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7. 이제는 그만둘 때 (1)
오준범은 폴더폰의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에 망설였다.
윤수혁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었고, 부영규와 윤수혁 사이에 이미 관계가 있을 수도 있었다. 모든 게 불확실했다.
그러나 오준범의 고민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쥐었다 피는,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면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살만큼 산 놈이 걱정은…… 이제 꼴리는 대로 해 보자, 말년에 팔자도 제대로 펴보고.’
마침내 그의 욕심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짧은 통화연결음이 지났고.
- 여보세요?
“저 오준범입니다.”
- 예, 벌써 찾으셨어요?
부영규의 신상을 말하는 것이었고, 오준범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욕심을 가다듬으면서 대답했다.
“네,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말씀하세요.
“부위원장님이 뷰영규를 찾아달라고 하신 이유를 짐작하고 드리는 말씀인데, …… 제가 부영규의 일을 대신하고 싶습니다. 자산 관리, 세무, 무엇이든 좋습니다.”
- 굉장히 감사한 말씀인데, 저번에 하셨던 말씀 기억나십니까?
오준범이 그 말에 바닥을 쳐다봤다가, ‘아’하며 입을 벌렸다.
윤수혁을 처음 대면했던 자리에서 그가 했던 말을 뜻하는 것이었다.
‘믿음이 가진 않습니다.’
처음 보는 윤수혁에 대한 경계였다. 의심이기도 했으며, 불신이기도 했다. 세상에 사기꾼은 많았고, 사기의 형태도 나날이 진화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말을 뱉은 것이었다. 혹여나 윤수혁이 흔들릴까 싶어서.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자신 또한 안순익이 했듯 윤수혁의 뒷조사를 한참이나 했었고, 평범한 소시민이라는 결과를 접했었다. 분명 윤수혁은 수억 원의 현금을 주무르고, 정치판을 꿰뚫는 눈과 정보를 쥐고 있음에도, 털어서 나온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작금의 상황에 오준범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믿음 말씀하시는 거지요? 제가 법적 효력 발생시킬 계약서라도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스피커 너머에서 옅은 웃음소리가 살짝 들려서 오준범이 귀를 기울였다.
- 바라는 게 있으십니까?
그리고 들려온 긍정적인 대답.
오준범이 눈빛이 바뀌었다. 아직 쥐고 있던 욕심이 끓어 올라온 것이었다.
“부위원장님이 주실 수 있는 것, 그게 뭐가 됐든 충분하게 주시면 됩니다.”
* * *
“긍정적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오 위원의 말은 나도 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착실한 부하 직원의 스타일이었다. 내가 안 고문에게 짤막한 설명을 들었을 때도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나름 고위공무원단에 속했던 사람이고, 장차관급 향우회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긴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조연이 어울린다고 판단했다.
지난 업적과 말과 행동이 그러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나온 말은 달랐다.
은연중에 품고 있던 욕심이나 야망 같은 것이 드러난 것인지, 내 수족을 자처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육십 몇 년을 살아오면서 만든 아집과 자존심은 어쩌고? 아니면 애초에 부하 직원의 역할을 하던 사람이니, 남들보다 쉽게 욕심을 감춘 것일 수도 있었다.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나도 그랬었으니까, 기회라고 여기면 바득바득 달라붙어서 뭐든지 했었다.
오 위원도 기회라고 여겼을 것이었다, 나 같은 놈은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놈이니까.
다만 그게 예상하지 못한 것이어서 확 정하진 못했지만, 오 위원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었다. 업계 전적도 준수했고, 평생을 보조자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못하면 부용규로 교체해도 될 일이지만, 굳이 그럴 생각은 없었다.
굳이 부용규라는 수를 하나 더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내가 찾아서 사람을 쓰는 것보다, 자처해서 들어오는 사람이 부리기 더 좋은 법이었다.
나는 아직 쥐고 있던 스마트폰의 화면을 켠 뒤,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계약서 준비하세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날아온 답장.
