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그날 밤, 카이엔은 꿈을 꾸었다.
이것도 참 오랜만이라면서 그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둥둥 떠다녔다.
발밑을 지지하고 있는 게 없으니 물 위에라도 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이 새까매졌다. 옅은 온기가 느껴지는 걸 봐선 누군가가 손으로 그의 눈을 가린 것만 같았다.
역시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게?”
“이런 장난을 치는 걸 보니… 마신도 아니고 앙그라 마이뉴도 아닌 것 같은데.”
“엥? 친한 거 아니었어요?”
살짝 변조했던 목소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놀란 목소리와 함께 손이 치워졌고 카이엔은 그의 뒤에 서 있던 사람을 보고 인상을 썼다.
“뭐야.”
“와, 표정 봐. 너무해요.”
“제 꿈에 나타난 이유라도 있어요?”
“음, 당신한테 마계로 오라고 하는 건 좀 시간 낭비 같아서? 그렇다고 제가 직접 가기엔 균형이 깨지니까요. 그나마 만만한 게 의식 세계죠.”
가까이 와보라는 손짓에 카이엔은 일단 사탄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는 웃으면서 카이엔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고생했어요.”
“…전 한 게 없는데요.”
프라우디에랑 바이스가 다 했지.
그 말에 사탄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 아니었으면 안 움직였을걸요?”
“그래서, 놈은 확실히 죽었나요?”
“네. 그 작은 아이가 잘 해줬어요. 맡겨서 미안해요.”
“티아마티스 님도 혹시 몰라 구조요청을 했다던데요.”
“그쪽도 바쁠걸요? 당신들이 실패했으면 구조 요청받고 왔을 땐, 이미 세상 절반은 먹혔을 거예요. 그럼 더 큰 위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놈이 이 세계를 완전히 삼키기 전에 세계를 먼저 없애버렸을 테고요.”
“…죽을뻔했네요.”
“그런 셈이지요.”
사탄은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고생 안 했으면 좋겠는데, 당신은 운명이 보이지 않으니 원.”
“당신이 절 살렸기 때문인가요?”
“전 능력 하나만 줬을 뿐이에요. 위험에서 벗어난 건 오로지 그대의 힘이지.”
“전 한 게 없는데.”
“당신이 그런 과거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런 사건을 겪었고 슬픔을 안고 있었기에 그 만티코어와 감정이 연결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는 양손으로 카이엔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렸다.
어린애도 아니고 다 자란 사람에게 이게 무슨 장난인가 싶어서 카이엔은 인상을 찌푸렸고 사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살짝 내려간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덕분에 당신과 당신 주변 사람들의 운명도 막 꼬여서 잘 안 보여요. 원래대로라면, 죽었을 애들이 많으니까요.”
프라우디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처분되어서 라이프 베슬만 다시 떠돌았을 테고
라스는 추격당하던 끝에 죽었을 테고
엔베인은 마검에게 먹혔을 테고
글러티나와 글라스는 일족과 함께 죽음을 맞이했을 테고
슬로세이는 납치되어 어딘가로 팔려갔을 테고
그리델라는 그런 슬로세이를 찾아 계속 헤멨을 테고
비셰는 추적을 피해 끊임없이 떠돌이 생활을 했을 터.
바이스는…
어땠을까?
‘걔는 잘살았을 것 같은데.’
번듯한 집안 자제이지 않나. 게다가 집 나온 지 이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아직 후작이 버리지도 못하는 자식이고.
고작 사탄이 이런 말만 하려고 온 것 같진 않아서 카이엔이 슬쩍 물었다.
“잘 살라고 응원해주러 온 거예요?”
“아, 그것만 있는 건 아니에요. 그쪽 꼬맹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진 알겠는데 그 추측은 틀렸을 거라고 좀 전해주세요. 걱정 많고 생각 깊은 것도 탈이네요. 그리고-”
사탄은 말끝을 늘이다가 카이엔의 얼굴을 붙잡았다.
“마신님 사제 하는 건 힘들지 않고요?”
“전 하는 거 없는데요.”
“하하 그렇긴 하죠. 그래도 당신을 끝으로 이 땅에서 마신의 사제는 없어질 거예요. 당신도 신도나 사제 늘릴 생각 없잖아요? 마신님은 좀 아쉬워할지 몰라도, 종교는 하나인 게 나아요. 그래야 분쟁도 덜하고. 지금은 에밀이랑 사이가 좋아도 긴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싸울 거고요. 자식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잖아요? 어휴, 전 그 꼴 두 번은 못 봐요.”
