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위험한 장소라며 바이스가 앞장섰다.
앞이 보이지 않는 탓에 카이엔은 신성력을 써서 만든 구체를 바이스의 앞에 띄워주었다.
작은 빛으로 앞을 비춰나가며 그들은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갔다.
“가장 불길한 느낌이 드는 곳으로 가죠. 거기가 심장부일 테니까요.”
“그래.”
빛조차 없는 곳에서, 오직 신성력 구체만이 빛나고 있었다.
숨소리와 신발 밑창이 돌바닥과 닿으면서 나는 뚜벅거리는 소리 말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로 속에서 두 사람은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한 번씩 카이엔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바이스가 힐끗 뒤를 돌아보거나 목소리를 내어달라고 부탁하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
무거운 공기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무렵이었다. 바이스가 걷는걸 멈췄다.
“왜 그래?”
“인기척이 있군요.”
“혹시-”
“아군은 아닙니다.”
경계하느라 들고 있던 검을 제대로 잡고 바이스는 그 자리에 섰다.
아직 불빛이 닿는 반경 안에 들어오지 못한 적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카이엔은 조심스럽게 구체를 움직여서 저 앞을 비추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것이었는데, 얼굴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머리 부분에 말미잘 촉수 같은 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으악!”
“릴리시아 닮았네요.”
“안 닮았어!!”
바이스는 태연했지만 카이엔은 비명을 질렀다.
피식 웃고 바이스는 꿈틀거리는 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잘려 나간 단면이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 모습에 질색하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카이엔은 저 너머로 비슷한 놈들이 더 몰려오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저, 저거 뭐야!”
“더 오는군요.”
“으…”
“흠. 못 지나갈 것도 없지만 앞이 안 보이는 게 문제군요. 일단 도망칩시다.”
“어?”
“어서요.”
재촉하면서 바이스는 카이엔을 붙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카이엔은 급하게 신성력 구체를 움직여 그들의 앞을 비추었다.
복잡한 미로의 내부를 다 외우지도 못했는데 왔던 길을 되돌아가다니!
그들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뒤에서 웅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괴물들이 그들을 쫓아왔다.
정신없이 도망치다 보니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빛이 비추는 저 앞이 막다른 길인 것을 확인하고 카이엔은 달리는 것을 멈추었다.
“벼, 벽인데?!”
“확인해보세요. 비밀통로가 있는지 갑자기 무너지진 않는지, 뭘 잘못 누른다고 함정이 나오는 건 아닌지.”
“…없는 것 같아.”
“그럼 벽에 붙어있으세요. 딱 적당한 장소네요.”
“뭐?”
“등 뒤를 경계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이쪽으로 죄다 몰려올 테니 여기서 다 해치우고 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바이스는 목걸이를 빼서 손목에 칭칭 감았다.
신성력이 깃든 물건이니 검을 잡은 손에 낀 채로 휘두르면 좀 더 나을 것 같았다.
그의 옆에 떠 있는 신성력 구체를 손끝으로 툭툭 밀어서 저 앞을 비추게 하며 그는 검 끝을 정면을 향해 겨누었다.
뒤에서 뭐가 튀어나오지 않는 이상 카이엔이 위험에 처할 일은 없으리라. 그는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 그어어어…
“하하. 입도 없으면서 소리를 낼 수 있군요.”
“웃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걱정 마세요. 절대 제 뒤로 보내지 않을 테니까요. 왕자님은 빛만 잘 비춰주세요.”
“…다치지 마라.”
“네.”
좀 더 가까이 오는 것을 기다리려는 모양인지 바이스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정해놓은 선 안으로 괴물이 발을 들이는 즉시 움직였다.
빠르게 사선으로 그어진 검이 괴물의 목을 베는 걸로도 모자라서 두 번이나 더 움직였다.
괴물들은 이성이 없는 듯하였다. 작전이나 진영을 짜지 않고 무작정 앞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 괴물들이 바이스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오러를 절제하면서도 그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괴물들을 해치웠다.
미로는 넓은 편이었지만 그가 방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신성력이 효과가 있는 건지 괴물들은 재생하지 못하고 베어지는 족족 녹아 사라졌다.
질척이는 것 같으면서도 곧 사라졌다. 바닥에 쓰러진 놈들이 다시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힐끗 뒤를 확인하니 카이엔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손을 모으고 있었다. 신성력을 쓰고 있는 게 확실한 모습에 그는 피식 웃었다.
쓰러진 놈들이 다시 일어나면 낭패니까, 카이엔은 그쪽을 해결하려는 듯했다.
