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화
아이클라타는 3주 정도 세자르에 머물다가 돌아갔다.
처음엔 페르세이지를 경계하느라 바빴지만 돌아갈 날이 되자 남매 사이는 많이 개선된 듯, 서로 인사까지 나누었다.
아이클라타가 돌아가자 페르세이지도 바로 휴가를 끝내고 ‘바이스’로 돌아왔다.
“그래서, 휴가는 잘 다녀왔어?”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뻔뻔하게 맞받아치는 바이스를 보고 카이엔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너 때문에 일이 늘어났으니까 책임져.”
“물론이죠.”
“에빌이 앓아누웠다고.”
“하하. 설마 그 자리에서 쓰러지실 줄이야.”
‘페르세이지’의 계산 하에 아이클라타는 진지하게 데릴사위로 에빌을 고려했고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하는 자리가 생겼다.
영문 모르고 끌려온 에빌은 현재 왕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은 귀족인 바이올로스 후작가의 차기 가주가 될 아이클라타에게서 데릴사위 이야기를 듣자 혼란에 빠지더니만 그대로 기절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모님과의 이야기도 끝났고 그의 선택만 남았다는 말에 정신줄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왜 이렇게 심약하냐고 혀를 차는 아이클라타였지만 에빌이 싫은 것 같진 않았다.
현재 에빌은 자기가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면서 오랜 야근과 마음고생으로 인한 충격까지 겹쳐서 끙끙거리며 앓아누운 상태였다.
“아귀다툼에 끼기 싫어서 내 호위 기사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온 애인데, 권력투쟁의 중심지인 바이올로스 후작가로 가는걸 좋아하겠어?”
“에빌 씨가 할 일은 몇 없을 겁니다.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거니까 집안일만 잘해주면 되죠. 그것도 왕자님 옆에서 보좌관으로 일한 경력이 있으니 잘 해낼 겁니다.”
“괜찮으려나 몰라…”
“게다가 왕자님도 계시잖습니까. 왕자님은, 친구분인 에빌 씨가 곤경에 처하면 모른척하실 겁니까?”
“아니.”
“라이오트 백작가만으로 모자라다면 왕자님께서 에빌 씨의 뒤에 서주시면 됩니다.”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좀 더 자신감을 가지세요.”
그런 바이스를 빤히 쳐다보며 카이엔이 물었다.
“너는? 네가 에빌을 추천하긴 했지만 여동생의 남편감으로 괜찮다고 생각해?”
“뭐, 에빌 씨 정도라면 나은 편이죠. 왕자님, 세상에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참으로 많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수백 가지 방법으로 다른 이들을 괴롭히죠. 적어도 에빌 씨가 결혼한 뒤에 다른 여자한테 한눈팔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그걸로도 충분합니다. 아이클라타에게 필요한 건 그 애가 일하는 걸 뒤에서 단단히 뒷받침해줄 사람이거든요. 사랑하는 사람보단 업무를 도와줄 파트너가 필요합니다. 에빌 씨를 누가 가르쳤는지 잊으시면 곤란하죠.”
“…그러네. 네가 가르쳤지 참.”
호위 기사로서 능력이 떨어지니 서류 처리를 해보라면서 하나둘 맡기던게 어느샌가 보좌관이 되어버렸다.
에빌은 시키는대로 하다보니 바이스의 의도대로 책상 업무를 하게 되었고.
바이스가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한다면 분명히 아이클라타의 마음에도 드리라.
“치밀한 녀석…”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런데 에빌이 진짜 결혼할까?”
“저도 열심히 중매를 서겠습니다.”
“협박이 아니라?”
“그렇게 들린다면 어쩔 수 없겠군요.”
“하지 마.”
다른 이들이 그에게 결혼을 강요할 땐 귀찮기 짝이 없었는데 남의 연애며 결혼의 과정을 실시간으로 옆에서 구경하고 있으니, 에빌에겐 미안하지만 조금 재밌는 것 같기도 했다.
이래서 바이스가 그에게 날아온 구혼서를 몽땅 태워버렸을까?
‘아니,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냉정하게 머리를 식히고 카이엔은 턱을 괴었다.
“뭐,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할 일이니 나는 구경이나 해야겠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런데 라이오트 백작이 아들이 데릴사위로 가는 걸 허락할까?”
“어차피 에빌 씨가 세자르에서 왕자님의 곁을 지키겠다고 했고 백작께서 허락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부터 에빌 씨는 가주 후보에서 제외된 겁니다. 게다가 누님분께서 정식으로 소가주가 된 지 오래고요.”
“으음…”
“아이클라타는 유능한 이를 좋아합니다. 차기 라이오트 백작이 될 에빌 씨의 누님분과도 어느 정도 교류가 있고요.”
“그럼 다행이고.”
에빌이 결혼해서 후작가로 가게 된다고 해도 아이클라타가 지켜주지 않을까?
아무튼 에빌이 깨어나면 축하 인사도 좀 건네고 괜찮은지 물어보고 싶었다.
