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7화 (7/191)

# 7

4. 무대에 오를 준비 (1)

내 말에 영석이가 대뜸 청와대 빽이냐면서, 우스운 말을 늘어놨다. 술 때문인지 좀 들뜬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영석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술 깨고 다시 얘기하자.”

“저 아직 안 취했는데?”

“됐어. 복귀하기 전에 전화나 해, 밥 사줄게. 그때 얘기하자.”

“오, 역시 사회인!”

영석이가 엄지를 치켜세웠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나를 배웅하겠다고 일어서는 영석이를 앉히고, 남은 애들에게 인사하다 보니 불현듯 뭔가가 생각났다.

“여기 연장자가 나지?”

한 시간 만에 취기가 잔뜩 오른 영석이가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대꾸했다.

“그럴걸요?”

“계산한다, 맛있게들 먹어.”

나는 금세 시끄러워진 테이블을 뒤로 하고 술집을 나왔다. 뒤에서 사회인을 연발하는 목소리가 바깥까지 들려왔다.

호객행위를 지나치고, 도로변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이내 집주소를 대고 잠깐 눈을 붙였다. 몇 분이나 됐을까, 꿈조차 없이 푹 잤던 나는 집에서 내렸다.

영석이야 조만간 다시 만나서 약한 부분을 건드릴 생각이었다.

나를 좋아하거나 존경하거나, 하여튼 내 손을 잡게끔 만들 것이었다. 영석이는 지금까지 부족함을 견디고 성장한 탓에 연약한 부분이 너무나도 많았다. 나는 그 부분을 채워 주든, 도려내주든 뭘 해 줄 생각이었다.

딴생각하며 집에 들어서자, 커피믹스를 타던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술 먹었어?”

“예, 조금요.”

양말을 벗고, 외삼촌이 사준 크로스백을 어깨에서 내리는데 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보좌관들하고?”

“아뇨, 대학 후배요.”

“무슨 좋은 대학이라고 후배들까지 챙겨?”

어느새 주방에서 나온 아버지가 커피잔을 쥔 채로 나를 마주했다.

나는 와이셔츠 단추까지 풀면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아버지 옆을 지나가는데, 묘하게 퉁명스런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랏일 돕기도 바쁠 텐데, 취직한 지 얼마나 됐다고 놀고 그래? 술값 네가 냈지?”

“예.”

“잘하는 짓이다, 국회 7급 비서라고 해 봤자 월급 얼마나…….”

방문을 열려다가 멈췄다. 10년이나 나이를 더 먹어서 그런가, 보좌진 막내 생활이 내키지 않듯, 아버지의 말도 듣기가 좋진 않았다.

“아버지.”

“…….”

커피잔을 입에 대면서 아버지가 나를 쳐다봤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눈이었다.

“씻고 오겠습니다.”

“……씻어.”

내가 토달기를 기대한 것인지, 기대가 꺼진 대답이 들려왔다.

걱정일까, 짜증일까?

아버지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자식이 좋은 대학가고 성공하길 바랐는데, 뭐하나 제대로 이룬 게 없으니까 실망한 것이겠지.

그래서 걱정이 잔소리가 되고, 잔소리가 훈계가 되는 것일 터였다.

그나마 형이 집과 수백 킬로미터가 떨어진 전남대를 졸업한 게 다행이었다. 성적이 썩 좋지 못하고, 스펙이 모자라서 아버지의 연줄로 중견회사에 들어가긴 했지만, 거기도 나름 좋은 곳이었다.

더구나 아버지는 권고사직으로 은퇴한, 쉰여덟의 노무관리 부장이었다.

지금은 타일 기술을 배운다고 종종 새벽녘에 화장실을 쓰고, 어수선한 소리를 내며 출근하고 있었다. 기술자들이 기술을 알려 주지 않아서 보조만 한다고 했었고.

그런 이유에서 자리 잡지 못한 나를 갈구는 것 같았다. 어머니도 장남인 형보다 나를 더 걱정했고.

