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어두운 동굴 속.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기엔 너무나도 광대하고 넓은 동굴의 안은, 수정과 푸른 이끼가 횃불의 빛을 반사하며 번쩍거리는 빛을 내뿜었다.
푸르스름한 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심마저 들게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은 벽. 동굴의 깊숙한 안쪽.
푸른 불꽃이 넘실거렸다.
신의 모습을 조각한 석상의 앞에 고개를 조아린 인간의 수는 상당했다.
불꽃은 신이었다.
제 신앙을 숨기고 불꽃을 섬기고 있던 이들은 신의 부름에 한자리에 모였다.
드넓은 동굴 안을, 부복한 이들이 꽉 채우고 있었다.
섬뜩한 느낌이 드는 불꽃을 신으로 받드는 이들은 정상이 아니었다.
불꽃이 확 타오르며 허공에 글씨를 새겨나갔다.
타오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던 이들의 입에서 헉, 하고 숨을 참는 소리와 함께 잇새로 흘리는 신음이 뒤섞였다.
알아볼 수 없는 언어로 글자가 빠르게 적혀나갔다.
허공에서 형체를 이루고 있던 수많은 글자는 이내 사그라들고, 한 단어만이 남았다.
성전.
그리하여, 이교도들은 그들의 신이 바라는 대로 성전을 하기 위한 준비에 나섰다.
천신을 향한 선전포고와 교단을 향한 전쟁.
그들은 맨 먼저, 성국 에밀을 노렸다.
신앙의 집결지이자 가장 강대하고 위험한 적을 먼저 쳐서 없앤다면 그 뒤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다.
왜곡된 신앙을 막을 수 있는 건 이 자리에 없었다.
***
조용히 퍼져나가고 있던 사이비 종교인 ‘사리반’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간 몰래 모아왔던 신도들을 앞세우고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신을 모시는 신도라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성전을 입에 올리며, 그들은 성국 에밀을 공격했다.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말은 ‘거짓된 신을 몰아내자’였다.
주로 하층민으로 이루어진 집단이지만 추적한 결과, 위로 올라갈수록 돈 많은 상인이며 귀족들도 보였다. 그들은 다른 나라가 에밀을 돕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사리반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에밀은 이에 무력으로 맞서기보단 일단 대화로 해결하고자 했다.
괴이한 신앙에 빠져있을 뿐 저들 역시 구원해야 할 대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나 대치하던 도중 내부에서 배신자가 나오는 바람에 허무하게 국경을 수비하는 방벽이 뚫렸고 결국 검을 들게 되었다.
현혹된 이들마저 구해내겠다는 고결한 의지를 가지고 에밀의 군대는 사리반에 맞섰다.
그리고, 그들은 사리반의 교인들이 내뿜는 신성력 비슷한 기운에서 불길하고 끔찍한 힘을 느꼈다.
카이엔의 신성력이 어둠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따뜻한 느낌이 들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저들이야말로 신의 적이며 그들이 물리쳐야 할 대상이라면서 에밀은 더욱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사리반은 곳곳에 숨어든 상태였다.
사방에서 이교도들이 합세하면서 전선이 밀려 나갔고 다른 나라에서도 그런 식의 폭주가 일어났다.
귀족 중에서도 이교도가 나타났고 이것은 성전이며 신에게 바치는 피이며 장차 그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세우는 데 꼭 필요한 희생이라고 외쳤다.
가르간트 왕실에서도 그런 민중을 제압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처음에는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무기를 쥐었던 이들의 싸움은 점점 격렬해졌다.
“…보고만 있을 수 없는데.”
세자르는 무사했다.
애초에 이곳은 마신의 신전이 위치한 곳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세자르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마신을 믿는 건 아니었지만 사이비나 이단 종교에 빠질 만큼 정신력이 약한 이들은 없었다.
사방에서 사리반을 막느라 난리가 났는데 이곳만은 멀쩡하다는 것에 카이엔은 찝찝해졌다.
“바이스.”
“네.”
“내가 끼어들고 싶은데… 괜찮을까? 휘둘릴 민간인들이 걱정돼. 주변을 둘러싼 상황이 악화될수록 휘말리는 사람들이 늘어날 거야.”
“어쩔 수 없군요. 영지 내로 들어오려는 침입자를 경계하고 있긴 하지만 지금까진 별문제 없었으니까요. 격전지로 가시겠습니까?”
“응. 그편이 낫겠어.”
“동행인을 골라야겠군요.”
카이엔이 결정을 내리자 바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카이엔과 함께 가르간트 내에서 사리반과 가장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 버티고 있는 곳으로 갈 사람을 정했다.
글러티나, 프라우디에, 자네인, 비셰였다.
글러티나는 만약의 상황에 그가 자리를 비웠을 때 카이엔을 지키기 위함이었고 비셰에겐 사리반에 빠진 이들의 정신 상태를 보이기 위함이었다.
