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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뱃지-2화 (2/191)

# 2

2. 눈이 뜨였다 (1)

눈이 뜨였다.

그저 누운 채로 푸르스름한 천장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흉몽을 꿨다면 다행이라고 되뇌거나 뭣 같았다고 읊조리기라도 했으련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죽었거나 죽었을 게 분명한 몸이었다. 살아 있어도 병원 천장이 보이거나, 어디 갇혀 있어야 했다.

더구나 흐릿한 줄무늬가 새겨진 천장은 내가 10년 전에 가족과 함께 살던 집의 천장이었다. 독립하면서는 하루도 자본 적이 없던 집이었고.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만한 기억은 아무것도 없었다.

있다면 그것도 믿기 힘든 일이겠지만.

오래지 않아서 나는 잠기를 완전히 털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이어서 반사적으로 내 핸드폰을 찾았다.

전역하자마자 샀던 폴더식 핸드폰.

“미친…….”

나는 당황스러움에 나오던 욕을 씹어 삼킨 뒤, 통화 기록과 문자 내용 따위를 살폈다.

딸깍이는 버튼을 누르면서 몇 번이나 더 욕을 내뱉었다. 납득할 수 없는 현실을 억지로나마 받아들이기 위해서, 나는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욕을 읊조렸다.

확인을 마치고서 핸드폰을 놓고 일어섰다.

딸깍.

전등 스위치를 누르고, 점등되는 형광등 아래서 눈을 찌푸렸다. 동이 트지 않아 윤곽만 어슴푸레 드러났던 방이 고스란히 보였다.

단출한 책상과 너저분한 책장.

투박한 컴퓨터와 각종 집기가 책상 위에 널려 있었고, 이어서 대학시절 썼던 교재와 자기계발서, 자기소개서 인쇄 양식 따위가 책장에 꽂혀 있었다.

더 이상 뭘 뒤져 보거나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2010년. 서울 중산대학교 졸업 이후이자, 내가 국회에 첫 출근할 날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가능한 것은 오직 두 가지 뿐이었다.

내가 예지몽을 꿨거나 과거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 그게 아니면 나는 정신병원을 가던지 접신을 하던지, 딴 길로 가야만 했다.

그렇게 심란했던 속을 정리하는 사이.

끼릭.

방문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문이 열리면서 쉰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일어난 거야?”

어머니였다.

형광등에 눈이 부신 듯 인상을 찌푸리고, 눈곱을 떼어 내던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출근 준비하니?”

“……첫 출근이라 긴장 돼서요.”

다행히 말은 제대로 나왔다.

울컥하거나 눈물이 맺히지도 않았다. 2020년에도 어머니는 잘 살아 있었다.

내가 대충 변명하자, 어머니가 그럴 만도 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너무 긴장하진 말고…… 안색이 별로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괜찮니?”

어머니의 눈에도 내가 이상해 보이긴 한 모양이었다.

죽었다가 살아난 데다가, 10년이라는 시간적, 정신적 괴리를 몇십분 만에 줄였으니 정상으로 보이는 게 더 힘들 터였다.

나는 고개를 젓고, 변명을 댔다.

“좀 졸려서요.”

“그럼 좀 더 자고 일어나렴, 피곤해 보인다.”

어머니는 밥을 안치러 간다면서 문을 닫았다.

나는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내가 효자는 아니었지만, 하마터면 부모보다 먼저 눈 감은 불효자가 될 뻔했다는 게 떠올랐다.

이 장 의원 개 같은…….

저절로 욕설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 가라앉았다.

내 인내심이 그 정도 화를 가라앉힐 정도는 됐다.

장 의원 밑 닦은 세월이 수년이었고, 정치판에서 구른 게 10년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일까?

죽기 직전도 아니고, 장 의원과 만날 때도 아닌, 첫 출근일인 오늘.

정치판 입문부터 새로 하라는 것이겠지.

실수해 가면서 일 배우고, 밑바닥 닦으면서 힘겹게 성장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어려울 것도 없었다.

내게는 지난 10년의 경험이 있었다.

