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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206화 (207/219)

-206화

다이잘이 바이스를 붙잡았을 때, 프라우디에는 어쩌면 이젠 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바이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저런 존재가 직접 힘을 쓴다면 그대로 휘둘릴 게 뻔하다고 여겼다.

하나 지금까지 함께 지냈고 은혜까지 입은 이를 그의 손으로 공격할 수는 없었다.

세계수의 가지를 다이잘이 아닌 바이스에게 사용해야 하나 그가 고민하고 있을 때, 바이스가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카이엔이 서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 손으로 왕자를 죽이고 싶었다고 말했던 이였다. 비록 어린 시절에 했던 생각이고 수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행에 옮기지 않은 그였지만 다이잘의 영향을 받은 지금 그 충동이 행해질 확률은 매우 높았다.

죽을 때까지 지키고 바라보고 싶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자면 그 죽음마저도 제 손으로 취하겠다는 의미가 되지 않을까. 바이스라면 그럴지도 몰랐다.

제 손으로 그 목숨을 거두지 않고 지금까지 돌봐왔으니 그 마지막마저 자신이 가져가겠다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이였지만 내면에 감추고 있는 폭력성만은 진실이었다.

그저 피를 보지 못해 지금까지 온순한 생활을 하고 있던 이였지만 카이엔이 모르는 곳에서는 거리낌 없이 적의 피를 사방에 뿌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손에 검을 들었다.

자신이 지켜왔던 이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웃었다.

그러나 그 검이 자신의 주인에게 닿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달려 나갈 것만 같았던 이는 검을 잡은 오른손 위에 왼손을 얹었다.

앞으로 휘두를 것만 같았던 팔이 방향을 꺾었고, 그대로 제 뒤에 있던 자를 찔렀다.

“뭣-”

카이엔을 향할 것처럼 보인 공격이 자신의 몸을 찌르자 다이잘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옆을 돌아본 바이스는 평소보다도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유효타였다.

비록 심장을 찌르진 못했지만 가슴에 박아넣은 검에서 손을 떼지 않고 바이스는 싸늘한 시선으로 제 옆에 서 있는 다이잘을 쳐다보았다.

“네놈…!”

“말로서 홀리려는 건 좋았지만 역시 상대를 잘못 고른 게 아닐까요? 저, 이중인격이라던가 그런 건 아닙니다만. 단순히 「페르세이지 바이올로스」와 「바이스 크라이머」라고 나눠놓은 건 그저 연기하기 편하라고 내세운 것임에 불과하다고요?”

칼같이 나눠놓으면 그렇게 행동하기 좋을 뿐이라며 그는 별 감흥 없이 말했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니 날카로운 그것은 더욱 깊숙이 살을 찌르며 바닥에 피를 흘렸다.

신인 척 위장하고 있음에도 피는 붉은색이라는 것에 바이스는 놀라야 하나 아주 잠깐 고민했다.

“흔들리지 않았다, 라고 한다면 거짓말이지만 흠… 별 감흥이 없네요.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서 살다 보면 가면 같은걸 쓰길 마련이고 제 경우엔 그 가면이 좀 더 세밀하고 두꺼웠다는 것뿐이니까.”

“방심해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쉽게 잡았네요.”

활짝 웃으며 바이스가 말했다.

그의 검은 다이잘의 몸을 관통해 검 끝이 바깥으로 삐죽 튀어나오기까지 했다.

하나 지금까지 그 모든 공격을 피하고 막아냈던 다이잘은 마비가 걸린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왕자님이 인간인 저를 걱정해서 여러 가지를 챙겨주신 덕분이죠. 오러를 이용해 주변을 감싸서 신성력이 가득 담긴 물건들이 힘을 못 쓰게 막아놨다가 한 번에 터뜨린 거라고 해야 하나.”

덕분에 그 신성력이 터지면서 다이잘의 몸을 꿰뚫었고 계속 스며들고 있을 것이라며 바이스는 즐겁게 제 추측을 이야기했다.

아무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 광경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바이스만이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프라우디에가 흠칫 몸을 떨었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죽일 방법이 있습니까?”

“네…?”

“생각보다 싱겁게 끝나긴 했지만 제가 붙잡고 있는 동안, 숨통을 끊으면 되지 않습니까? 오래는 못 붙잡습니다.”

그 말에 프라우디에는 마음을 굳힌 듯 다가왔다.