카이엔이 힘을 쓰고 있긴 하지만 경계는 하기로 하고 바이스는 좀 더 앞으로 나아갔다.
여전히 적의 수는 가늠할 수 없었다.
***
몇십, 몇백은 벤 것만 같았다.
죄다 해치운 것을 확인하고 바이스는 숨을 골랐다. 빛을 보내 저 앞을 비추어봐도 남아있는 것은 없었다.
바닥에 쓰러진 놈들은 흐물흐물하게 녹고 나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끝났다는 걸 확인하고 그는 카이엔에게 다가갔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죠. 거기서 쉬는 게 낫겠습니다.”
“좀 괜찮아? 계속 싸웠잖아.”
신성력을 불어넣어 준다고 해서 체력이 차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은 효과가 있겠지만 바이스는 신성력을 거절했다.
“아직 안도할 때가 아니니까요. 앞장서겠습니다.”
“…그래.”
거절하는 녀석을 붙잡고 실랑이를 할 시간은 없었기에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뒤에서 계속 바이스를 보고 있었다.
앞에 서서 싸우던 녀석이 그가 잘 있음을 확인한 건 싸움의 극 초반뿐이었다. 그 뒤로는 쭉 앞의 적만을 노려보며 움직였다.
단칼에 괴물의 몸이 흔들리고 바닥에 쓰러졌다.
놈들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카이엔은 바닥에 신성력을 흘려보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바이스는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 괴물들을 베어나갔다. 그 속도는 전혀 줄지 않고 오히려 더 빨라지는 것 같았다.
힘들 텐데도 그에게는 의지조차 하지 않으려고 했다. 자기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다치지나 말았으면.’
적도 분명히 생각이 있어서 그들을 흩어놨을 테니까.
그 장소에서 벗어난 다음에야 그들은 숨을 돌렸다.
휴대해온 작은 물병이 있어서 목도 축이고 잠시 앉아서 쉬기로 했다.
바이스는 주머니에서 나침반을 꺼냈지만 바늘이 움직이지 않았다. 혀를 차며 그는 나침반을 다시 집어넣었다.
“다행히 괴물이 더 나오진 않는군요.”
“네가 그만큼 없애버렸는데 더 나오면 안 되지.”
“그 말도 맞군요.”
낙하할 때 충격으로 기절하지 않았다.
시간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을 테지만 그 괴물들과 싸우느라 몇 시간을 소모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런 장소에 오래 있어서 좋을 거 하나 없을 텐데.
카이엔이 줬던 부적 중 하나인 브로치를 꺼내 봤다가 바이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브로치의 끄트머리부터 까맣게 그을린 흔적이 있었다.
“움직이죠. 다른 분들과 빨리 합류해야겠습니다.”
“넌 얼마 쉬지도 않았잖아.”
“이 정도쯤이야 문제없습니다.”
시간을 지체한다면, 그들의 손해란 게 명확했다.
미로에서 오래 헤맬수록 방어할 수단이 떨어지고 만다. 두 사람은 다시 미로를 헤맸다. 카이엔이 집중하면서 미로 속의 어둠을 더듬으며 나아갈 방향을 정했다.
꽤 긴 시간 방황한 끝에 그들은 미로를 빠져나왔다. 미로 밖은, 거대한 동굴과 같았다.
이전에 리치왕의 기억에서 엿봤던 곳과 비슷한 장소에 카이엔은 인상을 썼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 건지, 무사할지 걱정되었다.
“…조용하군요.”
바이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네. 시끄러운 것도 이상하지만.”
“다른 분들의 기척 또한 느껴지지 않습니다. 프라우디에 님이라면 어련히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그는 말끝을 흐리곤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델라 님과 비셰 님은 두고 올걸 그랬습니다. 바깥의 동태를 살피는 식으로요.”
“빼놓고 가면 싫어했을걸.”
“힘으로 따지고 보면 약한 축에 속하니까요.”
글러티나는 검을 쓸 수 있고 두 사람보단 강하니 예외로 둔 모양이다.
정신면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따로따로 떨어지지만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 이야기를 하니 바이스는 비셰가 알아서 잘 했을 거라고 답했다.
“비셰 님은 요새 특훈도 받고 계시니까요. 그리고, 위험해진다면 지옥에서 누가 구해주러 올 수도 있고.”
“아스모데우스? 비셰는 싫어하던데.”
“싫어해도 뜯어낼 수 있는 건 뜯어내는 게 옳습니다. 자기 목숨과 안위가 달린 일이라면야.”
