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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197화 (198/219)

-197화

사리반에 심취한 자들을 광기에서 건져낸 뒤. 카이엔은 신성력을 기르기 위한 훈련에 임했다.

에밀은 지금 힘든 상황이라 그쪽으로 쉽게 갈 수도 없었고 사람을 보내 정보수집을 하는 것도 힘에 부쳤다.

천신의 사제 역시 사리반의 불길함을 알아채고 그들의 신성력으로 어떻게든 막아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들이 단단한 벽이 되어서 사리반의 본체와 맞서고 있었기에 그 뒤에 있는 나라들은 자국에서 간간이 일어나는 사이비 종교의 폭도들만 해결하면 되었다.

일하는 중간중간 기도 시간을 가지면서 성수를 만들어서 차곡차곡 쌓아두니 어느새 선반 하나가 꽉 찼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영지의 외벽 중간중간마다 성수를 배치하도록 했는데도 성수의 양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가시려고요?”

“밤에 한번 가보려고.”

빛을 나타내는 천신과는 달리 마신이 담당하는 건 밤의 어둠이었다.

낮이나 밤이나 기도하는 시간은 상관없었지만 밤에 가면 좀 더 낫지 않을까 싶어서 카이엔은 잠시 신전에 다녀오기로 했다.

살짝 인상을 쓰긴 했지만 바이스는 동행하겠다며 따라왔다. 그런데 혼자 가는 건 좀 걱정이 된 건지 잠시만 기다려주라고 양해를 구하더니만 엔베인을 데려왔다.

“왕자님을 지키는 덴 하나보단 둘이 나으니까요.”

“더 안 데려와서 다행이다.”

“다른 분들은 쉬어야죠.”

“엔베인은?”

“엔베인 님은 안 쉬어도 된다고 합니다.”

그 말에 카이엔은 실망스럽다는 눈으로 바이스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엔베인이 얼른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전 괜찮아요, 왕자님. 아시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기서 서 있지만 말고 어서 가시죠. 더 늦어지면 곤란합니다. 늦게 주무시면 안 됩니다.”

“알았어.”

바이스의 재촉에 카이엔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났다.

고작 셋이서 신전에 가는 건데 마차를 탈 필요는 없었다.

밤 산책도 할 겸 걸어가기로 하고 세 사람은 나란히 영주성에서 나왔다.

이전의 언데드 사태 때문에 세자르의 사람들은 늦은 밤에 외출을 피하게 되었다. 야간 순찰을 하는 경비에게 걸렸다가 혼나기 싫다는 이유도 있었다.

순찰을 하는 이들은 카이엔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수고가 많다.”

“왕…영주님은 어디 가십니까?”

“신전에.”

왕 영주님은 또 뭐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카이엔은 경비를 격려해주고 신전으로 향했다.

과거 사형을 집행하던 땅은 프라우디에가 제대로 땅 밑까지 솎아내줬고 그가 축성까지 해서 귀신이 나오지 않았다.

신전을 처음 만들었을 땐 동네 애들이 한 번씩 밤에 담력시험을 하러 오던 모양인데, 신전에 귀신이 나올 리가 없었다.

만약 귀신이 나온다면 사리반이 아닌 카이엔 자신이 사이비라는 뜻이나 다를게 없으니까.

밤에 온 마신전은 여전히 조용했다.

들고 온 등불로 앞을 비추면서 카이엔은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막 안에 발을 디뎠을 때 그가 말했다.

“나 혼자 들어갈게.”

“괜찮으시겠습니까?”

“기도하는 건데 뭐. 인기척이라도 느껴져?”

“아뇨.”

“금방 끝내고 올게.”

“지키고 서 있겠습니다.”

바이스와 엔베인이 신전의 입구에 서서 경비 역할을 했고 카이엔은 등불을 들고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밤이어서 그런가, 불빛이 없어서 묘하게 오싹했다.

왜 마을 아이들이 담력시험을 하겠답시고 찾아온 건지 십분 이해했다.

맨날 기도하던 자리에 도착한 그는 등불의 불을 근처의 촛불로 옮겨붙였다.

촛불을 여러 개 밝히니 순식간에 사방이 밝아졌다.

