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4. 무대에 오를 준비 (2)
질의서 초안을 김 비서관에서 제출하고, 이 의원을 따라 사우나까지 갔다.
당연히 탕에 몸을 담그는 건 이 의원이었다.
나는 클리닝이 끝날 이 의원의 구두를 챙겨야 했고, 나오면 마실 수 있게 찬 커피와 차를 대기시켜놔야 했다.
시간을 보니 이 의원이 나오려면 30여분은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 비서로서의 업무가 아닌, 윤수혁으로서의 업무를 봤다. 가져온 노트북을 펼치고, 수첩 내용과 대조하면서 계획을 세웠다.
일단 보름 동안 7억에 가까운 검은 돈을 수거했다.
아직 접근하지 않고 내버려 둔 곳과 전북 김제시의 마늘밭에 매장된 불법도박자금 110억을 제외하면 다 쓸어 담았다고 봐야 했다. 허탕친 곳이 많아 아쉽긴 했지만, 많이 모자란 돈은 아니었다.
그리고 회의에서 떠올린 안순익.
그와 관련된 자료를 찾기 시작하는데, 금세 끝났다.
“노인네가 대단하네.”
자료가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았다. 만날 방법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강 부장이 왜 리스트에 안 고문의 번호를 넣었는지 알법했다.
웬만한 지역 유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안 고문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곧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그는 시민단체 고문과 서울시의회 추진사업의 자문까지 맡았으며, 책까지 출판하고 있었다. 당장 공심위에 들어가고, 비대위 자리 하나 정도는 차지해도 될 만한 체력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도에 어울리게, 그는 17년도 대선캠프의 자문위원단장을 맡았었다. 당시에 내가 전략수행팀장으로 그를 몇 번을 마주쳤기에 얼굴을 기억했다.
물론 그를 수행하지도 않았고, 업무상 대면이 적어 잘 알지 못했는데, 그의 뒷얘기는 적잖게 알았다.
한 때 정치계의 실세였던 사람이었다. 뒷얘기가 안 나올 수 없었다.
누가 정리해 준 것은 아니었지만, 온갖 사소한 그의 언행이나 행동에서 나온 뒷담화의 끝은 하나였다.
안 고문은 아직 정치를 하고 싶어 했다.
아쉽게도 17년도 대선에서 새한국당이 패배하고, 안 고문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서 결말을 보진 못했지만.
나는 안 고문을 만날 계획을 고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시간이 꽤 남았기에 바깥바람이나 좀 쐴까 했는데, 폴더폰이 진동했다.
엊그제 만났던 영석이가 문자를 보내온 것이었다.
[형, 어제 말한 거 무슨 알바예요?]
문자로 말할 만한 게 아니었다. 영석이가 감동하게 만들어야 했기에 열심히 폴더폰 키패드를 눌렀다.
[만나서 얘기하자, 주말에 시간 비워놔.]
[레알? 그럼 저 알바 형만 믿을게요. 알바천국 로그아웃합니다?]
[그래.]
[그럼 이번주 토요일 19시 콜?]
[저녁 일곱시 아니냐?]
[형 아직도 총기번호 외우면서 그러지 마요. 이만 저는 오침 취하러 갑니다. ㅂㅂ]
짧게 웃고 품에 폴더폰을 넣었다.
영석이와 만날 시간도 잡았고, 안 고문과 만날 방법도 준비해놨으니 이제 바람 좀 쐴 때였다.
나는 사우나 대기실을 나와서 눅눅한 바람과 여름의 뙤약볕을 올려다봤다.
“돈 찾기 좋은 날씨다.”
91만원의 수익을 낸 그리스 전과 다르게 이번 아르헨티나 전은 찾아올 돈이 꽤 됐다.
억 단위로 넘어가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507.5배나 뛰었다.
대한민국이 4강까지만 갔으면 수억은 벌 수 있지 않았을까? 우스운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많은 돈이 되긴 힘들었다.
나는 신한은행으로 곧장 가서 입구에 서 있는 청원 경찰에게 말을 붙였다.
“토토 당첨금 수령하러 왔습니다.”
청원 경찰이 나를 잠깐 보더니 은행 내부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낮 시간 때라 대기자가 많아서요, 5만 원 이하의 소액이시면 토토 판매처에 가셔서…….”
대기석에 앉은 사람들을 가리키던 청원 경찰의 말을 끊었다.
“5천만원이요.”
“……아,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청원 경찰이 주춤하더니 서류 작업하던 창구 직원에게 가서 뭔가를 속닥거렸다. 창구 직원이 곧장 나를 쳐다봤고, 이내 잰걸음으로 안쪽 사무실로 들어갔다.
