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매번 질리도록 날아오는 편지는 모조리 모닥불 안에 쏟아져 한 줌 잿가루로 변했다.
답장은커녕 받는 사람이 보지도 않는 편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이질 않았다.
카이엔은 맨날 그에게 한 뭉텅이 왔다는 것만 보여주고 그 편지들을 몽땅 태워버리는 바이스에게 딴지를 거는 것에도 지쳤다.
그 탓에, 중요한 소식을 하나 놓치고 말았다.
바이스는 제집에서 온 편지조차도 쓸데없는 것으로 취급했고 덕분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아이클라타 바이올로스라고 합니다.”
짙은 푸른색 곱슬머리의 여성이 고개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어서 카이엔은 그녀에게 대답해주지 못하고 바이스를 쳐다보았다.
바이올로스라면 바이스네 집안이었고 그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한 명씩 있었다.
그 시선에 바이스가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집에서 편지가 오긴 했습니다만.”
“안 봤어?”
“네.”
“왜?”
“그야 구혼서에 끼어있었으니까요.”
당당하게 그가 대답했다.
그 반응에 카이엔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인사가 무시당했지만 아이클라타는 무덤덤하게 카이엔을 응시했다.
그 시선이 카이엔과 바이스를 번갈아 가면서 향했고 그녀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제가 온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이 녀석이 태워버린 모양이야. 미안하다.”
“아뇨. 왕자이신 백작님께서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도 주변에서 왕자 왕자 거리니 백작님으로 불리는 게 몹시도 새로웠다.
아이클라타는 차분한 눈으로 제 오빠를 쳐다보았다.
집 떠난 지 10년도 더 된 혈육은 예나 지금이나 다른 점이라곤 없어 보였다.
뭐가 좋다고 웃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저 얼굴을 보니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하나 아랫것을 교육하는 솜씨가 없으시군요. 감히 주인 되는 자에게 오는 편지를 확인조차 안 하고 없애버리다니.”
“꾸준히 있었던 일이라 실수하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전혀 죄송하다는 얼굴이 아니었다.
아마 바이스는 편지를 읽었어도 여동생이 온다는 걸 알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카이엔은 한숨을 푹 쉬었다.
“다음부턴 좀 읽어봐.”
“수가 너무 많습니다. 비셰 씨나 글라스 씨와 나눠야겠습니다. 그게 아니면 페이리 씨라던가.”
“페이리는 왜?”
“그런 편지를 많이 읽으면 어휘과 글솜씨를 성장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테니까요.”
“…너 알아서 해라.”
“무례하군요. 어찌 저런 식으로 대처를 한다는 말입니까? 세자르가 다른 영지들에 비해 자유로운 곳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지나칩니다. 다른 이도 아닌 왕자님께 저런 태도라뇨.”
“옛날부터 저래서 난 이제 괜찮은-”
그러나 카이엔의 말은 미처 끝맺어지지 못했다.
그는 아이클라타가 바이스의 여동생이기에 구혼 핑계로 제 오빠를 보러온 것이라고 여겼다.
하나 아이클라타는 처음부터 일관된 자세를 취했다. 바이스를 보는 눈도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정말로 아랫사람을 보는 눈으로 바이스를 바라보던 그녀는 교육을 입에 담으면서 손을 치켜들었다.
철썩!
“헉!”
다짜고짜 제 오빠의 뺨을 후려치는 것에 카이엔은 기겁했다.
바이스는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엄청난 소리가 난 것만큼 뺨을 때린 자신의 손도 아플 텐데 아이클라타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바이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좀 더 좋은 시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아직 왕자님께서는 영주로서 자리하신 지 얼마 되시지 않았기에 모르시는 게 많을 테니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습니다.”
“아니… 그건 그렇다 쳐도…”
“왜 그러시죠?”
아이클라타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방금 그렇게 세게 따귀를 때렸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바이스도 바이스인데, 여동생마저도 한 성깔 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치만 보고 있자 잠시 침묵을 지키던 바이스가 입을 열었다.
“왕자님의 부족한 식견을 이해해주는 분이 나타나셨군요.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너 괜찮아?”
결국 카이엔이 이렇게 묻자 바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 보였다.
피할 수 있는 공격을, 하다못해 오러라도 써서 방어했다면 나았을 텐데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지 얻어맞은 뺨에 손자국이 그대로 나 있을 정도임에도 그는 카이엔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왕자님께 꼭 해야 할 말이 생겼습니다.”
“뭔데?”
“잠시 휴가를 다녀올까 합니다만.”
“뭐?”
뜬금없이 웬 휴가?
