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태양이 가려졌다.
단숨에 어두워진 주변에 조금전까지만 해도 광기에 차서 외쳐대던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거대하고도 신비한 존재. 강한 힘을 가진 존재가 나타나니 그제야 기가 죽은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누군가가 타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은 더욱 놀랐다.
평소 검은 망토를 휘날리고 다녔던 프라우디에는 흰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자그마한 잎이 달린 나뭇가지가 들려있었다.
작은 입이 열리며 영창을 시작했다.
노랫소리 같기도 한 목소리는 하늘을 날고 있는 드래곤의 위에서 외치는 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귀에 쏙 들어왔다.
그 목소리에 광신자들은 하나둘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았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풀려서 쥐고 있던 무기를 떨어뜨린 이들 중에선 잘못해서 제 발에 떨어뜨린 사람도 있었다.
“악!”
“어…어어?”
“우리가 왜 여기에 있지?”
“헉, 이건 뭐야! 왜 내 발밑에 도끼가…!!”
혼란이 퍼졌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왜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 알아내려고 했지만 여기 모인 이들 대부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외벽의 위에서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카이엔은 조용히 신성력을 모아 화살을 만들었다.
수많은 점처럼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질적인 모습을 한 이들을 향해 그는 활을 쏘았다.
신성력을 단단히 뭉친 화살에 맞은 사리반의 신. 리치왕은 광대라고 불렀으며 사탄은 그리모어라고 칭한 이의 사역마는 화살을 맞고 녹아내렸다.
옆에 있던 사람이 빛나는 화살을 맞더니 검게 변해 흐물흐물해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크게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이, 이게 뭐야! 으악!”
“괴물이다!!”
한두 명도 아니고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검게 녹아 사라지니 그들의 얼굴이 공포와 경악으로 물들었다.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해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이들을 향해 카이엔이 외쳤다.
“눈을 돌리지 마라. 악한 신이 나타나서 인간들을 꼬드기고 있다! 너희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게 하려는 것이다! 당장, 너희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거라!”
그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저절로 외벽 위에 있는 카이엔을 향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를 악마라고 매도하던 이들의 눈에 비쳤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 혼란 속에서는 정말로 악마처럼 보였던 이는 지금 빛나고 있었다.
“악신의 강림은 이 세계를 보살피는 신이 주시하고 있으니 그 신의 자식인 우리는 악신의 추종자를 경계하고 피해야 한다. 너희를 조종하던 이야말로 진정한 괴물이다.”
“빛과는 다르다. 어둠과도 다르다. 모든 죄악이 그러하듯 그 자 역시 선함의 가면을 쓰고 너희의 마음에 기생해 조종해왔다. 나는 이 땅에 단 하나뿐인 마신의, 어둠을 관장하는 신의 사제로서 죽음을 감시하고 경계하며 너희의 영혼이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을 막을 것이다.”
그들은 홀린 듯 성벽 위에 올라서 있는 카이엔을 바라보았다.
태양을 가리고 있던 금색 용이 성벽 근처로 날아가자 저절로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용의 등 위에 있던 흰 로브의 마법사는 조심스럽게 성벽에 발을 디뎌 카이엔의 옆에 섰다.
작은 체구의 소녀인지 소년인지 모를 아이의 손에는 나뭇가지가 들려있었다.
날붙이가 아니었다.
카이엔은 맨손에 신성력만을 가지고 있었고 곁의 아이는 회초리로도 쓸 수 없을 정도로 가느다란 나뭇가지만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바닥을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 다양한 날붙이들이 떨어져 있었다.
“공포를 경계하라. 두려움에 너희의 영혼을 내던지지 마라. 그것이 곧 너희를 집어삼키고 영혼마저 검게 물들일 것이다. 나 카이엔 이디에우스 아베르나는 마신의 대리인으로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해 제 뱃속으로 집어넣으려는 거대한 흉악을 무찌르겠다!!”
가만히 있어도 어차피 프라우디에를 노리고 덤벼들 테니 확실하게 해두는 게 나았다.
카이엔은 목소리를 높였다.