이내 대충 샤워하고 나오자, 거실에 있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옷 입고 앉아 봐.”

“예.”

대답하는데 어머니가 걱정스런 얼굴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나 싶었는데, 거실에 나가니 아버지가 대뜸 내게 봉투를 내밀었다. 10년 전에도 이랬었는지, 기억이 흐릿했다.

“내 일당이다.”

“……?”

“화장실 한 칸 붙이고 받은 돈이야, 하루 반나절동안 허리 굽혔다 펴고, 쪼그려 앉으면서 번 돈이라고.”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아버지가 써먹는 진심어린 훈계였다. 아직 철들지 못한 아들의 앞길을 바로잡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었다.

이 상황을 보니 아버지가 근본적으로 나를 걱정하긴 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친구도 아니고, 아들에게 단순한 짜증을 내겠는가?

어느새 아버지가 봉투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얼마 같으냐?”

노가다 기본이 7, 8만원씩은 받으니 그 두 배쯤 되지 않을까 싶었다. 15만원 정도, 그만한 액수를 들은 기억도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원하는 대답은 내 추측이 아닐 터였다.

괜히 추론해서 정답을 내놔도 달라질 건 없었다.

내가 대꾸하지 않자, 아버지가 반전이라도 알려 주듯 목소리를 깔았다.

“15만원이다.”

“…….”

“일 배운다고 잡일하면서, 타일까지 붙이고 받은 돈이 15만원이야. 일감 따지고, 날씨 따져서 한 달에는 얼마 버는 줄 알아? 한 4, 500 버는 줄 알어?”

쉬는 날도 일 하는 날 못지않게 많았으니, 2, 300 정도 될 것이었다. 어머니가 말했던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했는데, 아버지가 금세 말을 이었다.

“200이야, 꼴랑 200.”

예상대로 맞아들었다. 아버지의 언성이 조금 높아질 것처럼 보였다. 아들에게서 반성하는 기색이 별로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그런데 애비가 그렇게 벌어 온 돈을 술값 내는데 쓰고 그러면…….”

이어지고 있는 아버지의 말을 끊었다.

“술값 제가 벌어서 냈습니다.”

“네가 무슨 돈을 벌어?”

표정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아들을 걱정하긴 해도, 잘못한 것까지 너그러이 품어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은 말대꾸나 하는 바람에 소위 말하는 삔또가 나가기 직전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니, 거기에 맞춰서 싸울 생각은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노기를 누를 겸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녁에 늦게 들어올 때는 전단지 아르바이트했고, 아침에 일찍 나갈 때는 신문 돌렸습니다. 작지만 적금도 넣고 있고, 아버지만큼은 아니겠지만, 일해서 번 돈이 소중하다는 것도 압니다.”

전부 거짓말이었다.

덕분에 화를 폭발시키기 직전이던 아버지가 움찔했고, 벌어지려던 입술이 도로 닫혔다.

“그리고 말씀 안 드리려고 했는데, 오늘 낸 술값은 홀어머니 모시는 군인 후배 다독이려고 사준 겁니다. 월급 몇만 원 받는, 힘든 애한테 제가 술값을 받을 순 없잖아요?”

“…….”

“…….”

아버지는 당연하고, 어느새 곁에 와 있던 어머니도 아무 소리도 못 냈다.

원래 스물여섯 살의 나는 혼나면 혼나는 그런 놈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일 터였다. 이렇게 말을 한 적도 없는 데다가, 용돈이나 받아 타 쓰던 게 얼마 전이었으니까.

“……고생했다, 아들.”

어느새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고, 아버지는 담뱃갑을 쥐면서 일어났다.

“흠, 거…… 미리 말을 하지 그랬어.”

“죄송합니다.”

인성까지 괜찮은 아들 역할을 자처하자, 아버지가 어느새 미안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래도 차마 미안하다는 말은 못하겠던 모양인지, 아버지는 다른 말을 내놨다.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자라.”

