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자세한 건 그 아이가 눈을 뜨면 서로 이야기해보세요. 다른 몸을 얻었어도, 연금술과 흑마법을 배운 아이여도 잘한다면 숨어있는 정령들을 발견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편이 나을까요…”
“만약 그리모어가 마계에서 손을 쓸 수 있는 범위 내에 들어온다면 저희도 돕겠습니다. 지금 마왕은 앙그라니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겠지만요. 뭐, 아스모데우스의 경우엔 릴리트가 당신 곁에 있으니 자기 몸 반쯤은 날릴 각오를 하고 도와줄 수도 있겠지만요.”
“실례되지만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바이스가 공손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탄이 발언권을 주자 바이스는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비셰 씨는 현재 본의 아니게 몽마의 왕의 자리에 위치해 있다고 합니다. 그런 그녀 역시 고위 악마에 속할 텐데 인간계에 이이상 개입해도 되는지요.”
“뭐, 릴리트가 사라진 뒤 몽마들의 힘은 급격히 약해졌고 환생했어도 영 힘이 떨어지는지라… 별문제는 없어요. 말 나와서 하는 건데, 하위 악마의 경우엔 인간들도 무찌를 수 있을 정도라서 인간계에 개입하는데 제약이 거의 없습니다. 저희 같은 상위 개체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힘의 90% 이상 제약이 걸릴 겁니다. 그래서 대리전 때 벨레드는 자신이 대리인으로 택한 언데드의 몸에 빙의하는 식으로 목소리를 드러냈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아슬아슬했어요.”
“아…”
약하니까 괜찮다는 거구나. 악마로서 급이 낮으니까.
비셰의 취급이 여기서도 그리 좋지 않다는 게 안쓰러울 정도였다.
“인간의 정신은 약합니다. 그자는 그것을 노리고 그 틈을 파고들어 제 수족을 늘려나가고 있어요. 리치왕이 자기 의지로 봉인을 받아들여 눈을 감은 이후론 다른 소일거리를 하고 지낸 모양이지만 그녀의 존재를 확인했으니 다시 난동을 부릴 확률이 높아요. 그녀를 가지려고 할 테니까.”
“저희가 일찍 공격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군요.”
“문제는, 그쪽은 당신들의 위치를 알지만 당신들은 그걸 모른다는 거예요. 그건… 저희 악마 쪽에서 돕기로 하죠.”
전투에 참여할 순 없지만 정보수집 정도야 할 수 있었다.
비록 물러난 전 마왕이지만 적은 인간계는 물론이고 천계, 마계까지 위협하는 존재였으니 끼어들 이유는 충분했다.
“당신은 당신이 하던 대로 계속 움직이면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당신은 그때와 같으니까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프라우디에가 눈을 뜨면 돌려보내 주겠다는 말을 끝으로 그가 손을 흔들자 카이엔과 바이스의 주변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멀미가 날 것만 같은 풍경에 눈을 감았다가 뜨니 그들은 어느새 집무실에 서 있었다.
갈 때는 제멋대로 돌려보내기냐.
짧게 한숨을 쉬고 카이엔이 말했다.
“시간은… 얼마 안 지났네.”
“그렇군요. 흠, 경계 태세를 풀지 않아야겠습니다. 정보수집도요. 당분간은 또 시중을 들지 못하겠군요. 글라스 씨에게 맡기겠습니다. 영주 일은 이제 에빌 님도 잘하고 계시고요.”
“…다치고 오진 마.”
“제가 다칠 것 같나요?”
“아니.”
“이상한 말씀을 하셨군요.”
빙긋 웃으며 바이스는 시계를 확인했다.
그들이 자리를 비운 지 한 시간 정도 지난 뒤였다.
세자르에 오자마자 다시 지옥에 다녀온 지라 그가 말했다.
“왕자님은 방에 가서 쉬십시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셨는데 드시고 싶은 건 있으십니까?”
“딱히 없는데.”
“그럼 저녁은 완두콩 스프로 하겠습니다.”
“…딴 걸로 해줘.”
질색하는 모습에 바이스는 웃으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식탁에는 감자 강낭콩 스프가 올라왔고 카이엔은 얼굴을 구겼다.
***
흔히 실험실이라고 한다면 잡다한 물건으로 가득 찬 곳을 상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악마, 가미긴의 실험실은 그것과 조금 달랐다.
마계에서도 어느 정도 지위를 가진 그는 보유한 실험실만 해도 다섯 개는 되었는데 개중에서도 생물을 다루는 실험을 하는 곳의 내부는 정갈하게 정리되어있었다.
철제 선반 안에는 필요한 재료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있었고 사용법을 짐작할 수 없는 기계들이 가득했다.