그거면 해먹고도 남을 게 분명했다. 흙탕물이란 물은 다 마시고, 더러운 길이란 길은 다 골라 다녔던 인간이 바로 나였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구형 컴퓨터 앞에 앉았다. 초 단위로 지워져갈 기억 대신, 꺼내서 확인할 수 있는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였다.

언론에서 다룰 일들과 불법 감찰과 미행 따위로 알아낸 기록, 캐비닛에서 꺼내 열람했던 자료며 내부자들 사이에서 돌던 소문들까지 바쁘게 타이핑 해 나갔다.

어머니가 몇 번을 부르다가 방으로 들어와 모니터를 바라보기 직전까지 키보드를 두드린 것 같았다.

10년은 새벽녘에 기록하기에는 너무나도 긴 세월이었다.

그렇게 집밥까지 먹고서 나는 집을 나왔다.

새로 살기로 마음 먹은 만큼, 내 정치적 행로를 정해야 할 때였다.

계획표를 짜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갈 길은 보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내 인생에 정치라는 동네 외에는 머물 곳이 없었다.

아니면 왜 하필 오늘이겠는가?

굳이 10년간의 기억을 얻게 된 게 오늘인 건 우연일리가 없었다.

그럼 정치를 한다면 뭘, 어떻게 할까?

“여(與), 야(野).”

나는 조용히 읊조렸다.

정치판은 두 갈래에서 시작됐고, 나는 여당인 새한국당과 야당인 신민주당 중에 한 곳을 골라야 했다.

야당에는 제2, 제3 야당이나 무소속도 있겠지만 거긴 볼 필요도 없었다. 정치는 힘 있는 곳에서 시작해야만 했고, 대통령을 만들었던 새한국당과 신민주당 만이 그런 힘을 갖고 있었다.

물론 정치를 하려면 여당인 새한국당에서 해야 하는 게 기본이었다.

행정부를 현실적으로 압박할 수 있고, 가시적인 권력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앞으로 7년 안에 새한국당은 헌정사상 최초로 분당할 예정이었다. 전 당대표였던 대통령은 외교 분란과 국정 혼란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게 될 것이었고.

그렇다고 해서 신민주당이 날개를 달고 잘 나가는 것도 아니었다.

정권 교체에 성공했으나 개혁은 비리와 적폐는 끝내 청산하지 못했다.

신민주당도 팔을 잘라 내야 하는 마당이었다. 당연히 제 몸 성하길 바라는 인간들이 무엇을 청산하겠는가?

결국 정권 초기에 비상하다가 몇 번 주춤하기 시작하더니 비난을 얻어맞았고, 중도층의 지지율을 잃게 됐다.

그럼 나는 어딜 가야 할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스타트는 똑같겠네.”

뱉은 말처럼 그대로 출근하면 됐다.

전생처럼 새한국당 비례대표 출신인 이 의원 밑에서 보좌진 겸 당원으로 시작하면 될 일이었다.

이유? 보수당이니까.

나라를 다 팔아먹어도 1번이라는 한 지지자의 말처럼 보수당이 갖는 의미는 각별했다.

대한민국을 흔들만한 이슈가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국회 의석수만 4할 이상을 먹는 곳이 보수당이었다.

군사정권 이후에 치러진 지난 총선만 봐도 각이 나왔다.

그리고 새한국당은 내가 빠삭하게 알고 있는, 내 홈그라운드였다.

그 정도면 암울한 미래는 감당할 만했다.

당연히 싹 다 바꿔야 하겠지만, 앞날을 뻔히 아는 내 입장에선 충분히 할 만한 일이었다. 쉽지는 않겠다만.

* * *

국회 의원회관 408호.

“아, 수혁 씨? 잠깐만 있어 봐.”

4급 보좌관 박민표가 말을 이으면서 서류철을 뒤적거렸다.

“지금 내가 가봐야 돼서…… 일단 저기 앉아 있어. 저기가 수혁 씨 자리야, 필요한 거 있으면 이 비서한테 말해. 아니다, 이 비서가 대충 설명 좀 해 줘.”

어느새 한쪽 어깨에 크로스백을 걸치고, 양손에 서류 뭉치까지 챙겨든 박민표가 이번에는 인턴비서들을 쳐다봤다.

