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한밤중에 바이스가 찾아와서 이상한 말을 하고 간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오전 업무를 보는 중, 오늘은 메이드 복 차림으로 일하던 비셰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말에 벌컥 문이 열렸고 비셰는 눈이 동그래져서 카이엔을 보고 외쳤다.
“와, 왕자님! 바이스 씨… 아니! 손님인 페르세이지 님께서! 연무장을 빌리고 싶다고 하셨어요!”
“연무장? 거긴 왜?”
“그… 여동생분이랑 해야 할 일이 있으시다던데요. 구경하러 오셔도 좋대요.”
“하아-”
대체 뭘 어쩌려는 건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카이엔이었지만 바이스의 요청을 수락해주기로 했다.
연무장에서 무엇을 할지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지만 본인이 구경하러 와도 좋다고 했으니, 보러 가야 할 것 같았다.
…안 보러 갔다가 나중에 무슨 말을 들을지 두렵기도 했고.
그가 일을 마무리 짓고 일어나자 옆의 책상에서 서류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에빌이 몸을 일으켰다.
“카이엔, 나가게?”
“응. 너도 같이 가자. 이럴 때나 쉬지 언제 쉬겠어.”
“고, 고마워…”
비실거리면서 에빌은 카이엔의 뒤를 따라갔다. 시종으로서 곁을 지키고 있던 글라스도 함께였다.
그렇게 네 사람이 연무장으로 향하니 이미 그곳엔 페르세이지와 아이클라타가 서 있었다.
두 사람 다 대련을 할 생각인지 옷차림이 이전보다 훨씬 가벼웠다.
긴 곱슬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셔츠와 조끼, 긴 바지를 입고 부츠를 신은 아이클라타는 카이엔을 발견하자 가볍게 묵례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인사는 둘째치고, 갑자기 연무장은 왜 빌리겠다는 거야?”
“그야 제대로 이 망할 오라버니께 한 번이라도 타격을 주기 위함이죠.”
“…첫날에 뺨 때렸잖아.”
“그걸로는 모자라요. 제 10여 년 동안의 한은 아직 건재합니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아이클라타는 페르세이지를 쏘아보았다. 하나 여동생의 강렬한 눈빛에도 페르세이지는 웃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그가 입매를 비틀어 웃으며 말했다.
“무슨 자신감인진 모르겠지만 저렇게 원하니 검 한 번 맞대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죠.”
“으으…!”
“어… 살살해. 다칠라.”
“염려 마십시오.”
“언젠간 꼭… 오라버니의 그 얼굴에 그럴듯한 흉터를 내주겠어요.”
“이런. 이곳에 계신 게 누구신지 잊어버리신 건가요? 웬만한 상처는 왕자님이 바로 치료해주신답니다.”
“…왕자님. 이 인간이 다쳐도 절대 치료해주지 마세요. 아주 괴물 같은… 괴물보다 더한 인간이니까 알아서도 잘 나을 거예요.”
아무래도 어제 저녁 식사 이후에 페르세이지가 성질을 살살 긁어대서 아이클라타가 결투라도 신청한 모양이었다.
그의 허가 하에 남매의 대련을 빙자한 결투가 이루어졌다.
매일 매일 영주성의 하인들이 쓸고 닦아 깨끗한 연무장의 중앙에 남매가 마주 보고 섰다.
저렇게 서 있는걸 보니 두 사람은 참 많이 닮아있었다.
짙은 푸른색 머리카락도 그렇고 눈매도 그렇고, 누가 봐도 두 사람이 남매란 걸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들으면 화내겠지?’
분명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간 아이클라타가 불같이 화를 내리라.
“흠. 심판이 없군요. 글라스 씨가 수고 좀 해주시겠습니까?”
“네? 저요?!”
“네. 따로 부탁드릴 분이 없으니. 에빌 씨는 이제 보좌관이지 않습니까.”
“하하… 저도 그냥 시종인데…”
뺨을 긁적이며 글라스는 카이엔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카이엔은 뜻대로 해주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엔 옆에 서 있던 글라스는 천천히 남매가 있는 연무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본의 아니게 심판을 맡게 된 그는 큼큼 헛기침을 하곤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심판을 볼게요. 위험한 순간에는 끼어들 겁니다.”
“손속을 둘 테니 염려 마시길.”
“저는 진심으로 오라버니를 찌르러 달려들 거예요.”
