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루레이스, 그리고 프라우디에.
한 몸에 있는 두 사람과 사탄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긴 이야기를 마친 다음 프라우디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네.”
사탄이 손가락을 튕기자 닫힌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 탓에 바깥에 서 있던 가미긴이 깜짝 놀라서 안을 들여다보았고 눈이 마주치자 사탄이 손짓하며 말했다.
“끝났으니까 데려다주세요. 앙그라 마이뉴한테는 제가 말할게요.”
“아, 문만 열어주셔도 돼요.”
“혼자 가도 되겠어?”
“네. 괜찮아요.”
“하는 수 없지.”
혼자 가도 된다는 사람을 억지로 따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가미긴은 즉시 세자르로 연결되는 문을 만들어냈다.
문앞에 서서 잠시 망설이던 프라우디에는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리고 열린 틈 안으로 들어갔다.
눈을 감았다가 뜨는 것만으로, 주변의 배경이 바뀌었다.
가미긴은 저택 바로 앞과 연결되게끔 공간을 연결해줬고 프라우디에는 머뭇거리다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카이엔을 만나야 했다.
저택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그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아무래도 그의 실종 사실이 저택의 사용인들에게까지 알려진 모양이었다.
그들을 진정시키며 프라우디에는 카이엔의 집무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그 안에는 카이엔과 바이스, 에빌이 있었다.
“누구…어!!”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서류에 서명을 하던 카이엔은 프라우디에를 보고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집무실의 오른편에 위치한 책상 앞에서 다 죽어가는 얼굴로 카이엔의 업무를 돕고 있던 에빌은 제 뺨을 꼬집었다.
멀쩡한 건 바이스뿐이었는데 아마 그가 걸어오는 발소리를 들어서일 거라고 프라우디에는 추측했다.
“프라우디에! 다행이다, 몸은 괜찮아?”
“네. 악마분들이 도와주셨어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 무사해서 다행이다… 정말로…”
“에헤헤.”
멋쩍은 웃음을 흘리는 프라우디에였지만 동그란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를 구하기 위해 다들 위험을 무릅썼고 카이엔과 비셰는 라이프 베슬을 이식한 가짜 몸의 정신에 접촉하기까지 했다.
그때 그가 티아마티스의 손에 부서졌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문제가 되는 라이프 베슬을 파괴했다면 이런 위험한 일이 생겼을 리가 없는데.
다들 그를 염려하기만 하고, 이 일의 원흉이라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미안하고 고마워서 얼굴을 보게 되니 저절로 눈물이 뚝뚝 흘렀다.
프라우디에가 울기 시작하자 카이엔은 허둥지둥 겉옷의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 작은 얼굴을 닦아주었다.
“울지 말고. 정말 괜찮은 거 맞지?”
“…네.”
더 말했다가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서 프라우디에는 짧게 대답했다.
프라우디에가 감정을 정리할 때까지 다들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눈물이 멎자 프라우디에는 카이엔이 준 손수건으로 눈을 꾹꾹 눌렀다.
“왕자님께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그래. 일단 앉자.”
“어… 나는 나가 있을까?”
“그냥 있어.”
눈치를 보면서 에빌이 묻자 카이엔이 말했다.
그 덕에 바이스를 제외한 세 명은 집무실 내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바이스는 앉으라는 말에도 꿋꿋이 카이엔이 앉아있는 의자 뒤쪽에 서 있기를 고집했다.
“…눈을 뜨고 나서, 전 마왕님과 이야기했어요. 사탄 님이요.”
“그랬구나.”
“리치왕과도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 사람은 광대라고 불렀고 사탄 님은 그리모어라고 칭한, 신에게 맞서고 신을 죽일 수도 있고 세계를 삼키는 그 존재는 보다 수월하게 자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저를… 정확히는 리치왕을 노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것 때문에 천 년 전, 그 사건이 일어났다며 프라우디에는 조용히 그가 들은 내용을 전했다.
이전에 정신세계에서 리치왕을. 루레이스를 만나 대강의 사정을 전해 들었던 카이엔은 다른 두 사람보다 쉽게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요령이 없던 그녀는 낙인이 찍혀서 추적당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제 육신을 버리고 리치가 되는 것을 택했다. 그러나 그녀의 적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천 년이나 지난 지금 또다시 과거와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제가 죽는다고 해서 바로 세계가 부서지진 않을 거예요. 제가 없으면 좀 더 자기 목적을 이루기 쉬워지니까 노리는 걸 테고…”
“막 눈을 떴을 텐데, 무리하는 거 아냐?”
“괜찮아요. 비상사태잖아요.”
