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펜이 종이를 긁으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갉작이는 소리가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어느새 다시 복귀한 에빌도 서류에 집중했다.
혹시라도 빠진 숫자나 더해진 숫자가 있을까 봐 서류에 코를 박고 뚫어져라 노려보던 카이엔은 확인이 끝나자 도장을 찍고 넘기면서 입을 열었다.
“에빌.”
“응?”
“너 나중에 결혼하면 후작 부인 되는 거야?”
“어? 그러네?”
“에빌 씨가 따로 작위를 받으신 게 없으니 후작 부군이 되실 겁니다.”
“그렇구나.”
“명예직으로 작위 하나쯤 받으실 수도 있고요.”
바이스의 첨언에 두 사람 다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행동하는 게 비슷했다.
어쩌다 보니 결혼이 예정되어버린 에빌은 좋은 날을 잡을 때까진 세자르에 계속 머물기로 했다.
예물이니 뭐니 하는 건 친가인 라이오트 백작가가 바이올로스 후작가와 알아서 잘 상의할 테니 그는 건강하게 잘 지내다가 날짜가 잡히면 그때 움직이기로 했다.
수도도 본가도 워낙 멀기에 왔다 갔다 움직이는 데에 시간이 허비된다는 이유였다.
“네 결혼인데 너는 하는 게 없네?”
“알아서 잘 해준다니까 믿어야지…”
“에빌 씨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염려 마세요.”
“바이스 씨 친가라니까 솔직히 좀 무서워요.”
“괜찮습니다. 후작님이야 이제 이빨 빠진 호랑이고 아이클라타가 잘해주실 테니까요. 아, 한 명 더 있는데. 베스펠이라고 남동생이 있지만 걱정 마십시오. 아이클라타가 금방 정리할 겁니다.”
“네? 친동생을 정리요?!”
“좋은데 보낼 거니 괜찮습니다.”
“그 좋은 데가 좋은 데로 들리지 않는데…”
“하하.”
바이스의 웃음에 에빌은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보통 시집을 가면 장님 3년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이라고 하지 않나.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되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그는 반쯤 마음을 놓기로 했다.
다만 현 왕가를 사이에 두고 건너건너 사촌인 카이엔과 바이스의 꼬인 족보에 자신이 추가된다고 생각하니 조금 머리가 아팠다.
“나 진짜 괜찮을까?”
“에빌 씨가 큰 잘못만 저지르지 않으면 됩니다. 예를 들면 불륜이라던가.”
“그런 거 안 해요!!”
“그럼 된 겁니다. 가서도 여기서 일했던 것처럼 똑같이 일하면 되고요.”
“으음… 그럼 좋겠네요. 카이엔, 나 없어도 열심히 살아야 해.”
“난 계속 열심히 살아왔어.”
뚱한 얼굴로 대꾸하는 친구를 보며 에빌은 웃을 뿐이었다.
다만 그가 자리를 비우면 새로 보좌관을 뽑거나 해야 할 텐데, 카이엔이 무리하는 건 아닐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 심정이 표정으로 드러난 건지 바이스가 조용히 말했다.
“에빌 씨의 빈자리엔 다른 이를 앉혀둘 겁니다. 글라스 씨도 괜찮겠죠.”
“어? 그런가요?”
“어깨너머로 본 게 있으니 할 수 있겠죠. 못 하면 할 수 있게 만들면 되고요.”
“…그냥 제가 인수인계 잘할게요.”
지금부터 글라스에게 차근차근 알려주면 될 것 같았다.
아직 식을 올릴 날짜도 잡지 않았으니까!
***
날짜가 잡혔다.
준비하는 데에만 무려 1년이 걸린 거다.
결혼식 준비를 위해서 에빌이 세자르를 떠난 지도 두 달이나 지났다.
그 뒤에야 비로소 청첩장이 도착했다.
“…넉 달 뒤네.”
“그러네요.”
“너도 받았어?”
“네. 따로 왔습니다.”
