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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214화 (215/219)

외전 4화

“그럼 이제 대련은 끝인 거지?”

“네.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습니다.”

“…언젠간 오라버니의 목을 꼭 따고 말 거예요.”

“살벌한데?”

“이 정도 각오는 하고 살아야 합니다.”

“네 목을 따버린다잖아…”

“꿈은 크게 가질수록 좋죠.”

여동생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말하고 있음에도 페르세이지는 평온했다.

그저, 아까까지만 해도 떨고 있던 아이가 다시 한번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노려보는 것에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조만간 후작가에 한번 갈까요? 기사단 실력도 좀 볼 겸.”

“어…”

“된통 깨지고 나면 떨거지들은 알아서 떨어져 나갈 거고 싹수 있는 자들은 남을 테니까요.”

“오지 마세요. 기사단이 공중분해 될 거예요.”

단호하게 아이클라타가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페르세이지로서 후작가에 방문한다면 분명, 후작가의 기사들을 박살 내버릴게 뻔했다.

그러면서도 본인은 심심풀이밖에 되지 않았다면서 올 때와 마찬가지로 훌쩍 가버리겠지.

그 꼴은 못 본다며 아이클라타는 살짝 인상을 썼다.

여동생이 인상을 쓰든 말든 페르세이지는 카이엔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어떠십니까?”

“뭐가?”

“아이클라타 말입니다.”

“무슨 말이야?”

“반하셨나요?”

“허…”

한다는 말이 그건가?

카이엔은 맥이 탁 풀리는 것만 같았다.

어젯밤에 와서도 이상한 소리나 늘어놓더니.

한숨을 푹 쉬며 카이엔이 말했다.

“아니.”

“흠. 그럼 뭐가 모자란 모양입니다. 아, 저랑 싸워서 졌기 때문일까요?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면 왕자님이 반하셨을까요?”

“넌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냐…”

“하지만 자네인 씨와 별로 다른 점도 없지 않습니까? 키도 크고 늘씬하고 검도 잘 쓰죠. 흠… 역시 금발이어야 할까요? 비셰 씨, 이쪽으로 오시죠!”

“네?!”

페르세이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비셰는 화들짝 놀랐다.

날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펄쩍 뛰어오른 그녀는 울상을 지으면서 터덜터덜 구경 석에서 연무장 중앙으로 걸어왔다.

새파래진 얼굴을 보고 페르세이지가 물었다.

“얼굴이 왜 그럽니까?”

“으…으으…”

“누가 잡아먹기라도 합니까?”

“그치만 부르셨잖아요! 좋은 이유는 아닐 것 같았다구요!!”

얼굴을 찡그리면서 외치는 비셰였지만 페르세이지는 그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대신, 비셰를 빤히 쳐다보더니 그 손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검을 쥐여주었다.

“왕자님, 이젠 어떠십니까?”

“뭐가?”

“비셰 씨요.”

“…그냥 평소의 비셰잖아.”

“흠. 왕자님의 취향을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모르는 걸 네가 어떻게 아냐?”

“그렇군요. 아, 비셰 씨. 검을 휘둘러보실래요?”

“저, 저 그런 거 못해요!”

“그럼 안 되겠군요.”

페르세이지는 비셰의 손에 쥐여준 검을 다시 가져갔다.

어쩌다 보니 네 사람이 둥글게 모여 선 모양이 되었는데 아이클라타는 힐끗 비셰를 보고는 물었다.

“왕자님의 시녀인가요?”

“아…네.”

“수도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답니다. 굉장한 미인을 시녀로 데리고 있다고요.”

“그, 그런가요?”

“왕자님 주변에 미인이 아주 많아서 아직도 결혼을 안 한다는 소문도 있죠.”

“그것 때문에 결혼을 안 하는 건 아닙니다만.”

“뭐, 소문이니까요. 저번에 파티장에 데려왔던 아가씨도 그렇고요.”

페이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알면서도 그렇게 끊임없이 구혼서를 보내는 건가.

카이엔은 인상을 썼고 페르세이지는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하하. 왕자님은 더욱 세를 넓혀가실 테니까요.”

