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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200화 (201/219)

-200화

정령들의 보고가 도착했다. 그와 비슷하게 사탄의 답장 또한 도착했다.

그들이 의심했던 겔로스가 아니라 그보다 남쪽에 위치한 나라, 아피스의 중심에 사리반의 심장부가 있고 그곳에서 가장 불길한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다고 했다.

목적지가 정해진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다면서 카이엔은 먼저 가르간트의 왕성에 방문하기로 했다. 어차피, 가는 길에 있기도 했다.

그와 함께 갈 이는 바이스와 프라우디에, 자네인, 글러티나, 그리델라, 비셰였다.

가는 길이 워낙 멀어서 비행 가능한 사람 위주로 뽑았다.

또다시 집 지키기를 하게 된 슬로세이는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카이엔의 결정에 수긍했다.

날지 못한다는 이유로 라스와 엔베인 또한 세자르에 남아 저택을 지키기로 했다. 이번에는 도움이 못 돼서 죄송하다며 두 사람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긴. 금방 다녀올 테니까 기다려줘.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엄청 오래 걸리겠지만…”

도중에 들러야 할 곳이 많다며 카이엔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수도로 가는 데에는 긴 시간이 소모되지 않았다.

이전에 티아마티스가 안가를 하나 만들어놨다면서, 그곳의 텔레포트 게이트 좌표를 프라우디에에게 알려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 쓸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리델라와 비셰도 한 손 보태서, 그들은 마법을 이용해 빠르게 수도로 이동했다.

먼지 쌓인 안가의 내부에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잠시, 한시가 급했기에 그들은 즉시 왕성으로 이동했다.

따로 약속을 잡진 않았지만 카이엔은 얼굴 자체가 신분증이나 마찬가지였고 이제 제 정체를 숨길 필요도 없는 바이스가 후작가의 증표를 내밀며 경비를 독촉했기에 쉽게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물론 모두 데리고 간 것은 아니고 카이엔과 바이스만 왕성 안으로 발을 들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저한테도 말을 안 해주시고.”

“네가 생각하는 건 아니야.”

“흠.”

“진짜야.”

“왕이 되시는 것도 나쁘진 않으실 텐데.”

“조용히 해…”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왕성에서 저런 소리를 하다니.

저 입을 때릴 수도 없고 꿰맬 수도 없는 노릇이라 카이엔은 이마를 짚었다.

약속 없이 쳐들어온 두 사람은 당당하게 왕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들이 성문을 통과했다는 소식이 빠르게 전달됐는지 중간에 성에서 일하는 시종이 와서 두 사람을 안내해주기까지 했다.

어쩐지 잔뜩 긴장한 것 같은 시종을 보고 바이스가 소곤거렸다.

“뭘 상상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만.”

“그래?”

카이엔은 심드렁하게 대꾸했지만 바이스는 웃었다.

“뭐, 둘이서 반란이라도 일으킬 거라고 여기는 거 아니겠습니까? 상상력이 풍부하군요.”

“너 혼자서 기사단 몇 대대는 상대할 수 있겠지.”

“그렇게 봐주시다니 영광이군요. 왕자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정말 할 수 있다는 거야?”

“해보진 않았지만 적당히 손을 쓰다 보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한 마디로 죄다 죽여버릴 생각으로 베어버리면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여전히 살벌한 바이스의 대답에 카이엔은 애써 모른척하며 입을 닫았다.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그들은 국왕의 집무실이 있는 궁으로 향했다. 바짝 군기가 서 있는 기사들을 보고 카이엔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독대를 하고 싶은데.”

“위험합니다.”

“말만 하고 나올 거야.”

반사적으로 대답한 바이스에게 손을 흔들며 카이엔이 말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구기는 바이스를 보며 카이엔이 한 마디 덧붙였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나설 거란 건, 바보라도 아는 사실이잖아.”

“그렇죠.”

“그쪽도 이젠 네가 누군지 알 테고.”

“흠.”

“괜찮을 거야.”

“왕자님의 변명 실력이 많이 느셨군요. 그럼 한 번만 봐 드리죠.”

“변명 취급하기냐…”

어이가 없어서 저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카이엔이 독대를 요청했기에 시종은 그 말을 다른 시종에게 전달했고 국왕이자 그의 작은아버지는 그것을 수락했다.

문 앞에서 기다린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이스를 문에서 좀 더 떨어진 복도에 서 있게 하고 카이엔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한창 일하느라 바쁠 사람을 약속도 없이 찾아왔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연락도 없이 찾아오다니, 이상한 일이구나.”

국왕. 바르바스 이디에우스가 꺼낸 첫마디는 이러했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지라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급한 일이 있거든요. 제가 마신의 사제라는 건… 유명해져서 이미 다 아실 테고, 정체불명의 사이비 종교의 신도들이 난리를 일으킨 것도 알고 계실 겁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기에 카이엔 역시 본론부터 꺼냈다.

