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1년 후.
세자르 영지는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사리반은 산산이 흩어져서 사람들은 원래 일상으로 돌아갔고 다시 검은 숲에는 사냥을 위한 사람들이 몰렸다.
해가 되는 위험한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전리품을 거래하고.
카이엔은 한 번씩 산채로 잡힌 몬스터들을 보면 대화를 시도하고 구매한 뒤 풀어주거나 사냥 법칙을 어긴 자들을 발견하면 주저 없이 벌했다.
그가 그런 식으로 움직이자 다른 북부 영주들도 조금씩 그가 내세운 규칙을 영지 법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정원에 심어놓은 세계수는 쑥쑥 자랐다.
잘 자라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얼른 옮겨심지 않으면 못 옮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카이엔과 프라우디에는 세계수를 옮겨심기로 했다.
고작 손가락 하나 정도 크기였던 작은 가지. 심지어 묘목도 아니었던 것이 이렇게 잘 자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이미 봐두고 관리하던 땅이 있으니 그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대규모 공사가 시작되었다.
하인들이 조심스럽게 나무 근처를 둥글게 파냈고 그리델라가 마법으로 들어 올려서 뿌리가 감싼 흙까지 통째로 짐차에 실었다.
마법이 있으니 옮기기가 굉장히 편리했다.
영지와 가까운 곳으로 선정하긴 했어도 마차를 타고 며칠 가야 하는지라 카이엔은 프라우디에와 그리델라, 비셰, 엔베인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 바이스는 당연하다는 듯 카이엔을 따라갔다.
주로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을 데려가기로 했고 엔베인은 호위 겸 동행하기로 했는데 슬로세이가 자기도 간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성인식을 치르고 나서 꽤 시간이 지난 지금 슬로세이도 처음 만났을 때의 어린애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다.
“나도 갈래! 나도 물 조종할 수 있다 뭐!”
“바닷물은 안 되는데.”
“맹물도 된다구!!”
따라가고 싶다고 떼를 쓰니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슬로세이도 일행에 끼게 되었고 그들은 세계수를 태운 짐차를 가지고 검은 숲 안으로 들어갔다.
프라우디에는 나무의 뿌리를 살펴야 한다면서 짐차에 타서 뿌리가 마르지 않게 세심하게 물을 뿌려주었다. 나무에 물을 준다는 핑계로 온지라 슬로세이도 짐차에 탔다.
천천히 이동하느라 평소보다 하루가 더 걸려서 도착한 곳에 그들은 세계수를 옮겨심었다.
이번엔 마법으로 적당히 땅을 파고 마법으로 나무를 들어 올려서 심고 마법으로 흙을 덮었다.
인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으니 굉장히 수월하게 끝낼 수 있었다.
이전부터 세계수를 옮겨 심으려고 눈여겨봐 둔 덕분에 높은 울타리와 담장, 작은 오두막까지 설치한 뒤였다.
사유지 표시도 해놨지만 누가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곤 장담할 수 없어서 이제부턴 검은 숲 안에도 관리자를 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하니 프라우디에는 웃으며 말했다.
“정령들이 해줄 거예요. 아무나 세계수에 접근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럼 다행이지.”
“이 나무가 이렇게 커져서 정령들도 기뻐하고 있어요.”
카이엔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도 프라우디에의 곁에 정령이 있는 모양이었다.
허공을 보면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에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성과 떨어져 있는 이곳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비셰가 이동 마법진을 만들어놓기로 했다.
물론 진이 망가지면 못 쓰겠지만 지옥에서 아스모데우스에게 속성으로 이 마법만 죽을 각오로 배워왔다며 비셰는 열심히 땅바닥에 엎드려서 마법진을 그렸다.
서서 해도 될 텐데 굳이 엎드려서 온몸에 흙을 묻히면서 준비를 하는 비셰를 보고 카이엔이 놀라서 물었다.
“비셰, 아스모데우스가 많이 괴롭혀?”
“네? 그거야 맨날 있는 일이고…”
“지팡이로 그려도 되잖아. 굳이 엎드려서 할 필요가…”
“아… 버릇이 돼서….”
“…어쩌다가?”
“아하하….”