그가 묻기도 전에 바이스는 품에서 흰 봉투 하나를 꺼내 카이엔의 손에 꼬옥 쥐여주었다.
“휴가 신청서입니다. 이 자리에서 바로 수리해주실 거죠?”
“어… 어어… 그래.”
그동안 바이스가 못 쉬긴 했다.
카이엔이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바이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뒤로 단정히 빗어넘겼던 머리를 마구잡이로 흐트러뜨렸다.
살짝 긴 앞머리는 오른쪽 눈을 조금 가릴 정도였다. 그 상태에서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만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젠 바이스가 아니라 페르세이지로군요.”
“…뭐?”
“그렇지 않습니까? ‘바이스’는 휴가를 갔으니까요.”
이렇게 말하며 그는 빙긋 웃었다.
어쩐지 무서워져서 카이엔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스가 휴가 가고 남은 자리에는 ‘바이스’가 아니라 ‘페르세이지’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페르세이지는…
‘서, 설마…’
바이올로스 후작가의 장자이며 여기 있는 아이클라타의 오빠다.
아무렇지도 않게 ‘페르세이지’는 여동생에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군요. 아, 이게 아니던가? 너무 오랜만에 페르세이지를 지칭하려니 어렵네.”
“…맘대로 하시죠. 어떤 말투를 쓰던 오라버니가 변하는 건 아니니까.”
“그런가? 음, 다른 사람도 아닌 너희에게라면 좀 더 편하게 대했던가? 못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이런 짓을 할 정도로.”
얻어맞은 뺨을 가리키며 그가 말하자 아이클라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여동생을 바라보는 페르세이지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그럼, 이다음에 어떻게 될지는 알고 있겠지?”
“…당한 만큼 갚아준다.”
“그렇지.”
“뭐? 야 너 설마…”
진짜 때리려고? 여동생을?
아무리 아이클라타가 먼저 손을 썼다고 해도?
바이스… 아니, 페르세이지는 정말로 여동생에게 그대로 돌려줄 생각인 건지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카이엔은 기겁했고 아이클라타는 바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피하지 않았다.
이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는지 꼭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위로 들어 올려진 페르세이지의 손은 아이클라타의 뺨을 때리지 않았다. 때리려는가 싶더니만, 각도를 바꿔서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쓰다듬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느낌에 아이클라타는 소스라치게 놀라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났다.
“오, 오, 오라버니?!”
“왜 그러지?”
“이, 이게 무슨…”
“흠. 정말 때릴 줄 알았던 거야? 그러고 싶은 마음도 있긴 하지만 그 전에, 혼자서도 잘 커 준 네가 기특해서 그런 건데.”
“그런…”
“왕자님도 똑같습니다. 제가 정말 때릴 줄 알았습니까?”
“네 눈빛이 살벌했다고…”
“하하. 속으셨군요.”
이 상황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페르세이지는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까 전과 다른 점이라곤 그저, 머리 모양을 흐트러뜨린 것뿐인데 어쩐지 좀 더 살벌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카이엔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놀라게 하지 좀 말고…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뭘 말입니까?”
“네 여동생이 왔잖아.”
“바이스는 지금 휴가 갔습니다만.”
“너…”
“지금은 저도 손님으로 대해주세요.”
“진심이야?”
“인수인계를 하지 않고 급하게 휴가 간 건 죄송합니다.”
담담히 대꾸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앞에 서 있는 남매를 보고 카이엔은 한참 동안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별채로 가자.”
“왕자님께서 직접 안내해주신다니, 영광입니다.”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하하.”
“…오라버니는 대체 뭘 하고 사셨던 거예요?”
“이것저것 여러 가지 하고 살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카이엔은 일단 두 사람을 손님용 별채로 안내했다.
페르세이지는 정말로 손님 역할에 심취하기로 한 모양인지 아이클라타와 나란히 걸으면서 시답지 않은 잡담을 이어나갔다.
“어? 왕자님! 새로운 손님이신 건가요? 그런데 바이스 씨 머리 모양이 왜 저러세요? 얼굴은… 으왓!”
근처를 지나가던 비셰가 그들을 발견했다.
비셰는 바이스의 머리 모양이 흐트러진 것에 한 번, 그의 뺨에 붉은 손자국이 난 것에 두 번 놀랐다.
경악해서 그녀는 카이엔을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사정없이 진동하고 있었다.
“누, 누, 누가 바이스 씨한테… 아니, 바이스 씨가 저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맞을 수 있긴 했던 거예요?!”
“저도 사람입니다만.”
“그래도요!!”
“그리고 지금은 바이스가 아니라 페르세이지라고 해주세요. 바이스 크라이머는 휴가 갔습니다.”
“네?”