가르간트 곳곳이 사리반으로 인해 홍역을 앓고 있었지만 그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왕국 지도를 짚어가면서 바이스가 말했다.
“실시간으로 정보가 갱신되고 있어서 장담은 못 하지만 나트폰트라 변경백령이 정리되고 있는 건 기억하고 있으시죠?”
“내가 바본 줄 알아?”
“하하. 그쪽보다는 좀 더 안쪽 지역이 문제입니다. 언데드에게 아슬아슬하게 피해를 당하지 않은 지역이죠.”
“의외네.”
“언데드의 습격을 받은 곳은 몰살당했으니까요. 저희가 간다는 말을 전하겠습니다. 저희가 도착할 때까지 더 버티라고 해야죠.”
“할 수 있겠어?”
“사역마를 쓰면 된다고 하더군요.”
사역마를 통해 서로 대화를 할 수 있는 마도구를 전달하면 그 뒤부터는 수월할 것이라고, 바이스는 말했다.
사역마나 마도구 같은 건 비셰가 제공할 수 있었다. 아스모데우스는 이런 데 쓰라고 그녀에게 마도구를 제공하진 않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비상사태니까.
준비를 마친 그들은 비밀리에 세자르를 떠났다.
목표 지점은, 세자르보다 남쪽에 위치한 라이엔 후작령에 속한 지역인 에른이었다.
복잡하게 마차며 물자 준비를 해갈 필요는 없었다. 그쪽에도 마법사가 있었기에 비셰와 프라우디에가 지시한 대로 이동 마법진을 구축해놓았다.
세자르에서 에른으로 이동하는 건 문제없지만 에른에서 세자르로 이동하는 건 막아놓고, 마법진이 문제없이 작동한다는 걸 확인한 다음 그들은 순식간에 에른으로 이동했다.
“아이고, 왕자님. 이런 곳까지 직접 와주시고…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왕자로서 온 건 아닌데.”
에른의 담당자는 라이엔 후작의 친척인 카를 에모도르 백작이었다.
덕분에 후작가의 지원으로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힘들게 버티는 와중에 도와주겠다고 카이엔이 손을 내민 건 그들에겐 구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연신 고개를 숙이는 백작을 보며 카이엔이 말했다.
“바로 확인하고 싶은데. 괜찮은가?”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작위를 따지고 들면 두 사람은 비슷했지만 카이엔이 왕족이기 때문에 에모도르 백작은 깍듯이 카이엔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뒤를 동행한 일행이 뒤따랐다.
세자르를 담당하는 왕자의 곁엔 이종족이 함께한다는 소문은 이미 온 나라에 퍼진지 오래기에 영주성의 이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물론 대놓고 쳐다보진 못하고 힐끔거렸다.
마차를 타고 방어전이 한창인 외벽으로 향하면서 에모도르 백작은 다시 한번 영지의 상황을 알렸다.
사리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폭도들은 개개인만 보면 힘없는 일반인이지만 떼로 몰려들어서 무기를 휘두르며 불붙인 장작이나 화살을 던진다고 하였다.
그런 그들이 외벽을 넘어 영지로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병사들 또한 화살을 쏘거나 뜨거운 물을 부어서 그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았다.
무력 진압을 해보긴 했지만 죽을 각오를 하고 떼로 덤벼드는 사람들인지라 막기가 어려웠노라 그는 실토했다.
“기사들 잘못은… 없겠지. 일단 적은 사이비 종교에 휘둘리는 민간인이니까.”
“면목이 없습니다.”
“내가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무력 진압밖에 없어.”
제정신을 차리게 할 수 없다면 죽이는 수밖에 없다.
그 말을 꺼내는 카이엔의 표정은 어두웠다.
사리반이 믿는 신으로 짐작되는 이가 있었다.
이미 예전부터 신인 척, 신 노릇을 하던 놈이니 사람들을 현혹하는 건 쉬웠을 터였다.
영지와 영지가 아닌 곳을 가르는 외벽에 가까워질수록 함성이 커졌다. 밖에서 난동을 피우는, 조종당하는 이들의 목소리였다.
외벽에 도착한 그들은 먼저 바깥의 상황부터 살폈다. 각자 손에 무기로 쓸 것들을 들고 있는 이들은 눈에 핏발이 서서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물러서지 않는다! 부유한 이들만을 비호하는 신은 진짜 신이 아니다!”
“우리야말로 진정한 신을 믿는 신도다!”
그 말에 카이엔은 기막혀하며 에모도르 백작을 보며 물었다.
“최근에 세금이라도 올렸나? 아니면 착취?”
“아닙니다! 나트폰트라 변경백령이 완전히 제 기능을 잃으면서 근접 지역 모두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데 치안을 나쁘게 만들 일을 할 리가 없죠!!”