비셰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아무튼 여기엔 그녀가 잘못한다고 해서 혼낼 사람은 없었으므로 비셰는 옷에 묻은 흙을 털고 일어났다.
익숙하게 허공에서 꺼낸 마법 지팡이의 끝으로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는 비셰를 보며 카이엔은 조심스럽게 프라우디에에게 말했다.
“…비셰 좀 잘 봐줘.”
“네. 그치만 잘하고 계세요. 가끔 자괴감에 빠지긴 하지만요.”
비셰는 마법진을 완성한 뒤 영주성과 연결이 잘 되는지 그 위에 서서 몇 번 시험해보았다.
마법진이 잘 작동하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안심했는지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다만 마법진으로 마차까지 이동시킬 수는 없었기에 그들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마법진을 실험해보느라 비셰 또한 마력을 많이 소모했기에 반쯤 녹초가 되어서 마차에 실려 갔다.
한번 마법진을 설치해놓으니 세계수를 심어놓은 곳으로 가는 건 수월했다.
프라우디에는 1주일에 1번 이상 이동 마법진을 쓰거나 자네인과 함께 하늘을 날아서 세계수가 잘 자라고 있는지, 누가 건드리고 간 흔적은 없는지 살폈다.
세계수씩이나 되는 나무에 벌레가 먹을 리는 없었지만 프라우디에는 신경 쓰이는건지 벌레 쫓는 약을 잔뜩 만들어가기도 했다.
세계수는 프라우디에가 맡아서 관리하게 되었으므로 카이엔은 가끔 프라우디에가 필요하다고 하는 재료를 구해다 주면 그만이었다.
그것 말고도 그가 신경 쓸 일은 많았다.
여전히 산처럼 쌓일 정도의 구혼 편지를 보여주던 바이스는 그것을 바로 모닥불에 쏟아부었다. 덕분에 집무실 모닥불은 편지를 장작 삼아 활활 잘도 타올랐다.
“왕자님이 결혼이라니. 아직 턱도 없습니다.”
“어… 그래. 그럼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솔직히 나보단 네가 급할 거 아냐.”
“전 결혼할 생각 없습니다만. 왕자님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으음.”
“가정이 생기면 그쪽에 신경을 써야 할 텐데, 그 정도로 여유가 있지 않습니다.”
했던 이야기가 또다시 반복되곤 했다.
어느 날은 프라우디에의 권유로 함께 이동 마법진을 사용해 세계수를 보러 갔다.
땅이 좋은 건지 정원보다 넓어서인지 자라나는 속도가 더 빨라진 것 같았다.
“…더 먼 데에 심을 걸 그랬나?”
울타리를 좀 더 높일 필요가 있다는 카이엔의 중얼거림에 프라우디에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먼 옛날 존재했지만 사라졌고 또다시 인간이 이 땅에 심어 뿌리를 내리고 자라기 시작한 세계수는,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이 자리에 있게 될까?
과일 나무 같은 게 아니니 열매는 맺히지 않을 테고 그 씨앗이 더 생기진 않을 것이다.
프라우디에와 함께 세계수에 물도 주고 슬로세이가 뚫어놓은 수원에 흐르는 물이 멀쩡한지 확인한 뒤에 카이엔은 짧은 외출을 마치고 영주성으로 돌아왔다.
비셰가 신경 써서 보수 관리하고 있는지라 이동 마법진은 아직 쓸만했다.
***
말도 없이 티아마티스가 방문했다. 게다가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중절모에 검은 망토를 걸친 키 큰 남자였는데 기이한 모양의 귀걸이를 착용한 데다가 얼굴은 이상하게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늘로 가려진 것만 같아서 수상함이 물씬 풍기는 사람이었는데 티아마티스가 데려왔으니 그에게 해가 될만한 사람은 아닌 게 분명했다.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않게 응접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마자 티아마티스가 입을 열었다.
“…이전에, 내가 구조요청을 했다고 했었지.”
“아. 그랬던 적이 있었죠.”
“이제 도착했다.”
“네?”
일 다 끝난 지 오랜데??
카이엔이 입을 딱 벌리자 티아마티스는 손으로 얼굴을 덮어 가렸다.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티아마티스와 함께 온 검은 옷의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리 웃긴 지 한참을 낄낄거리다가 그가 말했다.