“…사촌 동생이 세례 해주라고 해서 대충했는데요.”
“제대로 믿진 않을 거잖아요. 만약에 그 동생이 수도에도 신전 세우자고 하면 안 된다고 하세요.”
아 역시 그렇구나.
알만하다며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탄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고 카이엔은 대충 맞장구를 쳐주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어차피 꿈속이니까 시간도 느리게 흘러갈 테니 잡담쯤이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다.
그러던 도중 카이엔은 이전에 바이스와 동굴에서 했던 말이 떠올라 그에게 물었다.
“왜 대리전에서 바이스한테 접촉하려고 한 거예요?”
“별생각 없었는데요?”
“…생각이 과했다고 전해줘야겠네요.”
바이스도 그것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한 바가 있던 모양인데.
어째 그의 주변엔 너무 걱정이 많아서 이상한 결론을 내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사탄은 여전히 그를 보며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더 물어볼 건 없나요? 이런 기회 흔치 않은데.”
“별로… 아, 프라우디에가 세계수의 가지를 심었는데 이게 자랄까요?”
“자라도 문제고 안 자라도 문제 아닐까요?”
“네? 왜요?”
“그야 세계수가 자라면 그거 노리는 놈들이 많을 테니 수호해야 하잖아요. 안 자라면… 기대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아플 테고.”
“…….”
“농담 아닌데.”
자라야 하는 건가 안 자라야하는 건가.
카이엔도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이 아프다는 건 또 뭐람.
그 표정에 사탄은 걱정하지 말라면서 등을 팡팡 두드렸다.
“걱정 마요. 그 꼬마가 잘 돌봐줄 테니까- 약해지긴 했어도 세계가 주시하는 아이인데.”
“아 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작별 인사를 할까요? 이왕이면 얼굴 볼 일이 없으면 좋겠어요. 저희가 만날 일이 있다면, 또 무슨 일이 터진 뒤 일 테니까요.”
“으음…”
“잘 있어요. 쉽게 죽지 말고요~”
무슨 인사가 그러냐!!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점점 의식이 흐려졌다.
발밑이 꺼지는 느낌이 들며 서서히 가라앉은 그에게 사탄은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 이젠 볼일이 없겠구나.
더이상 세계가 위협받을만한 일은 없을 테니까.
아쉬워해야 하는 걸까?
눈앞이 까맣게 변했고 이윽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가 그는 익숙한 목소리에 살며시 눈을 떴다.
“…일어나셨습니까?”
“응….”
“푹 주무셨나요?”
“모르겠어.”
몸은 가뿐하긴 한데.
꿈속에서 사탄과 나눴던 대화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러고 보니 검을 돌려주지 않았다.
‘알아서 하겠지…’
거기까지 찾으러 갈 시간이 없었다.
잠이 덜 깨서 그가 눈을 비비고 있자 바이스가 바로 세숫물을 내밀었다.
눈 비비지 말라면서 수건을 물에 적셔서 눈가를 닦아주는 건 덤이었다.
무사히 세수를 마치고 잠옷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으면서 카이엔이 입을 열었다.
“너 저번에 나랑 둘이서 함정에 떨어졌을 때, 전 마왕이 왜 널 선택한 건지에 대한 추측 같은 걸 말했었지?”
“네.”
“별 이유 없다던데.”
카이엔이 벗어둔 잠옷을 개던 바이스의 손이 잠깐 멈췄다.
“…네?”
“특별한 이유 없었대.”
“정말인가요?”
“응. 그렇다던데.”
“…그럼 됐습니다.”
잘 개어놓은 잠옷을 한쪽에 내려놓고 바이스는 카이엔에게 겉옷을 입혀주었다.
이제 식사하러 갈 시간이었다.
“꿈속에서 만난 모양이군요.”
“응. 별의별 이야기 다 했어. 프라우디에가 뭘 착각하고 있다고 하던데, 난 잘 모르겠다.”
“흠.”
“이따가 말해주려고.”