아이클라타는 카이엔과 바이스, 세아나의 몫으로 세 장의 청첩장을 보냈다.
거기다가 바이스는 따로 편지까지 받은 모양이었다.
여동생의 편지를 읽으며 바이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오라비인 ‘페르세이지’로 오라는군요. 페르세이지로서 참석해서 왕자님 옆에 딱 달라붙어 있으면서 착실하게 시중을 들라고 하네요.”
“으으음…”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 거겠죠. 아직도 많은 이들은 장자인 페르세이지가 병약해서 모습을 감추고 있다고 여길 테니. 멀쩡한 모습도 보여주고 후작가를 이을 생각이 없다는 걸 행동으로 표현하라는 뜻.”
“뭐…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맡겨만 주세요.”
“세아나도 같이 가는 거니까 얌전히 있어.”
“왕자님 시중들려면 다른 분들도 데려가야 합니다만.”
누구를 데려가야 할까?
한두 명은 더 데려갈 수 있을 텐데, 결혼식 구경 같은걸 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카이엔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비셰? 결혼식 구경하는 거 좋아할 것 같은데.”
“안됩니다.”
“응? 왜?”
“비셰 씨는 미인이죠.”
“그렇지.”
“결혼식에 신부보다 눈길을 사로잡는 미인이 오면 어쩌자는 겁니까.”
“아.”
“비셰 씨가 가려면 얼굴을 좀 바꾸고 가거나 아예 베일을 뒤집어쓰고 가는 게 낫습니다.”
“그냥 안 데려갈게.”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정말 데려갈 사람이 없다.
그와 바이스가 자리를 비우면 영주성을 관리하고 지도할 사람으로 글라스를 두고 가야 하는데.
모두에게 물어봐야 하나? 카이엔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그 외에 선물도 준비해야 합니다.”
“뭘 준비해갈까?”
“아이클라타는 세아나만 데려오면 된다고 했지만 저희는 에빌 씨의 손님이기도 하니까요.”
“네가 적당히 챙겨줄래? 난 도무지 모르겠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함께 하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에빌의 결혼식에 대해 이야기하자 다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수도까지 따라가는 건 축하와는 별개였다.
분명 위세 높은 후작가인 만큼 수많은 사람이 올 텐데, 그 틈바구니에 끼고 싶지 않다는 말이었다.
글라스는 친구인 에빌의 경사를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카이엔과 바이스가 자리를 비우면 영주성을 책임지는 건 자신이었기에 한숨만 푹 쉬었다.
“제 몫까지 잔뜩 축하해주세요…”
“그럴게.”
아직 세자르 남작을 도와 일하던 집사가 있었지만 나이가 들어 많이 약해진 상태라 언제 쓰러질지 몰랐다.
본인은 아직도 열정이 넘쳐서 일하고 있었지만 보는 이의 입장에선 조마조마했다.
카이엔의 예상대로 비셰는 귀족의 결혼식을 궁금해했지만 바이스에 의해 차단당했다.
“비셰 씨는 안 됩니다.”
“네에?!”
“너무 예뻐서 안 됩니다. 신부보다 눈에 띄면 안 되니까요.”
“히잉…”
그런 법이 어딨냐며 비셰는 양손으로 얼굴을 덮어 가렸다.
에쁘다는 말은 칭찬이었지만 그 외모 때문에 같이 가지 못한다는 게 섭섭했다.
“저 얼굴 바꾸고 가면 안 돼요?”
“어떻게 바꿀 겁니까?”
“적당히 평범하게 바꿀게요!”
“왕자님 옆에 평범한 사람을 세워두고 싶진 않습니다.”
명백한 거절이었다.
비셰는 테이블에 엎드렸고 카이엔은 바이스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냥… 안 데려가고 싶다고 말해…”
“그건 아닙니다만.”
“어휴.”
“저, 왕자님. 제가 같이 가도 될까요?”
의외로 프라우디에가 살며시 손을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하자 프라우디에는 멋쩍어하며 웃었다.