“후-”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는 양 손가락을 깍지껴 잡았다. 기본적인 기도의 손동작 중 하나였다.

마신은 그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고 믿어주라고 했다.

신도를 늘리라는 둥 좀 더 신 취급 해달라는 둥 요구 사항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 정돈 귀여운 수준이었다.

요즘엔 좀 연락과 간섭이 뜸한 것 같긴 하지만, 처음엔 별의별 일로 어찌나 말을 자주 걸었던지.

‘이제 질린 건가…’

좀 조용하다가 때가 되면 다시 말을 걸겠지.

카이엔은 그렇게 생각하며 평소처럼 기도했다.

바람이 불었다. 그 탓에 촛불 빛이 일렁거렸다.

싸늘한 바람에 그는 살짝 몸을 떨었다.

잠깐의 흔들림. 고작 그것뿐이었다.

그 사이에, 그가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제단의 위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생겨났다.

온통 검었다.

검고 검어서 인간의 형상을 띄고 있다는 건 분명했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다리를 느긋하게 까딱이고 있던 존재와 카이엔의 눈이 마주쳤다. 마주쳤다, 라고 생각했다.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살짝 고개를 들었다가 그 존재를 목도한 카이엔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누구지?”

“못 알아보면 서운한데. 계속 기도하고 있었잖아.”

인간의 형상을 한 자는 이렇게 답했다.

하나 카이엔은 길게 숨을 내쉰 뒤 말했다.

“아니.”

“당신이 아니다.”

“너는 마신이 아니야.”

확신에 찬 어조로 카이엔은 목에 힘을 주며 목소리를 짜냈다.

묘한 압박감에 짓눌릴 것만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갈라진 목소리에 적의를 담아 그가 입을 열었다.

“불길한 기운이야. 나를 속일 수는 없다. 네가 사리반을 만들었고 네가 신인 척 교묘하게 인간들을 홀리고 있었던 거야. 네가 그리모어를 만들었고 그런 네가 바로, 리치왕이 ‘광대’라고 부르며 적대하던 자겠지.”

고개를 꼿꼿이 들며 카이엔은 그 존재를 똑바로 응시했다.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형상을 띈 것. 까만 형체는 몸을 좌우로 크게 흔들면서 움직였다.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웃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지만 카이엔은 그자가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눈치가 빠르네.”

“내 눈이 단춧구멍도 아니고, 너랑 마신을 헷갈릴 리가 없지.”

애초에 마신은 이런 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꿈속에서, 힘을 최대한 억누른 상태로 꼬맹이 모습을 한 채 나타났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마음을 약하게 하는 데에는 신성하고 위압감 넘치는 모습보단 떼쓰는 어린애 모습이 나았다.

잠깐 딴생각을 하며 마신을 떠올리니 조금은 긴장이 풀렸다.

이대로 제단 위에 앉아서 그를 내려다보는 저놈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고 싶지 않아서 카이엔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자 검은 형상이 손가락을 아래로 내리그으며 말했다.

“앉아있어.”

단지 한 마디 말한 것뿐이었는데 저절로 무릎이 꺾였다.

카이엔은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다시 그는 그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상태가 되었다.

이 공간에는 그와 저 존재 둘 뿐이었다.

신에 필적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놈이니 바이스와 엔베인의 시선을 피하는 것쯤은 아주 손쉬웠을 터.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지?’

그가 고민에 빠졌을 때, 담담하고 나른한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그래, 그렇게 있는 게 낫겠다.”

고개 들지 말고, 라고 그가 덧붙였다.

정말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알지 못하는 힘이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길었다.”

“길고도 길었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시간을 허비했는지 알면 아마 깜짝 놀랄걸? 얼마나 물들어버린 건지, 처음 이 세계에 발을 들이밀었을 때와는 모습조차 달라졌다구.”

아, 내가 맞춰서 바꾼 건가? 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의 나는 그저 형체 없는 거대한 덩어리에 불과했지. 유동적으로 움직이면서 필요할 때마다 신체의 일부분을 조금씩 바꿔가면서, 몸집을 늘리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고.”