간단한 아침 식사 뒤엔 바로 일할 시간이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어난 일 중에서 아직 처리가 끝나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설명이 필요한 것들도 있기에 옆에서 에빌이 그를 도와주었다. 녀석도 이젠 보좌관티가 물씬 풍겼다.
점심 식사 후 산책을 하면서 프라우디에를 만나러 갈 수 있었다. 사탄이 해준 영문모를 이야기를 해주자 프라우디에는 안심했다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거기다가 카이엔은 사탄이 해줬던, 세계수가 잘 자라도 문제 안 자라도 문제라던 말을 전하자 프라우디에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아하하… 일리는 있지만….”
“정말 크게 자라면 검은 숲으로 옮겨야 할지도 모르겠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세계수 같은 걸 둘 수 없으니 조금은 인적이 드문 곳에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음에 시간 내서 검은 숲의 땅을 보러 가기로 프라우디에와 약속하고 카이엔은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중간에 가진 티타임엔 페이리와 사트로누스, 플루토, 소금이가 함께했다.
인형인 베누스는 음식물을 섭취할 필요가 없다면서 바이스의 지시에 따라서 과자를 옮기고 빈 찻잔을 채워주는 일을 했다.
소금이는 제 몫의 견과류 접시 안에 들어가서 열심히 제 간식을 흡입했다. 동그란 뺨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볼 주머니 안에 넣고 아껴먹지 않아도 되는데.”
- 버릇이니 어쩔 수 없다!
“아.”
그럴 만도 했다.
카이엔은 겉의 단단한 껍질을 벗긴 땅콩을 소금이에게 건넸다.
부드러운 갈색 속껍질만 벗기면 되는 생땅콩을 건네받은 소금이는 열심히 앞니로 껍질을 갉작였고 그 순간, 퐁- 하면서 속의 땅콩이 튀어나왔다.
- ??
“여깄어.”
멍하니 손에 남은 땅콩 속껍질만 바라보고 있는 소금이를 보면서 카이엔은 피식 웃었다.
발사된 땅콩을 주워서 건네주니 소금이는 땅콩을 손에 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찍.”
- 이게 왜 저기에…?
“크흡…”
영문을 몰라 계속 갸웃거리면서도 소금이는 땅콩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쭉 지켜본 카이엔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소금이가 말을 할 줄 알긴 하지만 햄스터 몬스터라는 속성은 변하지 않았다. 가끔 이런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옆을 보니 페이리도 소금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린 채 숨죽여 웃고 있었다.
사트로누스는 개껌 비슷한 간식을 씹고 있었고 플루토는 그것보다 살짝 작은 개껌을 씹어댔다. 아무래도 이 둘은 자기 간식을 먹느라 바빠 소금이의 귀여운 모습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맞다, 이번에 괜찮은 책을 발견해서 왕자님께도 빌려드리고 싶어요.”
“그래? 그럼 다 읽고 빌려줄래? 그런데 난 책 읽는 속도가 느려서.”
“괜찮아요. 충분히 읽고 빌려드릴 테니까요.”
짧고 즐거운 티타임 이후엔 다시 일할 시간이었다.
고생한 에빌에겐 오후에 휴식을 주고 카이엔은 바이스와 함께 남은 일을 처리했다.
저녁이 되자 식사를 하고 신전으로 외출했다. 사트로누스와 플루토를 산책시켜줄 겸 두 몬스터에게 목줄을 걸고 신전으로 향했다. 당연하다는 듯 그의 옆에는 바이스가 있었다.
평소처럼 신전을 청소하고 기도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달은 밝았지만 불 꺼진 집들이 가득한 거리는 을씨년스러웠고 바이스는 등불로 카이엔이 가는 길을 비추었다.
“왕자님.”
“왜?”
“앞으론, 별일 없겠죠?”
“그렇지않을까? 더 강한 놈이 나타나진 않을 거 아냐.”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저녁 산책과 신전 방문 뒤에는 못한 일을 마저 정리하고 잘 준비를 했다.
항상 똑같은 일상이었다.
목욕을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그가 침대에 눕자 바이스는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네고 방문을 닫고 돌아갔다.
카이엔은 잠이 오지 않아 멀뚱히 천장을 쳐다보다가 야행성인 소금이가 돌아다니면서 내는 샤샤샥하는 소리에 피식 웃고 몸을 돌렸다.
새벽이 되면 소금이가 더 활발해질 테니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얼른 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