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왔구나.”
붉게 칠해진 입에서는 놀랍게도 사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이 지금 어떤 형상을 하고 있는지 그제야 눈치를 챈 건지 그것의 모습이 다시 본래의, ‘신’을 위장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변화는 잠깐이었지만 카이엔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둘뿐인가보네.”
“그런가 봅니다.”
다들 무사하다면 좋을 텐데. 카이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앞에 선 이는 처음 보는 자였지만 그가 누군지는 명확했다.
“광대, 라고 하기엔 좀 다른 모습을 하고 있군. 리치왕 시절과는 달라.”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 내가 그 모습 그대로겠어?”
놀랍게도 그것은 조금 투덜거렸다.
마치 사람처럼.
사람이 아닌 것이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소름 끼쳤지만 그 행동은 위화감은 들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감이 좋은 이들은 꺼림칙함을 느꼈겠지만 그것마저도 신과 대면해서 느끼는 위압감이라도 여기지 않았을까?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며 광대가, 그리모어가 입을 열었다.
“사리반 녀석들이 하는 말 못 들었어? 그들은 나를 신이라 칭하며 다이잘이라고 부르기도 했지. 그쪽이 낫게 들린다.”
“이름 따윈 상관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여기서 죽을 테고 그 이름이 다시 불리는 일 따위는 없을 겁니다.”
바이스가 카이엔의 앞을 막아섰다.
한가롭게 잡담할 시간도 없고 동료를 기다릴 시간도 없다는 태도였지만 먼저 공격하지는 않고 경계만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광대는, 그리모어는, 이제는 다이잘이라 불리는 그는 웃었다.
“뭐가 그렇게 두려워서 앞을 막아서는 거지? 난 네 주인을 해치고 싶은 마음이 없다만.”
“그야말로 헛소리군요. 왕자님은 제가 키웠는데, 어렸을 적부터 나쁜 친구와 어울리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부디 왕자님 눈앞에서는 물론이고 이 세상에서 꺼져주십시오.”
그와 동시에 바이스가 다이잘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이잘은 내려놓고 있던 팔을 흔들거리는가 싶더니만 단숨에 앞으로 나아갔고 그가 할퀴려고 내지른 손톱을, 바이스는 검을 들어서 막았다.
금속이 갈리는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울렸다.
한 뼘 정도 되는 거리를 두고 가까워진 얼굴을 바라보며 다이잘이 입을 열었다.
“역시, 네가 제일 방해가 될 줄 알았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바이스를 몰아붙였고 바이스는 그에 맞섰다.
다이잘은 무기조차 들지 않았지만 그의 신체와 검이 부딪칠 때마다 찢어질 듯한 금속음과 함께 충격이 가해졌다.
그마저도, 상대를 가지고 노는 듯한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바이스는 이를 악물고 버티면서 반격할 틈이 보일 때마다 검을 찔러넣었지만 다이잘은 쉽게 제 살을 내어주지 않았다.
마법을 쓸 수 있음에도 그는 육탄전으로 바이스를 상대했고 그 광경을 몇 걸음 떨어져서 지켜봐야 하는 카이엔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도망칠 수는 없다. 그도 싸워야 하지만 여기서 끼어들었다간 바이스의 방해밖에 되지 않는다.
조용했던 동굴 안이 두 사람이 맞붙는 소리로 인해 소음으로 가득 찼다.
축복 대신 저주를 내리는 신전은 더욱 불길한 기운을 흘렸고 카이엔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슬금슬금 기어 나와 그를 붙잡았다.
그대로 그것이 그의 숨통을 틀어막게 둘 수 없었다. 카이엔이 저항하고 있을 때였다.
쿵!
쿠구구구-
갑자기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바이스와 다이잘의 싸움의 여파 때문에 무너진 게 아니었다. 저 위에서, 누군가가 힘으로 부순 것이었다.
떨어지는 돌덩이를 피하기 위해 바이스는 뒤로 물러나 카이엔의 옆까지 다가왔다.
커다란 구멍이 뚫린 천장을 통해 나온 건, 거대한 금빛 드래곤과 작은 인영이었다.
그리고 무너진 건 천장뿐만이 아니었다. 동굴의 한쪽 벽 또한 무너져 내리면서 그 안에서 잔뜩 먼지를 뒤집어쓴 글러티나와 그리델라가 튀어나왔다. 뒤에서 비틀거리면서 비셰도 나타났다.
무너진 천장에서 뛰어내린 프라우디에는 그 혼란 속에서 다이잘을 향해 가지고있던 지팡이를 휘둘렀다.
팔을 들어서 그 공격을 막으며 다이잘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아, 다 모였네?”
“너희 괜찮은 거야?!”
“왕자님이야말로 괜찮으세요?”