“미안, 이쪽도 많이 바빠서. 그런 놈들을 상대하느라 1분 1초가 아까울 정도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는 모자를 벗었다.
눈을 가리는 가면을 착용한지라 여전히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나 드러난 콧대와 입술만으로도 그가 굉장히 잘난 얼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카이엔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나름 잘 처리한 모양이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흔적이라던가 잔해는, 음. 아직 있는 모양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소멸할 거야. 평범한 물건에도 귀신이 붙을 수 있는데 그런 놈이 꼬인 물건들은 더하겠지.”
“…이거 프라우디에 불러와야 하는거 아니에요?”
“너만 있으면 된다.”
티아마티스의 단호한 대답에 카이엔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여전히 맞은편에 앉아있는 검은 옷의 남자는 그를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어디 보자, 운명에서 벗어난 인간이랬지? 흠-”
그건 또 어디서 들은 거람.
정체불명의 남자를 앞에 두고 카이엔은 괜히 긴장돼서 마른 침을 삼켰다.
한참 동안 그를 살피던 남자는 이내 입을 열었다.
“문제없다.”
“…정말입니까?”
“응. 어차피 얘가 야망을 품고 쓸데없는 짓을 벌일 것 같지도 않고 이 정도쯤이야 뭐. ‘둠’이 나타난 세계에선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달까. 게다가 이쪽 세계 마신도 주시하고 있다면서? 괜찮을 거야.”
카이엔은 그 말보다 티아마티스가 동행해온 남자에게 존댓말을 쓴다는 것에 더 놀랐다.
눈이 동그래져서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니 검은 옷의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 영향으로 운명이 바뀐 사람들도 많지만, 이 녀석 곁을 떠나지도 않을 테고. 그럼 괜찮아. 아까운 건 인간이라 수명이 짧은 건가? 주변 녀석들은 다 이종족이랬지? 너, 수명 늘려줘?”
“네?”
뜬금없이 무슨 소리?
그런 표정이니 티아마티스가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으음… 쉽게 말하자면 이쪽도 신…이라서.”
“네??”
“정확히는 고인 물들이 못 나서니 앞장서서 싸우고 일하는 담당이지만.”
“신….”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아도 된다. 아직 담당한 속성도 세계도 정해져 있지 않고 이곳저곳 구조작업만 하러 다니고 있으니까. 그래서, 수명 늘려줄 필요는 없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욕심 없네. 잘 됐다. 그럼 됐어.”
소리 내 웃으면서 그는 다시 모자를 쓰고 일어났다.
장식이 많은 귀걸이가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이쪽은 평화로운 것 같으니까 다른 곳으로 가봐야겠다.”
“…몸조심 하십시오. 나이도 많으신 분이.”
“야! 나 정도면 고인 물들 축에서도 어린 편이거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잘 있어라!”
손을 흔들며 신이라 소개되었던 남자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눈도 한번 깜빡이지 않았는데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모습에 카이엔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티아마티스는 한숨을 쉬었다.
두통이 오는 건지 그는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문제없다니 다행이군…”
그 역시 프라우디에의 추측을 들은바. 전 마왕인 사탄이 괜찮다고 했어도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신조차도 괜찮다고 해줬으니 정말 문제가 없는 거겠지.
만약 그 ‘둠’이라는 것의 파편이 있었다면 그가 저렇게 돌아갔을 리가 없으니까.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카이엔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가 말했다.
“이젠 정말 다 끝났다. 수고 많았어.”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다만…”
티아마티스는 말끝을 흐리고 그가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리치왕을 노리고 세계를 노리고 신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존재.
‘둠’은 어느 순간 나타난 신의 천적이며 신을 잡아먹고 힘을 불려 나갔다.
이 세계에 왔던 놈은 이미 신 몇 명, 세계 몇 개를 먹고 어느 정도 이성을 갖췄기에 스스로 신인 척 위장하고 세계에 내려왔고 리치왕을 놓치고 나서도 세계의 에너지를 빨아먹으면서 자아를 쌓았을 것이라고.
재앙 급은 신을 노리고 자아가 있는 놈들은 세계와 신 양쪽 모두를 노리니 이미 한번 ‘둠’을 격파한 세계는 몸을 사리면서 오지 않을 것이라고 그가 말했다.
