털하게 웃고 말더니, 금세 말을 이었다.

“그럼 내 알아서 준비 다 해 놓겠네.”

“꼼꼼하게 하셔야 합니다, 고문님은 몰라도 아랫사람들은 돈에 눈 뒤집힐만한 나이지 않습니까?”

안 고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마치 너는 그런 나이가 아니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물론 눈이 마주치자마자, 안 고문은 너스레를 떨듯 말했다.

“걱정 말게, 그 바닥 해먹던 빠꼼이들 알고 있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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