그것들은, 오래전에 사라진 마도 공학의 유물이었다.
가미긴은 네비로스와 함께 프라우디에의 몸을 고쳤다.
프라우디에의 키에 맞게 조절한 수술대에 사지를 고정하고 대수술을 시작했다.
부서진 뼈를 이어붙이고 찢어진 혈관을 꿰매고 빠져나간 만큼의 피를 수혈해줘야만 했다.
아라스크가 어찌나 상처를 헤집어놨는지 망가진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이번에 몸을 고치면서는 저번보다 더 튼튼해지도록 중간중간 마력 또한 채워 넣었다.
예전엔 심장 부근을 열어 라이프 베슬만을 확인했던 가미긴이지만 이번엔 다른 장기들도 찬찬히 살펴보았다.
“마력이 흐르는 통로는… 라이프 베슬이 들어감으로써 생긴 것 같은데.”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지 시간이 지나서 막힌 게 많군.”
“잘 될지 모르겠어.”
열과 성을 다해 두 사람은 찢어진 육체를 조립하고 꿰맸다.
그들이 아라스크의 연구실에 몰래 숨어들어 갔을 때 그곳에는 프라우디에의 빈 몸 말고도 다른 재료들이 상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프라우디에의 몸만 가지고 나왔다. 개중에는 탐이 날 만한 재료들도 있었지만 프라우디에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기에 재빨리 그 몸만 데리고 빠져나왔다.
수술, 그리고 관찰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근육을 다시 짜 맞추고 겉의 가죽과 피부를 꿰매고, 몸 안에 충분한 피를 채워 넣은 것을 확인한 다음 그들은 마력으로 심장에 자극을 주었다.
작은 파직거림으로도 프라우디에가 일어나지 않자 두 악마는 당황하면서 전기 충격기를 준비했다.
“이걸로도 안 되면 어떻게 하지?”
“재수 없는 소리 마…”
이건 꼭 통해야 한다면서 그들은 마른 침을 삼키고 전기 충격기의 버튼을 눌렀다.
연구실 안에서 몇 번이고 전기가 번쩍이는 빛을 냈고, 그 뒤에야 프라우디에의 감겼던 눈이 서서히 떠졌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두 악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실패한 줄 알았습니다…”
“나도…”
주변의 소란이 들리지 않는 건지 프라우디에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위에서 빛나는 불빛 때문에 눈이 따가웠다.
잘 움직이지 않고 저릿저릿한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사지가 구속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불안해하며 눈동자를 굴리고 있으니 가미긴이 팔다리를 묶어놓은 매듭을 풀어주었다.
“움직일 수 있겠니?”
“네에…”
“몸은 좀 어때?”
“괜찮, 아요.”
흐리멍덩한 눈에 곧 빛이 돌아왔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당연한 일인데.”
“누가 저를 찾아주신 건가요?”
“전(前) 마왕입니다. 어떻게 알고 있던 건지 원…”
“만날 수, 있을까요?”
정신을 차린 직후임에도 프라우디에는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말했다.
고치긴 했어도 아직 움직이는 건 무리일 텐데.
잠시 프라우디에를 살피던 두 악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투성이가 된 이전 옷을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프라우디에는 가미긴과 함께 사탄을 만나러 갔다.
전 마왕의 성은 고요했다.
혼자 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카이엔을 옥좌의 앞에서 맞이한 것과는 달리 프라우디에와 가미긴이 찾아갔을 때 그는 집무실처럼 꾸며놓은 방에 있었다.
이제 마왕 자리에서도 물러났겠다, 잠적한 상태라 할 일도 없을 텐데 책상 앞에 앉아있던 그는 손님이 오자 미소를 지었다.
“에스코트도 하고 제법이네요.”
“무슨 헛소리를…”
“밖에서 대기하고 있으세요. 이야기 끝나면 문 열어줄 테니깐.”
“얘 혼자 두고 가라고?”
“무슨 문제라도?”
“…아냐. 기다리고 있겠다.”
가미긴은 순순히 프라우디에를 두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프라우디에에게 마법으로 의자를 가까이 가져다주고 사탄이 물었다.
“눈을 뜬 소감은 어떤가요? 리치왕.”
그 말에 프라우디에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눈동자는 이전의 온순하고 잔잔한 빛이 아닌 매서운 칼날과도 같은 예리함이 서려 있었다.
작은 입술이 열리자 그 안에서는 날 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쓸모없는 짓을.”
“하하.”
“뭘 노리는 거지?”
“음, 평화?”
리치왕은, 루레이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이 아이의 안에 영원히 잠들어있으려고 하는데 왜 계속 불러내는 거지?”