“안 넓혀. 여기서 안 나갈 거라고.”

“검은 숲을 개발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세계수가 잘 자라고 있긴 하지만 확답할 수는 없군요.”

“세계수요? 그런 게 있어요?”

“아. 못 들은 거로 하세요. 그냥… 성장이 빠르고 밤이 되면 잎사귀가 일정 확률로 반짝이는 나무입니다.”

“뭐죠, 그건…”

아이클라타는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하나 페르세이지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아무튼 대련은 이걸로 끝이니 돌아가죠. 당신은 언제 돌아갈 겁니까? 볼일을 끝났죠?”

“…좀 쉬다 갈게요.”

“어떠신가요, 왕자님?”

“쉬었다 가라고 해야지. 너는 언제 돌아갈 거야?”

“아이클라타가 돌아가면 저도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겠습니다.”

뻔뻔한 대답에 카이엔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평생 바이스로 살 생각은 없지만 이후를 평생 페르세이지로 살고 싶지도 않거든요.”

“둘 다 너잖아. 게다가 차이점을 모르겠는데?”

“아직 저에 대해 잘 모르시는군요. 조만간 알게 해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알고 싶지 않으니까 가만히 좀 있어.”

“참… 오라버니도 많이 바뀌셨네요.”

떨떠름한 얼굴로 아이클라타가 중얼거렸다.

“이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봤어야 하는데.”

“봐서 뭘 어쩌려고요?”

“그냥… 저만큼 황당해하면 좋겠네요.”

“하하하.”

“후우- 저도 돌아가면 따로 구혼 활동을 해야겠네요. 왕자님은 안 될 것 같으니까요.”

“포기한 겁니까?”

“정말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주변에서 하도 말이 많으니 제가 나선 거죠. 오라버니 얼굴도 볼 겸요. 괜히 온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요.”

“왜죠?”

“…그 얼굴 보니까 짜증 나서요.”

솔직한 대답을 털어놓으며 아이클라타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저도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데릴사위로 들여야 하는데 적당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거든요.”

“하긴 후작가 안주인이면 아무나 들일 수는 없겠지.”

“짜증 날 정도로 유능한 오라버니와 한숨이 나올 정도로 무능한 남동생을 둔 탓에 사람을 보는 눈이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거든요.”

도대체가 중간이 없다며 아이클라타는 미간을 찌푸렸다.

여동생의 고뇌에 페르세이지는 웃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구경 석에 반쯤 달라붙어서 기절한 건지 쉬고 있는 건지 모를 에빌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분은 어떤가요? 왕자님의 소꿉친구고 지금은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네?”

“적당히 쓸만하고 성격도 모난 데 없는데.”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중매?”

“에빌을?”

“아이클라타가 연상이긴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에빌 씨 정도면 무난하지 않나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네.”

“칭찬입니다.”

그 말에 아이클라타의 시선이 에빌에게 향했다.

에빌은 연무장 중앙에서 오가는 대화를 듣지 못한 건지 연이은 업무로 지친 몸에 힘을 빼고 있는 상태였다.

이곳에 온 첫날, 본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카이엔이 두 사람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싶다고 요청했다는 말을 전달한 이라, 시종 비슷한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약해 보이는데요.”

“요즘 야근을 많이 해서 그만.”

“네가 빠져서 그렇잖아.”

“하하.”

“웃지만 말고.”

“뭐, 오라버니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됨됨이는 괜찮은 모양이네요.”

“당신이 휘어잡기도 좋고요.”

“흠.”

“어? 진지하게 생각하는 거야?”

“라이오트 백작가의 장남입니다.”

“아아.”

알고 있는 건지 아이클라타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차차 알아보도록 해야겠네요.”

“이종족 식구 중에도 괜찮은 이들은 많지만 인간은 에빌 씨를 추천해드리겠습니다.”

“애초에… 네가 추천할만한 인간은 에빌 뿐이잖아…”

나머지는 다 이종족이니까.

게다가 프라우디에에겐 자네인이, 라스 옆엔 그리델라가 있었다.

