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티아마티스와 짧게 대화한 뒤, 그들은 에밀로 향했다.
마차를 타고 수도 밖으로 나간 뒤에 마차를 다시 돌려보낸 뒤, 일행은 에밀까지 날아서 가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빠른 이동을 위해 자네인이 폴리모프 해서 드래곤으로 변해 카이엔, 바이스, 프라우디에를 태웠고 그리델라와 비셰, 글러티나는 혼자서 비행할 수 있어서 따로 날기로 했다.
물론 하루 만에 갈 수는 없고 등에 탄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중간중간 내려서 쉬어야 했다. 그들이 착지할 장소를 찾는 게 다른 세 명의 몫이었다.
이런 일이 있을까 봐 에밀에는 미리 언질을 해둔 터였다.
빠른 속도로 나는 드래곤의 등 위에선 찬 바람이 쌩쌩 불었고 바이스는 카이엔과 프라우디에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어찌나 많이 덮어줬는지 눈만 빼고 전부 가려졌다.
“좀 심한 거 아냐?”
옆에서 빗자루를 타고 날던 그리델라가 한마디 했지만 바이스는 꿋꿋했다.
“이 정도는 해야 하죠. 거사를 앞두고 감기라도 걸리시면 곤란합니다.”
“그러는 바이스 씨는 외투만 입고 있잖아.”
“전 튼튼합니다.”
“왕자님, 숨구멍도 가려진 것 같은데 괜찮아?”
“어… 그런데 이건 너무 과한 것 같다.”
“움직이지 마세요. 그러다가 떨어지면 큰일입니다.”
카이엔이 담요를 치우려고 하자 바이스가 재빨리 말했다. 그러나 바이스는 드래곤 등 위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가방에서 담요를 꺼내 두 사람에게 덮어줬다.
그의 신체 능력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카이엔은 평범한 사람 수준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있기로 했다.
그가 담요를 치울 수 있게된 건 자네인이 지상으로 착지한 뒤였다.
며칠에 걸쳐서 비행한 끝에 그들은 에밀에 도착했다.
이미 전해 들은 것이 있기에 에밀의 성기사단은 드래곤이 날아와도 놀라기만 했고 공격하지 않았다.
아래쪽에서 양팔을 흔들면서 착지 지점을 가리키는 이들을 보고 자네인은 조심스럽게 공터에 착지했다.
“카이엔 이디에우스 아베르나 백작님이 맞으십니까?”
“네.”
“성왕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쉬실 곳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너희는 먼저 가서 쉬고 있어. 바이스만 따라와도 되니까.”
“응.”
“알겠습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마신의 사제는 몬스터와 소통할 수 있고 이종족을 곁에 둔다.
너무나도 유명한 사실이었다.
그런 그와 함께 온 이들이 이종족이라는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금빛 몸체의 드래곤을 타고 온 것도 놀라운데 그 드래곤은 등에 태운 일행이 내리자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으니까.
진짜 드래곤인건가 웅성이는 이들에게 자네인은 반쪽, 이라는 대답을 해주었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이었다.
한 사제를 따라서 카이엔은 바이스와 함께 성왕을 알현하러 갔다.
성왕이 거주하는 궁은, 다른 나라의 왕족이 기거하는 궁보다 작은 편이었다.
흰색과 푸른색으로 구성된 건물은 정갈했다.
사제의 안내를 받았지만 카이엔은 성왕과 독대를 하게 되었다. 바이스는 문밖에 서 있기로 했지만 괜찮다며 웃으면서 카이엔을 보냈다. 물론 귓속말로 이렇게 소곤거렸다.
“따로 마법적 처치같은 게 되어있는 것도 아니고… 안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설마 그런 일이 있겠어?”
“방심은 금물이죠.”
어딜 가던 경계를 풀지 않는 게 바이스다웠다.
사제는 그를 기도실로 안내해주었다. 평소 성왕이 사용하는 기도실이라고 하였는데, 커다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꽤 넓은 내부가 눈에 띄었다.
작은 예배실을 만들어놓은 것만 같았다.