“…나도 이번에 듣게 된 거지만. 역시 커뮤니티에서 빠져나오는 게 아니었나.”
“아무튼, 이제 아무 일 없다는 거죠?”
“외부에서의 간섭이 없을 뿐이지. 인간들 사이의 분쟁 같은 게 없어질 리 없잖나.”
“끄응.”
한 마디로 외부에서 압력을 주진 않겠지만 인간들이 잘 하지 않으면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겨우 구해낸 세상을 말아먹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건 뭐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매번 그렇듯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었으니까.
“나도 가보마. 자네인에 대한 것도 아까 그 사람에게 보여줬는데… 예외로 해줄 테지만 다음부턴 일 벌이지 말라고 한 소리 들었고.”
“아. 역시 혼날만한 일이었습니까?”
“내 피로 생명을 만드는 거야 몬스터 정도고 다른 생물에게 피를 뿌리는 것도 그와 비슷하지만 인간에게 피를 뿌려 다른 존재로 만드는 건 좀, 법에 어긋나는 모양이군. 초범이니 봐준다고 했다.”
어차피 그런 권속을 더 늘릴 일은 없었던 티아마티스는 짧은 푸념을 늘어놓고 돌아갔다.
마법을 써서 수도의 저택으로 돌아간 그는, 아까 전의 검은 옷의 남자가 사라진 것과 다른 방법으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한참 동안 응접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서 카이엔은 아까 했던 대화를 복기했다.
‘둠이라…’
어차피 이젠 안 나타난다고 했으니 괜찮겠지?
지금 중요한 건 그것 말고도 많았다.
그는 이미 평균 결혼 적령기를 지난 나이였지만 결혼까지 하지 않았다.
왕족이긴 하지만 왕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세자르에 속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지만 주택 지역을 더 늘릴 생각은 없고 지금 관리하는 마을만으로도 벅찬 상태다.
가르간트 내의 비밀 경매장에서 살아있는 몬스터나 이종족이 거래되는 것을 뿌리 뽑고 싶다.
인어 왕국 머라이어스의 인어와 더스크라이즈의 다크 엘프들과의 교류를 추진하고 싶다.
마신전도 어차피 하나뿐이니 좀 더 크게 짓고 싶고 집집마다 두고 기도할 수 있는 성물을 만드는 것도 좋겠다.
옆에서 바이스가 나이도 더 먹었는데 고작 백작으로 만족할 거냐면서, 국왕을 쪼아서 다른 거 더 얻어내라고 난린데 뭘 어떻게 쪼라는 건지 모르겠다.
맨날 구혼 편지가 오면 태워버리는 데 정말 저래도 되는 건지 여전히 걱정이다.
요즘 그리델라랑 라스가 부쩍 같이 다니는 모습이 많이 보이는데 정말 사귀는 건가 싶기도 하다.
그때 사탄이 꿈에 나타난 이후, 악마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녀석들도 바쁠 테고 인간계에 신경 쓸 일 없다는 걸 테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비셰가 한 번씩 불려가는 걸 봐선 다들 문제는 없는 것 같고.
악마들이 인간계를 신경 쓸 정도로 위험한 일이 없다는 건 반가운 일이었다.
***
나무 그늘에서 카이엔은 사트로누스의 등을 베고 누워있었고 카이엔의 배 위에 소금이가 누워있었다.
근처에서 루브도 똬리를 틀고 일광욕을 하면서 낮잠을 자고있었고 페이리는 그 옆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플루토는 그 옆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으음…”
잠들었던 카이엔이 부스스 눈을 떴다.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은 소금이가 깰까 봐 그냥 그 자리에서 눈만 깜빡이고 있으니 기척을 느낀 페이리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깨셨어요?”
“응. 깜빡 잠들었네.”
“푹 쉬세요. 간만에 쉬게 된 건데.”
“그럴까…”
움직였다가는 소금이가 깰지도 모르고.
카이엔은 좀 더 누워있기로 했다.
사트로누스도 자는 건지 숨을 쉴 때마다 몸이 움직이는 게 뒤통수로 전해졌다.
크게 자란 세계수의 그늘은 꽤 넓어서 모두 그 아래에서 누워있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시간을 내서 산책도 좀 하고 주변도 점검할 겸 찾아왔다.