바닥이 무너져서 갈라졌던 이들이 한자리에 보였다.
다이잘이 뒤로 물러난 것에 바이스는 한숨을 돌렸다. 하나 다이잘은 상대해야 할 적이 늘어났음에도 웃고 있었다.
“함정을 꽤 파놨었는데.”
“통하지 않았어요.”
“쬐끔 위험하긴 했는데 우리 쪽에도 정신 조작에 능한 사람이 있단 말씀!”
그리델라가 허리에 척하고 팔을 올리더니 대꾸했다.
두 명, 세 명으로 갈라진 모양인데 세 사람이 있던 쪽은 비셰가 잘 처리했던 모양이다.
몸에 묻은 먼지를 털며 비셰도 한마디 했다.
“괴물들이 쏟아져나올 땐 좀 아찔했지만요.”
“미안하다. 성수를 다 써버렸어.”
“괜찮아. 몇 병 더 있어.”
“이제야 좀 더 재밌어질 것 같네.”
다이잘은 웃는 낯을 거두지 않았다.
반면 프라우디에는 어두운 얼굴로 카이엔의 옆으로 다가갔고 나머지는 전투태세를 취했다.
자네인은 방패라도 될 생각인지 드래곤 화를 풀지 않은 채로 그 두 사람 앞에 섰다.
“글러티나 님, 제게 맞춰주실 수 있나요?”
“힘들 것 같지만 노력할게.”
그리델라와 비셰는 마법으로 보조하기 위해 각자 위치를 정해서 섰다.
전투의 재시작을 알린 건 자네인이었다.
커다란 드래곤의 입이 벌어지면서 불꽃 같은 브레스가 정면의 다이잘을 향해 쏘아졌다.
싸우는 도중에 썼다간 바이스와 글러티나까지 휘말릴 가능성이 있기에 처음부터 쏴버린 것이었는데 다이잘은 광범위하게 쏘아진 브레스에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 뒤를 이어서 바이스와 글러티나가 양쪽에서 검을 들고 다이잘을 공격했다.
프라우디에도 중간중간 끼어들면서 공격을 했다. 주로 마법이었다.
변화무쌍하게 이어지는 바이스의 검로에 맞춰서 글러티나는 치고 빠지는 식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두 사람이 덤벼들어도 그의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릴 수 없었다.
프라우디에는 다이잘의 중심을 노리기보단 발밑을 노렸지만 그 노력도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했다.
그런 일행의 싸움을 보며 카이엔은 조용히 신성력을 모았다. 다이잘이 조금이라도 멈춘다면 쓸, 큰 공격 한 방을 노리고 신성력을 압축하고 있었는데 그의 머릿속으로 텔레파시 같은 게 들렸다. 프라우디에의 목소리였다.
- 왕자님. 들리세요?
“어?”
- 쉬잇. 소리 내지는 마시고요. 몰래 빙 돌아서 신전 쪽으로 가세요.
“거긴 왜…”
- 비셰 씨가 탐색하고 있어요. 분명히, 저자가 현신하기 위해 매개체로 삼은 것이 있을 거예요. 저 몸을 죽여봤자 완전히 멸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에요. 그러니까 안쪽을 좀 더 살펴봐야 해요.
옆에 있던 프라우디에가 살짝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눈이 마주치자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이 다이잘의 시선을 끌고 있는 지금 기회였다.
비슷한 말을 자네인에게도 전달한 건지 그녀가 다시 브레스를 뿜어 다이잘의 시야을 가렸고 카이엔은 그와 동시에 앞으로 달려갔다.
목적지는, 신전이었다.
가만히 그리델라가 시전하고 있던 것이 은신 마법이었던 건지 아무도 그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신전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음산하고 괴이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카이엔은 신성력으로 몸을 보호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 비셰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녀는 입구에서 얼마 못 나아간 위치에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비셰의 손을 잡고 신성력을 쓰며 그가 말했다.
“괜찮아?”
“가, 감사합니다…”
“찾은 거라도 있어?”
“아뇨, 아직요. 적의… 그러니까 신전의 주인인 저 존재가 환상과 현혹에 능해서 그걸 꿰뚫어 볼 수 있는 제가 조사를 하게 된 거지만 수확은 없어요. 함정은 잘 피해 가고 있지만요.”
“함정이 있었어?”
“다 제거하면서 가는 길이었어요. 왕자님이 오실 걸 알았으니까요.”
신성력이 방패가 되니 좀 더 낫다며 비셰는 똑바로 섰다.
“왕자님도 눈에 신성력을 집중해보세요. 저보다 나으실 거예요.”
“윽.”
비셰의 말대로 한 카이엔이었지만 신성력으로 시력을 강화하자 신전의 모습이 아까와 다르게 보였다.