방의 안쪽 벽에는 천신을 상징하는 문장이 그려져 있었고 옆으로 길쭉한 의자가 여섯 개쯤 있었는데 그중 하나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성왕은, 머리가 하얗게 세었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었다.
“에밀의 성왕님을 뵙습니다.”
카이엔이 먼저 인사를 하자 노인은 느리게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신 님의 유일한 사제님을 뵙습니다.”
“말을 낮추십시오.”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신께서, 계시까지 내려주셨는데.”
성왕은 웃으면서 말했다.
가까이 오라는 손짓에 카이엔은 의자로 다가갔다. 마주 보고 앉을 수 없기에 그는 성왕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성왕과, 반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인 그는 굉장히 대조되어 보였다.
옷차림만으로도 어떤 신을 믿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카이엔과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성왕도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마신께서는 검은색을 좋아하시는 모양입니다.”
“어… 그런 것 같진 않아요. 그냥, 제가 맨날 검은색만 입고 다니거든요.”
바이스가 다른 색도 어울리지만 머리색과 맞추는 게 제일 낫다고 해서, 검은 옷이 제일 많았다.
손자뻘인 그를 앞에 두고 성왕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계시를 받았고 다른 사제님들에게도 그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직접 만나고 싶어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저도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솔직히 제가… 걱정을 좀 했거든요. 어쩌다 보니 사제가 되긴 했지만 정말 마신의 사제로서 일해도 될지, 그게 문제였으니까요.”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아마 신께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실 줄 알고 안배를 두신 거겠죠.”
성왕은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사리반이란 자들에 대해서는, 들으셨을 겁니다. 그런 자들이 있었다는 걸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게 너무나도 부끄럽고 죄스럽습니다. 그 자들에게 이용당하고 죽임당한 이들이 얼마나 많을지… 저 역시, 백골로 가득 찼던 동굴에 대한 보고를 들었으니까요.”
“…제가 쫓는 자입니다. 저희가 책임지고 처리하겠습니다.”
“무거운 짐을 혼자서 드실 생각 마십시오. 저희 또한 함께하겠습니다.”
“에밀에 부탁하고 싶은게 있습니다. 그건, 사리반의 군대입니다. 그들을 막아주신다면 저희가 적의 심장부를 치겠습니다.”
그건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세계수의 가지를 든 프라우디에는 그자의 심장에 가지를 박아넣겠다고 했다.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생명의 기운으로 넘치는 가지를 심장에 꽂는다면 반발력으로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군대는 사리반과 전투를 하면서 점점 안쪽으로 밀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혹시 사리반의 중심지를 알아내셨습니까?”
“겔로스가 아닌 아피스에 있다고 합니다.”
“아피스… 허어… 그쪽은 생각지도 못했군요. 사령 기사는 겔로스에만 손을 쓴 줄 알았는데.”
“사령 기사와는 관련이 없을 겁니다. 그자가 겔로스의 산 자를 모조리 없애버렸기에 아피스 쪽에서 불안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고 사리반이 성행한 걸로, 여깁니다. 제 생각일 뿐입니다.”
죽은 자는 입이 없다.
산 자는 죽음이 가까이 오자 불안해하며 어떻게든 제 안전을 보장받고 싶어 한다. 기댈 곳을 찾는다.
생존자가 얼마 없는, 완전히 망가진 겔로스가 아닌 그 인접 국가인 아피스에서 사리반이 유행병처럼 생겨났을 것이다.
성왕 또한 그 의견에 동의한 건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신의 사제님, 당신께서는 바로 군대에 합류하시는 겁니까? 조만간, 또다시 사리반의 군대와 크게 맞붙을 일이 있습니다만.”
“그럼 에밀 쪽에서 그들의 시선을 끌어주십시오. 그 틈을 타서 이동하겠습니다.”
“땅 위의 적은 저희쪽 군대가 막겠습니다. 일행분들은 하늘을 날아서 오셨다고 들었는데.”
