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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205화 (206/219)

-205화

눈을 떴을 때.

그는 커다란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익숙한 광경. 익숙한 어둠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아.

이건 꿈이구나.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저 소리는, 사트로누스의 비명이었다.

자식을 잃은 변종 만티코어가 내지르는 절규와 울음이었다.

카이엔은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다.

눈높이가 낮았다. 정말 진짜 같은 꿈이었다.

그는 방 밖으로 나왔다. 어두컴컴하지만 무섭지 않았다.

방에서 빠져나와 복도를 걸어갔다. 아직 사트로누스가 건물 안에 도달하진 않은 건지 시체는 없었다.

긴 복도를 걷고 계단을 내려간 그는 궁 밖으로 나왔다.

싸늘한 바람이 전신을 스치고 지나갔다. 얇은 잠옷 탓에 꿈이란 걸 알면서도 괜히 추워서 몸을 떨었다.

밖에는 그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괴물이 있었다.

상처투성이의 괴물이 잔뜩 구름이 껴서 달빛조차 내려오지 않는 땅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낮은 울부짖음이 들렸다. 그 상처를, 아픔을 아는 이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사트로누스.”

카이엔은 조용히 괴물의 이름을 불렀다.

내 소중한 첫 친구이자 가족.

누가 그에게 이런 꿈을 보여주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다이잘이라고 했던가?”

“눈치가 빠르네.”

“대충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그 순간 배경이 빠르게 바뀌었다.

만티코어의 모습이 사라지고 등 뒤에 있던 궁전이 사라졌다. 그의 몸 또한 바뀌었다.

아무것도 없는 새까만 공간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사방을 알 수 없는,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곳.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는 카이엔의 모습에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은 무서워하면 어디 덧나나?”

“아무래도 내가 쪼개버린 게 심장이 아니라 머리통이었나? 미친 소리를 하는 걸 봐선…”

“농담할 여유도 있고.”

그의 눈앞에 바로 다이잘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나 카이엔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나보고 뭘 어쩌란 건지…”

“아, 역시 읽을 수 없네. 천 년 동안 여기 묶이면서 내가 힘을 잃은 건가?”

“허?”

“네 운명이 바뀐 그 날. 그때를 기점으로 해서 넌 다른 인간들과 많이 달라져 버린 거야. 네 운명을, 미래를 읽을 수 없는 특성이 네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테고.”

다이잘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다시 배경이 바뀌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두컴컴했던 공간이 마치 밤하늘처럼 바뀌었다.

별 무리의 중심에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의, 난생처음 보는 공간이었다.

살짝 놀라긴 했지만 카이엔은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내가 널 반으로 쪼갰는데도 멀쩡한 걸 보니 함정이었나?”

“아니. 확실히 타격을 입긴 했지. 재미는 없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카이엔을 바라보았다.

천 년 전, 그는 리치왕을 놓친 이후로도 이 세계를 떠나지 않고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를 발견하고 미치고 정신을 놓아버린 것들을 거느리면서 소일거리를 하고 놀았다.

신들은 그런 그를 내버려 뒀다.

그런 주제에 이제 와서 그를 친다는 것도 조금 웃기는 노릇이었다.

‘뭐, 이번엔 좀 일을 크게 벌이긴 했지. 그래서인가?’

그의 존재는 이미 이 세계에 깊이 뿌리를 박았다.

겨우 매개체 하나 부쉈다고 그는 사라지지 않는다.

신에 대적하는 존재.

신을 잡아먹는 존재.

세계를 삼키고 힘을 빼앗는 자.

그와 같은 것들은 상당히 많았고 지금도 곳곳의 세계를 떠돌아다니면서 제 배를 채우고 있을 것이다.

존재하며 뿌리를 내려, 이미 많은 에너지를 흡수했다.

목숨줄을 부지할 수 있게 되니 배를 채우는 것 말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놀이를 즐기게 되었다.

신은 그저 세계를 살피기만 할 뿐 직접적인 개입을 하지 않았기에 그는 제 마음껏 땅 위의 것들을 휘둘렀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날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그를 없애려고 든다고?

아라스크를 이용해서 일을 저지르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고 미치광이들이 전쟁을 일으킨 것도 처음이 아닌데.

이미 깨져버린 리치왕 따위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다.

이번 시대에 그들이 선택한 건 바로 눈앞의 인간이었다.

하나의 인연으로 운명에서 벗어난 그 존재는 법칙을 깨는 자로도 부를 수 있기에, 그런 특성 때문에 위쪽에서도 지키려고 하는 걸지도 몰랐다.

