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상처도 치료하고 상황에 대해 이야기도 할 겸, 일행은 에밀로 향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성왕은 그들을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그들이 에밀에 오고 나서 이틀 뒤, 전장에 나섰던 이들에게도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맞서 싸우고 있던 괴물들이 사라지고 사리반이 와해했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다만 조종당했던 이들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뒤라서 중심에서 그들을 조종하던 이들이 죄다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난동을 피웠기에 어쩔 수 없이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도 적혀있었다.
그 보고가 도착하자 카이엔과 프라우디에는 다른 일행들은 쉬게 두고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는 회의에 참석했다.
다이잘을 물리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가 그들 두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바이스는, 정신적 안정을 위해 독방에 있고 싶다고 요청했다. 외진 곳에 콕 박혀있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는 말에 성왕은 지금은 쓰지 않는 탑을 내어주었다.
예전엔 사제들이 고행을 위해 쓰기도 하고 그 뒤엔 죄를 지은 이를 가둬두기도 했던 높은 탑이었는데 바이스는 딱 좋다면서 그나마 청소가 잘 된 방 하나를 받게 되었다.
카이엔의 시중을 드는 것마저 비셰에게 부탁한 그는 그대로 독방에 틀어박혔다.
밖으로 나오지 않고 식사마저도 방 밖에 두면 알아서 가지고 들어가겠다고 말을 남긴 그는 그 누구와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에밀에서 지낸 지 나흘째 되는 날 밤.
프라우디에는 바이스를 찾아갔다.
“…무슨 일이시죠? 혼자 있고 싶다고 했잖습니까.”
“걱정돼서 온 거예요.”
“왕자님조차도 절 보러 오지 않으실 정도로 제가 단단히 경고했었는데도요?”
“네.”
“…아무튼, 들어오시죠.”
바이스가 쓰는 독방에는 침대와 옷장, 작은 서랍과 탁자, 의자 하나가 있었다.
화장실이 포함되어있는 방 중에 제일 작고 외진 곳으로 부탁했기에 좁고 간소한 살림만 있었다.
죄수가 쓰던 방을 줄 수는 없었던 모양인지 간수용으로 마련된 8층의 작은 방을 쓰게 되었는데 간수용 방이라고 해도 창문은 굉장히 작았다.
방에 들어온 프라우디에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정갈하다.
방은 마치 새것 같았다.
물론 낡은 건물이라 군데군데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긴 했지만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깔끔했다.
바이스라면 이불도 칼 같이 정리해놓고 가구도 깨끗하게 쓰겠지만 도저히 사람이 쓰는 방처럼 보이지 않았다.
프라우디에는 잠시 방안을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저한테 직접 찾아와서 할 정도인가 보군요.”
“네.”
프라우디에는 똑바로 바이스를 쳐다보았다.
“당신, 정말로 바이스 씨가 맞나요?”
그 물음에 바이스는 피식 웃었다.
“갑자기 그런 걸 왜 물어보나요?”
“그야,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요.”
“전 걸려들지 않았습니다만. 오히려 놈을 찌르지 않았습니까.”
“알아요. 분명 치명상이었어요. …인간의 기준으로는요.”
프라우디에는 짧게 한숨을 흘렸다.
정말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거의 신에 준하는 존재예요. 그런 자의 육체가 그렇게 허약할 리가 없어요. 옮겨갔다면 모를까…”
“흠?”
“무려 천년이 넘었어요. 리치왕조차도 라이프 베슬이 온전했기에 그 시간 동안 버틸 수 있었지만 바깥과의 소통을 두절한 채 그저 봉인되어 잠들어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어요. 저희의 적은 신에 버금가지만 신이 아니었고요.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면 분명히 이 세계에 처음 들어왔을 때 거대한 재앙이나 천재지변을 불러왔을 거예요. 저는, 세계에 항상 일정한 양의 에너지가 보존되고 일정한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에 대한 걸 가장 잘 아는 건 리치왕, 루레이스 미오소티였고 그런 그녀의 기억을 모두 확인한 게 프라우디에였다.
그가 그런 의심을 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다만 제 추측이 틀렸기를 빌며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파괴의 힘이 강해질수록 재생할 수 있는 힘 또한 강해지고, 누군가가 세계를 멸망시키려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그것을 막을 존재가 등장한다, 라는 거예요. 그 힘들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저절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거고요. 저희는 세계를 삼킬 수도 있는 존재를 죽였지만 아무런 여파가 없어요. 심지어 제힘마저 사라지지 않았어요. 왕자님도 마찬가지예요. 여전히, 마신은 그를 주시하고 있는걸요.”