“생명체의 감각기관을 흉내 내어 세계를 파악하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감촉을 느끼고 가끔은, 맛을 보기도 했지. 이성을 가진 존재는 자신의 이해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보게 되면 미쳐버리고 말아. 발작해서 죽거나 폐인이 되어 버린 녀석들도 많았지만 극히 일부, 완전히 미쳐버리지 않고 한 톨의 이성이 남아있는 자들은 나를 신처럼 모시기 시작했지.”

그는 즐거운 듯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까지 이 세계에 존재한다. 내가 뭔지도 모르면서 떠받드는 녀석들을 이용하면 좀 더 쉽게 이 세계를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실상은 그리 큰 도움도 안 됐어. 네가 ‘리치왕’이라고 부른 그 존재도 결국엔 놓쳐버렸고 말이야. 지금은 그렇게 애를 써서 갖고 싶지도 않다고 해야 하나.”

“이미, 영혼에 너무 많은 손상을 입어버렸어. 잔뜩 흠집이 난 유리구슬을 아무리 잘 닦아놓는다고 해도 그 흠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리치왕이 봉인을 택했을 때 붙잡지 않았던 건가?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 난리를 친 거지?

묻고 싶었지만 입술이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카이엔은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신이 무슨 이유로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 같은 혼돈 역시 마찬가지. 신을 잡아먹으며 힘을 늘려나가고 결국엔 신이 되기를 추구한다. 이성이 없어도 계속 계속 생명을 먹어 치우다 보면 어느 순간 정신이 들게 돼. 처음 이 세계를 인식했을 때의 나와 처음으로 세계의 수호자를 만났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아주 많이 다르지.”

“수많은 신도가 있고 믿음이 있으며 경외가 있다. 내가 신이 되지 못할 이유가 있나?”

마치 그에게 질문을 하는 것 같았다.

카이엔은 입 안쪽을 깨물었다.

몸을 일으키고 싶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혀도 뻣뻣하게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무언가가 목을 콱 움켜쥐고 있는 것만 같았지만 가까스로 작은 틈을 비집고 열어서 그는 목소리를 흘렸다.

“바라는 게… 뭐야?”

고개를 들려고 했다.

잘되지 않았지만 억지로 몸에 힘을 주었다. 절반도 채 들지 못하고 반항하듯 노려보았다.

“헛소리 그만하고, 여기 온 목적이나 말하시지.”

그런 그를 보며 검은 형상은. 스스로를 혼돈이라고 칭한 자는. 신의 자리를 노리는 자는 웃었다.

“강한 힘을 가진 자는 좋지. 굳은 신념을 가진 자는 사랑스럽지. 자신이 믿고 있는 그 모든 것이 무너져내렸을 때, 눈동자 안의 이성이 산산이 부서지는 모습을 구경하는 건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을 정도야.”

그가 제단에서 내려왔다.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카이엔의 바로 앞에 선 그는 카이엔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무거웠던 몸이 쑥 들어 올려져서, 검은 형상은 억지로 카이엔이 그와 눈을 마주치게 했다.

그렇게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카이엔은 그자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까맣기만 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저히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그 모습에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제대로 쳐다보기가 힘들었지만 눈을 감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너는 이상한 인간이지. 어때, 날 따른다면 마신보다도 더 잘해줄 자신이 있는데.”

“…헛소리를.”

카이엔은 갈라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네가 죽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용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리치왕과 다시 만나고 싶어서 그 많은 일을 벌였던 아라스크조차도 진짜가 아니었다. 이 정체 모를 존재가 만들어낸 가짜며 허상이며 그림자였던 것이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내뱉은 말이었지만 예상외로 눈앞의 존재의 반응은 담담했다.

“흠? 그럼 안 되겠네.”

그는 순순히 손을 떼었다.

붙잡혀있던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져서 그대로 흘러내렸다.

“몸 한 군데 성한 곳이 없이 처참하게 부러지고 망가지면 생각이 좀 달라지겠지. 보아하니 인간도 인간 아닌 것들도 나를 찾아내기 위해 꽤 애를 쓰는 것 같던데 어떠냐, 나를 찾아오겠나?”

놀랍게도 그는 웃고 있었다.

“찾아와라. 기꺼이 맞이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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