바이스가 휴가에서 복귀한 기념으로 그동안 고생했던 에빌과 글라스에게 1주일의 휴식이 주어졌는데 에빌은 그 일주일을 앓아눕는 것으로 써버렸다.
휴식 후 복귀한 에빌은 여전히 죽을상이었다.
“카이엔…”
“왜.”
“나 진짜 날벼락 맞은 거 같아…”
“살아있으면 된 거지.”
“놀리지 말고!”
“바이스가 그러는데, 결혼해도 괜찮다던데? 너라면 잘 버틸거 같대.”
“바이스 씨 여동생이잖아! 그럼 뭐야, 사돈 관계가 되는 거잖아? 게다가 너랑 바이스 씨는 건너건너 친척인데 거기다가 사돈 관계로 내가 끼어? 와! 이건 또 무슨 일이람!”
에빌은 아직도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더 쉬게 해야 하나.
카이엔은 얼른 서랍에서 종이를 꺼내 슥슥 내용을 작성했다.
도장까지 찍고 나서 카이엔은 완성된 휴가서를 에빌에게 내밀었다.
“아직 많이 힘든 것 같은데 더 쉬다가 와라.”
“쉬어서 해결될 일이 아니야!”
“머리 좀 식히고.”
“나,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주변 사람들 모두 연애든 결혼이든 아무것도 안 해서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살았는데!”
“그리델라랑 라스 있잖아.”
“그 두 사람도 그런 관계가 된 지는 얼마 안 됐잖아!”
영주성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고 성격이 좋은 에빌은 여러 사람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다.
생각해보면 이런 녀석이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
귀족이긴 하지만 다른 이들을 깔보지도 않고 평민인 이들과도 굉장히 가깝게 지내곤 했으니까.
게다가 남의 외모나 성격에 대해 품평하지도 않았다.
영주성에 거주하는 이종족 식구들은 그 모습을 본 모든 이가 입을 모아서 미인이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그런데 에빌은 그런 이들의 외모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비셰가 처음으로 여성체 모습으로 변해서 메이드 복을 입고 신이 나서 영주성을 활보하고 다녔을 때도 ‘어? 변했네?’ 로 끝이었다.
그날 비셰는 영주성 밖으로 외출 나갔다가 30분 만에 20명도 넘는 사람들에게서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던데.
“너는 좋아하는 사람 없었어?”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봐?”
“그냥, 궁금해서.”
“딱히 없었는데?”
“그래?”
“너도 그렇잖아… 라고 말하기엔 넌 있었구나 참.”
“나 놀리냐?”
현재 자네인은 프라우디에와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친구라고 하기엔 뭔가 가까운데 연인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한.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옆에서 첨언할 수도 없어서 다들 구경만 하고 있는 상태였다.
“너도 남말 할 처지가 아니야.”
“내가 뭘?”
“말해도 모를걸?”
“말해보기나 해.”
“너 좋아하던 사람들, 이제 슬로세이 빼곤 다 포기했잖아.”
“무슨 소리야?”
“이것 봐.”
에빌은 혀를 차곤 더이상 말해주지 않았다.
덕분에 카이엔은 에빌을 붙잡고 그건 또 무슨 말이냐고 몇 번이고 물어봐야 했다. 물론 에빌의 입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듣는 사람 찜찜하게 왜 말을 하다 마는 거람?
궁금하긴 했지만 영문모를 이야기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는 일이라 카이엔은 하던 일이나 마저 하기로 했다. 물론 에빌의 손에 휴가서를 쥐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 아직 많이 힘들어 보이니까 더 푹 쉬다 와라.”
“쉬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
“안 쉬는 것보단 낫잖아.”
에빌에겐 더 많은 휴식이 필요했다. 잘 달래서 돌려보낸 뒤 카이엔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 함께 고생하면서 지냈던 친구가 결혼을 하게 되어서 떠난다면 좀 서운하고 심심할 것 같았다.
그가 세자르를 벗어나서 이곳저곳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도 에빌이 다른 이들과 함께 영주성을 지켜줬기 때문이다.
그런 녀석인데 어쩌다 보니 바이스의 세 치 혀에 팔려 가버렸다. 정말로 본인이 ‘어, 어’ 하는사이에 이야기가 끝난 것이다.
남은 건 식을 올릴 날짜 잡는 것 정도 아닐까? 결혼 예물이라던가.
‘나는 뭘 선물해주지?’
세자르에서 나는 특산물이 있나? 그런데 준다고 아이클라타가 좋아할지가 문제였다.
그런 그의 고민은, 일주일 더 휴가를 얻게 된 에빌이 돌아오고 나서 반쯤 해결되었다.
그사이에 수도의 후작가에서 온 편지를 받은 건지 에빌은 출근하면서 편지를 하나 가지고 왔다.
“카이엔.”
“응?”
“어… 그, 아이클라타 씨가 편지를 보냈는데.”
“잘됐네. 연서야?”
“그, 글쎄? 그건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내가 결혼하면 너도 뭐 보태줄 거 있냐고 물어봐서.”
