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9화 (9/191)

# 9

4. 무대에 오를 준비 (3)

영석이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갖고 있는 돈을 좀 확인했다.

토토로 번 돈이 5,000만 원정도 됐고, 검은 돈이 7억을 웃도는 수준이었다. 이제 이 기초 자금을 2년 동안 수천, 수만 배로 불려놓을 생각이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미래가 바뀔 것이었고, 바뀌어야만 했다.

그랬기에 2년 안에 자금을 최대한 불려 놓는 게 내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투자인 셈이었다. 물론 2년 뒤에도 전 정권에서 이어져 온 사업을 진행하고, 유사한 계획을 수립해야 하니 미래가 싹 바뀌진 않겠지만.

어쨌든 나는 돈을 불려 놓을 생각이었다.

재벌이 되는 게 목적은 아니지만, 정치하는 사람에게 일차원적으로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었다. 입법조사원을 부리고, 사무실을 운영하며, 선거를 치르다보면 통장 비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무나 국회의원하고 재선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미래는 바뀌지 않는 게 최선이겠다만, 2년 뒤에는 바뀌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외교분란과 국정혼란, 일명 쌍란을 야기할 김 대통령이 사임과 함께 새한국당까지 추락시킬 예정이었다. 또한 헌정 사상 최초로 보수정당이 분당하고, 친김 세력과 광적인 보수 단체들의 데모로 광화문이 시끄러워질 것이었다.

이걸 일개 국회의원이 수습할 수 있을까?

아니, 막아야 했다.

집이 무너지는데 깔리면 나도 죽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3.6포인트의 차이로 낙선이 가려질 12월 대선을 뒤집어야 했다.

그게 당과 나를 구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고, 내가 당에 스며들고 당권을 잡기 위해서도 그나마 가장 나은 방법이었다.

여야가 바뀌겠지만, 적어도 당과 함께 몰락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였다.

나는 새한국당을 바꿀 것이었다.

물론 대권 후보인 김 대표는 재기를 꿈꾸면서 세력을 불리겠지만, 그 4년 동안 나는 김 대표의 팔다리를 자르고 목까지 쳐낼 생각이었다.

반대로 김 대표의 목을 먼저 치고, 팔다리를 자를 수도 있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집에 도착하자, 거실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빈 커피잔 안에 말라붙은 커피를 보니 기다린 지 꽤 된 모양이었다.

“저거 한 번 신어 봐.”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아버지의 턱짓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소파 옆에 쇼핑백이 하나 있었다. 금강제화가 떡하니 써진 쇼핑백을 확인하고 다시 아버지를 쳐다봤다.

설마 나 신으라고 사준건가 싶었는데, 맞는 모양이었다.

“오다가 하나 샀다.”

“괜찮은데…… 잘 신을게요.”

“신어 봐, 안 맞으면 바꿔야 돼.”

내가 신발 케이스만 꺼내가려고 하자, 아버지가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10만원은 족히 넘을 것 같은 까만 구두였다. 종업원의 추천이라도 받은 건지, 구두 디자인이 당신이 신던 것과 다르게 날렵했다.

나는 뒤꿈치까지 넣고 가볍게 발을 움직였다.

“좋네요.”

“발은 딱 맞어?”

어느새 아버지가 거북목을 흉내 내듯 내가 신은 신발을 쳐다보고 있었다. 엊그제의 훈계가 많이도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왠지 가벼운 웃음이 일 것 같았지만, 나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잘 신고 다닐게요.”

“……들어가 봐라, 피곤할 텐데.”

“예, 아버지.”

방에 들어온 나는 택시에서 보던 자금 내역을 보다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왠지 효자 흉내라도 좀 내야 될 것 같았다. 해외 효도 관광이라도 한 번 보내드려야 하나? 최소한 신발 받은 값은 해야 될 것 같았다.

나는 볼펜을 꺼내서 몇 글자를 새로 적었다.

내 사적인 기록이었다. 외삼촌의 국회 사무총장에 이은, 부모님의 효도 관광.

* * *

이틀 뒤, 의원회관 휴게실.

“와…… 너 어떻게 알았어?”

4급 보좌관 박민표의 말이었다.

업무 중에 윤수혁과 대화를 나누다가 나온, 남아공 월드컵 조별리그 결과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냥 비길 것 같더라고요.”

윤수혁의 덤덤한 대답에 담배를 물던 박민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비긴 거 말고 2:2가 더 신기하다, 너 한준희 아니냐?”

“그냥 찍은 건데요, 뭐.”

“토토 샀으면 바로 회식감인데…… 아니. 너 토토 안 했냐?”

일순 박민표가 윤수혁을 쳐다봤다. 슬쩍 떠보는 듯한 시선에 태연하게 있던 윤수혁이 주위를 힐끗거렸다.

그러곤 담배를 손가락에 걸어 두고만 있는 박민표의 귓가로 다가갔다.