“으음… 그, 괜찮으세요?”
“물론입니다.”
글라스의 염려에도 페르세이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덤빌 테면 덤벼보라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웃자 아이클라타는 화를 내려다가 되려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감정을 갈무리하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고 서게 한 다음 글라스가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럼 준비하십시오. …시작!”
그의 외침과 함께 먼저 움직인 건 아이클라타였다.
빠르게 자리를 박차고 달리면서 검을 뽑아 든 그녀는 묵직한 양손 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후웅-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휘둘러진 검이 제 바로 앞까지 와서야 페르세이지는 움직였다.
검을 뽑지도 않고 가볍게 몸을 비트는 것만으로도 저를 향한 공격을 피한 그는 톡톡, 발끝으로 연무장의 바닥을 치며 입을 열었다.
“조금 빨라지긴 한 것 같군요.”
“대체 언제적 이야기를 하시는 거죠?”
“글쎄요. 10년 전?”
“언젠간 꼭 오라버니를 없애버리고 가주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일념으로 수련했으니, 방심은 금물이에요.”
“하하. 그거 재밌네요.”
남매간에 오고 가는 대화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검을 뽑으세요! 끝까지 저를 놀리실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흠,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나.”
그녀의 말에 페르세이지 역시 검을 손에 잡았다.
아이클라타의 검보다 도신이 가늘고 가벼운 검이었다.
한 손만으로 검을 잡고 허공에 휘휘 저으며 그는 아이클라타를 바라보았다. 마치, 이번에도 그녀가 먼저 덤벼들기를 바라는 듯한 태도였다.
먼저 덤비지 않으면 상대해주지 않겠다.
그 모습에 이번에도 페르세이지를 향해 먼저 검을 휘두른 건 아이클라타였다.
쩡-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하나 몇 번이고 검이 맞부딪치고 공격이 이어져도 페르세이지는 자신을 향하는 모든 칼날을 쳐내고 피했다. 그것도 아주 작은 움직임만으로.
“아이클라타 씨도 약한 건 아닌데… 바이스 씨가 너무 강하네.”
“그러게요.”
솔직히 말하면 바이스… 페르세이지가 너무 강했다.
가만히 시골구석에만 처박혀있었다면 모를까,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개인적인 수련을 쉬지 않았고 마왕 대리전이며 사이비 사냥이며, 별의별 놈들과 싸운 덕분에 실전 경험도 꽤 많았다.
그 전부터 소드 마스터였던 녀석이 죽을 정도로 위험한 일들을 겪고 나니 더욱 강해질 수밖에.
아이클라타가 아무리 열심히 검을 수련했어도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은 없을 테니 페르세이지보단 아래일 게 뻔했다.
페르세이지는 아이클라타의 공격을 맞아줄 것 같으면서도 아슬아슬한 순간 피하거나 받아 쳐냈다.
“…난 이제 눈으로 따라가기도 어렵다.”
검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며 카이엔이 투덜거렸다.
“남매라 그런가 되게 닮았네.”
“그러게요.”
“비셰 네가 보기에도 그래?”
“바이스 씨 기운이 훨씬 진하고 뚜렷하고 무섭지만요.”
“그렇구나.”
몽마인 그녀가 보기엔 그런 모양이다.
페르세이지가 공격을 막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않자 아이클라타가 외쳤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거죠?! 저를 무시하지 마세요!”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만.”
“그럼 왜 그러는 건데요!”
“왜인지는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훈련용 검도 아니고 진검을 들었는데, 둘 중 하나는 피를 봐야만 끝이 난다는 걸 알 텐데요.”
“…상관없어요.”
“구혼하러 갔다는 딸이 다쳐서 돌아오면 후작님이 참 좋아하시겠군요.”
“상관없어요!”
“아이클라타.”
핏-
바람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입은 셔츠의 목깃이 잘려 나갔다.
살갗은 건드리지 않고 옷만을 찢어버린 검격.
페르세이지는 냉담한 시선으로 여동생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긴 했군요. 이렇게나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걸 보니까.”
“아…”
“쓸모없는 피붙이를 남겨놓고 온 이유를 진정 모르는 겁니까?”
“그-”
“본성을 감춘다. 약점이 있다면 숨긴다.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마라. 예전부터 말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그 꼴은 뭐죠?”
아이클라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얼굴색만 점점 창백해졌다.
