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6. 내 사람들 (2)
며칠 뒤 일요일, 관악산 입구.
새파란 등산복 차림의 안순익이 양손에 등산스틱을 짚고서 나타났다.
관악산 입구에 모여 있던 산행회 회원 하나가 침침한 눈을 껌뻑였다. 전직 고위공무원이나 정계 혹은 관료 출신이 모인 산행회로, 다가오는 사람이 낯 익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같이 시선을 돌렸던 산행회 총무가 움찔하더니 안순익을 향해 잰걸음으로 움직였다.
예순이나 된 그의 발걸음에 50대 회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니. 고문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김 총무, 나 왔네.”
안순익이 인중에 맺힌 땀을 닦으면서 털털하게 웃었다. 총무는 양손을 가지런히 하고 놀란 얼굴을 수습했다.
“왜긴. 나도 건강관리 해야지, 오랜만에 자네들 얼굴도 좀 보고 말이야.”
“아휴, 괜찮으시겠습니까?”
“이 사람이? 나도 10년 전까진 산행회 회장이었어.”
그 말에 김 총무가 멋쩍게 웃었고, 복장을 추스르던 산행회 회원들이 다가왔다.
“잘 알죠, 고문님.”
김 총무가 웃으며 대답하자, 이내 모여든 회원들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이고, 안 고문님!”
“회장님!”
이어서 장관이며, 어르신이며 별별 호칭들이 다 나왔다.
안순익이 웃으면서 그들의 인사를 받았는데, 흡연구역에 있던 산행회 오준범 회장만이 그를 선배님이라고 부르면서 다가왔다.
“선배님!”
“오준범이. 신수가 훤하네?”
“흐흐, 은행 감투 하나에 신수가 훤하겠습니까? 아, 근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오준범의 말에 안순익이 편한 얼굴로 웃었다.
그는 차관보 재직시절부터 청와대에서 함께 일한 후배였고, 장차관급 향우회 모임에 속한 일원으로 같은 식구였다. 더구나 몇 번이고 감싸주고, 진급하도록 도와준 후배이기도 했다.
어느새 안순익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출판 기념회에서 말 안 했던가?”
“아…… 무슨 말씀을 하셨죠?”
“산행 한 번 하려던 참이었어, 앉아서 글만 썼더니 몸이 오죽 무거워야지. 자네도 알잖아? 내가 어디 앉아만 있을 사람인가?”
“으하하하, 선배님도 참. 그 연세에 대단도 하십니다.”
이어서 오준범은 안순익한테서 회비를 걷으라는 둥의 농담을 하고, 몇 마디 안부를 나누면서 산행을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안순익은 5, 60대 회원들의 보조를 못 이겨서 뒤에서 걸었고, 오준범이 그의 곁에서 말벗을 해 주었다.
숨이 거칠어지고, 중간에 나무뿌리에 걸터앉아 쉴 때였다.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내던 오준범이 안순익에게 말을 붙였다.
“근데 진짜 어쩐 일이세요? 선배님 피트니스 센터에 나가시지 않습니까? 골프 라운딩도 하시고.”
“이 사람 눈치가 여전하네.”
안순익의 말에 보온병 뚜껑을 열던 오준범이 행동을 멈추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이신데 여기까지 직접 오셨어요?”
“자네가 경제기획원 출신이지?”
“네, 갑자기 옛날 얘기는 왜…….”
“지금은 뭐하고?”
계속된 물음에 오준범이 눈을 껌뻑거렸다.
“아휴, 선배님. 말씀을 좀 해 주세요. 갑자기 노태우 때 얘기하시면 제가 감을 못 잡겠습니다.”
안순익이 그의 눈을 보고는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빠릿빠릿한 후배들 아직 있지?”
곧장 대꾸하려던 오준범이 주춤했다. 이어서 아직도 열지 못한 보온병 뚜껑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 현업에 있는 애들이 있긴 합니다, 은퇴해도 회사에서 이름 날리는 동생들도 있고요. 사람 필요하십니까?”
“척하면 척이네. 내가 부탁을 좀 받았거든, 사업 때문에 말이야.”
“사업이요?”
“소스가 있어, 돈 굴릴 사람들만 좀 있으면 돼.”
그 말에 오준범의 미간이 좁혀졌고,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누가 소스를 준답니까?”
안순익은 대답 대신에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말 할 수 없다는 의미, 오준범의 호기심이 절로 의심으로 바뀌었다.
“제가 참 선배님 존경하고 잘 따르지만…… 확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기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식의 사기도 가끔 있는 편이었다. 현업에 종사 중인 공무원부터 은퇴한 간부와 원로까지 사기꾼의 세치 혀에 속아 넘어가는 내용이 뉴스에도 나왔었다.
경제기획원, 국세청, 청와대 등을 오가며 고위공무원단에 속했던 오준범도 사기꾼을 만나 본 적이 있었다.
어느새 안순익이 나직하게 말했다.
“왜, 사기꾼이라도 만났을까 봐?”