“예, 먼저 들어갈게요.”

어머니는 아버지와 할 말이 있는 듯 같이 거실을 떠났고,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로써 집이라는 무대에서 선보인 첫 연극은 아주 좋은 성적을 냈다.

나를 낳고 키운 부모가 이렇게 반응한다면, 정치판에서는 기립 박수와 함께 갈채를 보내지 않을까?

아마 그 무대는 제대로 선보이려면 거의 2년 정도를 기다려야 하겠지만, 소소하게 실력을 선보일 연습 무대는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리고 조만간 올라갈 예정이었다.

이미 지금도 무대 의상을 입고 있었다.

새한국당 청년대책위원회 부위원장, 국회의원 보좌진.

그리고 스물여섯의 청년까지.

* * *

이틀 뒤, 국회.

문체부에서 나온 나이 지긋한 팀장이 업무 보고서를 배부하고, 윤수혁을 비롯한 새한국당 보좌진을 대상으로 회의를 시작했다.

상임위 회의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보좌진은 주로 사실 관계 확인이나 질의서 작성에 주안을 두고 질문했으며, 팀장도 면피용 답이 아닌 제대로 된 설명을 내어 놓았다. 공격하고, 공격당하는 상임위하고는 성질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건 뭐…… 나보다 잘하는 거 같다?”

윤수혁과 회의에 참석한 5급 비서관 김대운의 말이었다.

배부 받은 보고서에 약어로 요약하고 정리하며, 짤막하게 필기한 윤수혁의 솜씨는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비서의 것이 아니었다.

김대운이 윤수혁의 보고서를 들추면서 말했다.

“기가 막히네, 기가 막혀. 질의서 초안 기대한다?”

“한 번 해 보겠습니다.”

긴장이라곤 일말도 없는 담담한 대꾸에 김대운이 혀를 내둘렀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비서들은 가혹한 업무량, 국회 내 위계질서, 업무 능력 때문에 곧잘 움츠러들고, 사직서를 내곤 했었다. 그런 와중에 첫 취업이자, 첫 비서인 윤수혁은 보통의 비서들과 달랐다.

업무가 우수한 것뿐만 아니라, 말과 행동도 초짜와는 다른 여유가 있었다.

‘하긴…… 그러니까 소문이 쫘악 났지.’

그 사이 윤수혁은 틈틈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체부 설명이야 어려운 것도 없었고, 일반적으로 진행해 온 것과 다를 게 없었다. 평범한 메뉴얼과 같은 것이어서 주의 깊게 듣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었다.

이미 한 번 겪은 것이기도 했고.

그래서 윤수혁은 대강의 요점만 정리하고, 강석배가 건넨 리스트를 떠올리고 있었다.

은퇴한 정치 원로.

그들은 정관계 핵심부로 보다 쉽게 접근하는 일종의 지름길이었다.

밑바닥부터 박박 기어서 승진할 게 아니라면, 정관계 핵심부로 입성하는 데 은퇴한 정치 원로들만큼 좋은 도구도 없었다.

애초에 그들 스스로가 민간과 정관계의 교두보를 자처하기도 했었다. 웬 단체에서 고문이며 자문으로 데려가는 이유도 그랬다. 압박을 덜 받고, 로비를 쉽게 하기 위함이었다.

실권은 사라져도, 인지도를 먹고 사는 정치인들에게 명망 있는 원로들은 함부로 깎아 내릴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윤수혁은 연락처에 기입한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안순익.

그는 리스트에 있던 이들 중 국회의원과 청와대 요직을 거쳐 장관까지 역임했던, 연혁이 화려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아직 인지도도, 연줄도 꽤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도 시민단체 고문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강석배가 건넨 리스트에 안순익이 있다는 점이었다.

한마디로 명망 치고 접근하기 쉬운 사람이라는 것.

윤수혁은 끝나가는 회의를 보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 고문이면 적당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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