동행한 기사들은 주변을 청소하고 경비하고 있었는데 다들 제 할 일을 하는 와중에 혼자 느긋한 게 좀 미안하긴 했지만 여기 오려고 지금까지 고생한 걸 생각하면 그는 쉬어도 됐다.
“왕자님.”
“응?”
“주변 정찰을 마치고 왔습니다.”
“별일 없었지?”
“네. 위험한 몬스터의 수가 줄었습니다. 이대로라면 다음 토벌의 시기는 좀 더 늦춰도 되겠군요. 더 안쪽까지 본다면 모를까, 근방에는 없습니다.”
“음, 찾아오려는 용병들의 숫자도 줄겠네.”
“사업 계획안을 축소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돌아가는 대로 바로 검토하자.”
카이엔은 손끝으로 소금이를 툭툭 건드렸다.
일어나려고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몸을 좀 더 둥글게 마는 소금이를 보며 카이엔은 조심스럽게 소금이를 손으로 옮겨 이동장에 넣어주었다.
바로 떠나진 않을 거고 여기서 하룻밤 자고 나서 아침이 되면 움직일 생각이었다. 다만 계속 누워있기 좀이 쑤셔서 몸을 일으켰다.
기지개를 켜니 몸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사트로누스와 플루토는 계속 낮잠을 자게 내버려 두고 카이엔은 루브도 들어서 이동장 안에 넣어 마차 안에 실었다.
맨날 잠만 자는 루브는 여기서도 잠만 잤다. 외출한다고 하니 좋아하던 녀석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낮잠에 푹 빠져버렸다.
바람에 가지에 잔뜩 달린 잎사귀들이 사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날 밤, 카이엔은 자다가 깨서 천막에서 나왔다.
바이스가 알면 혼내겠지만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적응이 잘되지 않았다. 바람도 쐴 겸 그는 하품을 하며 밖으로 나왔다.
은은한 달빛과 몬스터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사방에 세워놓은 횃불로 인해 사방이 밝았다.
그가 쓰는 천막은 세계수 근처에 세워놓은 거라 카이엔은 커다랗게 자란 나무를 보러 갔다.
달빛을 받아서인지 잎사귀며 가지가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슨 빛무리가 어른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눈을 비비고 봐도 똑같았다.
나뭇잎이 저절로 발광하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작은 빛 덩어리도 돌아다녔다.
반딧불이가 돌아다닐 시기는 아닐 텐데…
주변을 떠다니는 빛무리를 보고 카이엔은 세계수 가까이 다가갔다.
나무는 그가 다가오자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가지를 흔들었다.
“으음.”
뭐라고 말을 하는 걸까?
그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몬스터가 아니니 그가 나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들리지도 않았고.
가만히 서서 세계수를 바라보다가 카이엔은 천막으로 돌아갔다.
- 안녕.
- 안녕.
- 만나서 반가워.
빛무리가 깜빡였다.
- 안 들리나 봐.
“들릴 리 없죠. 제가 그 정도로 만능은 아닌지라.”
어느새 그 나무의 기둥에 기대어 서 있던 사탄이 말했다.
그는 가만히 있다가 팔을 뻗어 나무의 가지 하나를 꺾었다.
“하나 정돈 가져가겠습니다. 만약을 대비해서.”
- 응.
“앞으로 천년은 건재하시겠지만, 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 다시는, 안 올 생각?
“네. 인간은 인간대로, 악마는 악마대로. 뭐, 멍청한 놈들이 악마소환 따위를 한다면야 누군가는 사고 칠 수도 있겠지만.”
피식 웃으면서 그는 외투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나뭇가지를 집어넣었다.
“저번에 오신 분께서 손수 균열까지 손봐서 예전처럼 복구시켜놓기도 했고요.”
- 알 것 같아.
“분신체를 보내는 것도 힘들고, 이젠 작별입니다. 잘 있으세요.”
짧은 인사를 남기고 사탄은 사라졌다. 남은 건, 그 자리에 뿌리내린 세계수뿐이었다.
은은한 빛을 내던 나무는 서서히 제 몸에서 나오는 빛을 가렸다. 다들 자고 있을 시간이니,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