어느새 내 곁에 다가온 청원 경찰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잠깐만 계시면 직원분이 당첨금 지급 안내해 주실 겁니다. 저 근데…… 그거 혹시 이번에 아르헨티나 전 맞추신 건가요?”
“예.”
“와, 축하드립니다. 저 여기 근무하면서 토토 몇천만 원이나 맞추신 분 처음 봤어요.”
나는 별다른 대꾸를 않고 내 쪽으로 오는 여직원을 쳐다봤다. 내 또래 남자의 묘한 웃음을 더 받아주고 싶진 않았다.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예쁘장한 여직원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지금 창구가 다 차서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예, 좋죠.”
나도 모르게 긍정의 답을 하고 여직원의 뒤를 따랐다.
역시 사람은 예쁘고 잘생기고 봐야지, 나는 벽에 걸린 설립 기념 거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얼굴로 승부할 게 아니니까, 속으로 허튼 변명을 댔다.
* * *
토요일 저녁.
국회의원 이계진을 태우고 동대문구를 돌아다니던 윤수혁이 아파트 정문에서 차를 세웠다. 이계진이 뒷좌석에서 내리려다가 윤수혁의 어깨를 짚었다.
“오늘 고생했다, 차비해.”
하루 종일 운전하고 수발든 것을 치하하는 말이었다.
어느새 대충 쥔 만 원짜리 몇 장이 윤수혁의 어깨너머에서 떨어졌고, 이계진은 차에서 내렸다.
술기운이 도는 이계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윤수혁은 떨어진 지폐를 주웠다.
3만원.
‘전에는 이거 받고 좋다고 힘냈었지.’
피식 웃은 윤수혁은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관리인에게 키를 맡겼다. 이내 아파트 입구에서 택시를 잡은 윤수혁이 뒷좌석에 올랐다.
“신촌이요.”
동시에 윤수혁이 기사에게 쥐고 있던 지폐를 내밀었다.
이계진이 줬던 3만원이었고, 돈을 받던 택시기사는 윤수혁을 쳐다봤다. 차가 막혀도 택시비 만원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당황한 시선을 마주한 윤수혁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빨리 가시면 됩니다, 약속 시간이 다 돼서요.”
“아아, 네. 알겠습니다.”
택시기사는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는 듯 돈 통에 지폐를 넣고는 쾌속으로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기사는 ‘빨리’에 집중한 듯 전면 창과 좌우를 살피면서, 입도 다물고 바쁘게 운전했다.
그렇게 신촌역에 도착한 택시기사는 빙긋 웃는 얼굴로 사이드 브레이크까지 채웠다.
“다 왔습니다, 손님. 진짜 복 받으실 겁니다, 고마워요!”
“예.”
기사의 웃는 얼굴을 뒤로한 윤수혁은 손을 털면서 식당으로 들어갔다.
조명이 어두운 소고기 취급점이었고, 둥근 테이블에 앉아 있던 최영석이 벌떡 일어났다. 물컵과 메뉴판 따위만 있었고, 밑반찬도 없는 자리였다.
“아, 형. 지금 19시 08분이잖아요.”
“일이 바빠서, 미안하다. 음식 안 시켰어? 먼저 먹고 있으라니까.”
의자를 끌어 앉으면서 대답하자, 최영석이 함께 앉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같이 먹어요. 근데…….”
최영석이 주위 눈치를 슥 보고 말을 이었다.
“형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여기 좀 비싸요, 저쪽에는 연예인들 사인도 있는데 봤어요?”
이내 최영석이 사인이 걸린 벽 쪽으로 슬쩍 눈짓을 하자, 윤수혁이 가볍게 웃었다.
“알아.”
“아니…… 네? 안다고요?”
“어, 너 휴가 나와서 소고기만 안 먹었다며?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사회인이니까 사주는 거야.”
이미 펼쳐져 있던 메뉴판을 쓱 내려다본 최영석이 입맛을 다셨다.
“……그러면 그냥 형이 주문하는 대로 먹을게요.”
잠시 생각하다 뱉은 말에 결국 윤수혁이 테이블 호출 버튼을 눌렀다.
곧장 온 종업원에게 윤수혁은 한우 등심부터 특수 부위를 주문했고, 옆에서 듣고 있던 최영석은 금액을 합산하다가 입을 벌렸다.
“……형, 왜 그래요? 어디서 돈 훔치고 그런 거 아니죠?”
농담기가 섞인 걱정에 윤수혁은 고개를 저었고, 먼저 나온 소주를 까면서 잡담을 나눴다.
그렇게 술이 몇 순배 돌고, 불판도 한 번 갈고 다시 고기를 얹을 무렵.
최영석을 살피던 윤수혁이 입을 열었다.
나직하게 깐 목소리였다.
“영석아, 너 전역하고 알바 구한다고 했잖아?”