“…사정을 이야기하면 좀 길어. 나중에 설명해줄게.”
“인수인계를 지금 할까요? 바이스는 잠시 휴가 갔으니 비셰 씨가 글라스 씨와 함께 왕자님을 보필해주십시오.”
“네? 네에… 일단 알겠어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비셰는 마저 갈 길을 갔다.
그렇게 비셰를 보내고 나서 끝난 게 아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바이스의 꼴을 보고 놀랐고 바이스는 그런 그들에게 똑같은 대답만을 해주었다.
이젠 바이스가 페르세이지 바이올로스란걸 모르는 사람이 없게 돼버렸다.
그 모습에 아이클라타는 이마를 짚었다.
“오라버니는 대체…”
“왜 그러시죠?”
“…네. 맘대로 하세요. 어차피 차기 후작은 제가 될 테니까.”
“드디어 제가 가계도에서 파였나요?”
“아직은요. 하지만 제가 소가주가 되자마자 제명해버릴 겁니다.”
“기대하겠습니다.”
만인에게 경어를 쓰기를 십 년도 넘게 이어갔던지라 이쪽이 더 편한 건지, 페르세이지는 살짝 말투를 바꾸었다.
그 변화에 아이클라타는 미간을 찌푸렸다.
별채로 두 사람을 데려온 카이엔은 곧 다른 사람을 붙여줄 테니 방에서 쉬고 있으라고 말하고 가버렸다.
복도에 단 둘만 남게 되자 페르세이지는 여동생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방문한 목적은? 정말 구혼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겸사겸사죠. 오라버니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볼 겸.”
“흠. 그래서 소감은?”
“한심해요. 본인이 시골구석에 처박혀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지 않아요?”
“시골이라니. 왕자님이 들으시면 가슴 아파하실 소리를.”
“같잖은 연기하지 마시고요.”
“진심인데.”
그 말에 아이클라타는 인상을 찌푸렸다.
“직접 앞에 두고 보니 감회가 참 새롭네요. 그 누가 오라버니가 이렇게 자랐을 줄 알았겠어요?”
“내가 집을 나갔을 때가 열일곱이었나? 그쯤 되었을 테니 다들 예상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열일곱이면 다 컸지.”
“하?”
“너야말로 많이 컸구나.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
“말 돌리지 마시고요.”
“그래서, 방문한 목적은?”
다시 한번 묻는 말에 아이클라타는 한숨을 푹 쉬었다.
거의 십여 년 만에 만난 오라버니의 성격에 적응하기가 꽤 힘들었다.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온건하고 이성적이라서 더욱 그랬다.
다른 사람의, 특히 카이엔의 눈치를 보는 건지 아니면 그 괴팍한 성격이 그사이 많이 죽은 건지.
페르세이지를 흘겨보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구혼은 핑계 맞아요. 제가 차기 후작이 될 테니까 이 땅을 다스리고 있는 왕자님과 결혼하게 된다면 후작가를 지휘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베스펠이 있잖아.”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그 애는 엄청나게 모자라요!”
“아직도?”
“아직도.”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단언하는 여동생의 모습에 페르세이지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교육을 했어야지.”
“자기도 남자라고, 커갈수록 맷집이 늘어서요.”
“흠.”
“데려올 걸 그랬나요?”
“아니. 그랬다면 왕자님 옆에 찰싹 붙어있었을걸?”
기가 막히게 자기를 보호해줄 사람을 찾아내는 감각을 가진 녀석이었다.
카이엔을 곤란하게 만들 생각이 없었기에 페르세이지는 입가에 띄고 있던 미소를 지웠다.
“어떻게 자랐나 확인하고 싶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고, 앞으로도 볼일은 없겠군.”
“그 애도 좋아하겠네요. 오라버니 볼 일이 평생 없다면요.”
“네가 곁에 있잖아. 그럼 됐지.”
“충분히 괴롭히고 잘 써먹으란 말로 들리는군요.”
“알면서.”
“그렇죠.”
남매는 서로를 마주 보고 빙긋 웃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저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그리델라와 슬로세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바이스의 여동생이 왔고 바이스는 휴가 가서 페르세이지로 불러야 한다는 말에, 이건 또 무슨 일인 건가 싶어서 구경 왔는데.
남매의 성격이 굉장히 닮아있었다.
“바이스 씨가 여자였다면 저랬을까?”
“더하지 않았을까?”
“계속 구경하다간 들키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이스 씨잖아. 얼른 가자.”
“응.”
슬로세이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델라를 따라갔다.
바람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여기까지 오게 해 듣기만 했을 뿐인데도, 멀리 떨어져서 관찰했음에도 바이스라면 그들이 엿보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