라스와 그리델라의 경우엔, 예전에 마녀의 연회에 참석했을 때 연인 관계라고 변명한 게 어쩌다 보니까 정설로 굳어지게 되었다. 덕분에 검은 숲 한쪽 귀퉁이에 자리 잡은 마녀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청첩장 언제 보낼 거냐고 성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엔베인은 언데드고 그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그리고 비셰는… 어쩐지 누구를 옆에 세워뒀다간 아스모데우스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았다.

글라스는 누나인 글러티나와 마찬가지로, 그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고 혼인하지 않고 아이를 두지 않겠다고 했고.

“소거법으로 에빌 밖에 안 남는데?”

“쉿.”

“이미 다 들었어요.”

“하하하. 그렇지만 에빌 씨도 괜찮은 분입니다.”

“나한테 떨어뜨려 놓으려고 그러는 거 아냐?”

“보좌관인 에빌 씨가 사라지면 왕자님의 업무 부담이 늘어날 텐데 제가 그런 짓을 왜 합니까?”

“페르세이지 바이올로스로서 저택의 집사, 내 시종, 내 보좌관까지 하려고?”

“구미가 당기긴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그럼 언젠간 할거라는 말 아닌가?

몸이 몇 개라도 부족할 텐데 사서 고생을 하려는 녀석을 보는 카이엔의 눈길이 곱지 않았다.

***

아이클라타는 페르세이지에 대한 관심을 끊고 본격적으로 영지를 관찰했다.

검은 숲과 맞닿은, 몬스터의 침입을 경계해야 하는 북부.

그중에서도 이종족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영주.

외부인인 그녀에게 전부를 알려줄 수는 없기에 적당한 정보만 전달해줬지만 아이클라타는 빠르게 이해했다.

그러더니만 이렇게 말했다.

“왕자님 곁에 워낙 미인이 많아서 눈이 높아진 탓에 결혼을 안 하는 거라고 둘러대면 되겠네요.”

“어… 그런가?”

“항상 곁에 있는 시녀도 그렇고 손님으로 묵고 있는 이들 모두 웬만한 영애들보다 예쁘던데요. 그 아라크네 아가씨도 시선을 확 끄는 미인은 아니지만 소박하고 담담한 매력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그, 그래?”

“눈에 띄는 남성분은 안 계십니까? 비셰 씨의 남성체 모습도 본 걸로 알고 있는데.”

“잘생기긴 했더라고요.”

“그걸로 끝?”

“뭘 더 바라시는 건가요?”

“비셰 씨가 들으면 서운해하겠습니다. 남성체 모습에도 굉장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으시던 것 같은데.”

여성들은 다 예쁘다고 하면서 남성들에겐 꽤 평가가 박했다.

비셰는 여성체던 남성체던 길 가던 사람 열 명 중에서 열 명 모두 돌아볼 만한 미모였는데도.

그 말에 아이클라타는 뚱한 얼굴로 대꾸했다.

“남자는 잘생긴 것보단 능력 있고 말을 잘 듣는 게 좋거든요.”

“말은 저렇게 하지만 그냥, 남자들은 흐릿한 배경쯤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어…”

“저번에도 말했지만, 오라버니는 너무 유능해서 짜증 나고 남동생은 너무 한심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제가 인정할 정도로 유능한 남자는 오라버니뿐이니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에 대한 평가가 박해질 수밖에요.”

“제가 에빌 씨를 추천한 이유도 저것 때문입니다. 왕자님처럼 아이클라타도 혼인에는 별 관심이 없거든요. 데릴사위로 데려갈 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귀족들은 다 제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인데.”

“딴 건 모르겠고 에빌이 고생 많이 하겠다.”

“눈치는 있으니 잘 지낼 겁니다.”

“전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벌써 혼인이 성사된 것처럼 구시네요.”

“생각해보셔서 나쁠 건 없을 겁니다.”

방긋 웃으며 페르세이지가 말했다.

“하긴. 오라버니가 그렇게 추천할 정도면 됨됨이며 능력치는 괜찮은 거겠죠.”