“리치왕이 봤던 광대와 저희가 봤던 다이잘은 그 존재의 형체가 달랐어요. 아라스크의 탈을 쓰고 있었던 존재가 다른 이로 위장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을 테죠. 저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요.”
“그는 정신체, 라고.”
“정신에 기생하여 몸을 빼앗으며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했다.
프라우디에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
“그런 그가 마지막으로 접촉한 게 바이스 씨예요. 정말, 바이스 씨는 제가 아는 그 바이스 씨가 맞는 건가요?”
“하하. 그런 걸 대놓고 말하기입니까. 제가 아니라고 하면 어쩌려고요?”
“…어차피 전 이제 가치가 없어요. 다이잘도 그걸 알고 있었을 거예요. 지금 세계가 주시하는 건 다른 인물이라는걸.”
“세계도 너무하네요. 자기들이 못 지켜놓고는 이제 와서 다른 사람에게 갈아타기입니까?”
“왕자님이 위험해요.”
“지금까지 잘 지켜왔으니까 앞으로도 잘 지킬 생각입니다만.”
“정말로요?”
“프라우디에 님. 확신을 못 하고 있군요.”
“바이스 씨가 정말로, 몸을 뺏긴 게 아니라면…”
“전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만. 지금은 좀… 제어를 못 할 것 같아서라고 해야 하나. 솔직히 바이올로스 후작가에 있었을 땐 거기가 제 세상이나 마찬가지니까 내키는 대로 행동했으니까요. 맘에 안 들면 죽이고 괴롭히고 없애버리고. 저에게 있어서 누군가의 생명이란 건 그렇게 존귀하고 무거운 것이 아니었어요. 전 인간이 아니라 짐승으로 태어났어야 맞았을지도 모릅니다. 그쪽 세계는 약육강식이라고 하잖아요.”
제 이야기를 하는 것임에도 마치 책을 읽는 것만 같은 담담한 어조에 프라우디에는 두 손을 꼭 쥐었다.
“왕자님은, 그런 제 본성을 어느 정도 억누르지 않는 이상은 옆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의도적으로 새로운 이름을 짓고 옆에 있기 좋을 만한 성격을 꾸며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생의 절반 이상을 ‘귀찮긴 하지만 능력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시종을 연기하며 살았군요. 나름 즐거웠습니다.”
“지금…은요?”
“네?”
“지금은, 어떤데요?”
“뭐, 저도 평생 본성을 감추고 살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언젠가는 이 이름을 버리고 「페르세이지 바이올로스」로 돌아가야 한단 것 정돈 알고 있습니다. 한평생 연기만 하다가 죽는 건 제가 생각해도 좀, 멍청이 같기도 하고.”
바이스는 프라우디에는 바라보았다. 평소에 짓던 표정이 아니었다.
좀 더 날카롭고 쌀쌀맞은 눈은, 보는 이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저 눈은 상대방을 자신과 같은 선상에 두고 있지 않았다. 좀 더 아래의 것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런 놈과 저를 동일시하다니 그건 좀 싫네요. 프라우디에 님도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겠지만요.”
“…본인인 척, 하는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음, 그럼 제가 죽으면 되는 걸까요?”
“네?”
“제가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말이죠, 심장이 있고 급소가 있는 인간이니 잘 찌르면 단번에 죽겠죠. 자살하면 그, 달팽인지 뭔지 하는 놈도 다른 곳으로 옮겨붙지 못할 거 아닙니까. 붙을 데가 없을 테니.”
“하, 하지만-”
“그럼 제 죽음은 뒤로 미뤄둘까요?”
리치왕도 그런 식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못 피했는데…
프라우디에는 애써 그 말을 삼켰다.
“그, 제가 예민했어요. 쉬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이만 가볼게요.”
“잠시만요.”
돌아가려는 프라우디에를 바이스가 불러세웠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만약에 정말 저한테 그놈이 붙은 게 확실하면 바로 말해주세요. 언제든지 목 긋고 죽겠습니다.”
“그,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자, 그럼 돌아가세요.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다들 걱정할 테니까요.”
웃으면서 프라우디에를 돌려보내고 바이스는 단단히 문을 잠갔다.
그 뒤엔 방안을 서성이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에 잠겼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 다들 속내를 감추고 살아간다. 남에게 절대 보일 수 없는 면 또한 가지고 있다.
그는 카이엔에게 무해한 척 접근하기 위해서 연기를 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라고 생각했다.
