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충분히 마음을 가다듬은 바이스는 다음날 탑에서 제 발로 걸어 나왔다.
다른 사람들이 어디에서 묵고 있는지는 사전에 알아봐 둔 뒤라 그는 거침없이 발을 옮겼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그였지만 성왕이 내어준 별궁에서 쉬고 있던 이들은 그를 환영해주었다.
“바이스 씨, 이젠 괜찮으세요?”
“네. 멀쩡합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 많이 다치진 않았으니까요.”
“다행이네. 두문불출해서 걱정했어.”
“그런데 왕자님은요?”
“어…”
그의 물음에 다들 말없이 그의 눈을 피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바이스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죄라도 지으셨어요? 마침 성국이니 바로 달려가서 아무 사제나 붙잡고 회개하세요.”
“아니 그건 아니고…”
“으음…”
“왕자님은 어디 계시죠?”
똑같은 질문이 이어졌다.
다들 아무 말도 못 하는 와중에 눈을 질끈 감고 그리델라가 총대를 멨다.
“그… 왕자님은 데이트…하러….”
“…하?”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바이스가 말끝을 올렸다.
살짝 얼굴을 찌푸린 그는 그리델라를 쳐다보며 물었다.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그러니까 데이트! 그 왜, 자주 봤던 성녀님이랑!”
뚝, 하는 소리가 들린 것만 같다고 다들 느꼈다.
착각이겠지, 잘못 들은 거겠지. 환청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차마 바이스의 얼굴을 못 보고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땅 아니면 하늘을 향했다.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딨습니까?”
“그게-”
“우리도 모른다. 복구하는데 도와주러 간 거겠지. 에밀이 전쟁 피해 때문에 난리도 아닌데 한가롭게 놀 데가 있을 리가 없잖아.”
글러티나가 빠르게 첨언했고 다들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트란 말을 꺼낸 건 그리델라였지만 그들은 다들 열심히 데이트는 아닐 거라고 그 말을 부정했다.
“둘이서 나간 거라 데이트라고 했는데 봉사활동 간 거겠죠.”
“맞아요. 성녀님이랑 왕자님이라니 분명 눈에 엄청 띌 텐데 데이트 일리가…”
“그, 저희가 따라갔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하아. 전 가보겠습니다.”
짧게 한숨을 쉬고 바이스는 가버렸다. 아무도 뒤돌아서 걸어가는 그를 막지 못했다.
바이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쩔쩔매면서 프라우디에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쩌죠?”
“바이스 씨 화난 건 아냐?”
“왜 화가 납니까?”
“왕자님이 데이트 갔잖아요!!”
“호위를 빼놓고 갔다고 생각하는 건가… 하긴, 위험하긴 하지.”
“그… 잔느, 그건 아닐 거예요…”
아마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한 게 아닐까?
그들도 카이엔을 찾으러 나가야 하는 건 아닐까 안절부절못하면서, 모두 한숨을 푹 쉬었다.
사제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서 카이엔이 혼자 설렁설렁 가버리는 걸 막지 못한 그들의 탓이 컸다.
한편 바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이 계속 빨라지고 있었다.
아무리 적이 없다고 해도, 호위도 없이 나가는 건 말도 안 된다!
카이엔은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걸 좀 더 자각하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봉사활동이라면 프라우디에 님이나 비셰 씨 정도라면 데려갈 수 있었을 텐데? 자기 몸 지킬 수단도 변변치 않은 사람이…!’
어느새 그는 충실한 시종으로 되돌아간 상태였다.
‘데이트? 정신이 나간 것도 아니고 무슨 생각으로 외국에서…’
천신도 계시를 내려서 인정한 존재이며 세상을 어지럽히던 사리반이 믿던 가짜 신, 다이잘을 물리치긴 했지만 모든 사제가 성왕처럼 카이엔을 인정하진 않았을 터.
그의 눈에 카이엔은 아직도 제 몸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최약체였다. 그런 카이엔이 혼자서 돌아다닌다고 하니 굉장히 걱정되었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그 역시 성국은 초행이었고 아무리 성황이 거주하는 궁이 다른 나라에 비하면 작은 편이라고 해도 지리를 속속 아는 건 아니었다.