“……청와대 청소부가 과장 흉내 내고, 고등학생이 대통령을 사칭하는 시댑니다. 저도 한 번 만나 봤습니다, 말이 너무 그럴듯해서 퇴직금 말아 먹을 뻔했었죠. 선배님이라고 소스가 확실하다는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내가 자네 찾아오기 전에 뭐했을 것 같아?”
그 말에 오준범이 다시금 미간을 좁혔다. 목적이 자신이 아닐까, 하는 얕은 의심을 가질 무렵에 안순익이 말을 이었다.
“사방에 전화 돌렸네, 내가 그 짓 한참하고서 딱 하나 알았네.”
“뭡니까, 그게?”
“내 뒷날을 다 쓸 참이야.”
오준범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힘이 들어간 미간도 풀렸고, 의심이 어려 있던 눈빛도 사라졌다.
그때 오준범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몇 개 없었다.
정말 거물이라도 만난 것일까, 혹은 홀라당 넘어갈 만한 사기꾼을 만난 게 아닐까 하는 상반된 생각.
그리고 그 소스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나이 든 호기심.
안순익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영감탱이 노망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투자 좀 안다는 애들로 몇 명 추려 봐.”
오준범은 그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두 가지 상반된 생각 때문에 오준범은 안순익을 지그시 쳐다봤다.
안순익은 아직 치매에 걸린 것 같지도 않았고, 말과 행동이 어눌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나이 든 맹수처럼 보였으나, 맹수도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런 고민이 더해질 수록, 오준범의 생각은 점점 한 쪽으로 기울어졌다.
물고 물리는 생각 틈에 있는 작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무슨 소스길래…….’
웬만한 산전수전 다 겪었던 늙은 베테랑의 감각이 다시금 꿈틀거리는 것이었다.
오준범도 안순익과 같은 부류였다.
애초에 안순익이 유능했던 후배들 중 고르고 골라서 접촉한 첫 번째 후보가 오준범이었다. 둘의 성질이 다를 수가 없었다.
죽이 잘 맞고, 실력도 좋은 후배.
안순익이 찾아온 오준범은 그 조건에 부합한 사람이었다.
이내 찰나 같던 고민의 시간이 지나고, 안순익이 목소리를 냈다. 조금은 훈계하는 듯한 어조였다.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할 놈들로 준비하면 될 일을…… 병신들 아니면 지들이 혓바닥 놀음인지 알 것 아닌가? 무슨 고민이 그리 길어?”
“……저도 책임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못하겠다, 이 말인가?”
안순익의 물음에 오준범이 입을 열려다가 멈칫했다.
‘……내가 가면, 내가 직접 보면 된다. 뭔지 알게 되겠지, 똥인지 된장인지.’
어느새 속으로 주문이라도 외듯 오준범이 결단을 내렸고, 단단히 굳은 시선을 본 안순익이 입을 열었다.
“너도 가려고?”
“네…… 향우회가 왜 있겠습니까, 자기 사람들 도와주려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럼 재깍 준비하고 전화 받을 준비나 해둬, 내려가야 되겠다.”
안순익이 곧장 등산스틱을 짚으며 일어서자, 오준범이 보온병을 등산 가방에 넣고 허겁지겁 정리했다.
“벌써 가시게요?”
“자네 보러 왔잖아, 봤으니까 가는 거고.”
“그래도…….”
“내가 일흔일곱이야. 여기 더 가다가 죽어, 이 사람아. 정상은 산길타고 못 올라가, 이제.”
등산 가방을 걸치고 있던 오준범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안순익은 올라왔던 길을 내려가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연락처에서 윤수혁을 찾아 눌렀고, 꽤 긴 통화 연결음을 기다렸다.
- 여보세요.
윤수혁이 전화를 받자, 안순익이 호흡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허으…… 좀 만나세.”
- 음…… 일이 바빠서 오늘 밤 10시는 넘어야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시원한 거 같이 들지.”
- 알겠습니다.
그날 저녁, 냉면집.
밤이 새까맣게 내려앉고, 번화가 외곽에 택시 한 대가 섰다.
안순익은 벌써부터 토악질을 하는 사람들을 보다가, 약속 장소인 냉면 가게로 들어갔다.
먼저 와 있던 윤수혁이 안순익에게 인사했다.
“물냉면 시켰습니다, 괜찮으시죠?”
“좋지, 그나저나 많이 바쁜가? 이 밤중에 만나는 걸 보니.”
“안 바쁜 때가 있겠습니까, 전당대회고 하니…….”
안순익이 자리에 앉으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전당대회도 선거 못지않지.”
안순익이 예상한다는 듯 중얼거리자 윤수혁이 가볍게 웃었다.
“전당대회가 다 그렇죠.”
이미 몇 번 겪어 본 듯한 태연한 말에 안순익이 가만히 시선을 마주했다. 지금보다는 10년은 더 깊어 보이는 눈빛에, 느긋하게 바라보던 안순익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비서를 전에도 했었나? 내가 찾아본 건 저번 달이 첫 출근이던데.”