“당연히 했죠.”

그 말에 박민표가 손바닥을 쳤다. 담배 불씨가 튀었고, 휴게실에 있던 사람들이 둘을 쳐다봤다.

어느새 박민표가 끌끌대면서 윤수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얼마?”

“회식할 정도는 되는 거 같아요.”

그 말에 박민표의 눈이 동그래졌다.

“야, 무슨 회식이야. 방에 사람이 몇인데 그걸 다 데리고 가려고? 차라리 나하고 좋은 데 가자. 어? 쓸데없이 위장 채워서 뭐하냐, 정신과 육체의 양기를 보충해야지.”

박민표가 그러면서 손으로 굴곡을 표현했다.

“나 VIP야, 실장이 무조건 에이스만 꽂아준다고. 진짜 걔네 허리 놀림이…….”

적나라해지는 성매매 얘기에 윤수혁이 표정을 굳혔다.

‘지금은 할 일이 너무 많아, 이 양반아. 그리고 진짜 에이스가 최고위원들 옆구리에 있지, 보좌관 옆구리에 있겠어?’

윤수혁이 생각을 삼키는 새, 태연하게 말을 잇던 박민표가 윤수혁을 쳐다봤다. 의아한 시선을 느낀 윤수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짧은 사이에 쉬운 변명을 생각해 낸 것이었다.

“군대 동기 때문에 못 가요.”

“뭔 소리야?”

“동기가 갔다가 에이즈 걸려서…… 저는 트라우마 때문에 못 가요.”

단단히 굳은 윤수혁의 표정에 박민표가 주춤했다. 거긴 깨끗하다고 대꾸하려 했으나, 에이즈 걸린 지인의 경험담은 절로 목덜미가 서늘해질 만한 얘깃거리였다.

“참치회 어떠세요? 제가 아는 데 있는데.”

“……어, 어. 참치회 좋지. 그리고…… 내가 한 말은 없던 걸로 해. 괜히 신경 쓰지 말고.”

박민표가 내심 걱정된 듯 담뱃불을 튕기면서 말했다. 윤수혁은 어느새 덤덤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보좌관님.”

먼저 입구를 나서고, 꽁초를 버린 박민표가 뒤를 따랐다.

윤수혁은 뒤따라오는 박민표를 쳐다봤다가 시선을 돌리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이 양반이 전에도 그랬었나? 아니면…… 그만큼 친해졌다고 봐야겠지?’

윤수혁이 옅은 웃음을 지으면서 걸었고, 뒤에서는 박민표가 업무 통화하며 걸었다.

그렇게 잠깐을 걸어서 사무실에 도착하자, 9급 비서 이수경이 윤수혁을 불러 세웠다.

“이거 윤 비서님 앞으로 왔어요.”

이수경이 내민 고급 편지지에 지나쳐 가려던 박민표가 걸음을 멈췄다. 윤수혁이 봉투 겉면의 ‘보낸 이‘를 확인하고 있었다.

“뭐야? 어? 관악문인협회?”

“그게 뭐예요?”

박민표와 이수경의 물음이 이어지자, 윤수혁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버지가 좀 받아 달라고 하셔서요.”

* * *

봉투 안에는 관악문인협회에서 주관하는 안순익 고문의 출판기념회 초청장이 들어 있었다.

이게 바로 내가 안 고문을 만날 수단이었다.

체력 관리 하는 헬스클럽이나 등산 봉사 활동, 각종 인터뷰 등 안 고문을 만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이게 가장 얌전한 방법이었다.

가뜩이나 젊은 놈이 움직이면서 말을 건네면 가벼워 보일 것 같았다. 박수와 웃음이 있는 곳에서 점잖은 척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관악문인협회에 전화해서 의원실로 초청장 하나를 받았다.

나는 초청장을 품에 넣고,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국회 메신저 아이콘이 반짝거렸다.

[아버지가 작가셔?]

박 보좌관의 말에 고개를 들자, 파티션 너머에서 답장하라는 시선과 마주했다. 나는 조용히 키보드를 쳤다.

[아뇨, 그냥 관심이죠. 나이 드셔서 감수성이 예민해지신 건지. 원래 남자가 나이 들면 여자처럼 된다고 하긴 하는데, 아버지가 그러신 거 같아요.]

머리를 오래 굴리지 않아도, 거짓말이 바로 튀어나왔다.

아버지하고 영석이에게 한 말부터 박 보좌관에게 한 에이즈 소재의 얘기는 너무나도 쉽게 나온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이 물이 올랐다. 아니, 죽기 전보다 더 잘했다.

그때야 정치인의 오른팔이었으니 말보다 실무에 더 집중한 경향이 있긴 했지만, 내가 이렇게 뻔뻔할 줄은 몰랐다.

이미 마인드는 정치인이 다 된 모양이었다.

어느새 박 보좌관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그럼 너도 같이 가?]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뭐 시키실 일 있으세요?]