이러다 엇갈리기라도 하면 낭패인데.
신경을 쓰려니 괜히 머리가 아파서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카이엔을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면서 찾아다녔다.
흔치 않은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을 가진 젊은 남자를 찾자 목격자들은 메르실라까지 언급하면서 방향을 알려주었다.
다행히 두 사람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멀리 가지 않은 건 다행인데 기분이 미묘해져서 바이스는 일단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카이엔과 메르실라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봉사활동을 하러 간 건 아니었고 이번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언제 끼어들어야 하나 차분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바이스는 속으로 숫자를 세고 벽 뒤에서 걸어 나왔다.
기척은 일부러 숨기지 않았다.
“왕자님.”
“어? 너 언제 나왔어?”
“나온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안 보이셔서 찾고 있었죠. 중요한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그때 있었던 일 때문에 신경 쓸게 많아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 좀 하고 있었어.”
“에밀의 분들만으로는 일손이 모자란 건가요?”
“아, 그건…”
메르실라가 조심스럽게 이야기에 참여했다.
겔로스와 아피스 지역은 완전히 황폐화가 되어서 정화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뿐더러 혹시나 있을지 모를 생존자를 찾기 위해 추적팀을 꾸릴 예정이라고 했다.
하나 거의 죽은 땅이라고 해도 무방에서 모든 나라가 암암리에 가지고 있었던 중립이라는 현 위치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투아의 경우엔 땅 욕심이 없다며 손사래를 치긴 했지만 그 마음이 언제 바뀔지도 몰랐다.
“가르간트야 국왕의 성격상 전쟁은 무리고 제국도 꽤 피해를 입었을 테니 괜찮을 거라고 봅니다만은. 게다가 지금은 성국분들이 망가진 땅에 신경을 써야 하니 에밀이 위험할 일은 없지 않나요?”
“그건 맞아요.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어서… 사리반으로 인해 반란 비슷한 것이 곳곳에서 일어났잖아요.”
“반란이라.”
“그걸 걱정하는 걸지도 몰라요. 카이엔 님은 그… 본인이 왕위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가르간트에서 견제를 할 테고요.”
“생각이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의심하는군요.”
답답하다며 카이엔은 실소를 흘렸다.
도대체 그런 작자들은 언제쯤 돼야 그를 신경 쓰지 않을지 굉장히 궁금했다.
쌍둥이 중 한 명이 왕세자 혹은 왕세녀로 책봉된 다음? 현 국왕이 죽어서 둘 중 한 명이 왕위를 이은 다음?
아마 끝이 없으리라.
“그, 카이엔 님이 괜찮으시다면 에밀로 오셔도 좋아요. 어차피 종교 국가고…”
“아뇨. 천신을 믿는 나라에서 아무리 적대하지 않는다고 해도 마신의 사제인 제가 있는 건 좋지 않죠. 괜히 분열의 씨앗을 심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제가 괜한 말을 했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걱정해주셔서 한 말인걸요.”
그렇게 대화를 정리하고 카이엔은 먼저 가보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바이스가 그를 찾으러 올 정도니 시간이 꽤 많이 지나서 다른 사람들도 걱정을 할 거라면서.
늘 곁에서 떼어놓지 않았던 호위를 죄다 물리고 온 카이엔인지라 메르실라도 이해했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바이스와 함께 별궁으로 돌아가는 길. 카이엔은 오랜만에 만난 바이스가 뚫어져라 그를 쳐다보자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렇게 봐?”
“제가 방해했습니까?”
“뭘?”
“데이트하러 가셨다고 하던데.”
“…넌 그 말 듣고 나 찾으러 온 거야?”
“그 이유도 있고, 혼자서 돌아다니는 왕자님 목숨이 걱정되기도 했고요.”
“으으음…”
“몸 사리세요. 생각지도 못한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면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빈말이라도 좋은 말로 하면 어디 덧나나.