바이스는 프라우디에가 가까이 오기 직전에 품에서 꺼낸 단검을 다이잘의 어깨에 박아넣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힘주어 깊게 찌른 단검은 한 뼘 정도의 칼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파고든 다음에야 멈추었다.

“축성 받은 무기입니다. 의식에 사용하는 향유도 발랐고요.”

“큭… 네깟것들이 감히…!”

“끝을 낼 시간입니다.”

프라우디에는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꼭 쥐고 다가갔다.

그의 마력에 반응해 얇은 가지는 웅웅 진동했고 그 거센 떨림에 프라우디에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왕자님.”

“응?”

“신성력으로, 결계를 만들어주실 수 있으세요?”

“어… 해볼게.”

카이엔은 조심스럽게 팔을 들어 올렸다.

조금 전, 사악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상자를 깨부수느라 신성력이 소모되긴 했고 이곳에서는 힘이 느리게 회복되긴 했지만 부탁한 결계 정도는 칠 수 있었다.

어차피 다이잘이 사라진다면 이곳을 가득 채운 기운 또한 사라질 테니 그는 서서히 신성력을 움직였다.

다이잘과 그를 제압하고 있는 바이스, 그리고 프라우디에가 서 있는 범위를 결계로 감싸자 반투명한 막이 생겼고 프라우디에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세계수의 가지를 손에 쥔 채 프라우디에는 무어라 주문을 읊었다.

“…이 세계는, 침입자를 거부합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리치왕은. 영생을 얻을 수 있음에도 죽음을 택한 루레이스 미오소티는 천년이 지난 뒤에야 자신을 노리고 위협하며 달려들었던 자의 정체를 알게 되었고 그 뜻을 이은 최초의 인격이 제힘을 되찾아 이 땅에 드리운 사악에게 심판을 행했다.

그가 들어 올린 가지가 흔들리며 성장했다. 얇은 나뭇가지가 프라우디에의 마력을 먹고 성장해 어느새 창처럼 길어졌다.

“세계의 근원으로서 직접, 추방령을 내립니다.”

프라우디에는 대리인으로서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

세계수의 창이 붙잡힌 다이잘의 심장을 찔렀다. 신성력으로 억압받는 몸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심장부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귀를 찢어버릴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 아아아아아악!!

- 빌어먹을 나무! 처음부터 찾아가 그것부터 없애버렸어야 했는데!

- 그토록 긴 시간 동안 내버려 뒀다가 이제 와서? 그때, 그 동굴에서, 너를 처음 본 순간! 그때! 그때 삼켜버렸어야 했는데-!!

그 목소리는 머리를 뒤흔들었다.

다이잘은 한 명이었지만 비명은 여러 명이 입을 모아 내지르는 것만 같았다.

사방이 흔들리는 충격에 다들 귀를 막았지만 귀를 막는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런 이들을 지키기 위해 카이엔은 세 사람을 가두어놨던 결계 위에 더욱 큰 결계를 만들어 씌웠다.

퉁. 퉁.

무언가가 결계를 두드리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 버림받은 주신의 사자! 네놈이 이딴 세계를 지킬 의리 따윈 없을 텐데…!!

퉁! 퉁!

저항이 심해졌다. 마치 강풍과도 같이 몰아치는 비명에 카이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시야가 새까맣게 물들었다. 다이잘이라는 물풍선을 터뜨리니 그 안에 담겨있던 먹물이 사방으로 튀어 모든 것을 검게 뒤덮은 것만 같았다.

다이잘이라는 존재가 조각나며 그 조각 하나하나가 세계를 향한 저주를 토해냈다.

이것이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이 작은 조각만으로도 세상은 쉽게 병들 수 있다.

그는 더욱 신성력을 끌어모았고 있는 힘껏 결계를 유지했다. 그때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이 웅웅 울어댔다.

사탄이 빌려줬던 검의 울음에 카이엔은 조심스럽게 검을 꺼내 들었다.

언뜻 검날에 누군가의 얼굴이 비친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어-!”

검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따라 카이엔은 걸음을 움직였다.

어느새 사방이 검게 물들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신성력으로 방어하고 있긴 하지만 다들 괜찮은 걸까?

그런 의문이 든 찰나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이쪽. 완전히 끝을 내야지.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였다.

몇 번이고 꿈속에서 들었던 이의 목소리에 카이엔은 그가 시키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까만 공간은 사방이 똑같이 생겨서 그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 어둠의 한 곳을 가리키며 목소리가, 마신이 말했다.

-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계속 이런 걸 이 세계에 둘 수는 없었으니까…

- 힘을 보태줄게요.