작은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전부터 왕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러 갈 거고요. 죽을 수도 있어서 미리 말하고 가려는 겁니다.”

“뭐? 그게 무슨-”

“사제니까요.”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카이엔은 이 한 마디만을 입에 담았다.

“아마, 큰 여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광신자들이 날뛸 수도 있겠죠. 하지만 왕이시니까 어떻게든 잘해보세요. 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러 떠납니다. 그럼.”

제 할 말만 하고 카이엔은 빠르게 집무실에서 나왔다.

바르바스에게 자질구레한 일까지 설명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 이 정도만으로 충분했다.

혼란스럽겠지.

충분히 혼란스러워하다가 만약에 무슨 일이 벌어지면 일 처리 좀 잘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카이엔이 복도를 걷자 기다리고 있던 바이스가 즉시 따라붙었다.

“이야기는 잘하셨습니까?”

“내가 할 말만 하고 나왔어.”

“잘하셨습니다.”

국왕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그다음은 티아마티스… 에빌라이 공작을 만나러 가야 했다.

왕성에 들렀다가 공작가로 향하는 그의 걸음을 보고 누군가는 의문이든 의심이든 품겠지만 그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궁에서 나서는 그를 붙잡는 이가 있었다.

어떻게 알고 온 건지 돌아가려는 그를 향해 누군가가 외쳤다.

“형… 형!!”

“응?”

그를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세상에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돌리자 저만치에서부터 에이들러가 뛰어오고 있었다. 뒤에서 시종으로 보이는 이가 급하게 달려오는 걸 봐선, 에이들러가 그를 발견하고 갑자기 뛰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가 걸음을 멈추자 에이들러는 더욱 빠르게 뜀박질을 했다.

“헉- 허억… 여, 여기 왔다고 들어서…”

“응. 이제 가려고.”

“어?”

담백한 말에 에이들러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렇게 금방?”

“할 말이 있어서 온 거거든. 연락도 없이 찾아왔으니 얼른 용건만 끝내고 가려고 했지.”

“어휴- 난 또 뭐라고… 놀러 온 줄 알았는데.”

“요즘 난리가 났으니까 따로 전해야 할 말이 있었거든. 그런데 넌 무슨 일이야?”

“형이 왔다고 들어서!”

빠른 대답이 돌아왔다.

아직도 어리기만 한 사촌 동생을 보며 카이엔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키가 큰 것 같기도 했다.

“키 컸어?”

“응! 그런데 아직도 레이지가 나보다 더 커…”

“원래 어릴 땐 그럽니다. 편식하지 말고 일찍 자고 일찍 주무세요.”

“잘하고 있는데…”

순식간에 시무룩해진 에이들러였지만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그는 카이엔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형! 혹시, 마신도 세례를 해줄 수 있어?”

“세례?”

“응. 만약에 해줄 수 있다면 나한테 해줄 수 있어?”

“뭐?”

이건 또 처음 듣는 말이라 카이엔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에이들러는 물러서지 않았다.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는지 당황한 그의 얼굴을 보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마신의 사제로서, 가르간트의 왕자에게. 형이 믿고 있는 신이라면 나도 믿을 거야.”

“너 진짜…”

“어차피 성국에서도 인정했다며? 나쁜 신은 아니라면서. 지금 밖에서 한창 난리인 광신자들이 믿는 종교가 이상한 거라잖아.”

“그렇긴 하지만, 너 진심이야? 마신 사제는 나뿐인데?”

“응.”

“그리고 난 세례같은 거 해본 적 없어.”

“그냥 물 부으면 되는 거 아냐?”

“절차 다 생략하고 간단하게?”

“응.”

에이들러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는 잘만 한 마디씩 찔러주던 마신이 지금은 아무런 답이 없었다.

한숨을 쉬며 카이엔이 답했다.

“일단 장소부터 옮기자. 가까운데 빈 건물 있어?”

“이쪽에.”

에이들러의 안내를 받으며 그들은 장소를 이동했다.

시종에게 부탁해서 물을 채운 은잔을 손에 들고 카이엔은 에이들러를 보았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궁의, 아무 장소의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에이들러가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냥 물만 부어도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될 리가.

카이엔은 손에 들고 있는 잔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채워진 물이 저절로 찰랑거리며 은은한 빛을 머금었다.

순식간에 성수를 완성한 카이엔은 에이들러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나 진짜 절차 같은 건 잘 몰라.”

“알아.”

“하여간…”

“마신은 나쁜 신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알면 됐다.”