혼란에 차 웅성거리던 이들은 어느새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경외 어린 시선이 그를 향했고 카이엔은 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휘둘린 너희에게 죄가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너희 스스로도 잘 알 것이다. 돌아가라. 돌아가서 기도하여라. 너희를 가엾게 여겨 굽어살피는 천신께, 그리고 마신께 너희의 잘못을 낱낱이 고하고 용서를 구하라. 너희가 해를 입힌 이들에게 사죄하라.”
그렇게, 그는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그의 말에 몰려왔던 사람들은 하나둘 뒤로 물러났다. 힘이 빠진 듯 휘청거리면서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곳이 어딘지 조차 몰랐지만 계속 있을 수만은 없기에 물러났고, 그런 그들의 앞에 커다란 천막이 나타났다.
그 앞에 서 있던 금발의 여인이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작은 보따리를 내밀었다.
“이건…”
“가지고 가세요. 빈손으로는 돌아갈 수 없잖아요?”
비셰는 활짝 웃으며 한 명 한 명에게 보따리를 건넸다.
안에 든 것은 신의 심볼이 새겨진 작은 조각상과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마른 식량, 돈이었다.
고개를 숙이면서 사람들은 보따리를 받아 갔고 물물교환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에 들고 있는 날붙이를 내려놓고 터덜터덜 걸어갔다.
앞서가는 몇 명이 그렇게 하자 뒷사람들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무기를 버리고 보따리를 받아 갔다.
“다음에는 사이비 종교에 빠지지 마세요.”
“으음…”
“부끄럽구먼.”
비셰가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카이엔은 사리반이 이상한 힘으로 사람들을 현혹했다면 신성력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미 휘둘렸던 사람들을 보호 명목으로 성곽 안으로 들일 수는 없었다.
제정신을 차린 뒤라면 다시 돌려보내야 하는데 조종당한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만한 돈이 있을 리 없을 터. 그래서 넉넉하게 작은 보따리들을 준비했다.
나눠주는 건 비셰가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손을 들었다.
‘가까이에서 본다면, 잘 알 수 있으니까.’
그녀는 보따리를 건네주며 한 명 한 명 차분히 살폈다.
혹시라도 남아있을지 모를 조종과 세뇌를 경계했는데 카이엔이 신성력을 섞어 내지른 목소리며 프라우디에의 마법, 그리고 카이엔이 사람들 틈에 섞여 있던 사리반의 괴물을 없애는 것으로 이들에게 걸린 현혹은 모두 제거된 상태였다.
그렇게 몰려온 이들이 모두 돌아간 것을 확인하고 비셰는 카이엔의 곁으로 돌아갔다.
외벽의 위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에모도르 백작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말로, 카이엔은 저들을 진정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돌려보냈다. 그 과정에 다친 사람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이 사실이었구나.’
이전에 에밀의 사절단이 마신의 사제로 인정받은 카이엔을 만나러 왔다는 건, 귀족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알려진 상태였다.
새로운 신과 그 사제의 등장에도 에밀의 반응은 온건했다.
이전에 별의별 희한한 종교며 사이비의 등장에 격하게 반응하며 이단 토벌을 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정말로 마신이 존재하는 신이었기에 카이엔은 올바른 신성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왕자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고개 들고, 은혜를 갚고 싶으면 사이비 종교가 판치지 않게 잘해. …어딜 가던 빈곤한 이들은 있겠지만 그들이 의지하는 게 정체 모를 사이비 종교가 아니라 이 땅의 관리자여야 하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일단 원흉을 제거해야 할 텐데. 혹시 알아낸 게 있으면 나한테도 전하도록.”
“네! 그런데 왕자님… 정말 왕자님께서 그, 사리반이라는 종교를 없애시려고요?”
“할 수 있으면. 나보다 에밀이 빠를 수도 있고.”
“그렇군요.”
에모도르 백작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일은 그에게 맡기기로 하고 카이엔은 흩어진 일행을 다시 모아왔다. 나설 일이 없었던 글러티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카이엔의 옆으로 복귀했다.