“……한 달 정도하니까 국회가 뻔히 보이더라고요.”
살짝 늦은 대답이었으나, 안순익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처음 만남부터 지금까지 윤수혁은 추측도, 예상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로서는 윤수혁에게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정보, 돈, 조력자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도 윤수혁이라는 사람 자체가 안순익에게는 낯설고 특별한 존재였다. 보통의 말단 비서나 사회 초년생과는 다른 것을 보여 줬기 때문이었다.
‘내가 스물여섯 때는 뭘 했을꼬?’
안순익은 그런 생각을 속에서 지워 내고, 가볍게 웃었다.
“자네 혹시 수재나 영잰가?”
“과분한 말씀입니다.”
“나는 자네 나이 때 뭐 했는가 싶어, 말단 공무원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런 식의 잡담을 나누는 사이, 가게 주인이 냉면을 내려놓고 갔다.
가위로 면을 자르고 식초와 겨자를 뿌린 두 사람이 그릇 안을 휘젓고 맛을 봤다. 이어서 후루룩거리며 몇 입씩 먹었을 무렵.
안순익이 냅킨으로 입을 닦고는 스테이플러가 박힌 서류를 올려놨다.
“포럼하고 봉사회 하나씩 가입은 했네. 그리고 자네 종교가 없던데, 개신교 어떤가? 개신교 봉사회나 소모임 들어가면 전현직 정치인들 적잖게 있네만.”
입을 우물거리며 음식물을 삼킨 윤수혁이 고개를 저었다.
“개신교 신자 800만 명이고, 무교가 2,000만 명입니다. 천주교 신자와 불자는 500만, 1,000만 명이고요. 개신교 보다는…… 국민을 섬기는 종교가 어떻겠습니까?”
“아니, 불교가 1,000만 명이나 되나?”
안순익이 몰랐다는 듯 묻자 윤수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답니다. 전두환도 절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종교인 과세 문제로 싸우면 시끄러울 겁니다. 아, 거기 서류 좀 주시죠.”
안순익이 서류를 건네자, 윤수혁이 받아서 앞장부터 빠르게 훑었다.
앞서 말한 포럼과 봉사회 관련된 자료였고, 뒤에는 개신교 모임 같은 게 나열되어 있었다. 각각 모임마다 정관계 인사의 가족들이 다니는 정보까지 기입되어 있었다.
윤수혁이 만족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청년경제연구포럼, 서록도온누리모임…… 아, 사업체는 어떻게 됐습니까?”
“일할 놈들 명단은 뽑았네, 맨 뒤에 보게.”
윤수혁이 마지막 장을 보고 곧장 간략한 신상 명세를 살폈다. 간단하게 본 윤수혁이 다시 젓가락을 쥐면서 말했다.
“스펙이 좋네요.”
“그러네만, 거 제일 위에 오준범이라고 있지? 예순 넘은 친구.”
“아, 예.”
“그 친구가 명단 줬는데, 자네가 한 번 봐야 될 것 같네.”
윤수혁이 다시금 젓가락질을 하다가 예상한다는 듯 바라봤다.
“못 믿겠답니까?”
“그렇기도 하네만 나름 생각이 있겠지, 오준범이도 이 바닥 빠꼼이었어. 아무 생각없이 그럴 놈은 아니야.”
그 말에 잠깐 머리를 굴린 윤수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준범 씨…… 이 분 뭐라고 부르죠?”
“은행 자문위원이니까 오 위원이라고 부르게.”
“그럼 오 위원님이 사장직 달면 되겠네요. 필요한 최소 인원만 체크하면 제가 확인만 하겠습니다. 아, 굳이 조건 하나 달자면 젊은 사람들로 뽑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장이라니? 그럼 자네는 국회에 남겠다는 소린가?”
“예, 국회는 다시 돌아올 곳이라서 발 뻗을 자리 알아보고 있습니다.”
윤수혁이 그러면서 속으로 셈을 했다.
A급 보좌진으로 꾸리고, 채 알지 못했던 의원들 서열 같은 것을 확인하며 여전히 흐릿한 기억도 다시 떠올려야 했다.
또한 국회 내에서 가져갈만한 중요한 물건도 있었다.
아직 접근이 어려워 내버려 뒀지만, 그만두기 전에 꼭 손대야 하는 물건이었다.
“알겠네, 그럼 비서를 하겠다는 말인데…… 회사 운영을 어떻게 할 텐가?”
“공무원이라 발기인도, 동업자도 안 됩니다. 어차피 몇 개월 뒤에 나갈 테니, 그때까지 창업 준비만 해 주시면 됩니다. 제 말 한마디면 회사 설립이 가능하게 말입니다.”
안순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가 있다는 게지…… 그걸 도대체 어디서 났을꼬?’
이내 다시금 냉면을 먹기 시작한 윤수혁은 그런 안순익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고문님, 냉면 더 안 잡수세요?”
“아아, 먹어야지.”
“그리고 오 위원님은 다른 분들하고 다 같이 한 번 뵙기로 하시죠.”
“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