피식 웃으며 카이엔은 아직도 작기만 한 사촌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성수가 담긴 잔이 기울어지면서 에이들러의 머리카락을 적시고 흘러내렸다.

“그저, 어둠을 무서워하지 말고 인외 종족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주며 그들과 대화하고 교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우선순위를 잘 매겨둬야 한다. 무조건 그들만을 위하려고 하지 마. 그건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응.”

은잔에 채워진 모든 성수를 흘려보내고 카이엔은 에이들러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물 때문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면서 에이들러는 활짝 웃었다.

“고마워, 형.”

“뭘. 대충했다고 나중에 마신한테 혼나는 건 아닐지 모르겠네.”

들고 있던 잔을 에이들러에게 건네며 카이엔이 말했다.

“나 이제 간다. 언제 볼진 모르겠네.”

“내 생일 때 또 초대하면 되지.”

“…그러네.”

짧은 침묵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에이들러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카이엔은 바이스와 함께 빠르게 왕성에서 나왔다.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있으니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카이엔은 알지 못했다.

그가 에이들러에게 세례를 해주느라 잠시 빌렸던 은잔에 성수를 채워 넣었고 그 탓에 에이들러가 그 잔을, 그리 귀하지도 비싸지도 않은 그 은잔을 왕실의 보물로 지정해서 성배가 되버린걸 알게 된 건 먼 훗날의 일이었다.

밖에서 마차를 수배해 기다리고 있던 이들과 합류한 카이엔과 바이스는 에빌라이 공작가로 향했다.

자네인이 자세한 위치를 알고 있는지라 마차는 빠르게 목적지로 향했다.

공작가 문턱을 넘는 건 그곳의 사용인들이 자네인을 알고 있었기에 별문제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하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들이 왔다는 것을 전달받은 티아마티스는 손님들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시중들 사람들까지 모두 물리고 나서야 그는 공작가에 방문한 이들을 쓱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벌써 소문이 퍼졌겠군.”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렇지.”

피식 웃고 티아마티스가 말했다.

“그래서, 떠날 셈이냐?”

“위치를 알아냈으니 가야겠죠.”

“나는 움직이지 못한다. 미안하게 됐군.”

그 말과 함께 그는 몸을 가리고 있던 마법을 풀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수많은 사슬이 나타났다. 굵은 사슬은 그의 팔을 묶고 있었고 다리의 족쇄는 어디에 연결되어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 땅에, 이 장소에 묶여버린 것 같은 모습에 다들 크게 놀랐다.

손을 까딱이며 티아마티스는 자조했다.

“그놈이 먼저 선수를 쳐서 내 움직임을 봉쇄해버렸다. 이렇게 되기 전에 미리 도움 요청을 하긴 했지만 제때 올지 모르겠군…. 나는 이 세계와 함께 끝을 맞이하기로 결정한 단 하나뿐인 용, 그래서 커뮤니티에 신경을 끄고 살았는데.”

다른 곳들도 비슷한 상황의 연속이라며 그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구조가 올지, 오지 않을지 모른다.

어차피 외부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았던지라 카이엔은 가만히 티아마티스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사슬로 칭칭 묶여있긴 하지만 실체가 있는 건 아니라며 그는 사슬에 손가락을 뻗었다. 손가락은 사슬을 통과했다.

“하지만 난 수도를 벗어날 수 없다. 몸이 움직이지 않더군. 그나마 다행인 건… 나와는 달리 자네인. 너는 내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독룡이라 이 제약에 걸리지 않을 거다. 그리고 나를 묶어놓은 만큼 그놈도 힘을 묶어놓은 채 싸우게 될 테니 그것에 걸어보는 게 좋을 거다.”

“만약 싸우던 도중 그 힘을 거둔다면요?”

“그럼 내가 바로 움직일 수 있다. 당장 가세하지.”

“그럼 그자가 이 사슬을 풀 일은 없겠군요.”

선수 쳐서 티아마티스의 발을 묶어놨으니 위급한 상황이 생겨도 그 힘을 거두진 않을 것이다. 그 힘을 거둔 순간, 풀려난 티아마티스가 단숨에 날아올 테니까.

티아마티스는 다시 마법으로 사슬을 가렸다. 가리지 않아도 웬만한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조금이나마 힘을 가진 이들의 눈에는 너무나도 수상한 이 사슬이 보이니 어쩔 수 없었다.

이노스 녀석이 이걸 보고는 새로운 취미라도 생겼냐고 깜짝 놀라 외치는 바람에, 가리지 않으면 누군가에겐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했고.

“이젠 어디로 갈 거지?”

“에밀입니다.”

“그래. 그들과 같이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느리게 눈을 깜빡인 고룡은, 프라우디에를 바라보며 말했다.

“죽지 말거라.”

“네.”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다.”

“안 죽어요.”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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