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화
“페르세이지 님!!”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곧 풍성한 금발의 미인이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건축가로 직업을 선택했던 예스티카 벨라시가 엄청난 기세로 그들… 정확히는 페르세이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예스티카 님.”
“페르세이지 님! 오신다는 말은 들었는데-”
“여동생의 결혼식이니까요.”
“정말이지.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좋잖아요.”
한때 약혼한 사이였던 두 사람이다.
아닌 척하지만 연회장 내 모든 사람의 눈과 귀가 이쪽으로 쏠렸다.
카이엔은 얌전히 병풍이 되기를 택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렇게 보면 두 사람은 참 잘 어울리는데, 예스티카도 이미 마음을 접었으니 두 사람이 다시 이어질 확률은 낮았다.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서 기뻐요.”
“건강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바이올로스 후작가에서 일방적으로 파혼 선언을 했지만 두 사람의 대화엔 모난 구석 하나 찾을 수 없었다.
파혼 소식은 알아냈어도 페르세이지의 상태에 대해서는 알아낼 수 없었던 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 그래도 예뻤던 예스티카는 드레스를 입고 힘주어 치장을 한 덕분인지, 세자르에 왔었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그 모습에 카이엔은 자네인에게 속삭였다.
“…비셰도 꾸미고 오라고 할 걸 그랬나?”
“으음… 그러게요.”
그 사이에 비셰와 세아나가 도착했고 예스티카는 그 두 사람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비셰의 단발머리와 안경을 보고는 조금 놀란 것 같긴 했지만 말이다.
“그럼, 이따가 또 뵐게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예스티카는 돌아갔다.
그들에게 향했던 시선 중 몇 개는 예스티카를 쫓아갔다. 대다수가 남자들이었다.
“바이…페르세이지 씨는 후회 안 하세요?”
“뭘 말입니까?”
“파혼한 거요.”
“네. 저야 이 생활에 만족한다지만 예스티카 님은 아닐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지금은 자신의 꿈을 향해 열심히 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쪽이 더 보기 좋습니다.”
장갑으로 가리지 않은 손은, 거친 데다가 흉터까지 나 있었다.
바로 이곳에 카이엔이 있으므로 치료해줄 수도 있었지만 예스티카는 거절했다. 흉터와 상처, 굳은살은 당연한 거라면서.
잡담을 하고 있으니 프라우디에가 에이바토스와 함께 돌아왔다. 에이바토스는 다시 한번 카이엔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가 이젠 정체를 알게 된 페르세이지를 향해서도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오, 드디어 시작하는군.”
“이번 결혼식에 바이올로스 후작님이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하더라고요.”
“소문으로 듣자 하니, 성국에서 성자님을 모셔왔다고…”
“성녀님 아니었나요?”
주변 사람들이 하도 시끌시끌 떠들어대니 안 듣고 싶어도 저절로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기나긴 사설이 끝나고 주례를 봐줄 사람이 나타났다.
“…엥?”
익히 아는 얼굴에 카이엔은 당황하고 말았다.
주변 하객들이 성자가 어쩌구 성녀가 어쩌구 떠들길래 헛소리를 한다고 여겼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척척 걸어가서 단상 앞에 선 건 그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메르실라 님이군요.”
“넌 안 놀라네?”
“제가 추천했으니까요.”
“허…”
“왕자님이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알았습니다. 성공했네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입꼬리를 올리는 녀석을 보니 화낼 기운도 사라졌다.
이제 더 놀랄 일도 없다며 카이엔은 손에 든 유리잔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아직 그가 놀랄만한 일은 더 많이 남아있었다.
진행을 맡은 시종의 우렁찬 외침에 신랑이 입장하는 순간. 카이엔은 제 눈을 의심했다.
“…저게 에빌이라고?”
“그렇군요.”
“대체 얼굴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아주 잘 꾸며놨군요. 새벽부터 일어나 화장을 받았을 겁니다.”
“하하…”
카이엔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맨날 같이 서류의 바다에서 헤엄치면서 이대로 일하다간 제명에 못 죽겠다며 우는소리를 했던 에빌이었는데, 결혼식을 앞두고 후작가에서, 특히 아이클라타가 고되게 관리를 시킨 모양이었다.
소문만 무성했지 실제로는 대다수가 얼굴도 모르고 있던, 라이오트 백작가의 신랑이 나타나자 하객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에빌 씨 멋져요.”
“정말 대단하네요. 누가 꾸며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애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요.”
몽마인 비셰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꾸며준 사람은 대단한 실력자일 게 분명했다.
뒤이어 입장한 신부 역시 사람들의 감탄을 사기엔 충분했다.
흰 정장과 흰 드레스.
오늘의 주인공인 두 사람은 수많은 사람의 감사와 박수를 받으면서 성녀의 축복 하에 성대하게 결혼식을 마쳤다.
***
피로연.
신랑과 신부는 하객들의 인사를 받느라 바빴다.
어떻게든 인사를 해야 할 텐데. 카이엔은 잠시 사람이 빠지길 기다리기로 했다.