프라우디에는 가만히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작은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새까만 연기가 몽글몽글 형체를 이루면서 주먹만 한 커다란 구슬이 만들어졌다.
빛을 빨아들이는지 광택조차 없는 새까만 구슬을 내밀며 프라우디에가 입을 열었다.
“이게, 제가 가지고 있는 흑마법의 정수예요. 정령들은 죽음의 기운이 넘치는 이 힘을 본능적으로 피하게 되어있어요. 저는, 이걸 부숴 없앨 거예요.”
리치왕이 하지 못했던 일이다.
같은 영혼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루레이스와는 달리 죄 없는 이의 피를 묻히지 않은 그는,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힘이 없다고 해도 괜찮으니까. 그는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좀 더 정령의 기운을 잘 느낄 수 있을 테고 제가 들을 수 없었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 거예요.”
“괜찮겠습니까?”
“네. 이편이 나아요. 언데드가 나타난다고 해도 이젠 왕자님이 해치우실 수 있잖아요.”
바이스의 물음에 프라우디에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그의 손 위에 있는, 그의 몸에서 빼낸 마력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없으면 그는 이제 더이상 흑마법을 쓸 수 없다.
그의 정신에는 라이프 베슬의 원래 주인인 리치왕 루레이스의 인격과 그녀가 말하길, 그녀가 흑마법사가 되면서 잃어버린 인간이었을 적의 인격인 그, 그리고 리치왕이 그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으로 만들어낸 가짜 리치왕의 인격이 있다.
가짜 리치왕의 인격의 도움으로 만들어낸 흑마법의 그릇을 들어내어 부순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더이상 흑마법사가 아니다.
목숨을 가지고 놀지 않았다.
필요 없는 살생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것에 걸고 그는 흑마법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작은 두 손 위에 올려진 흑마법의 정수에 금이 가더니 이윽고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무언가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텅 빈 것만 같은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프라우디에는 카이엔을 바라보았다.
걱정한 기색이 역력한, 그러면서도 그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할까 봐 아무 말도 못 하는 그를 보며 프라우디에는 웃었다.
“왕자님. 저 정말 괜찮아요.”
“…응.”
“다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죄송해요.”
“네 잘못이 아니야. 넌 잘못한 거 없어.”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요. 여러모로 정보가 모자라긴 하지만요.”
리치왕조차 없애지 못한 자가 그들의 적이다.
강해져야 했다.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야 했다.
리치왕은, 루레이스는 혼자였다.
그녀를 따르는 이들은 많았지만 루레이스는 가장 중요한 부분까지 그들에게 알려주지 않고 혼자서 광대를, 그리모어를 해치우려고 했다.
그 결과 온 세상이 적으로 돌아서 버린 탓에 실패해버렸다.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이들은 진짜 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이렇게나, 그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루레이스가 그에게 이 일을 맡긴 걸지도 몰랐다. 자신은, 그저 영혼 깊숙한 곳에 눈을 감고 잠든 채로…
루미나르. ‘루미나’는 그때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눈앞의 공포에 정신이 부서지고 영혼에 금이 갔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분리해냄으로써 버틸 수 있었다.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루레이스’는 ‘루미나’를 대신해 앞에 나서서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루레이스가 지켜줬기에 지금의 그가 있을 수 있다. 물론 루레이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렇게 믿었다.
그날, 저녁 식사는 모두 함께했다.
프라우디에가 돌아온 것을 알고 다들 울면서, 웃으면서 그를 맞이해주었다.
그가 더이상 흑마법을 쓸 수 없다는 것에 모두 놀랐고 정령이며 세계의 의지 같은 이야기를 듣고 나선 더욱 놀랐다.
천 년 전에 마무리 지어지지 못한 싸움이 이제 와서 다시 시작된다는 말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쩔 수 없네. 이겨야지.”
“아- 왕자님은 큰일이네. 이게 산 넘어 산이라는 건가?”
“저희만으로 괜찮을까요?”
“지금은 괜찮을 겁니다. 과거 리치왕은 그 광댄지 뭔지 하는 놈들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마저 적으로 돌렸지만 왕자님은 다르니까요.”
“하긴 신전이 있지?”
신전은 이 땅의 유일한 마신 사제인 카이엔을 인정하고 적대하지 않았다.
저 하늘 위에서 마신과 천신이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계시를 뿌려댄 결과였다.
그리고 프라우디에가 흑마법을 포기한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의 눈에 꺼림칙하게 보일만 한 것도 없었다.
“이번에는 선공을 하고 싶다면 역시 적의 행방이 묘연하군요. 방법이 없을까요?”