마신의 사제, 따위의 직함을 내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운명에서 벗어난 인간은 제 손으로 신을 죽일 수도 있을 것이란 걸 아는 걸까?

말없이 바라보는 시선에 카이엔은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다이잘은 아까부터 계속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기분 나빠서 인상을 구기고 있으니 다이잘이 그에게서 시선을 뗐다.

“더 붙잡고 있기는 어려울 것 같네. 그럼 이만.”

그 말을 끝으로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배경이 산산이 부서졌다.

유리창이 깨지는 것처럼 조각나는 시야에 카이엔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발이 바닥에 닿는 느낌이 들면서 몸이 비틀거렸고 그런 그를 비셰가 부축했다.

“왕자님! 괜찮으세요?”

“으응… 대체 뭐가 일어난 건지.”

“까만 게 왕자님을 휘감았다가 사라졌어요.”

“시간은?”

“많이 지나진 않았어요.”

“얼른 돌아가자.”

놈에게 타격이 없는 것 같았지만.

카이엔은 불안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일단 신전에 들어온 목적은 달성했으므로 두 사람은 급히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나갈 때도 그들을 붙잡는 건 없었다.

겨우 신전 밖으로 나왔을 때, 그들은 아직도 다이잘에게 맞서서 싸우고 있던 일행을 볼 수 있었다. 다행히 쓰러지진 않았지만 많이 지쳐 보였다.

고작 한 명을 상대하고 있을 뿐인데도, 꽤 많은 상처가 눈에 띄었다.

“왔네?”

가장 먼저 그들을 발견한 다이잘이 고개를 살짝 젖히면서 미소를 지었다.

아까 얼굴을 보면서 대화도 했으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거냐.

카이엔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다만, 다이잘이 그를 쳐다보자 바이스가 몸을 추스르고 다이잘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마치 그 시선에 카이엔이 있다는 것을 못 견디겠다는 듯, 덤벼들었다.

몸을 숙이고 빈틈을 파고들어 내지른 검이 다이잘의 코끝을 스쳤다.

다시 거두어서 횡으로 그은 검은 아슬아슬하게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는, 나지 않았다.

겉의 피부만이 아주 조금 베였지만 그것뿐이었다.

아무리 막고 피해도 결국엔 그의 몸에 조금의 흠집을 내버린 이를 보며 다이잘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네가 제일 방해가 돼.”

뒤이어 쏟아지는 칼날을 가볍게 피하면서 다이잘은 바이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무것도 손에 쥐지 않은 맨손일 뿐이었지만 채찍처럼 휘둘러진 팔이 바이스의 목을 붙잡아 그대로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저항하려는 팔다리는 잘 움직이지 않았다.

녀석에겐 보이지 않는 손 같은 것이 있어서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보여도 공격이 튕겨 나가곤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맘먹고 힘으로 짓누르고 있으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큭…”

“어디서 이런 게 튀어나온 거지? 내가 천년도 넘게 이 세계에 거주하면서 이상한 놈들을 꽤 많이 봐왔지만, 그중에서도 상위권에 들어갈 정도야.”

바이스의 목을 붙잡아 누르고 있는 상태로 다이잘은 제 몸을 숙였다.

처음 보는 생물을 찬찬히 관찰하는 듯 집요한 시선과 마주치자 구역감이 치밀었지만 바이스는 그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노려보았다.

그들 중에서 가장 강한 이가 제압당했다. 게다가 다이잘이 바이스와 너무 가깝게 붙어있어서 프라우디에조차 쉽게 손을 쓸 수 없었다.

바이스를 관찰하던 시선을 떼고 다이잘은 카이엔을 힐끗 보았다.

“보통, 이런 놈들은 나중에 거하게 일을 저지르던데. 안전장치가 있어서 못한 모양이네.”

“…당장 떨어져.”

“흠.”

카이엔의 말을 무시하고 다이잘은 다시 제 발아래에 있는 바이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꽤 강한 힘으로 눌러서 제압하고 있는데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건지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꿈틀거리고 있는 모습이 꽤 신기했다.

평범한 이는 그와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그대로 그 보잘것없는 이성이 조각나 스스로 제 목을 조르거나 숨 쉬는 걸 멈추고, 더이상 영혼이 파괴되는걸 막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

그런데 이 녀석은 단순히 옛정만으로 마신의 사제이자 운명이 뒤틀린 이의 옆에 붙어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저항하는 걸 포기하지도 않았다.

다이잘은 바이스의 목을 붙잡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작은 저항이 있었지만 그에겐 아무 소용 없었다.

