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안개처럼 그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카이엔은 헉 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를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지자 거짓말처럼 몸이 가벼워져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바닥에 엎드린 채로 한참 동안 숨을 고르고 나서야 카이엔은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촛불의 빛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까 죄다 꺼진 줄로만 알았는데, 꺼지지 않았다니.
‘도대체 뭐야…’
도대체 뭣 때문에 그를 찾아와서 저런 말까지 하고 간 건가.
그가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니 저만치에서부터 발소리와 함께 바이스와 엔베인이 달려왔다.
“왕자님!”
엔베인은 등불을 들고 있었고 바이스는… 검을 들고 있었다.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대체-”
말을 잇지 못하고 바이스는 카이엔을 보았다.
누구한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꼴이 말이 아니었다.
외출하기 전에 잘 빗어서 매끄럽던 머리카락이 누군가가 잡아채고 휘두른 것처럼 엉망이 된 데다가 얼굴색 또한 창백했다.
들고 있던 검을 검집에 다시 꽂아놓고 그는 카이엔의 어깨를 붙잡았다.
“무슨 일이 있으셨군요. 누굽니까? 습격입니까?”
“…그놈이야.”
“네?”
“제대로 된 이름을 몰라서 그놈이니 그림자니 광대니 그리모어니 하고 부르는 놈.”
“그자가 왔다 갔습니까?”
“…어.”
카이엔은 최대한 차분히 말하려고 했지만 목소리 끝이 떨렸다.
가까이에서 마주친 그 자는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리치왕의 기억에서 봤던 푸른 불꽃은 보는 이의 정신을 깨부수고 미치게 만들었다.
긴 시간이 흐른 지금 그것은 인간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그 성질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끔찍해진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신성을 휘감고 신인 척 하고 있다니. 토할 것만 같았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바이스가 그를 부축했다.
“도대체 왜 왕자님한테… 프라우디에 님을 노리는 게 아니란 겁니까?”
“나도 몰라. 거짓말일지도 모르지. 나를 한번 떠보려고 그랬던 걸지도 모르고.”
“부축받을 게 아니라 업히시죠. 그편이 낫겠습니다.”
비틀거리던 그를 부축하던 바이스는 카이엔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냉큼 업어버렸다.
평소라면 필요 없다고 밀어 냈을 테지만 지금은 정말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카이엔은 얌전히 바이스에게 업혔다. 엔베인은 이젠 그자의 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신전을 불안해하며 경계했다.
그 사이에 바이스의 등에 업힌 채로 카이엔은 띄엄띄엄 그자가 했던 이야기를 전했다.
“찾아오라니, 과한 자신감이로군요. 혼쭐을 내줘야겠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정보원과 정령들이 할 일이죠. 아무튼 지금은 가서 좀 쉬세요. 성수 쌓아놓은 게 많으니까 오늘은 그걸로 목욕하고 주무시고요.”
“성수로 왜 목욕을 해…”
“더러운 것이랑 접촉했잖아요.”
불길한 놈이긴 했지.
더이상 대꾸할 힘도 없어서 카이엔은 그렇게 하자며 고개를 숙였다.
이대로 바이스한테 업혀 가면 난리가 날 텐데, 제 발로 걸을 힘이 없었다.
***
바이스는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이 지나간 자리마다 깊은 상처가 남고 매서운 바람이 그 뒤를 따랐다. 근처에 내려놓은 등불의 빛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하늘에 뜬 달빛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그의 눈은 날카롭게 정면을 응시했다.
떨어지는 나뭇잎을 향해, 나뭇잎마저 없다면 바람을 향해.
아직 미숙하긴 했지만 그 역시 소드 마스터였다.
누가 들으면 그가 미숙하다는 말에 기겁할지도 모르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그는 미숙했다.
휴식을 취할 시간마저 쪼개고, 카이엔의 곁을 비우기까지 하면서 그는 훈련 시간을 늘렸다.