그제야, 과거 바이올로스 후작가에서 하나뿐인 오라버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떠올랐다.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먼발치에서만 지켜볼 수 있었던 사람.
4살 위의 혈육은 도저히, 자신과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이였다.
“개인적인 훈련을 게을리하진 않은 것 같고, 영지에 숨어든 첩자의 일부는 당신이 관리하고 있었을 테고, 그 외에 성취한 것은 있습니까?”
“저, 정기적인 모임을…열어서, 동맹을…”
“그 외에는?”
“후작가의 기사단… 하나를 가지고 있어요.”
“또.”
“기사 학교에 장학금을 지원해서, 우수한 학생들을 모으고 있어요.”
“다른 건 없습니까?”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이클라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페르세이지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10년 동안 한 게 고작 그겁니까?”
그 말 한마디가 너무나도 아프게 가슴을 찔렀다.
페르세이지가 후작가를 나가지 않았다면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었음을,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와 다르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싸늘한 그 눈을 마주 보는 게 힘들어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온몸의 피가 죄다 말라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분위기를 깬 건, 다름 아닌 카이엔이었다.
“정말이지, 실망스럽기 그지없-”
“그만해!”
대련을 하던 이들이 멈춰서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가 바뀌면서 아이클라타가 점점 고개를 숙였다. 떨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임을 직감하고 카이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무장 중앙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페르세이지의 입부터 틀어막았다.
“또 네가 잘못했지? 하여간 이 입이 문제라니까.”
페르세이지는 카이엔이 제 입을 막고 있자 가만히 손끝으로 톡톡, 카이엔의 손을 두드렸다.
치우라는 의미였지만 카이엔은 고개를 저었다.
“또 네가 무슨 말을 할지 어떻게 알아?”
페르세이지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 손을 치울 수도 있겠지만 페르세이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실은 카이엔이 접근하는 것부터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가만히 뒀다. 왕자의 행동은 그의 생각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까와는 달리 심드렁한 얼굴로 페르세이지는 아이클라타를 바라보았다.
“넌 좀 어때? 괜찮아?”
“…네. 생각지도 못하게 도움을 받았네요.”
하아, 하고 아이클라타는 긴 숨을 내뱉었다.
“역시 오라버니를 곤욕스럽게 만들려면 제가 왕자님과 결혼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응??”
“그 오라버니가 돌봤음에도 이렇게나 바르게 자라주신 왕자님이 참 신기해요.”
“…너 대체 무슨 말을 했던 거야?”
듣고 싶으면 치우라는 듯, 페르세이지는 카이엔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손을 뗄까 떼지 말까 고민하던 카이엔이였지만 계속 페르세이지의 입을 막고 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미심쩍은 얼굴로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듣고 싶습니까?”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별로 안 듣고 싶어지네.”
“네. 안 듣는 게 좋습니다.”
“뭐?”
“제가 없음에도 제 기대치에 못 미치는 성과를 낸 아이에게 한 말이니까요.”
“세상 사람들이 다 너 같으면 진작에 멸망했어. 다이잘이 없어도 멸망했다고.”
“하하.”
질색하며 카이엔이 대꾸했지만 페르세이지는 웃을 뿐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도 냉기를 풀풀 날리던 이가 저렇게 웃고 있으니 아이클라타는 맥이 탁 풀렸다.
시골 생활을 하면서 독기가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독은 건재했고 카이엔 앞에서나 얌전한 척 하는 거였다.
살기에 민감한 아이를 돌보면서 버릇처럼 감추게 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건지 아니면 카이엔이 특별취급 받는 건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 서운할 뿐이었다.
“오라버니는, 제 피붙이 말고 다른 이에게만 친절하시네요.”
“피붙이는 경쟁자니까요.”
“…아버지보단, 당신에게 인정받고 싶었는데.”
“그럼 더 노력하시죠. 솔직히 제 눈에 차는 사람은 지금까진 아무도 없거든요. 왕자님만 봐도 아직 한참 모자라시니까요.”
“갑자기 나는 왜 끌어들여?”
“끼어든 건 왕자님입니다만. 지금의 전 페르세이지니까 왕자님이랑 연관 없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래, 네 맘대로 해라.”
그와 말해봤자 자신만 손해기에, 카이엔은 순순히 항복했다.
지금의 자신은 페르세이지라고 말하면서도 하는 꼴을 보면 바이스로 있을 때와 별다를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