끈 떨어진 인형 마냥 늘어진 몸을, 무릎을 꿇고 앉게 한 뒤 그는 비어있던 다른 손으로 바이스의 눈을 덮어 가렸다. 목을 붙잡았던 손으로는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손목을 움켜쥐었다.

“떠올려보렴. 네가 가장 순수하게 감정만으로 움직였을 때를.”

“무슨…!”

가장 먼저 이상을 눈치챈 건 프라우디에였다.

들고 있던 세계수의 가지에서 마력이 확 피어오르면서 다이잘을 향해 휘두르자 매서운 칼날이 다이잘을 향해 쏘아졌다. 그러나 그 칼날들은 다이잘에게 닿기도 전에 산산조각나 부서졌다.

지금까지 다이잘은 별다른 재주를 부리지 않고 제 몸만으로 이들을 상대했다.

그런 그 자가, 인간의 이성을 좀먹는 이가 바이스를 붙잡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속삭였다.

바이스가 그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게 보였지만 너무 가까이 붙어있어서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자네인이 브레스를 쏠 수도 없었고 비셰의 정신계 마법은 사용하는 즉시 튕겨 나갔다.

프라우디에는 다이잘을 노리고 마법을 연사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를 바이스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넓게 실드가 둘려있는 건지, 아까 마력으로 만든 칼날들을 난사했을 때보다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채 마법은 파훼됐다.

마력이 터져나가면서 번쩍이는 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어둑어둑한 동굴에서, 불길한 야광을 뿜어내던 수정의 빛을 가릴 정도의 섬광이 튀었다.

그러나 그 어떤 공격을 쏟아부어도 그것은 다이잘에게 닿지 못했다. 글러티나가 마법 공격을 피하면서 가까이 다가가 검을 휘두르려고 했지만 얼마 가지도 못해서 실드에 막혔고 그것은 그녀의 검 역시 튕겨냈다.

실드 안은, 밖의 소란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고요했다.

무릎 꿇고 고개 숙인 이의 눈을 가리고 가까이 붙어서 속삭이는 모습은 아무것도 모르는 이의 눈에는 신이 죄인의 죄를 사하는 것처럼 신성해 보였다.

주변에서 튀는 마력이 그 모습을 더더욱 비현실적으로 느끼게 했다.

눈을 가린 손이 떼어졌다.

고개 숙인 바이스에게 다이잘은 마지막 한 마디를 새겼다.

“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면 되는 거야. 나는 억압받는 자를 풀어주고 고난에서 해방하며 소원을 이루어주는 신이니까.”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마치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귓가에서 속삭이는 암시였다.

다이잘이 그대로 두어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붙잡는 것이 없어지자 바이스는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움직이자 실드 바깥의 이들은 공격하는 걸 멈추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가 삐걱대며 몸을 움직였다. 고개를 돌려서 카이엔을 바라보았다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닫고, 그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잠깐이지만 그 시선이 교차했을 때 카이엔은 오싹해졌다.

둘이서 같이 함정에 떨어졌을 때, 바이스는 계속 말했다.

자신이 방해가 되면 얼마든지 버리고 가라고.

본래 페르세이지 바이올로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그 이름을 감추고 ‘바이스 크라이머’로서 그의 곁에 있게 된 녀석은 속내를 제대로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다.

보여줬다고 해도 그게 진짠지 가짠지 구분할 수 없었다.

자신이 양인 척 위장하고 있다는 말에도 카이엔은 지금까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네가 양이면 다른 사람들은 양보다도 덜 위협적인, 오히려 양에게 뜯어먹히는 식물 급 아니냐고 대꾸한 적도 있었다.

그가 도대체 무엇을 걱정하고 있었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이 바로 바이스가 경계했던 상황이 아닌가.

“너…”

믿고 싶지 않았다.

저절로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나왔다.

이제 와서 적의 술수에 놀아나게 되는 건가?

이대로 바이스의 손에 전멸?

신 급이다. 신과 맞먹으려고 하는 존재의 힘이다. 고작 흑마법사나 몽마의 정신 조작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할 게 뻔하다.

그런 조종을 신성력으로 풀 수 있는 건가?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완전히 고개를 든 바이스는 카이엔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벙긋거리던 입술이 열리며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왕자님.”

“전 당신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당신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이게 제 대답이 될 수도 있겠죠.”

평소처럼 웃으면서 그가 말했다.

검을 잡고 있던 손이 서서히 움직였다. 그 검 끝이 향하는 방향은, 너무나도 당연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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