[충성하겠습니다.]
…… 할아버지뻘 되는 오 위원의 충성이라니.
제대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과하다는 답장을 다시 적으려다가, 나는 문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충성하겠다는 사람을 말릴 필요는 없지.
그럼 이제 제대로 사적 이익을 취할 차례였다.
이미 7.4 전당대회에서 7,000만원가량을 투자해서 며칠 만에 2,000만원의 수익을 냈다. 앞으로도 7.28 재보궐 선거나, 지방선거, 임시전당대회, 총선 따위의 수많은 테마주 수익들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MB의 통일세 언급으로 인해 관련한 사업체, 연구기관이 들썩이고, 우리금융 민영화 작업 등의 결과로 바뀔 증권가와 은행가의 판도도 시끄러울 예정이었다.
이미 MB정권에서 신생 건설업체가 4대강 밀어 주기만으로도 업계 순위권에 이름을 올린 사례도 있었다. 나중에 비리로 걸려서 임원진들이 물먹긴 했지만.
그리고…… 무엇보다도 10년 뒤에도 가치가 떨어지지 않을 땅!
연구시설과 각종 사업체 부지, 역, 어항, 공항 개발 따위로 엮인 땅은 몇 배씩 오르곤 했다. 굳이 그게 아니어도 각종 관광지나 문화거리의 땅값은 고작 몇 개월 만에 확 뛰기도 했고.
이걸 다 알면 좋겠다만.
당연하게도, 아쉽게도 전부 알진 못했다.
나도 내 일이 바빴으니 주요 사건이나,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만 기억날 뿐이었다.
그래도 그거면 충분했다.
10배로 뛰는 일 거리 몇 개가, 곧 1,000배, 10,000배였다.
그리고 얼마 뒤, 예정 되어 있던 7.28 재보궐 선거가 치러졌다.
최종 투표율은 37.5퍼센트로 보통의 재보선보다 높은 투표율을 보였으나, 새한국당이 5개 의석을, 신민주당이 3개 의석을 차지해 예상외의 결과가 나왔다.
정권과 여당 심판론도 전혀 상관없는 듯한 양상이었다.
그날로 ‘새한국당의 7.28재보선 압승’ 혹은 ‘신민주당의 안일한 참패’ 따위가 인터넷 언론을 비롯하여 9시 뉴스에 실렸다.
이틀 만에 신민주당 당대표의 사퇴 얘기가 나왔고, 5일 만에 지도부가 총 사퇴했다. 어차피 다음 달이면 전당대회가 열릴 예정이었지만, 이것도 나는 예견했다.
내 비영리단체와 공익단체를 관리하며 약간의 심부름을 겸하던 안 고문이 놀라서 전화를 걸어왔다.
- 자, 자네, 신민주당 정보는 또 어떻게 아는가?!
“신민주당에도 민주연구소 있잖습니까?”
민주연구소는 신민주당의 ‘작전과’와 다름없는 곳으로 80년대 데모하던 석학들은 죄다 이름을 올려 둔 곳이었다. 새한국당의 여의도연구소와 같다고 보면 됐다.
당연히 그만한 권위도 있는 곳으로, 내 정보의 신뢰도를 올리기에는 적절한 변명이었다.
그냥 아는 수가 있다고 하는 것보다, 전에 여의도연구소를 언급했던 것처럼 써먹는 게 한참은 나았다.
물론 여의도연구소나 민주연구소나 다 빨대가 있다고 하면 개소리겠지만, 정보가 100퍼센트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그러면 믿게 되고, 오 위원처럼 충성하겠다는 문자를 보내게 되는 것이었다.
지금도 안 고문은 한참이나 감탄을 흘리고 있었다.
- 거기서 날짜까지 확정한단 말인가? 이거 참, 듣고 있으면서도 못 믿겠구만.