꼬치꼬치 묻는 이유를 몰라 묻자, 박 보좌관의 채팅이 이어졌다.

[조카가 문예창작과 희망하는 애라서 데려 갈 수 있나 싶어서.]

[당연히 갈 수 있죠.]

안 가는 게 좋겠지만.

나는 뒷말을 생략하고 엔터를 쳤다.

박 보좌관을 내 측근으로 쓰고 싶어서 환심을 좀 사는 것이었다. 특히나 박 보좌관은 제대로 확인해 보니 국회에서 평판이 손꼽을 정도로 우수했다.

다만 서울대, 고려 대, 연세대가 국회에 난무하는 마당에 흔한 인서울 학벌이라는 게 문제였고, 일을 너무 잘한다는 게 문제였다. 그 탓에 잘 나가는 의원 곁에 있는 보좌진들이 꺼려 해서 박 보좌관이 이 의원 옆에 있는 것이었다.

이미 온갖 연고로 엮인 실세 의원에게 갈 수 있는 이는 한정적이었으니.

그리고 나는 지금부터 끝까지, 좋은 이미지를 가져가야 했다. 이런 가벼운 호감도 쌓이면 하나의 이미지가 되기 때문이었다.

이내 박 보좌관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파티션 너머에서 고마워하는 시선이 느껴지는 착각까지 들었다.

[역시 우리 에이스, 너 밖에 없다. 고맙다.]

[날짜가 이번 주 토요일 점심인데 확인해 보세요.]

[이번 주 토요일이면 참치회 먹는 거 아니었어? 아까는 이번 주말이라며?!]

[예, 그 행사 끝나고 저녁 괜찮으시죠?]

[ㅋㅋㅋ 스케줄 빠듯하겠다.]

이후로 쓸데없는 채팅을 잠깐 하다가 의원실 업무를 봤다.

간만에 사무실로 돌아온 비서관이 시킨 자료 신청과 확인, 정리 등등의 일이었다. 피감기관에 전화하고, 국정감사 아이템을 보완할 기사들을 주제별로 확인했다. 그러나 앉은 자리에서 하는 건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국정감사 아이템과 관련한 정부 부처에 찾아가는 게 기본이었다. 시민단체도 마찬가지였고.

내가 나가겠다고 말하자, 비서관이 떠보기라도 하듯 물어 왔다.

“컴퓨터로 할 건 다 했어?”

“예, 출력해서 철 해놨습니다. 국감 아이템은 더 파보려면 시민문화발전협회하고 전국체육인연합에 직접 가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거기 간부들이 국감 아이템을 오랫동안 만졌던데요.”

그러자 비서관이 히죽 웃었다.

“됐어, 그냥 있어. 하여튼 누가 에이스 아니랄까 봐…….”

나도 나갈 생각은 없었다. 비서관이 그냥 앉아 있으라는 말을 할 것 같아 내뱉어 본 말이었다.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알겠습니다.”

대답하고 자리에 앉아서, 에이스 티를 내면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화면의 한글 파일에는 긴가민가한 내 기억들이 활자로 기록되는 중이었다.

* * *

며칠 뒤, 토요일.

택시 옆 자리에 앉은 남고생을 잠깐 쳐다본 윤수혁이 차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고생은 점심 전에 집 근처에 만난 박민표의 조카였다.

한숨을 짧게 뱉은 윤수혁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너 문예창작인가 한다며?”

“아? 네.”

“그럼 이 사람들 누군지 알아?”

윤수혁이 품에서 참가자 리스트를 꺼내서 건넸다.

혹시라도 필요할까 싶어서 준비한 것이었다. 그들 중 일부의 대표작도 미리 암기해 둔 상태였다.

이내 학생이 놀란 듯 입을 열었다.

“와, 대박.”

“뭐가 대박이야?”

차창을 내다보던 윤수혁이 남고생을 쳐다봤다. 종잇장을 내려다보던 남고생은 눈을 껌뻑거리면서 윤수혁을 쳐다봤다.

“……유명한 작가들이잖아요.”

“그렇더라, 나도 대표작은 암기 좀 했어.”

“암기요?”

“대학 때 교양도서 몇 권 읽은 게 내 마지막 책이야. 암기하면 다행이지, 읽었겠냐…… 감상문 요약해서 하나씩 말해 봐.”

윤수혁은 조금 관심이 생긴 얼굴로 말했고, 남고생이 기억을 가다듬으면서 조잘거렸다.

거의 십수 권에 가까운 도서의 감상을 읊어 대는 사이, 택시가 천천히 멈춰 섰다.

윤수혁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리스트를 다시 살폈다.

“이 정도면 됐다.”

윤수혁의 말에 남고생이 설레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사인은 받을 수 있죠?”

“……그럴 걸?”

무심한 얼굴로 대꾸한 윤수혁이 턱짓을 했다. 택시가 출판기념회장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내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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