“아, 저번에 정령왕한테 부탁하긴 했는데. 그 아라스크란 사람은 가짜였으니까…”
“하하. 왕이라고 해서 다 도움이 되진 않는군요.”
바이스의 말에 그리델라는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괜히 어깨를 움츠렸다.
“그, 그치만! 어떻게든 도움을 주겠지! 세계가 망하면 다들 죽는 거잖아! 우리만 망하는 것도 아니고 죄다 망하는 건데!”
“그럼 그쪽에 걸어보도록 하죠.”
“프라우디에 넌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지금까지 썼던 마법을 못 쓰게 되는 건데…”
“다른 마법을 공부하려고요. 예전에 티아마티스 님이 주고 가신 책들이 많거든요.”
흑마법 말고 다른 마법도 많으니 괜찮을 거라며 프라우디에는 웃었다.
그것 말고도 그는 배워야 할 것이 산더미였다.
가장 기본적인 정령 교감부터 시작해야 했다.
막 흑마력을 버린 그에게 바로 다가올 만한 정령은… 하나 있었다.
어둠의 정령.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루레이스를 포기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았던 아이.
비록 천 년이란 세월이 흘러 그때 그 정령은 이미 소멸하고 다른 어둠의 정령들이 그 자리에 있겠지만, 어둠의 정령이라면 가장 먼저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믿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프라우디에는 정원으로 나갔다.
잘 정돈된 정원수와 화단 사이사이에서 작은 빛 덩어리들이 하나둘 바람을 타고 두둥실 떠올랐다.
작고 동그란, 까만 빛 덩어리들이 프라우디에를 향해 날아왔다.
그를 힐끔거리기도 하고 주변을 맴돌기도 했다. 그 작은 정령들을 향해 프라우디에는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정령과 닿자 정령은 깜짝 놀라 파르르 떨다가도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왔다.
“안녕.”
프라우디에가 먼저 입을 열어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한 얼굴로 프라우디에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안녕.”
이번에는 정령들도 그의 말에 대답해주었다.
- 안-녕?
- 보여?
- 보이는 거야?
곧,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보인대! 보인대!
- 와!
- 처음이야. 나 이런 인간은 처음 봐.
정령들은 즐거워하면서 프라우디에의 주변을 뱅글뱅글 돌았다.
그런데 그에게 몰려든 어둠의 정령 중 일부는 프라우디에에게 다가갔다가 멀어지는 것을 반복하다가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돌린 그는 저만치에서 걸어오는 카이엔을 발견했다.
“왕자님?”
“어… 정원으로 가길래 무슨 일 있나 해서.”
“확인해볼 게 있어서요.”
웃으면서 프라우디에가 말했다.
티 없이 맑은 웃음에 카이엔도 마음을 놓았는지 표정이 풀어졌다.
그러나 프라우디에가 웃은 건 카이엔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날아갔던 어둠의 정령 몇 마리가 카이엔에게 붙어있었다.
카이엔은 그걸 모르는지 정령들이 그의 머리카락에 달라붙어서 장난치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계속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아서 프라우디에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 왕자님…”
“응?”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정령은 안 보이시죠?”
“정령? 여기 있는 거야?”
“네.”
“모르겠는데. 소리도 안 들려. 내가 알아듣는 건 몬스터가 하는 말뿐인 모양이야.”
귀신이나 정령은 그의 이해 범위 밖이었다.
하지만 카이엔과 소통할 수는 없어도 정령들은 그가 꽤 맘에 드는지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음… 혹시 곤란한 일 있으면 바로 말해줘. 내가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할게.”
“네. 꼭 그럴게요.”
떼어줘야 하나 고민하던 프라우디에였지만 카이엔이 몸을 돌리고 가버리자 정령들을 떼어줄 수 없었다.
그래도 작은 정령들이고 해를 끼치진 않을 것 같으니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프라우디에는 그의 어깨에 앉은 정령을 바라보았다.
흑마력을 버린 뒤에야 그는 정령을 보는 눈을 뜰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왕자님의 곁에도 계속 있었던 걸까?’
워낙 작은 정령들이니까.
어둠의 정령이 루레이스를 바라보기만 했던 것처럼. 이 정령들도 이 주변에 항상 있었지만 이제야 그가 발견한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곳에는 참으로 정령들이 많았다.
해가 진 뒤 나타난 어둠의 정령들도, 땅속에서 잠자고 있는 대지의 정령들도. 꽃 속이나 나뭇가지 사이에 숨어있는 바람의 정령들도.
몬스터뿐만이 아니었다.
몬스터와 이종족 뿐만이 아니라, 더 많은 존재가 세자르에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