예전의 그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땐 1분 1초라도 더 카이엔의 옆에 붙어있으려고 했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지금까지 지켜온 이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그게 가장 걱정 되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어떤가.
카이엔의 시중을 다른 이에게 맡길 수 있고 호위 또한 적당한 자에게 맡길 수 있었다.
그가 무뎌진 것일까. 그것이 아니면.
‘쓸데없군.’
잡생각을 몰아내며 그는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이미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지는 오래였지만 실력을 드러낼 일은 극히 드물었다.
이전의 상대가 악마와 계약한 마왕 대리전의 참가자였다면 지금의 적은 신이다.
신에 필적하는 존재다.
인간의 손으로 신을 죽일 수 있는가. 신에 버금가는 힘을 가진 정체불명의 존재를 베어버릴 수 있는 건가.
의심이 들 때마다 그는 검을 휘둘렀다. 그런 건 해봐야 아는 것이니까.
카이엔을 죽게 할 생각 따윈 없었다.
누가 카이엔을 노리고 위해를 끼치려고 한다면, 그가 먼저 나서서 베어버리면 그만이다. 없애버리면 된다.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
‘충분하다고 여겼는데.’
그래서 여유로운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하나 힘이 모자라다는 걸 알게 된 지금은 조급함만 늘어갔다.
그럴수록 검 끝이 날카롭지 못하고 빗나갈 확률이 높아진단 걸 알면서도 그는 난생처음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항상 강자였던 그는 처음으로 그가 약하다는 것에 통감했다.
강해야 한다. 강해야만 한다.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일정 지점의 경지에 다다른 그였지만 아직도 모자람만을 느끼며 바이스는 숨을 내쉬었다.
이쯤 하기로 하고 그는 검을 집어넣었다.
공연히 무리해서 몸을 망치면 오히려 카이엔에게 방해가 된다.
할당된 시간을 모두 소모했으니 억지로라도 쉬어야 할 때. 그는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검술을 연습할만한 공간을 따로 마련해놓고 귀신이 나타난다 어쩐다하는 말로 사용인들을 겁줬으니 밤에 근처를 돌아다니는 이는 없을 것이다.
깜깜한 어둠 속.
내려놓은 등불을 집어 들고 그는 방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내일 아침 다시 씻을 테니 대충 물로 땀만 씻어낸 다음 침대에 누웠다.
다음날 바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카이엔의 옆에 딱 붙어서 시중을 들고 보필했다.
사리반이 없어도 카이엔이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았다. 에빌을 진작부터 교육해놔서 망정이지, 카이엔 혼자 했다간 며칠 밤을 새워도 무리였을 정도다.
슬쩍 옆을 보니 에빌은 평소처럼 다 죽어가는 얼굴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뭐라고 했더라, 일할 사람을 더 뽑자고 했던가?
지금은 타인을 경계해야 할 시기라 행정관을 뽑을 수 없다며 딱 잘라 거절했던 게 떠올랐다.
“사리반을 어떻게 해야 하지? 그놈들이 믿는 신이 사리반인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럼 단체명인가?”
좀 사그라들었다 싶으면 다른 데서 불쑥불쑥 나타나니, 미칠 노릇이었다.
한숨을 쉬며 카이엔은 사리반과 관련된 서류를 확인했다.
검은 숲과 맞닿아있는 북부를 다스리는 귀족들은 완전히 그의 편에 서기로 정한 건지 사리반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몽땅 알아내서 보내주었다.
세자르의 사람들이야 워낙 그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서 사리반에 대해서도 별생각이 없었다.
신전에서 만났을 때 물어보기야 했지만 그가 사이비라고 하니 ‘사이비구나~’ 라면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겉으론 아무렇지 않아도 속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카이엔은 주민들이 공포에 떨지 않게, 불안해하지 않게 진정시킬 계획을 짰다.
여기서 단연 돋보이는 건 비셰의 능력이었다.