“아, 맞다. 그거 무슨 알바라고 했죠? 공기관?”
최영석이 잘 익은 소고기 한 점을 집어 먹으면서 물었고, 윤수혁은 고개를 저었다.
“알바 하지 마라.”
“……에?”
당황한 최영석이 입을 우물거리다가 윤수혁을 쳐다봤다. 윤수혁은 무거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알바 하지 말고 학교 복학해.”
“에이, 저도 그러고 싶죠. 근데 돈이…….”
“내가 줄게.”
“…….”
다시금 고기를 집으려던 최영석의 손이 멎었다.
“그러니까 학교 다녀, 공부 열심히 하고 졸업해라.”
“네? 무슨 말이에요?”
최영석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그간 최영석이 알고 지내던 윤수혁은 평범한 중산층이었다. 부족하진 않아도, 풍족하지도 않았던 형편임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윤수혁은 전과 같은 어조로 딴 소리를 내놨다.
“너는 꽁돈 생기면 어디에 쓸래?”
그 말에 당황스런 얼굴을 하고 있던 최영석이 작게 입을 벌렸다.
“……형, 로또 맞았어요?”
“아직 부모님한테도 안 보여 줬어.”
윤수혁이 지갑에서 곱게 접혀 있는 작은 종잇장을 꺼냈다.
어느새 젓가락을 내려놓은 최영석이 얼른 손을 뻗어서 종잇장을 펼쳤다. 그것은 스포츠 5,000만 원이 넘는 토토 영수증과 세금을 떼고 은행 이체 내역이었다.
최영석의 눈동자가 떨렸다.
‘오, 오천만 원.’
이내 움찔거리던 시선이 윤수혁에게로 향했다.
“……농담 아니죠?”
“그래.”
단호한 대답.
그리고 수년간 같이 봐 온 윤수혁의 모습에서 최영석은 끝을 붙잡고 있던 의심을 놓았다. 오늘 먹는 고깃값만 해도 26살의 사회 초년생이 부담하기에는 값비싼 것이었다.
“으음…….”
이내 최영석이 쓰고 있던 야구모자를 벗고는 짧게 깎은 머리를 긁어댔다. 어둑한 조명에서 머리카락에 맺힌 땀이 반짝거렸다.
“형…… 근데, 왜 저한테…….”
“너 최영석이잖아, 제일 친한 후배. 그럼 너는 복권 맞으면 나한테 밥도 한 끼 안 사줄 생각이었냐? 선물도 하나 안 주고?”
윤수혁의 말에 최영석이 자연스레 자신의 상황을 가정했다.
만약에 나였으면, 내가 당첨금을 수령했으면.
이내 최영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조금 머뭇대는 모습에 윤수혁이 편안해진 어투로 말했다.
“못 믿겠으면 알바 알아 봐도 된다, 그래도 내가 학교에 네 학비는 내줄 테니까 교무처에 전화해서 확인해.”
“아니, 아니요. 그게 아니고 너무 당황스러워서…… 형, 근데 저 이거 갚으려면 몇 달은 일해야 되는데…….”
“너도 나한테 당첨금 빌려 주고 갚으라고 할래?”
“……아니요.”
윤수혁은 이내 술잔을 들면서 최영석을 쳐다봤다.
“이사 몇 번 했다고 초중고 동창생들 다 떨어져 나가고, 군대 동기들은 전국 팔도에 찢어져서 지 먹고 사느라 바빠. 친형 하나 있는데, 연락도 안 한 지 꽤 됐고. 그나마 믿을 만한 사람이 너 밖에 없다.”
최영석이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냥 앞으로도 믿을 만한 동생으로 있으면 돼, 그러면 돼.”
어둑한 실내 분위기와 술기운에 엷어진 감정이 윤수혁의 말에 흔들렸다.
최영석의 양손이 고개 숙인 얼굴을 문질러 댔다.
“……고맙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윤수혁이 미소와 함께 술잔을 들이켰다.
믿음을 돈 주고 사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수백만 원 밖에 되지 않는 푼돈이었다.
이건 얄따란 연줄과 수직적인 관계로 엮인 아랫사람과의 관계보다 더욱 끈끈한 것이었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하고, 도우며 의지하는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기회와 기회를 쥘 수 있는 능력이 다 있어야 했다.
하물며 스물다섯 청년의 감동이라면?
위태롭고 치명적인 순간에, 마음을 기울게 하는 마지막 추가 될 것이었다.
더구나 최영석은 은혜는 반드시 갚는 사람이었다. 고개 숙인 지금도 최영석은 감사함과 더불어, 은혜를 갚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어느새 술을 들이켠 윤수혁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래도 일자리는 알아 봐 줄게, 근데 졸업한 다음이다.”
끝까지 자신을 위한 말에 최영석은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