뒤이어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이엔이 질문을 하기 전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외쳤다.

- 지금!

그 목소리에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평소보다도 묵직한 검을 아래를 향해 찔러넣자 웅웅거리던 바람 소리가 멈추었다.

먹물을 뿌려놓은 것처럼 새까맸던 시야가 순식간에 밝아지고 어둠이 물러가며 그들을 원래 있던 장소로 돌려보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니 쓰러진 이들이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머리를 붙잡고 있는 이들을 보며 카이엔은 급하게 달려 나가려고 하다가, 발에 채이는 무언가를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동굴 바닥에 깊숙이 파고든 검의 옆에, 두 동강 난 무언가가 있었다.

무슨 용도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원통형의 물체에는 양각으로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카이엔은 고개를 들어서 바이스와 프라우디에 있는 쪽을 살폈다.

다이잘의 몸은 힘없이 고꾸라진 채 허물어지고 있었다.

“이제 다 끝난 겁니까?”

“…네. 아마도, 이걸로.”

“맥없이 끝났군요. 그럼 바깥도 정리가 되었으려나.”

혹시 아까 전 검은 공간은 그 혼자만 봤던 걸까?

물어볼 사람이 없으니 난감해하면서도 카이엔은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프라우디에!”

“왕자님! 어, 이쪽으론 오지 마세요! 죽은 것 같긴 한데 불안해서…”

“그럼 저희가 가면 되겠군요.”

바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프라우디에의 손을 잡고 카이엔에게 걸어갔다.

조금전까지 봤던 소름 끼치는 눈빛이 떠올라 카이엔이 살짝 뒤로 물러나자 그는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제가 이제 와서 눈 뒤집고 덤벼들 것 같나요?”

“아니 그게…”

“다 끝난 것 같으니 돌아갑시다.”

“어디로?”

“자네인 님이 뚫고 나온 곳으로 올라가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길이 없으면 부수면서 가면 되고요.”

“그럴 힘은 있고?”

“하다 보면 되겠죠.”

제 일임에도 마치 남 일을 말하는 것만 같은 태도에 카이엔은 피식 웃었다.

몸을 추스른 이들은 한곳에 모였다. 드래곤 화를 풀지 않고 있던 자네인의 등에 타서 천장에 뚫린 구멍을 통해 동굴에서 빠져나왔다.

미궁을 나오는 건 굉장히 힘들었지만 바이스의 말대로, 더이상 거리낄 것이 없으니 다 부수고 밖으로 나왔다.

신전의 지배자였던 다이잘이 소멸하자 괴물 또한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 그가 긴 시간 자리 잡고 있었던 탓에 이 땅은 정화를 해야만 했다.

정화하지 않으면, 그와 비슷한 것들이 스멀스멀 기어들어 와서 또 다른 거악을 형성할 것이라고 여겼기에 카이엔은 신전의 앞에 사탄이 줬던 검을 꽂아 넣었다.

“그 검, 빌려준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필요하면 찾으러 오겠지. 돌려달라고 하거나. 그런데, 이 정돈 해두고 가야지 안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프라우디에는 입을 우물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이 장소를 그대로 두고 가기엔 마음에 걸린 탓이리라.

다들 상처를 입긴 했지만 죽지 않았다. 그러나 카이엔은 그 상처를 치료해주면서 속이 울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신전 바깥.

거센 폭풍이 막아서고 있던 곳에는 이제 바람의 벽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사방에 죽어있는 괴물들만 눈에 띄었다.

주인이 죽었으니 생을 마감한 것이다.

사리반과 맞서고 있던 에밀 또한 이 변화를 눈치챘을 것이다. 바로 합류하기로 하고 자네인은 비행 속도를 높였다.

“에밀로 가실 겁니까?”

“그래야지. 저 광범위한 곳의 정화는 나 혼자서는 무리니까.”

“그쪽에게 맡겨야겠군요.”

“응. 떠넘기는 것 같아서 미안하긴 하지만.”

아마, 이번 일로 대륙의 지도가 크게 바뀔 것이다.

에밀은 성국이라는 이름답게 땅 욕심이 없겠지만 두 나라가 거의 망해버렸으니 가까이 붙어있는 에밀이 책임지고 관리할 수밖에.

혹시라도 살아있는 이가 있다면 이젠, 망가진 나라를 대신해 새로운 국가가 탄생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먼 훗날에나 벌어질 일이라고 카이엔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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