몽마가 사람의 꿈을 조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불안과 악몽 또한 없앨 수 있었다. 처음 그 이야기를 하니 비셰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악몽은 맥들 전문이라서요. 걔네는 아예 악몽을 먹고 사니까… 필요하면 마계에서 몇 명 데려올까요?”
“응?”
“안 그래도 요즘 먹을 거 부족하다고 하던데.”
“데려와도 문제는 없을까?”
“인간계에선 영체화해서 돌아다닐 거니까요. 거주지는 필요하겠지만요.”
“알아볼게.”
티아마티스에게 부탁하면 어떻게든 해결될 것 같았다.
세자르는 비셰가 담당할 수 있어도 다른 지역은 맥이란 녀석들에게 맡길 수 있다면 맡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델라는 수면을 돕는 향초를 만들어서 신전 한쪽에 놓아두었다.
필요한 사람은 가져가라고 둔 건데 신전에 놀러 온 애들이 집에 향초를 가져가서 가지고 놀다가 불을 낸 적이 있어서 향초는 자기 전에 잠깐 피웠다가 끄고 자는 거로 사용법을 다시 알려줘야만 했다.
가장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는 곳은 에밀과 겔로스의 국경 부근이었다.
카이엔은 에밀의 소식을 기다렸고 그런 그에게 에밀의 승전보가 날아왔다.
폭삭 망해버린 겔로스와 근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리반이 침투하기 좋은 위치에 있었던 투아, 아피스의 사이비 세력과 맞서 싸우던 에밀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승전보가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에밀의 사신으로 메르실라가 다시 한 번 세자르를 방문했다. 그녀와 함께 사제와 성기사들도 왔는데 익숙한 얼굴은 메르실라 뿐이었다.
다시 만난 그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자마자 카이엔은 자리를 옮겼다.
“…에밀은 좀 어떻습니까?”
응접실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카이엔이 물었다.
그 물음에 메르실라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전쟁에선 이겼습니다. 다른 곳은 저희처럼 과격한 싸움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그녀 또한 전쟁터에 나갔었기에 메르실라는 생생한 증언을 해주었다.
에밀을 향해 진군하는 사리반을 막기 위해 성기사들은 물론이고 성녀와 성자도 무장을 한 채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곳곳에 퍼진 교인들의 돈을 바탕으로 무장한 사리반의 군대는 얕볼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괴이한 힘까지 써대니 경전에서 나오는 악마들을 보는 것 같았다며 메르실라는 몸을 떨었다.
“사람 같지 않은 이들이 지휘를 하고 있더군요. 성기사 님께서 신성력이 가득 담긴 창으로 찌르자 검게 녹아 사라졌습니다.”
“으음… 실은 저도 그런 자는 본 적이 있습니다.”
“네??”
“좀, 큰일이 생긴 곳을 도우러 갔는데 굉장히 불쾌한 기운이 느껴져서 신성력으로 화살을 만들어서 쏘니까 까맣게 변해 녹아버리더군요.”
“아, 신이시여. 그런 자들이 다른 나라에도 있었다니…”
메르실라는 진심으로 탄식했다.
“정말 위험한 자들이에요. 왜 이제서야 발견한 건지 믿을 수가 없어요. 그것 때문에 이단심문관 님들이 어찌나 자책을 하시던지.”
“…이단심문관이요?”
“백작님은 들어보신 적 없으신가요?”
“그냥 괴소문 같은 건 좀 들어보긴 했습니다만.”
“신을 모욕하거나 가짜 신을 모시는 이들을 벌하시는 분들이에요. 그 외에 악마숭배자나 사악한 흑마법사 또한 담당하고 계시죠.”
한 마디로, 삐끗했다간 그가 만났을지도 모르는 이들이라는 거다.
마른침을 삼키며 카이엔은 애써 평정을 유지했다.
“전쟁에서 이기고 그 기세를 몰아서 적진까지 쳐들어갔어요. 다시 그들이 힘을 모아서 혼란을 불러오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메르실라 님도 가셨습니까?”