“네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솔직히 너한테 그런 말을 했을 땐 놀랐어.”
“나도 놀랐어.”
“돌아갈 마법진을 그릴게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쪽에서 세자르로 갈 수는 없게끔 만들었던지라 프라우디에는 비셰와 함께 바닥에 새로운 마법진을 그렸다.
일회용이라 다른 사람이 쓸 수는 없을 거라며 마법진을 다 그린 다음, 그들은 빠르게 세자르로 돌아갔다.
이동 마법진으로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돌아간 그들을 보며 에모도르 백작과 휘하 기사들은 감탄사를 흘렸다.
“역시 대단한 분이시군…”
“이참에 종교 바꿔야 하나?”
카이엔도 모르는 새에 마신을 믿을 잠정적 신자가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세자르에 도착하자마자 카이엔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급한 불은 끈건가…”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요.”
“본거지를 알아내야 할 텐데.”
카이엔은 혀를 차며 힐끗 프라우디에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에밀의 상황을 알아보고 싶지만 메르실라가 그에게 전하려고 보내는 편지의 절반은 제대로 도착조차 하지 못했다. 그걸 알아낸 건, 그녀가 보낸 편지마다 날짜와 번호를 기재해서였다.
그녀의 편지만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카이엔은 개인적으로 정보 수집을 명령했다.
정령들이라도 잘해주면 좋을 텐데.
그는 잠시,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았다.
***
정령들은 자신들이 아라스크를 찾는데 별 도움이 안 됐다는 것에 미안해하면서 프라우디에에게 나뭇가지를 하나 건넸다.
지금은 자취를 감춘 세계수가 남긴 가지 중 하나라는데, 손에 들고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질 것만 같은 가느다란 가지였다.
흑마법을 버린 프라우디에의 눈에는 정령이 그 이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보였기에 그들과 소통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정령들이 직접 세계수의 가지를 가져다준 이유는 프라우디에의 정령 친화도를 급속도로 높이고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저번에는 늦어서 소식을 전해주지 못했지만 이번에야말로 도움이 되겠다면서 정령들은 의지를 굳혔다.
자연 속에서 정령들은 살아간다. 사막이나 늪이나 묘지에도 정령은 존재했다.
그런 정령과 소통할 수 있고 그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건, 세상이 그 사람에게 맞춰서 돌아간다고 해도 완전 허풍은 아닐 것이다.
정령의 미움을 샀다간 매끈하게 다듬어진 길을 걷다가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테고 열매가 맺힌 나무 아래를 지나가면 백퍼센트 확률도 머리 위로 나무 열매가 떨어질 테니까. 게다가 너무 익어서 썩은 열매가 떨어질 것이다.
상대가 세계를 집어삼키려는 녀석이니, 세계의 힘을 끌어올려서 맞서야만 어느 정도 상대가 가능하다는 뜻이겠지.
가지를 손에 들고 프라우디에는 힘을 가늠해보는가 싶더니만 이리저리 휘둘러보았다.
마력을 싣지 않고 그냥 휘적휘적 젓는 것만 같은 움직임이었다.
“써보진 않는 거야?”
“네. 마력을 증폭시킬 수 있으니 중요한 순간에만 쓸 거예요. 그 외의 상황엔… 그냥 위협용?”
살랑거리는 얇은 나뭇가지라서 위협이 될 것 같진 않았지만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바이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저희 쪽에도 반칙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강한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힘이 모자란 모양입니다.”
“응?”
“세계에 거주하는 드래곤도 있고 마왕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마왕의 경우엔 양쪽 세계가 장벽으로 가로막혀있어서 힘을 못 쓰지만 드래곤은 좀 도와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분이 나서서 될 일이었으면 진작 나서지 않았을까?”
“그 말도 일리가 있군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맞서야 할까.
정체도 확실하지 않은, 오히려 신과 같을지도 모르는 자를 상대로 우리는 이길 수 있을까.
마왕 대리전과는 달랐다. 상대는 훨씬 더 위험하고 지독한 자라는 걸 카이엔은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