“선물 줘야지.”
“받고 싶은 게 있다는데…”
“뭔데? 결혼식 당일 바이스를 맘대로 부려먹을 수 있는 권리?”
그것 말고 아이클라타가 원하는 건 없을 텐데.
그런데 에빌은 우물쭈물하더니만 입을 열었다.
“아이클라타 씨가 세자르에 3주 정도 머물렀잖아.”
“응.”
“많은 사람을 만났잖아?”
“그렇지.”
“이종족 식구들 얼굴도 다 봤잖아? 릴리시아를 관찰하기도 했고.”
“…릴리시아를 주래?”
“아니. 그건 아닌데… 이종족 식구들이 쓰는 별채에 늑대인간 아이들이 거주하고 있잖아.”
“그 애들이 왜?”
“그 애들을 주라는데.”
“뭐?”
뜬금없는 말에 카이엔이 화들짝 놀랐다.
그 모습에 에빌은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현재 세자르에서 돌보고 있는 늑대인간 아이들은 라스를 삼촌으로 부르면서 잘 지내고 있었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 해준다는 말에 다들 고심 끝에 여러 분야에 도전하면서 공부와 훈련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나이대가 비슷비슷한 여섯 명의 아이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소녀인 세아나가 중심이 되어서 모두를 이끌고 있었다.
이따금 머리가 커져서 대드는 애들도 있었지만 세아나를 이길 수 있는 아이는 없었다.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 건지, 세아나는 문무를 겸비한 수재가 되겠다면서 열심히 공부 중이었다. 그 의지에 가끔 바이스가 훈련하는 걸 봐준다고,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로 들은 적도 있었다.
나머지 아이들은 각자 기사, 시종, 상인, 요리사, 정보원이 되겠다면서 벌써 직업을 선택해 그에 맞는 공부를 이어나갔다.
인간보다 능력치가 월등한 늑대인간인지라 빠른 성장세를 보여 다들 칭찬해주고 있었고.
그런데 그런 아이들을?
“정확히는 세아나를 데려가서 자기가 좀 더 잘 키워주고 싶대. 내키지 않으면 유학 보내는 셈 치고 보내주라는데?”
“세아나는 무리의 대장인데.”
“자기도 알고 있지만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를 시켜주고 싶대.”
“세아나의 장래 희망이 뭐랬지?”
“바이스 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던데. 뭐든지 다 잘하는.”
물론 세아나가 성격까지 바이스를 닮진 않겠지만 제2의 바이스는 사양이었다.
“사람을 보내주라니. 그건 세아나 의견도 물어봐야겠는데. 다른 애들은 보내주지 않아도 된대?”
“응. 세아나만 있으면 된대.”
아무래도 아이클라타가 세자르에서 머무는 동안 세아나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단순히 바이스처럼 되고 싶다면서 공부하는 아이를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던가.
바이스가 공부를 봐준다고 해도 세자르보단 번화한 수도로 가는 게 세아나에겐 더 좋을지도 몰랐다.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로 하고 카이엔은 세아나를 불러와서 짧은 면담을 진행했다.
아이클라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번에 오셨을 때 그런 말씀을 하고 가시긴 했어요.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시켜줄 수 있다고요.”
“네 생각은 어때?”
“왕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난 네가 원한다면 수도로 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 물론 아직 날짜도 잡히지 않았지만.”
“제가 없다고 해서 다른 애들이 말썽을 부리진 않을 거예요. 제대로 잡아놓고 갈 테니까요. 낯선 환경은 조금 겁나긴 하지만 저 혼자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지. 에빌이 결혼하면서 너도 같이 데려가는 거니까.”
“그럼 다른 애들하고도 이야기해볼게요. 저는 대장이니까요.”
어른스럽게 대답하고 세아나는 별채로 돌아갔다.
선택은 오로지 그녀의 몫이었다. 카이엔도 에빌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바이스에게 이 일을 전하니 그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흠. 아이클라타도 사람 보는 눈은 있군요.”
“세아나가 그렇게 유능해?”
“유능합니다. 식객으로 얹혀살고 있으니 하루라도 빨리 한 사람 몫을 해내야 한다면서 열심이거든요. 그래서 저도 지켜보고 있었죠.”
“그 정도야?”
“네. 잠재력이 높은 아이고 무리의 대장다운 책임감도 가지고 있고요. 나중에 왕자님이 후계자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된다면 그 아이에게 이 땅을 물려줘도 될 정도입니다.”
“…대단하네.”
바이스가 저렇게 말할 정도라니.
지금까지 바이스가 이렇게 후한 평가를 내린 사람은 없었다. 세아나가 처음이었다.
그가 깜짝 놀라 살짝 입을 벌리자 바이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다른 사람한테 빼앗기기 전에 호적에 올리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뭐?”
“양녀로 삼으셔도 될 겁니다.”
“아니 그건 좀…”
“뭐, 선택은 왕자님 몫이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양녀는 너무한 것 같다며 카이엔은 속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