“그곳에 여동생이 올지도 몰라서요. 그냥, 만나면 인사라도 하고 싶어서요.”
그는 이제 독스 백작가와 완전히 연을 끊었기에, 남남이었다.
하나 에이바토스와는 원만한 교류를 하고 있었기에 작별 인사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바이스는 미묘한 눈으로 프라우디에를 쳐다보았다.
“흠…”
그 시선의 의미를 몰라 프라우디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바이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프라우디에 님이 가신다면야, 비셰 씨도 같이 가도 되겠네요.”
“응? 그래도 되는 거야?”
“괜찮을 겁니다. 화내면 어쩔 수 없고요.”
“으으으음…”
카이엔은 침음을 흘렸다.
프라우디에가 간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자네인도 호위로 따라가기로 했다.
티아마티스가 내린 임무는 진작에 거둬졌지만, 그래도 그녀는 프라우디에를 지키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또한, 후작가의 차기 가주가 될 사람의 결혼식이라 티아마티스가 얼굴을 비출 수 있으니 인사라도 할 겸 같이 가고 싶다고 했다.
“난 안 가도 될 것 같아! 왕자님이랑 바이스 씨가 잘 보고 와서 나중에 내 결혼식장도 예쁘게 꾸며줘!”
그리델라가 웃으며 말했다.
수많은 마녀 친구들에게 언제 결혼식을 올릴 거냐는 말을 귀에 못이 막히도록 들은 그녀라 빠른 시일 내에 식을 올리는 거로 마음이 간 모양이다.
그렇게 에빌의 결혼식에 참석할 인원이 정해졌다.
후작가에 도착해서는 프라우디에는 자네인에게 맡길 테니 카이엔의 옆을 지키는 건 바이스와 비셰가 할 일이었다.
비셰는 얼굴을 가리거나 바꾸지 않는 대신 복장만은 평범하게 하고 가기로 바이스와 약속했다.
“화장도 하면 안 됩니다.”
“이게 맨얼굴인데요?”
“…자세히 보니 그렇네요. 혹시 향수 뿌렸습니까?”
“아… 그건 몽마 특유의 그… 체취랑 기운…”
“최대한 억누릅시다.”
“넵.”
너무 예쁜 것도 문제였다.
저 얼굴이면 못나 보이려고 큼직한 점을 찍는다고 해도 모조리 매력점으로 보일 거라며 바이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조만간 자리를 비울 것을 대비해 일을 하던 카이엔은 그 말에 바이스를 보며 물었다.
“네가 그런 말 하는 건 처음 들었어.”
“객관적으론 사실이니까요.”
“지금까진 그런 말 한 적 없잖아?”
“여동생의 결혼식이니 저라고 해도 조금은 신경이 쓰이니까요. 그리고, 왕자님도 거기서 똑바로 행동하셔야 합니다.”
“응? 나?”
“이제 백작님이지 않습니까.”
“다들 왕자라고만 불러대서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백작님이라고 소개될 겁니다. 왕자님을 깔보는 이는 없겠지만요.”
밀려났다고 해도 왕족은 왕족.
그리고 현 왕가는 그를 적대하지 않는다. 카이엔의 곁에는 수많은 이종족이 있으니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진 않을 테니까.
“문제는 저한테도 있지만요. 도대체 어떻게 페르세이지로서 있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네 맘대로 하면 되잖아.”
“한바탕 뒤엎을 순 없잖습니까.”
“…뭘 하려고 하는 거야.”
“결혼식에는 예스티카 님도 참석하실 테니 오랜만에 얼굴을 보겠군요.”
“아. 그럴지도 모르겠다.”
예스티카는, 페르세이지로서 참석한 바이스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큰일만 생기지 않으면 좋겠다고 카이엔은 빌었다.
***
결혼식에 참석한다고 해도, 머무는 장소가 문제였다.
그 이야기를 하자 바이스가 프라우디에와 무어라 대화를 나누더니만 순식간에 지낼 곳을 마련했다.