“하지만 그리모어를 퇴치하지 않으면 이 귀찮은 일은 영원히 반복될 거예요. 당신의 그 몸뚱아리는 호문쿨루스지만 심장은 한때 리치왕이라 불렸을 정도로 엄청난 대마법사의 영혼이 깃든 라이프 베슬인걸요?”
“나는-”
“당신이 흑마법사에게 납치만 되지 않았더라면 좀 더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그건 좀 아쉽네요.”
사탄이 말을 끊자 루레이스는 더욱 인상을 썼다.
그러나 현 몸뚱이는 작고 연약한 프라우디에인지라 본체만큼의 위압감을 낼 수가 없었다. 그 모습에 웃으면서 사탄이 말했다.
“카이엔. 도와줄 거죠?”
“뭘 어떻게 도우라는 거지?”
“생각한 바가 있을 텐데.”
“…나는 죽었다. 지금 이 몸의 주인은 다른 존재다. 공멸을 택할 수는 없어.”
“할 수 있으면 할 거란 말이군요.”
“그래.”
짧게 한숨을 쉬고 그녀가 답했다.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그녀가 그 말을 내뱉은 직후,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내부에서 싸움이 난 것 같다고 사탄은 해석했다.
자신을 감추고 있던 리치왕이 드러났지만 프라우디에의 의식이 가라앉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잠시 후 다시 루레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 존재를 막을 방법은 있는 건가?”
“더는 이곳을 제집처럼 들락거리는 놈을 가만둘 수는 없죠. 그 자식이 망쳐놓은 이미지가 한두 개가 아니라서.”
“흠?”
“무려 당신이 죽고 나서도 천년이 지났어요. 분탕 친 일을 찾아보니 꽤 되더라구요. 마신님은 이쪽 관할이라 별문제 없었지만 천신 쪽은 골머리를 썩혔을 거예요.”
신이 아닌 존재가 신인 척하면서 움직이면 당연히 사이비나 가짜 교단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당신이 아무리 인간을 초월한 존재였다고 해도 상대는 신 급이에요. 쉽게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죠.”
“…나는 뭘 하면 되는 거지?”
“일단 눈부터 다시 길러야겠어요.
“눈?”
“지금도 보이는거죠? 당신 옆을 기웃거리고 있는 존재가.”
“…어렴풋이, 는.”
“정령과 흑마법은 거의 상극이지만 당신은 영혼이 크게 물들지 않았기에 아직 존재 정도는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그 기척도.”
“정령, 이었던 건가…”
루레이스는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착각으로 치부했던 것은 실존하는 존재였고 그녀는 그제야, 그들이 정령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와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진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이미 지난 일이었다.
“그래서, 그걸 볼 수 있다면 뭐가 달라지기라도 하는 거냐?”
“글쎄요. 하지만 없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세계의 의지와 닿아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또 그 바람대로 움직이게 된다면 카이엔에겐 도움이 될 겁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군.”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시도는 해봐야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시행할 이는 그녀가 아니었다.
‘그런 이야기는 나 말고 다른 녀석과 해야겠군.”
“교대해주시는 겁니까?”
“그래야지.”
그녀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날 선 빛이 사라지고 잔잔하고 밝은 보라색 눈동자가 정면에 앉아있는 사탄의 모습을 그 안에 담았다.
눈빛부터가 다르다며 맞은편의 전 마왕은 웃었다.
프라우디에도 두 사람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이어진 사탄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게요. 그래야 하니까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과거, 리치왕은 혼자서 대륙을 떠돌면서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봐왔고 그들의 남은 수명 또한 가늠할 수 있었다.
리치왕이 활동하던 천 년보다도 더 과거인, 고대 시대. 문명이 발달하기 이전엔 이 땅에도 세계수란 존재가 있었지만 그것은 무슨 연유에선지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다르게 생각하면 세계수가 있는 곳이 세계의 근원이란 말이니 그곳을 파괴하면 세계 멸망에 박차가 가해질 것이다.
신을 죽이고 세계를 삼키는 존재가 나타났으니 세계수같이 딱 알아보기 쉬운 게 있으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만물에는 정령이 깃들어있고 흑마법사가 된 루레이스의 곁에 끝까지 머물렀던 건 어둠의 정령이었다.
마계에는 정령이 없지만 인간계로 돌아가게 되면 눈에 띌지도 모른다.
그녀가 흑마법에 물든 이후로 그녀의 시선을 피해 힐끗힐끗 바라보기만 했던 정령들은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바라봤고 기다렸던 존재와 눈을 마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악마들은 경계가 무너지기 전까진 인간계에서 큰 힘을 쓸 수 없지만, 그 경계가 무너지면 큰일이 나버리니 무너지지 않기를 바랄게요.”