“왕자님의 친구기도 하고요.”

“너희 에빌 생각은 안 해? 구혼한다고 받아들일 리가 없잖아.”

“라이오트 백작가에겐 손해 보는 일은 아닙니다만.”

“아니… 손해고 자시고 아들 일인데…”

“에빌 씨가 자기 살던 곳에서 나와 왕자님 곁으로 왔단 것 자체가 귀족들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권력다툼 같은 것을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반쯤 놔버린 아들이 엄청난 가문의 아가씨의 청혼을 받는다면 그쪽에서도 기쁜 일이겠죠.”

“…너희 나 없는 사이에 이야기 많이 했구나.”

정말 구혼하려는 모양이다.

물론 아이클라타 혼자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후작가로 돌아가서 바이올로스 후작 부부와 이야기해야겠지만.

그런데 정말 결혼을 하게 되면 에빌은 세자르를 떠나야 한다.

“에빌이 없으면 이젠 허전할 거 같은데.”

“그 말을 들으면 기뻐하겠군요.”

“아직 확정된 건 아니니까 염려 마세요. 저도 상대를 알아볼 시간 같은 건 필요하니까요.”

“결혼한다고 해서 꼭 부부가 붙어있을 필요는 없잖습니까. 에빌 씨가 계속 세자르에 있어도 됩니다.”

“아뇨. 전 제가 결혼하게 되면 남편 되는 사람은 후작가에 딱 붙여놓고 아무 데도 못 가게 할 거예요. 제 눈에서 벗어났을 때 뭘 할 줄 알고. 얌전히 집에서 내실을 다지라고 할건데요?”

“하하. 왕자님이 아이클라타와 결혼하지 않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어쩐지 에빌이 제물로 바쳐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카이엔의 표정이 이상해지자 페르세이지는 더 활짝 웃었다.

그나저나 당사자가 없는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걸까?

이미 늦어서 에빌에게 따로 알리기도 뭐한 상태였다.

“아무튼 오라버니, 만약에 제가 결혼하시면 무슨 핑계를 대고 오실 거예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죠.”

“그럼 페르세이지 바이올로스로 나타나서 왕자님 옆에 찰싹 붙어서 ‘나는 후작가 따위에 관심 없고 시골에 처박혀서 살 거예요.’ 라는걸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세요.”

“그걸 원하신다면야.”

“…나도 가야 하는 거야?”

어쩌다 보니 결혼식 하객으로 참석하는 게 확정돼버렸다.

떨떠름한 얼굴로 묻자 페르세이지가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제 여동생 결혼식이니 왕자님도 참석하셔야죠.”

“보통 주인이 시종 가족 결혼식에도 참석하나?”

“보통 시종이라면 모를까, 저는 보통이 아니잖습니까.”

“그 말이 맞긴 하지.”

“그럼 가셔야 합니다.”

“으으으음…”

“왕자님이 안 가신다고 해도 그 쌍둥이들이 얼굴이나 보자고 참석하라고 할 테고요.”

“아. 친척이었지.”

한 번씩 잊어버리긴 하지만 그와 페르세이지는 건너건너 친척 관계였다.

전 국왕인 그의 아버지의 남동생이자 현 국왕의 아내인 왕비가 바로 바이스의 고모였으니까.

아이클라타는 에이들러, 레이지의 사촌 형제였으니 당연히 친척이자 차기 후작이 될 아이클라타의 결혼식에 참석하겠지.

“조만간 만남을 주선하려고 합니다.”

“만남?”

“에빌 씨와 아이클라타요.”

“…왠지 에빌이 불쌍해지는데.”

만만치 않은 아이클라타에게 잡혀서 영혼까지 털리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이클라타 본인도 말하지 않았는가. 다른 이들과는 사람 보는 눈이 다르다고.

페르세이지 정도는 돼야 유능하고 믿을 수 있고 선망할 수 있을 텐데 에빌은…

‘괜찮으려나?’

페르세이지도 별 생각 없이 추천한 건 아닐 테니 그의 안목을 믿어야 할 텐데.

어째,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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