하나 페르세이지의 생각은 다른 모양인지 거침없이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얼른 오시죠. 일찍 인사하는게 낫습니다.”
“야…야!”
페르세이지가 카이엔을 붙잡았고, 그런 카이엔에겐 세아나가 붙어있었으므로 당연히 세 사람이 줄지어 인파에 섞이게 되었다.
이렇게 끼어들면 손을 놓칠 법도 한데 페르세이지는 카이엔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고 세아나도 팔을 잡았다간 놓칠 것 같으니 카이엔의 허리를 붙잡고 매달려서 가까스로 맨 앞까지 갈 수 있었다.
“결혼 축하한다.”
“오랜만이네요. 오라버니.”
저번에 만났음에도 두 사람 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모르는 척 인사를 나누었다.
남매가 웃는 낯으로 서로에게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카이엔은 한숨을 쉬면서 세아나를 챙겼다. 그리고, 에빌과 눈이 마주쳤다.
“카이엔…”
“어… 결혼 축하한다…?”
“와줘서 고마워!”
“윽!”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느라 피곤했던 모양인지 인사가 과격했다.
난데없이 그를 끌어안는 친구를 차마 밀쳐낼 수가 없어서 카이엔은 말없이 등을 두드려주었다.
“고생한다.”
“으아- 나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는데!”
“나도 네가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응? 내가 뭘?”
“네 얼굴.”
“윽. 내가 야근 때문에 시들시들해져서 그렇지 원래도 나쁘지 않았거든?”
투덜거리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에빌이 카이엔을 끌어안고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아이클라타는 세아나를 보고 굉장히 기뻐하면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정말 와줬구나! 고마워. 내가 있는 힘을 다해서 네가 공부할 수 있게 도와줄게.”
“가, 감사합니다…”
“공부 끝나면 돌려보내 줘야 합니다. 왕자님이 후계자를 보지 못하시면 영주성을 물려줄 거거든요.”
“네?!”
처음 듣는 이야기에 세아나가 깜짝 놀라 외쳤다.
아이클라타는 그 말에 페르세이지를 흘겨보았다.
“제가 데려가려고 해서 지어낸 거죠?”
“아뇨. 예전부터 생각한 겁니다만.”
“넌 절대 오라버니처럼 되면 안 된다? 능력은 우수해도 인성이 안 좋아.”
“어어어…”
“바로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군요.”
“어디 때려보시죠! 결혼식에서도 난리를 치면 후작님 얼굴이 볼만하겠어요.”
“하하. 그건 저도 바라는 바지만 때리진 않습니다. 애도 아니고.”
“어렸을 땐 그랬으면서.”
“대련을 하다가 얻어맞은 거죠.”
“항복했는데도 때렸잖아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요.”
“봤지? 저 인간이 저런 사람이야.”
데려왔으니 이제 못 돌려보낸다며 아이클라타는 세아나를 꽉 안고 놔주지 않았다.
세아나는 그 품에 안긴 채로 멀뚱히 페르세이지를 쳐다볼 뿐이었다.
“으음, 무서운 분이란 건 알고 있었어요. 그야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던걸요.”
“전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냥 무섭대요.”
“아무튼 세아나는 두고 가세요. 이제 제가 돌볼 테니까요.”
“이런. 성격이 너무 급한 건 아닙니까? 아직 피로연이 한창인데. 그리고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도 이것저것 챙겨야 할 일이 있을 테고요.”
“그동안 수도에 머무를 건가요?”
“머물 곳은 있지만 후작가에 있다가 돌아갈까요?”
잠시 남매 사이에 신경전이 오고 갔다.
눈빛으로 대화를 주고받던 중, 먼저 입을 연 건 아이클라타였다.
“오라버니가 후작가에서 지낸다고 하면 아버지는 이번에야말로 오라버니를 가둬두려고 할걸요?”
“그게 맘대로 될까요?”
“인질이 많잖아요.”
“저만큼은 아니지만 다들 실력은 있습니다. 아, 왕자님 빼고요. 왕자님은 아직 약해요. 신성력만 겨우 쓸 줄 아니까.”
“오라버니 눈에는 이 세상 사람 전부 약하잖아요.”
한숨을 푹 쉬곤 아이클라타는 세아나를 놔주었다.
“결혼식 끝나고 사흘 뒤에 보내주세요. 제가 초대한 손님이니 끝까지 책임질게요.”
“공부는 얼마나 시킬 겁니까?”
“한 3-4년 정도 생각하고 있어요.”
“충분하군요.”
그렇게 인사를 나눈 뒤에야 페르세이지는 카이엔과 세아나를 챙기고 뒤로 물러났다.
신랑과 신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나서야 다른 사람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연회장으로 들어올 때부터 나갈 때까지 페르세이지는 카이엔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움직일 땐 항상 같이 움직였고 착실히 시중을 드는 모습을 많은 이들이 목격했다.
뒤늦게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쌍둥이 중 에이들러가 투덜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식 구경하러 가는 건데!”
“어머니도 참석 안 했잖아. 시끄러워지는 거 싫다고 말이야.”
“그치만 형들이 다 왔다며!”
“…언제부터 페르세이지도 형이 된 거야?”