‘「페르세이지 바이올로스」였다면…’
노리던 대상이 무방비해졌으면 거리낄 것 없이 바로 다가가 해치웠겠지.
어차피 힘도 뺏기고 무력해진 상대 아닌가. 왕족이라고 해도 사방에서 암살자가 노리고 있었을 테니 남에게 뒤집어씌우기도 편했을 테고. 그랬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이전부터 그러했듯이 지루하게 살아갔겠지.
반면, 「바이스」로서 살아가는 지금은 어떤가.
귀찮은 일들도 많지만 꽤, 재밌지 않나.
‘그런데’
그런 내가 지금은 내가 아니라고 한다면?
무언가가 내 몸을 차지해 나인 척 연기를 하는 거라면?
용납 못 한다. 용서 못 해.
그때, 다이잘은 그를 충동질해서 아군을 베게 하려고 했다.
수작질에 넘어가진 않았지만 혹시 몰라 카이엔과 떨어져 있기를 택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카이엔이었으니까.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달려들 정도로 어리석진 않지만…’
게다가 죽이는 것보단 살려두고 옆에 있는데 더 낫다는 판단은 옛적에 끝내지 않았나.
슬슬 나가도 될 것 같다고 그는 판단했다.
세자르로 돌아가서 다시 일해야 하니까.
카이엔의 일이 어느 정도 끝났는지 확인한 다음에는 돌아가자. 집으로.
이제 다 끝났고 위험한 일 따윈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지키는 거다.
마왕이니 악마니 마신이니 그딴 거 다 필요 없다.
내가 먼저 발견했고 손에 넣으려고 했는데 중간에 끼어들어 수작을 부리기나 하고.
‘아.’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
고개를 젓곤 그는 침대에 누웠다. 프라우디에와 이야기하면서 괜한 상상을 하는 바람에 사고가 이상한 방향으로 치달아버렸다.
그 미친 후작가도 부모가 제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이려고 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는 식물조차 키워본적 없음에도 한 사람을 멀쩡히 잘 키워내지 않았던가. 이건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왕 놀라운 일을 벌인 김에 마지막까지 잘 키워내는게 좋지않나. 그렇게 믿었다.
***
그는 꿈을 잘 꾸지 않았다.
깊게 잠드는 일도 드물었다.
그러고 보니, 꿈을 꿀 정도로 깊게 잠들었던 적이 언제더라.
눈을 감은 채 그는 생각에 잠겼다.
아마, 그때일 것이다.
제 옷이 보라색 털들로 엉망이 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만티코어의 등을 베고 누운 어린 왕자의 곁에서.
칭얼거리는 그 아이를 깨우려다가 붙잡혀서 졸지에 같이 눕게 되었을 때.
낯선 이에게 등을 내주고 싶지 않아 으르렁거리는 짐승을 달래면서 아이는 곁에 누운 이를 끌어안았다.
온기란건 낯설었다.
손에 쥐었다고 생각했어도 이내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것이 사람의 체온이 아니던가.
연민을, 애정을 위장해 다가온 것들을 쳐내면서 어린 나이에 차가운 현실을 알게 된 그는 아무도 믿지 않으려고 했지만 눈앞의, 옆에 누운 아이만은 예외였다.
뺨에 닿은 손가락이 목으로 내려왔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많이 자랐지만 여전히 작은 아이였다.
그때처럼 환하게 웃지는 못했지만 이따금 제 곁의 몬스터들을 보며 옅게 웃던 아이다.
목에 닿은 손가락은 다시 뺨을 쓰다듬었다.
품에 안긴 아이가 너무 따뜻해서 그대로 눈을 감자 저절로 잠이 들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그는 「페르세이지 바이올로스」라는 이름을 완전히 버리기로 했다. 페르세이지로서 해왔던 일들은 이 작은 아이의 곁에서 할 수 없었다.
새로 지은 이름으로 자신을 지칭하면서 좀 더 가볍게 행동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가벼운 장난을 치며 어린 왕자가 그의 앞에서 경계심을 풀게 했다.
놀랍게도 그런 자신의 행동이 스스로도 마음에 들어서 꾸준히 유지했다.
가진 게 많고 물려받을 것도 많은 페르세이지에 비하면 가진 것도 몇 없고 지켜야 할 것은 오직 왕자뿐인 바이스가 좀 더 자유롭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살면서 남의 목줄만을 손에 쥐고 있었던 이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스스로 제 목에 목줄을 채워 그 손잡이를 다른 이에게 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