“어찌 됐든 저희로서는 잘 된 일 아닙니까?”
내 말대로 새한국당에서 인물론을 들먹이며 승리했다고 떠들어 대며 기뻐했다.
나도 마찬가지로 매수한 7.28 재보선 수혜주가 며칠 동안 상한가를 치고, 또 쳐서 웃음이 났다.
새한국당의 압승, 그리고 당 대표인 신 의원의 안정적인 출발, 예상외로 당선된 의원들이 합쳐진 시너지 효과였다.
‘억’ 소리 넘어가는 건 순식간이었고, 곧 있으면 다시 억 얘기가 나올 예정이었다.
8월 15일에는 대통령의 통일세 언급이 있었다.
이 말 한 마디로 통일부는 통일세 예산안을 기다렸다는 듯 국회에 제출할 것이고, 대북 사업을 진행했던 기업의 통일주 따위가 상승세를 보일 예정이었다.
당연히 다 엎어질 일이고, 그저 내 돈만 불려 주는 일이었다. 정확히는 이 정보를 아는, 알고 있는 MB계 최측근들의 재산까지 포함을 시켜야 되겠지.
어느새 정신을 차린 듯 안 고문의 짤막한 중간보고가 올라왔다.
- 참, 저번에 필요하다고 했던 거, 열쇠 말이야.
“예, 준비 됐습니까?”
- 되긴 했는데, 국회 보급 책상도 열쇠가 달라서 말이야. 하나가 아니고 꾸러미를 받았네, 이거 퀵서비스로 받겠나?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 그러게.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는 안 고문의 집으로 향했다.
이 열쇠는 직접 내 손으로 받아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국회를 나가기 전에 꼭 해야 하는 일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일 때문에 여태 국회에 남아 있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나는 그 일을 떠올리면서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제대로 된 도둑질이니까.
* * *
8월 초, 국회.
MB 정권에서 8.8 개각을 단행했고, 이로 인해 문방위에선 293회 임시회 1차 회의가 열렸다.
유인촌 장관의 암묵적인 경질로 인한 새 후보자 내정을 다루기 위함이었다.
오후 4시에 개회한 1차 회의에서 문체부 장관 인사청문회 요청안이 가결되고, 자료 제출과 증인 및 참고인 채택을 논하다가 30분 만에 끝이 났다.
“위원장님 물리적으로 증인 채택이 어렵지 않습니까?”
신민주당 위원 한 명이 산회 직전에 말하자, 문방위 위원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신민주당 간사님이 회의 중에 나갔고, 지금은 정족수도 모자랍니다. 말씀하신 바를 당장 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5일 전에 증인임을 고지해야 하지 않습니까? 청문회가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그게 가능합니까?”
“그러면 여야 간사 합의할 때, 위원님 의견을 포함하라고 하겠습니다.”
위원장이 생중계 중인 카메라를 의식해 표정을 관리했고, 신민주당 위원도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위원장이 수고의 인사와 함께 다음 회의 일자를 고지하면서 의사봉을 쥐었다.
“……이만 산회를 선포합니다.”
땅, 땅, 땅.
이렇듯 의사봉의 신호와 함께 1차 회의가 끝났다.
개회한 지 30여분 만이었다.
그리고 속전속결의 첫 회의와 다르게, 의원회관 410호에서는 문체부 장관의 청문회 준비로 바빴다.
정확히는 이계진이 정권의 홍위병 노릇을 자처하는 바람에 일이 늘어난 것이었다. 이는 공천과 재선을 위한 하나의 몸부림으로 MB 정권에 잘 보이기 위한 행동이기도 했다.
이미 지상파를 비롯한 일부 언론사에서도 MB의 눈치를 보고 있다며 욕을 먹는 중이었다. 또한 원내에서도 이계진 말고도 숱한 의원들이 알아서 거수기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애초에 MB의 친형인 SD가 새한국당의 실세였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렇게 8.8 개각으로 인한 청문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