“어? 이름 막 불러도 되는 거야?”
“곧 후작가에서 제명될 사람이라던데.”
“그래?”
에이들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반면 레이지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그 사람은 위험해. 딱 봐도 그렇지 않아?”
“응. 알아.”
“그런데 왜 관심을 가져? 그 오빠라면 모를까 페르세이지는 위험한 사람이야.”
“그치만 카이엔 형 옆에 있잖아. 괜찮지 않을까?”
“그건 네 생각이고.”
아무튼 조심하라면서 레이지는 읽던 책을 덮었다.
“응? 어디 가게?”
“너 분명히 만나러 가고 싶다고 할 셈이잖아. 같이 가자. 허락받는 거 도와줄게.”
“야호!”
“그리고 네가, 그때 오빠가 쥐고 있었던 은잔에 거창한 이름 붙인걸 이를 거야.”
“어…”
“얼른 와.”
“자, 잠깐만-!!”
***
“하. 나한테까지 인사하러 올 게 뭐람?”
“왕자님이시니까요.”
“왕자 아닌데.”
“이 대화도 오랜만이군요.”
페르세이지는 가만히 카이엔의 옆에 더 가까이 붙었다.
신랑 신부에게 인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른 귀족들이 한마디 말 붙이는 걸 받아줬더니 곧 다른 사람들도 순식간에 몰려오곤 했다.
페르세이지에게 인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페르세이지는 이 한 마디로 그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 “지금의 저는 한낱 시종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하실 말씀은 모두 저희 백작님을 통해서 하시길.”
그 말에 말문이 막힌 사람도 다수 있었다.
누군가는, 어떻게 나이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는 페르세이지가. 그 바이올로스 후작가의 사람이 카이엔의 곁에 있게 된 건지를 궁금해했다.
페르세이지는 그 물음에는 카이엔 곁엔 워낙 별난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다, 라는 애매한 답을 해주었다.
지금까지 왕자라고만 불리다가 오늘 하루, 평생 들을 백작님 소리를 다 들은 것 같다며 카이엔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페르세이지에게 몽땅 맡기고 도망치려고도 했지만 눈치 빠른 녀석이 그를 딱 붙잡고 놔주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붙잡혀있었다.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세아나는 앞으로 아이클라타의 손님으로서 후작가에서 지낼 테고, 공부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수도에 사는 귀족들과 그 자제들과 마주칠 일이 많을 거다.
세아나가 그의 곁에 있다는 걸 많은 이들이 목격했을 테니 굳이 아이클라타가 힘을 쓰지 않아도 괴롭히려 드는 녀석은 없을 테지. 혹시라도 있다고 하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아마 그가 나서서 싸운다고 하면 페르세이지가 가장 먼저 나설 거다.
“메르실라 님은 만나지 않으셔도 됩니까?”
“아까 인사했잖아.”
성녀인 메르실라 역시 수많은 귀족에게 둘러싸여서 그들의 인사를 받아줘야만 했다.
들려온 이야기로 판단하건대, 바이올로스 후작가에서 손님으로 며칠 더 머물면서 다른 귀족들에게 축복이며 기도 등을 해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러나저러나, 후작가 앞은 문전성시일 것이다.
사람이 조금 빠지면 세아나를 데려가야겠다고 카이엔은 다짐했다.
“평화롭군요.”
“그러게.”
“원하신다면야, 언제라도 나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넌 어째 사고 치지 못해서 안달이다?”
“그런가요?”
“난 지금이 제일 좋아.”
세자르 하나 관리하기도 벅찬데 왕은 무슨.
슬금슬금 불어난 영지 덕분에 그 안에 속한 마을들도 굉장히 많아졌다.
게다가 챙겨야 할 이종족 식구들도 있지 않나. 지금은 마녀들이 검은 숲에 거주하고 있지만 혹시라도, 아라스크의 손을 피해 생존해있을지 모를 늑대인간이나 이베리카의 눈에 띄지 않아 목숨을 부지했을 뱀파이어들이 나타난다면, 검은 숲엔 언제라도 이종족이 늘어날 거다.
몬스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그의 능력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신성력 또한 남아있었다.
그러니까,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내야지.
벌써 세계수도 훌쩍 자라서 이젠 밤이면 밤마다 잎사귀가 빛났다. 프라우디에가 말하길, 정령들의 수가 늘어나서 그런 거라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과거에 세계수는 엘프들이 관리했다고 프라우디에 님이 말해주셨습니다.”
“엘프?”
“엔베인 님이랑은 조금 다르게 생긴 모양이더군요.”
“그래?”
“다크 엘프가 있으니 엘프도 어딘가엔 있겠죠. 아마 그들이 세계수를 찾아 오지 않을까요?”
“설마.”
찾아온다고 해도 세계수가 더 크게 자란 다음이겠지.
카이엔은 그렇게 대답하며 별 생각 없이 흘려들었다.
…이곳저곳에 흩어져서 살던 엘프들이 어느 날 정령의 부름에 응해 세자르를 향해 대규모 이동을 시작하고 그로 인해 발생할 온갖 사건 사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