“아뇨… 위험하다고 앞장서지 못하게 하고 후방 지원으로 나섰어요.”
주먹을 꼭 쥐고 열성적으로 이야기하던 메르실라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선봉에 서서 싸우고 싶었던 모양이다.
저번에 만났을 때보다 호전적으로 변한 것 같아서 카이엔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지금까지 만난 사제와 성기사들은 다들 차분하고 친절하던데 상대가 가짜 신을 모시는 이단 분자여서 그런지 용서가 없었다.
“그리고 앞장서서 달려 나가셨던 분들이 굉장히 수상한 걸 발견했어요.”
이렇게 말하며 메르실라는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카이엔에게 건넸다.
카이엔이 몇 장 넘겨보니 그 안에는 어린애 낙서 같은 스케치가 있었다.
이게 뭔가하고 메르실라를 쳐다보니 그녀가 말했다.
“혹시 촛불을 빌릴 수 있을까요?”
“여기 있습니다.”
바이스가 빠르게 촛불을 대령했다.
메르실라는 카이엔에게 건넸던 종이를 다시 받아 몇 장을 골라내 겹친 뒤 촛불 위에 올려보기도 하고 옆에 대보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빛을 비추자 얇은 종이에 진한 잉크로 그려진 그림이 섞여서 괴이한 그림을 만들어냈다.
석상과 제단. 제물.
사실적으로 그려진 그림은, 그린 이로 하여금 그것을 모조리 한 종이에 담지 못하고 부분부분 다른 종이에 나누어서 그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카이엔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메르실라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도 끔찍한 광경이라 차마 전부 담을 수는 없었어요. 종이 하나에 그릴 수 없어서 이렇게 여러 장에 나눠서 그릴 수밖에 없었고요. 이건, 거의 중심부까지 쳐들어가서 발견한 거예요. 사리반에 심취한 고위층은 악마 숭배자 만큼이나 끔찍하고 잔인한 짓을 저질렀어요.”
제가 직접 보진 못했지만, 이라며 메르실라는 운을 뗐다.
“주변에는 인골이 굴러다니고 벽은 피로 몇 겹이고 덧칠되어있어서 손을 대면 핏가루가 부서져 내리고 무거운 공기가 흐른다고 했어요.”
카이엔은 그림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악마들 취미가 괴상하긴 해도 이런 짓을 대놓고 저지를 미친놈은 보지 못했는데, 이건 다 그리모어…광대의 짓이 아닐까 싶었다.
악마들이 인간계로 넘어올 만한 일은 거의 없고 광대는 인간계에 죽치고 살았으니 그놈이 저지른 일이 악마가 벌인 일로 오해를 산 걸지도 몰랐다.
그가 마신의 사제라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만나본 고위 악마들은 꽤 고상한 성격이었으니. 물론 좀 미친놈 같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미친놈은 아니었다.
겨우 그림에서 눈을 떼고 카이엔이 말했다.
“직접 여기까지 오셔서 알려주신 것, 감사합니다. 많이 지치셨을 텐데.”
“괜찮아요. 이게 다 세상을 위한 일인걸요.”
“…전 사리반이 모시는 그 신을 없앨 겁니다. 물론 진짜 신은 아니지만요.”
“에밀이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아! 제 생각도 그렇지만 성왕 님 생각도 같으셔요!”
“그렇군요. 그런데 혹시 이 장소는 그 뒤에 어떻게 됐나요?”
“끔찍한 제단을 파괴하고 봉쇄했어요. 그러는 도중에도… 정신이 망가져서 미쳐버린 분도 계셨어요. 정말 불길한 곳이에요. 어떻게 그런 신전을 만드는 이를 신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건지, 저는 모르겠어요.”
형언할 수 없는 공포와 눈이 마주쳐버린 거다.
이전, 리치왕이 만났던 이들과 같았다.
그 미친놈은 천 년 전보다 훨씬 강해진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