“의총 발언 수정안은 아직도야?

“지금 복사하고 있어요.”

“그럼 나 먼저 갈 테니까 그거 바로 챙겨 와. 호치케스 저번처럼 박지 말고, 알았어?”

“네, 보좌관님.”

복사기 옆에 붙어 있던 인턴비서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박민표가 의원실을 나갔다. 다급한 걸음소리가 의원실 문도 채 못 닫고 복도를 울렸다.

윤수혁은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여길 또 앉을 줄이야.’

익숙하게 가방을 건 윤수혁이 파티션 안쪽의 사무집기를 바라봤다. 국회 보급 컴퓨터며 각종 사무용품과 서류 뭉치, 하다못해 이면지 정리함까지 눈에 익었다.

윤수혁이 첫 비서 업무를 봤던 의원실이었다.

또한 2년 가까이 눈칫밥 먹으면서 일을 배우고, 비위를 맞춰가면서 버틴 장소였다. 모르려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감회는 그게 전부였다.

국회에 도착하고 낯익은 얼굴을 보면서 이미 새삼스러운 기분은 다 느낀 뒤였다. 앞으로도 소모적인 감정은 적당히 갖고 있다 휘발시켜야 했다.

할 일이 가득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수혁은 어느새 국회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타이핑을 해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할 무렵, 복사기를 다루던 인턴비서들까지 의원실을 나갔다.

그러자 문가 근처에 있던 9급 비서 이수경이 파티션 너머로 시선을 들었다.

“저기요, 윤수혁 씨?”

윤수혁이 조용히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자, 이수경이 말을 이었다.

“사실 저도 제 업무 봐야 하고 바빠서 설명하기가 좀 그래요. 음, 보좌관님이랑 의원님 의총 끝나고 이따가 오시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보좌관님이 오시면 설명 다 해 주실 거예요.”

“예.”

짤막하게 대꾸한 윤수혁이 다시 시선을 내리고 키보드를 마저 쳤다.

연이은 윤수혁의 마우스 클릭 소리에 시선을 내리려던 이수경은 가만히 윤수혁을 쳐다봤다.

윤수혁은 마치 업무를 보는 것처럼 보였다.

파티션에 반쯤 가려진 눈매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고, 모니터를 집중해서 주시하는 모양새였다. 마우스를 딸깍이고, 키보드를 짧게 두드리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났다.

이수경은 그런 윤수혁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뭘 안다고…… 그냥 가만있지.’

이내 이수경은 다시 시선을 내리고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 사이, 윤수혁은 국회 홈페이지를 돌면서 여야 의석수와 주요 현안, 새한국당의 당론 따위를 확인했다.

오래지 않아 윤수혁의 머릿속에서 흐릿했던 기억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국회의원의 이름들과 바뀐 상임위원회 명칭을 보자 어렵지 않게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었다.

‘아무래도 여기 당분간 있어야 되겠네.’

윤수혁은 그러면서 수첩을 꺼내 바쁘게 필기하기 시작했다. 모니터를 중간에 잠깐 쳐다보긴 했지만, 수첩 안의 내용은 모니터와는 관계가 먼 것들이었다.

윤수혁의 기억이었다.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얻었던 것들, 추문과 루머 따위도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열을 올리는 사이, 문소리에 윤수혁의 시선이 움직였다. 입구 근처에 있던 이수경은 반사적으로 일어서고 있었다.

“오셨어요, 의원님.”

윤수혁은 들어서는 이계진을 바라봤다.

대한체육회 이사, 태권도협회 부회장 같은 자리를 역임한 체육계 출신의 이계진은 비례대표 국회의원이었다. 이후 재선준비를 하지만 공천조차 못 받고 떨어질 사람이기도 했고.

이내 들어선 이계진이 시선을 돌렸고, 윤수혁의 머리가 깊게 숙어졌다.

“안녕하십니까, 의원님.”

“어, 웬 친구지?”

“7급 비서 합격자 윤수혁입니다.”

뒤에서 들어오던 박민표가 대신 대꾸했고, 윤수혁은 이계진을 마주했다.

‘내가 네 친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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