“그럼 왜 저러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쪽 지역 사람이 아닌가?”
그가 지금까지 만난 사제들은 선한 이들뿐이었다.
세자르에서 메르실라와 사제들이 무료 진료소를 열자 타지역에서 심각한 질환을 앓는 이들까지 찾아왔고 그들은 아무리 심한 상처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손을 가져다 댔다.
에밀의 사제며 성기사가 모두 융통성 있고 선한 이들은 아닐 테지만 지금까지 그가 만난 이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이종족이며 마신의 존재도 인정해줬고.
무언가 있는 것 같다며 카이엔은 함께 온 이들을 보며 말했다.
“좀, 수를 써야겠는데.”
“맡겨주십시오.”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의견을 정리한 뒤 카이엔은 에모도르 백작에게 말했다.
“내가 직접 살피겠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런데 카이엔의 뒤를 따라오는 건 바이스와 글러티나 뿐이었고 나머지 셋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것에 에모도르 백작이 의아해하자 카이엔이 말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 거니까 염려 말도록.”
“아, 네.”
도움받는 입장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노릇.
에모도르 백작은 완전히 카이엔에게 굽히고 있었으므로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세자르가 지휘관인 왕자의 능력으로 대규모 언데드의 습격을 막아낸 건 굉장히 유명한 일이었다. 지금은 비록, 상대가 언데드가 아니라 인간이긴 하지만 무슨 방법이 있으니까 도와주겠다고 손을 내민 거겠지.
그는 카이엔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눈빛에 바이스가 카이엔에게 소곤거렸다.
“저 사람은 왕자님을 완전히 믿고 있군요.”
“믿어주면 좋지.”
솔직히, 잘 될지는 그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바이스가 하던 대로 죄다 죽여버릴 수는 없으니 일단 대화를 해볼 셈이었다.
외벽으로 올라선 카이엔은 아래를 까맣게 메울 정도로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며 혀를 찼다.
‘엄청 많네…’
다 어디서 온 사람들이지? 가르간트 사람은 맞나?
사리반은 곳곳에서 사람들을 조종해 성전이라는 이름 아래 무차별적인 공격을 시행했다.
여기 있는 이들이 모두 가르간트 국민일 거란 생각은 버리는 게 나았다.
조심스럽게 그는 외벽의 난간 바로 앞까지 걸어갔다.
“무기를 내려라! 이곳을 공격하러 온 목적이 뭐냐!”
그의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그에게 쏠렸다.
검은 머리카락, 검은색 일색인 옷차림.
그 모습에 누군가가 외쳤다.
“왕자다! 괴물을 부리는 왕자다!”
“어둠의 추종자가 종말을 불러올 것이다!”
“뭐?”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어서 카이엔이 반문했고 그 말을 들은 이들은 무기를 든 손을 휘두르며 외쳤다.
“역시 우리가 옳았다! 거짓된 신을 몰아내고 우리의 진정한 신께서 그 자리에 오르실 것이다!”
“와아아-!!”
말이 안 통한다.
카이엔이 당황해서 눈만 깜빡이고 있자 옆에 서 있던 바이스가 그에게 속삭였다.
“왕자님. 몰려있는 게 한꺼번에 해치우기 딱 좋은데, 악마들한테 부탁해서 저 밑에 구멍 하나 뚫어주라고 하면 안 됩니까?”
“미쳤냐? 그럼 내가 저놈들이 말하는 대로 되는 거잖아.”
어이없는 말이지만 덕분에 정신이 들었다며 카이엔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의 눈에는 사이사이에서 바람잡이 역할을 하는 ,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자들이 뚜렷이 보였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통 인간으로 보일 테지만 그의 눈에는, 검은 기운에 감싸여서 도무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마 저런 놈들이 곳곳에 끼어있어서 사람들을 조종하고 있을 것이다.
목소리에 신성력을 담아서 카이엔이 입을 열었다.
“진정해라! 네 것이 아닌 감정에 네 몸을 맡기지 마라!”
“사악한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라! 저 모습을 봐라, 악마나 다름없다! 저 까만 머리칼과 핏빛 눈을 보라!”
“아니 난 원래 이렇게 태어났거든?!”
악마들도 뭐라고 하지 않은 그의 외모에 무슨 트집이람.
하지만 지금 그런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신성력을 담은 목소리도 너무 작아서인지 잘 통하지 않았다. 그것에 혀를 차며 카이엔은 바이스에게 지시했고 바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곳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일행의 힘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선동하기 쉬운 타겟이 등장해서일까. 바깥의 이들은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한마음 한뜻으로 외쳐대는 말에는 광기마저 느껴졌다.
그 소란은 태양을 가릴 정도의 거대한 몸체를 가진 드래곤의 등장에야 비로소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