훨씬 끔찍해진 모습에 질색하면서도 카이엔은 신성력을 거두지 않았다.
밖에서 다른 사람들이 잘 싸우고 있을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심장부를 쳐부술 수 있다면 도움이 될 테니 프라우디에가 그들 두 사람을 안으로 보냈을 터.
카이엔은 비셰와 함께 신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신성력으로 그들을 억누르려는 기운을 상쇄해나가면서 어렵게 한 걸음 한 걸음 뗄 수 있었다.
신전의 안에는 무수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굴러다니는 새하얀 뼈다귀들이 산처럼 쌓여있기도 했고 벽에는 수많은 빗금이 새겨져 있었다.
밋밋한 벽은 누군가가 손톱으로 새겨놓은 듯한 수백 수천 수만개의 빗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에는 정갈했던 것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거친 표식으로 남아있었다.
카이엔은 이것이 다이잘이 이 세계에서 보낸 시간을 표시해놓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발밑에서 밟히는 뼈는 쉽게 부서져서 가루가 되어 신발 밑창에 달라붙었다.
마치 먼지처럼 뼛가루들이 바닥에 깔려있었고 텁텁한 공기가 목 안에 달라붙었다.
일렁이는 푸른 불꽃이 시야를 혼란스럽게 했다. 신성력으로 만든 구체를 띄워서 그 빛을 몰아내며 카이엔은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비셰는 그의 옆에 꼭 달라붙어 있었다.
악마에게도 다이잘의 기운은 불길하고 끔찍한 모양이었다.
신전의 내부는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넓고 광대했다.
한참을 걸어도 함정만 나올 뿐 뭐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몇 개의 뼈 무덤과 핏자국을 지난 뒤에야 그들의 앞에 그럴듯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문 너머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문 앞에 바짝 붙어 귀를 대보는 비셰였지만 머리카락이며 얼굴에 먼지만 붙을 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카이엔은 문을 열었다.
녹슨 철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겨우 한 사람이 통과할 수 있을 만큼의 공간만을 만들었다. 그 이상은 아무리 힘을 써도 열리지 않았다.
카이엔이 먼저 문틈으로 들어갔다. 문 안은 넓은 복도와 연결되어있었다.
뒤이어 비셰가 빠져나왔다. 타오르는 횃불들이, 복도가 저 끝까지 이어져 있다는걸 알려주었다.
심장부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적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싶어서 카이엔은 마른침을 삼켰다.
“…가자.”
“네.”
비셰와 함께 카이엔은 복도를 걸어갔다.
조금전까지 있었던 장소에 비하면, 복도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복도 끝에 다다르자 다시 문이 나타났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안에는 제단처럼 꾸며놓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 위에, 상자가 놓여있었다.
“저건가?”
너무 대놓고 있지 않아?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카이엔은 정면을 응시했다.
저기서 불길한 기운이 풀풀 풍기고 있다는 건, 장님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느껴지는 기운뿐만이 아니라 아예 눈으로 보일 정도로 검은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즉시 카이엔은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지만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비셰로 인해 걸음에 제동이 걸렸다.
“비셰?”
“더, 더이상은 못 가겠어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비셰는 그 말을 끝으로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는 그녀에게 가지고 있던 반지를 쥐어 주고 카이엔은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가 무리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그는 신성력으로 비셰의 상태를 안정시킨 뒤 검을 손에 쥐었다.
이 불길한 힘으로부터 그가 멀쩡한 이유는, 그가 마신의 사제로서 신성력을 몸 안에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셰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빨리 상자를 파괴할 필요가 있었다.
세밀하게 만들어진, 공예품과 같은 금속 상자였다.
자물쇠가 붙어있는 걸 봐선 어딘가에 열쇠가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열쇠를 찾을 시간 따윈 없었다.
‘상자째 부숴야 하나? 그게 아니면 안에 든걸 없애야 하나?’
잠시 고민한 끝에 카이엔은 상자째 부수기로 했다.
불길한 것을 담고 있으니 상자 자체도 부정한 것이었다.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카이엔은 두 손으로 검을 잡았다.
가장 기본인 내려치기.
그는 상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까앙!
쇳소리만 날 뿐, 상자는 아직 멀쩡했다.
카이엔은 몇 번이고 검을 휘둘렀다.
까앙! 깡!
쇳소리가 나며 상자가 점점 찌그러졌다.
몇 번을 더 내리쳤을까.
찌그러진 상자가 이내 부서졌고 그 안에서 시커먼 바람이 빠져나왔다. 상자에 담겨있던 것은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자 빠른 속도로 빠져나와 가장 가까이 있던 이를 향해 들이닥쳤다.
“왕자님-!!”
비셰의 비명이 들린 것 같았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그가 피할 틈조차 주지 않고 그를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