왜 혼자 다니는 것 = 사망으로 여기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바이스는 가끔 사고가 이상한 데로 튀었는데 그 결말이 모조리 그의 사망 혹은 객사인지라 카이엔은 기분이 나빠졌다.
그의 무력이 형편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곳은 성국이었고 이곳 사람들은 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까지 의심할 필요는 없을 텐데도 바이스는 누구든지 끊임없이 경계하고 의심했다.
짧게 한숨을 쉬고 카이엔은 화제를 돌렸다.
“너야말로 몸은 좀 괜찮아?”
“애초에 몸보다는 정신 상태가 안 좋았어서… 뭐, 지금은 괜찮습니다.”
프라우디에가 카이엔에게 무슨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다행이라고 여기며 바이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카이엔도 그의 말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럼 다행이고.”
“왕자님.”
“왜?”
“정말 데이트하셨습니까?”
“아니라니까…”
집요하게 이어지는 질문에 카이엔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바이스도 그렇고 다른 녀석들도 그렇고 왜 그렇게 그의 혼사에 대해 관심이 많은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
떠나는 날, 에밀의 사람들이 바로 앞까지 나와서 그들을 배웅해주었고 그 일행의 맨 앞에는 성왕도 끼어있었다.
다음엔 좋은 일로 얼굴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인사를 뒤로하고 그들은 드래곤으로 변한 자네인의 등에 탔다.
마차로 가는 것보단 역시 이쪽이 빠르니 자네인이 좀 더 수고해주기로 한 것이다.
집이 걱정되니 최대한 빨리 날아가기로 택했다.
세자르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예전과 다를 게 없었다.
여전히 평화로운 그곳에 안도하며 그들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먼 길을 떠난 이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에 크게 환영해주었다.
그리고…
“카이엔 어서 와… 갑자기 이런 말 하긴 좀 그런데 나 좀 쉬어도 될까…?”
그간 영주 대리로서 일하느라 고생이 많았는지 얼굴이 반쪽이 된 에빌이 흐물거리면서 나타났다.
사리반이 곳곳에서 나타난지라 북부지역 영주들은 카이엔을 중심으로 뭉치길 원했는데 카이엔은 사리반의 본진을 치러 세자르를 떠났으니, 결정권은 모조리 에밀의 손에 쥐어진 상태였다.
일도 많이 했지만 마음고생도 심했을 터라 카이엔은 오랜 친구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가서 푹 쉬라고 말해주었다.
에빌이 가장 원하던 말인지라 그는 흐느적거리면서 제 방으로 돌아갔다.
“너희는 무슨 일 없었어?”
“세자르는 무사했습니다. 다만 다른 곳들은 골치가 아파서 지원하러 나갔습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엔베인이 보고했다.
에빌과 같이 가장 많은 일처리를 도맡았던 그가 에빌이 차마 못 해주고 간 말들을 정리해서 카이엔에게 전달했다.
남은 건 보고서를 보면 된다는 말에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시 지루한 책상 작업을 할 때였다.
한번 망할뻔한 세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고 남은 이들은 좀 더 단단해졌다.
프라우디에는 반쯤 시든 가지를 가져와서 카이엔에게 양해를 구하고 정원에 심었다.
“세계수의 가지랬지?”
“네.”
“다시 자라날까?”
“저도 잘 모르겠어요.”
“많이 커지면 옮겨심자.”
“그럼 검은 숲에 심어도 될까요?”
“그래. 다음에 땅 보러 갈까?”
“네!”
그러고 보니 나뭇가지는 일자로 쭉 뻗어있지 않았고 얇은 가지 중간에 짧은 가지가 하나 더 있긴 했다.
프라우디에가 그것을 똑 떼서 따로 챙겨놓은 모양이었다.
중심이 되었던 가지는 다이잘의 육신을 정화하기 위해 그곳에 두고 왔으니 남은 건 손가락 하나 정도의 길이의 가지뿐이었다.
“빨리 자랐으면 좋겠어요.”
“그러게.”
어느 정도 자라야 옮겨심을 수 있으니까.
세계수가 일반 나무보다 성장이 빠르다면 얼마 안 있어서 좀 더 넓은 땅을 필요로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