담담히 대답하며 걷던 바이스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두어 걸음 앞서가던 그가 걷는 걸 멈추자 카이엔도 제자리에 섰다.
늘 여유롭던 이는 뒤돌아서 카이엔을 바라보며 말했다.
“왕자님.”
“응?”
“제가 걸림돌이 된다면 망설이지 말고 버리십시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전, 마왕 대리전 때를 기억하십니까? 제게 접근했던 악마가 당시의 마왕이자 지금은 전 마왕인 작자라고 했었죠.”
“그랬지.”
“제가 꼬임에 넘어가진 않았지만 그자로서는 자기가 하기 싫어서 내려놓은 마왕 직을 다시 하고 싶단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을 텐데 왜 제게 접근했을까요. 그것이 궁금하여 이따금 생각해봤습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그의 입에 올랐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당신에게 방해가 된다면, 전 얼마든지 저조차도 버릴 수 있습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가자. 장소가 안 좋아서 너도 괜한 생각이 드는 거야.”
“‘페르세이지 바이올로스’는 ‘바이스 크라이머’보다 강하지만 성격이며 성향이 더욱 나쁩니다. 지금은 억누르고 있는 편에 가깝고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놈은 미친놈이지. 그리고 둘 다 너잖아.”
“지금까지의 저는 제 행동에 망설임 따윈 없었고 그로 인해 정신적인 면도 단단했습니다만 지금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마왕 대리전 때 호되게 당하기도 했고요.”
둘 다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바이스는 그 둘을 타인인 것 마냥 나눠서 말했다.
그러니까, 라며 그가 덧붙였다.
“제가 이상하다 싶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십시오. 제 손으로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언젠 죽이고 싶었다며?”
“하하하.”
“웃음으로 넘기려고 하지 말고.”
이번엔 흘려넘길 수 없다며 카이엔이 단호하게 대꾸하자 바이스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답했다.
“글쎄요. 지금은 죽이는 것보단, 가만히 두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쉽게 죽어주실 것 같지도 않고.”
“근데 왜 죽이고 싶었다는 거야? 나 어렸을 때 만났다면서?”
“네. 왕자님이 한 2~3살? 그쯤 되었으려나요. 기억은 잘 나지 않네요.”
“너도 어렸을 텐데 대체 왜…”
“사랑스러워서일까요. 너무나도 작고 약했으니까요. 손만 갖다 대는 것 정도로 픽 죽어버릴 것 같기도 했고.”
“취향이 괴상하네.”
“이런. 알고 계시는 거 아니었나요.”
대충 농담조로 대화하면서 그들은 말을 이어나갔다.
미로와는 달리 동굴의 벽엔 일정 거리마다 불꽃이 매달려있었다.
불꽃이 일렁이며 바닥에 드리워진 그림자 또한 일렁거렸다.
진심으로 꺼낸 말이었기에 바이스는 다시 한번 언급했다.
“제가 왕자님께 방해가 된다면, 즉시 버리십시오.”
“내가 알아서 할게.”
“안 됩니다. 약속해주세요.”
“싫다.”
“…제대로 생각해주세요.”
“알아. 제대로 생각하고 대답하는 거니까.”
카이엔이 고집을 꺾지 않자 바이스도 입을 다물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길을 계속 걷다 보니 똑같아 보이기만 하던 동굴의 벽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곳곳에 괴이한 조각상들이 보이기 시작하며 공기가 무거워졌다.
두 사람은 좀 더 나아갔다.
중간중간 백골이 된 시체가 눈에 띄었다.
그것을 밟지 않게 조심하며, 잘못 밟아서 발밑에서 부스러지는 백골을 보며 인상을 쓰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분명히 그들은 신전 안으로 들어왔건만.
바닥이 무너져서 빠지게 된 지하 미로를 건너 동굴 안으로 들어온 지금. 그들의 앞에 또 하나의 신전이 나타났다.
땅 위의 신전은 검은색을 띄고 있었는데 이곳의 신전은 기묘한 푸른 빛을 띄고 있었다.
녹색 같기도 하고 푸른색 같기도 한 빛깔. 오래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기묘하게 발광하는 물질들이 빛을 뿜어댔다. 눈앞이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워서 애써 시선을 돌렸다.
신전의 앞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가만히 서 있던 인영은 기척을 느낀 건지 뒤를 돌아보았다.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이 세계에서 보낸 부정한 것은 인간의 형상을 띈 채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신성함을 가장한 그것의 모습은 밝은 빛의 머리카락과 뚜렷하게 붉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을 발견한 그것의 입이 기묘하게 벌어지며 찢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