티아마티스가 가지고 있는 집이 많아서 그중 하나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마법으로 통신을 해서 허락도 받았다고 바이스가 말했다.
“먼지만 대충 털어주신다고 하더군요.”
안 쓰던 물건을 창고에서 꺼내주듯이 말한다.
없는 것보단 나으므로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타고 갈 마차 하나, 선물을 실은 마차 하나. 단출한 구성이었다.
보통 귀족들이 저택을 떠날 땐 호위를 위해 기사단을 꾸려가곤 하지만 함께 가는 사람들의 무력이 워낙 출중한지라, 카이엔은 이번에도 소규모 일행만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도적을 만나든 산적을 만나든, 솔직히 말하면 바이스 선에서 모조리 해결될 것이다. 바이스가 나설 것도 없이 자네인과 프라우디에만 있어도 될 테고.
“그런데 선물은 어떻게 했어?”
“마녀들이 검은 숲에 정착하게 되면서 견사를 짜기 시작했습니다. 솜씨가 훌륭하기에 비단 몇 필을 구매했습니다. 결혼식 선물이라고 하니 열과 성을 다해 짰다고 하더군요. 그간 왕자님께 정보비로 건네받은 게 많아서 특별히 서비스를 해줬다고 합니다.”
“비단?”
“네. 가벼운 마법도 걸어서. 가위로 자를 수는 있지만 칼로 찌르면 들어가지 않는 강화마법 살짝.”
“괜찮겠네.”
이런 걸 준비해올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그들뿐일 것이다.
그 외에 피로회복제와 도움이 될만한 물약 몇 개를 챙겼다고 바이스가 말해주었다.
“피로회복제면 그…”
“네. 프라우디에 님이 연구하시던 겁니다.”
“잠깐은 도움이 되겠지.”
소가주가 되면서 고생을 많이 할 아이클라타니 피로회복제는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뒤, 결혼식 날짜에 넉넉히 맞춰서 도착할 수 있게끔 그들은 세자르를 떠났다.
마차 두 대 뿐인 작은 구성이었지만 그들은 거침없이 수도를 향해 움직였다.
여행을 가는 건 처음이라며, 세아나는 잔뜩 들떠있었다.
늑대인간의 특성상 소규모로 마을을 구성해 인간들과는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터라, 번화한 수도에 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혹시라도 이 아이가 수도에, 인간들에게 실망하면 어쩌나 카이엔은 조금 걱정했지만 배려심이 없는 바이스는 그런 세아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수도에는 못된 놈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니, 누가 괴롭히면 바로 때려눕히고 제가 시켰다고 하십시오.”
“네!”
“…좋은 거 가르친다.”
“세아나는 이제 아이클라타가 돌봐줄 테니 뒷배에 바이올로스 후작가가 있다고 하면 알아서 찌그러들 테지만요.”
마땅한 호위 병력도 없는, 마차만 화려한 일행을 노리는 도적놈들이 있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처리되었다. 마차 안에만 있느라 좀이 쑤신 모양이었던 바이스가 단칼에 해치운 덕이었다.
이젠 눈앞에서 도적이며 산적 모가지가 날아가도 놀라지 않게 되었다며 카이엔은 한숨을 푹 쉬었다.
“얼른 가자.”
“네.”
금세 흉흉해진 주변을 정리하는 건 프라우디에였다.
정령들의 도움을 받으니 땅이 쩍 갈라지면서 시체들을 숨겼다. 시간이 지나면 훌륭한 양분이 되겠지.
그렇게 뒤처리까지 완벽하게 마친 뒤 마차는 다시 움직였다.
“…그런데 결혼식에, 왕가도 참석하려나?”
“조카의 결혼식이니 왕비님이신 고모님은 오실지도 모르겠군요.”
“영 껄끄러운데.”
“그쪽이 저를 더 껄끄러워할 테니 염려 마십시오.”
환하게 웃으며 바이스가 대답하자 카이엔은 왠지 심정이 더 복잡해졌다.
맞는 말이긴 한데… 기분이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