“날아가려고 합니다. 적들 사이에도 마법사가 있겠지만 제쪽에도 마법사가 있고 저도 신성력을 쓸 수 있으니까요.”
성왕은 카이엔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같이 온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계시가 내려왔습니다.”
그저, 그는 이렇게 운을 떼었다.
“세계가 멸망한다고 해서, 그저 손을 놓고 있을 수 만은 없는 일입니다. 보다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끝이 다가온다는 건 두렵지만 그것이 완전한 끝은 아니지 않습니까.”
죽으면 영혼은 명계로 가게 되고 신의 곁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 천신을 믿는 종교의 이야기였다.
그는 카이엔에게 사후세계에 대해 물었지만 카이엔은 생각해본 적이 없기에 솔직히 대답했다. 모른다고.
“제가 마신의 사제긴 해도, 정말 아는 게 없으니까요. 그래도…”
그는 고개를 숙였다.
“적대하지 않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빛과 어둠은 공존할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밤이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죠. 휴식은 필요한 법이고 우리 신께서도 잠깐 휴식에 들 시간은 필요할 테니, 밤은 마신께서 땅 위의 생명들을 보살피는 시간 아닙니까.”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성왕은 카이엔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드려주었다.
그에게 내려온, 마신의 사제에 대한 계시는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처음 카이엔이 마신의 사제로서 임명받자 그를 적대할 필요 없다는 것.
두 번째는 그에 관심을 가지는 이가 있으면 곁에 두게 해도 된다는 것.
이건 아마 성녀인 메르실라가 카이엔에게 관심이 있다면 엮어주라는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다른 사제들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세 번째는 사리반에 대한 것이다.
사리반을 적대하는 건 천신과 마신의 사제 모두이니 힘을 합쳐서 싸우라는 것.
막지 못하면,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건 오직 성왕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야기를 하던 중 두 번째 계시가 떠올라서 성왕이 물었다.
“메르실라 님과는 친하십니까?”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군요. 그분은 성녀로서 강한 신성력을 가지신지라, 이 전쟁에 참여해 최전방에 계십니다. 만나실 수도 있겠군요. 분명 반가워하실 겁니다.”
“많이 다치지 않으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카이엔은 얼버무렸다.
이전에 메르실라가 세자르에서 그에게 신성력 다루는 법을 알려줬을 때도 저택 사람들과 사제단 사이에서 비슷한 말이 나오기도 했는데 설마, 성왕까지 저런 말을 할 줄이야.
신이 엮어주려는 한 쌍이라고 여긴 걸까.
여기서 단번에 싫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성왕과의 대화를 마치고 카이엔은 기도실의 밖으로 나왔다. 바로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바이스가 바로 옆에 붙었고 다른 사제가 와서 그들을 안내해주었다.
미리 짐을 풀고 쉬고 있던 이들이 카이엔을 맞이했다.
“왕자님! 이야기는 다 했어요?”
“응. 에밀 쪽에서도 협조해주겠다고 했어. 조만간, 사리반과 싸울 일이 있대. 그들이 맞붙을 때 우리는 하늘을 날아서 간다.”
“흠. 내일 바로 이동하나요?”
“그래야 할 것 같아.”
“하루라도 푹 쉬시죠.”
다들 그 의견에 동의했다.
비셰만이 몽마라는걸 들킬까 봐 노심초사하는지라 카이엔이 괜찮을 거라며 달래줘야만 했다.
사리반과의 전쟁 때문에 에밀 내의 경비는 엄중했다. 다행히 식량이 모자라진 않은 듯했다.
사치를 금하는 계율이 있는지라 식탁 위는 그리 화려하지 않았고 사제는 그것 때문에 좀 민망해하는 것 같았지만 카이엔은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그 또한 맨날 만찬을 즐기는 것도 아니었고, 가볍게 식사하거나 대충 때우는 일이 많았으니까.
같은 사제긴 해도 모시는 신이 다르고 카이엔은 타국의 왕족이니까 좀 더 잘 대접해야 한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세자르에서도 이렇게 먹었다는 다른 이들의 증언이 뒤를 잇자 그제야 사제는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